철의 장막 헤치고 코뮤니즘 등정 x |
국내 최초로 파미르 코뮤니즘 등정
이들은 코뮤니즘의 노멀루트인 서쪽 포르탐벡루트로 7월 27일 등정에 성공했다. 등정자는 장봉완대장과 김진성, 송봉철, 박영석, 최병수대원 등 5명이었다. 한편 한국산악회팀의 김영대장(36)과 정재학(29), 유학재(29), 박열주(27), 구경모대원(27) 등 5명은 북쪽 지릉루트로 도전, 이들 중 유학재대원이 7월 31일 단신으로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이보다 앞서 7월 19일 김영, 구경모대원이 코르즈네프스카야(7,104m)를 등정, 이 산에 한국인 첫 등정기록을 세웠다. |
파키스탄 8천미터급에 몰린 세 한국대
나머지 5개 팀은 모두 7천미터급 원정대로 안나푸르나 3봉(7,555m), 타르케 캉(글레이셔 돔·7,193m), 추렌히말(7,371m), 닐기리 북봉(7,061m), 히말출리(7,893m)를 목표로 했다. |
4일간 미답의 이 루트를 5,800미터까지 올랐으나 여의치가 않았다. 그래서 본래 계획했던 루트로 돌아와 제1캠프(4,500m)를 설치한 것이 5월 21일. 이로부터 원정대는 1개월에 걸쳐 2캠프(5,100m), 3캠프(6,100m)를 설치한 끝에 6월 24일 어렵게 제4캠프(7,100m)를 건설했다.
계속되는 악천후로 베이스캠프로 후퇴를 다섯 번이나 거듭한 후였다. 7월 2일, 낭가파르밧 전체가 짙은 개스에 휩싸여 시계가 불량한 상태였지만 대원들은 5캠프 루트 공작에 들어갔다. 적설량이 많아 러셀하는 데 체력을 모두 소진했으나 7,350미터 지점에 이르니 짙은 개스로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더이상 등반이 불가능하다는 무전연락을 받은 이훈태대장은 눈물을 머금고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후퇴 결정을 내려야 했다. |
한편 낭가파르밧 서쪽 루트에는 또다른 한국대가 국내초등을 노리고 베이스캠프를 건설했다. 디아미르벽의 킨스호퍼루트를 선택한 광주 낭가파르밧원정대는 전년도 광주전남 학생산악연맹의 동계에베레스트 시도에 이어 광주 지역 두 번째 거봉 원정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 원정대는 71년 마나슬루 원정에 참가해 호남 지역 최초의 히말라야 경험자로 꼽히는 최창돈대장(45)의 지휘아래 윤장현부대장(41), 위계룡등반대장(37), 김웅기(38), 이은식(38), 송영호(33), 오성개(32), 박찬기(31), 김경선(31·여), 이성원(29), 박신영(29), 정오승(28), 정성백(28), 문태철(28), 서종갑(24), 이지헌(43·의사) 등 16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정대원은 12시 30분경 8천미터 지점에서 체력이 완전히 소진돼 돌아서야 했다. 여기서 원정대의 불행이 닥쳐왔다. 하산하던 정대원이 오후 2시경 실종된 것이다. 그의 피켈은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하던 불가리아팀이 7,900미터 지점에서 발견했다. 이로써 한국의 낭가파르밧 원정은 통산 4회의 실패를 기록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두 명의 대원을 잃게 되었다. |
8일, 다시 4명의 대원이 정상공격을 위해 2캠 프까지 올랐으나 강풍과 눈보라로 또다시 돌아 서야 했다.
암벽지대와 설릉지대를 로프 확보 없이 통과한 일행 4명은 오전 9시경 7,800미터 지점에 이르렀다. 여기서 유승태대원은 너무 지쳐 포기하고 박대원만이 폴란드대원들과 등반을 계속했다. 그로부터 세 시간 뒤인 12시 5분, 일행은 마침내 정상에 도착했다. 이들의 하산길은 순조롭지 않아 7,800미터 지점에서 비박을 하고 다음날 귀환했다. |
한일합동대 에베레스트 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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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대의 불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등정조를 지원하기 위해 사우스콜에 올라온 대원 중에서 함대원이 실종되는 사고가발생했다. 원정대는 남서벽을 등반중이던 한국팀에게 수색을 요청했지만 결국 찾지 못한 채 그가 단독등반을 감행하다 실족사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함대원은 에베레스트에서 첫 번째 한국인 희생자로 기록되었다. 한일합동대의 등정으로 한국은 총 12명의 에베레스트 등정자를 배출한 셈이 되었다. |
한편 남서벽에 네 번째 도전장을 낸 박영배대장(43)의 합동대는 9월 19일 쿰부빙하에 들어왔다. 대원은 박대장 외에 김홍경(32), 엄홍길(30), 김창선(30), 김기환(25) 등 6명으로 구성된 소규모팀이었다. 이 시즌 남서벽에는 스페인팀이 먼저 등반중이었기 때문에 한국대는 그 뒤를 따라 비교적 쉽게 루트를 만들어갔다. 9월 23일 2캠프를 건설하고 곧바로 남서벽 등반에 들어가 24일 3캠프(7,200m)를 설치했고, 10월 7일에는 김창선, 김기환대원이 7,800미터 지점에 네 번째 캠프를 올렸다.
이때 스페인팀은 꿀루와르를 통과, 8,300미터 록밴드 위까지 진출했으나 낙석으로 대원이 부상을 입자 철수를 결정했다. 베이스캠프로 내려왔던 한국대는 12일 다시 3캠프까지 올라 등정 기회를 엿보았으나 계속되는 악천후와 물자 부족으로 결국 등반을 단념하고 말았다. 이로써 85년부터 네 차례나 시도한 남서벽 등반은 다시 한국산악계에 커다란 숙제로 남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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