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한국 히말라야 원정대 [8-1] (1990년) *-

paxlee 2007. 9. 27. 16:35
철의 장막 헤치고 코뮤니즘 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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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로 파미르 코뮤니즘 등정



대한산악연맹 코뮤니즘원정대
한국산악회 코뮤니즘원정대



전년도에 최초로 진출한 소련 파미르 지역에 한국원정대가 본격적인 등반에 나섰다. 매년 개설되는 코뮤니즘(7,495m) 국제캠프에 동국대, 거리회, 악우회, 계명대에서 합동으로 12명의 대원을, 그리고 한국산악회에서도 5명을 파견, 이중에서 6명이 등정함으로써 이 지역 최초의 등정기록을 세웠다. 한국산악인의 파미르 진출은 6공화국 정부의 북방정책과 소련의 개방정책의 영향으로 화해무드가 조성되어 89년 7월에 최초로 이루어졌었다. 이 지역에서는 74년부터 세계산악인들을 위한 코뮤니즘 국제캠프가 개설되어 등반이 이루어져왔었다.

▲ 90년 7월 31일 소련 최고봉 코뮤니즘에 단독으로 오른 한국산악회의 유학재대원. 이보다 앞서 대산련의 장봉완외 4명이 국내 첫 등정을 기록했다.

90년 7월에 열린 제16회 파미르캠프에는 대한산악연맹 합동대와 한국산악회기술위원회에서 모두 15명이 참가했다. 대산련합동대는 이인정대장(45·한국대학산악연맹 회장)을 비롯해서 김광진(40), 안규섭(34), 박영석(27), 김진성(26), 윤태영(25) 등 동국산악회원 6명과 거리회의 장봉완(39), 악우회의 송봉철(28), 이선용(27), 그리고 계명대산악부의 최병수를 합쳐 1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코뮤니즘의 노멀루트인

서쪽 포르탐벡루트로 7월 27일

등정에 성공했다. 등정자는 장봉완대장과 김진성, 송봉철, 박영석, 최병수대원 등 5명이었다. 한편 한국산악회팀의 김영대장(36)과 정재학(29), 유학재(29), 박열주(27), 구경모대원(27) 등 5명은 북쪽 지릉루트로 도전, 이들 중 유학재대원이 7월 31일 단신으로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이보다 앞서 7월 19일 김영, 구경모대원이 코르즈네프스카야(7,104m)를 등정, 이 산에 한국인 첫 등정기록을 세웠다.


파키스탄 8천미터급에 몰린 세 한국대


90년에 히말라야 등반을 목표로 한 한국대는 여름시즌에 파키스탄으로 몰린 3개 팀과 가을시즌에 네팔히말라야로 몰린 9개 팀, 그리고 겨울철의 1개 팀 등 모두 13개 팀이었다. 이 중 8천미터급 산을 노린 원정대가 절반이 넘는 8개 팀으로 낭가파르밧(8,125m)과 에베레스트(8,848m)에 각 2팀, 그리고 가셔브룸 1봉(8,068m), 캉첸중가(8,586m), 마칼루(8,463m), 안나푸르나 1봉(8,091m)에 각각 한 팀이 출사표를 던졌다.

 

나머지 5개 팀은 모두 7천미터급 원정대로 안나푸르나 3봉(7,555m), 타르케 캉(글레이셔 돔·7,193m), 추렌히말(7,371m), 닐기리 북봉(7,061m), 히말출리(7,893m)를 목표로 했다.
봄시즌에는 오랜만에 히말라야원정대가 없어 휴식기를 갖고 여름에는 3개의 8천미터급 원정대가 파키스탄으로 몰렸다. 한국산악계로서는 아직 미답의 산인 세계 8위의 고봉 낭가파르밧에 대산련과 광주합동대가, 역시 한국인 미답의 가셔브룸 1봉에 대전합동대가 도전장을 낸 것이다.


대한산악연맹 낭가파르밧원정대



이훈태대장(50·대산련 등반기술위원장)이 이끄는 대산련 낭가파르밧원정대는 등반루트를 남쪽의 루팔벽으로 잡고 5월 11일 일찌감치 베이스캠프(3,050m)를 건설했다. 루팔벽은 63년부터 헤를리히 코퍼대장이 이끈 독일대에게 네 차례나 도전을 받은 끝에 70년 5월 등정된 4,500미터의 표고차를 자랑하는 난벽이다. 루팔벽은 워낙 난코스이기 때문에 등반대들은 주로 초등된 북쪽의 헤르만 불루트나 서면 디아미르벽을 선호해 왔다.

 


그런 루팔벽에 도전한 대산련팀은 대장 외에 정상모부대장(36), 김창선등반대장(30), 엄홍길(30), 장병호(29), 김주용(33), 박찬민(25), 홍재기(27), 조성수(25), 김경호(25), 전서화(31), 홍경표(28), 김홍빈(26), 한문기(30) 등 전국에서 선발된 14명으로 편성되었다.
이들은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다음날 곧바로 76년 오스트리아팀에 의해 초등된 일명 한스 쉘 루트의 우측 벽을 공략했다. 쉘 루트의 눈사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4일간 미답의 이 루트를 5,800미터까지 올랐으나 여의치가 않았다. 그래서 본래 계획했던 루트로 돌아와 제1캠프(4,500m)를 설치한 것이 5월 21일. 이로부터 원정대는 1개월에 걸쳐 2캠프(5,100m), 3캠프(6,100m)를 설치한 끝에 6월 24일 어렵게 제4캠프(7,100m)를 건설했다.

 

계속되는 악천후로 베이스캠프로 후퇴를 다섯 번이나 거듭한 후였다. 7월 2일, 낭가파르밧 전체가 짙은 개스에 휩싸여 시계가 불량한 상태였지만 대원들은 5캠프 루트 공작에 들어갔다. 적설량이 많아 러셀하는 데 체력을 모두 소진했으나 7,350미터 지점에 이르니 짙은 개스로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더이상 등반이 불가능하다는 무전연락을 받은 이훈태대장은 눈물을 머금고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후퇴 결정을 내려야 했다.


광주 낭가파르밧원정대



한편 낭가파르밧 서쪽 루트에는 또다른 한국대가 국내초등을 노리고 베이스캠프를 건설했다. 디아미르벽의 킨스호퍼루트를 선택한 광주 낭가파르밧원정대는 전년도 광주전남 학생산악연맹의 동계에베레스트 시도에 이어 광주 지역 두 번째 거봉 원정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 원정대는 71년 마나슬루 원정에 참가해 호남 지역 최초의 히말라야 경험자로 꼽히는 최창돈대장(45)의 지휘아래 윤장현부대장(41), 위계룡등반대장(37), 김웅기(38), 이은식(38), 송영호(33), 오성개(32), 박찬기(31), 김경선(31·여), 이성원(29), 박신영(29), 정오승(28), 정성백(28), 문태철(28), 서종갑(24), 이지헌(43·의사) 등 16명으로 구성되었다.


6월 8일 베이스캠프를 건설한 광주팀은 11일 제1캠프(5,200m), 여기서 800미터의 빙설벽과 200미터의 수직벽을 통과해 16일 2캠프(6,200m)를 설치했다. 21일 제3캠프(6,800m)까지 진출했으나 대원들간에 불화가 발생하고 악천후가 닥쳐 전원 후퇴했다. 전열을 가다듬은 원정대는 28일부터 등반을 속개 7월 2일에는 정성백, 송영호, 박신영대원이 4캠프(7,500m)까지 올라가 설동을 파고 비박을 감행했다. 그리고 다음날 컨디션이 비교적 좋은 정성백대원이 마침 정상공격을 나선 불가리아팀 대원 3명을 따라나섰다.

 

그러나 정대원은 12시 30분경 8천미터 지점에서 체력이 완전히 소진돼 돌아서야 했다. 여기서 원정대의 불행이 닥쳐왔다. 하산하던 정대원이 오후 2시경 실종된 것이다. 그의 피켈은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하던 불가리아팀이 7,900미터 지점에서 발견했다. 이로써 한국의 낭가파르밧 원정은 통산 4회의 실패를 기록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두 명의 대원을 잃게 되었다.


대전충남산악연맹 가셔브룸 1봉원정대



‘빛나는 원정대’란 색다른 명칭을 단 대전충남연맹의 가셔브룸원정대는 발토로 산맥에 우뚝 솟은 세계 11위의 가셔브룸 1봉(8,068m)을 3봉(7,952m)과 동시에 공략한다는 목표로 6월 15일 베이스캠프(5,050m)를 건설했다. 이 원정대의 명칭은 발티어로 ‘빛나는 벽’이란 뜻을 가진 가셔브룸에서 따온 것이다.

▲ 90년 7월 16일 박혁상대원과 함께 가셔브룸 1봉 정상에 오른 폴란드의 세계적 여성등반가 반다 루트키에비츠

가셔브룸 산군에 대한 한국대의 도전은 전년도 성균관대의 가셔브룸 2봉 원정에 이어 두 번째이나 1봉과 3봉 등반은 처음이었다. 이 원정대는 82년 고줌바캉, 86년 랑탕리룽을 등반한 바 있는 윤건중대장(37)의 지휘아래 김병만부대장(36), 송열헌(31), 유승태(27), 윤상호(28), 박혁상(27), 차용석(35), 박명우(26), 윤석민(24), 김병만(30), 주충익대원(27) 등 11명으로 구성되었다.


한국대는 6월 17일 제1캠프(5,950m), 22일 가셔브룸 라(고개)에 2캠프(6,400m)를 세웠다. 여기서 원정대는 북면으로 새 루트를 시도해 보았으나 200미터를 전진하는 데 그쳤다.
7월 2일 제2꿀루와르까지 진출한 후 다음날 송열헌, 박혁상대원이 정상공격에 나섰다. 이들은 6,900미터 지점에서 비박을 하며 기회를 노렸으나 갑작스런 날씨 악화로 후퇴해야 했다.

8일, 다시 4명의 대원이 정상공격을 위해 2캠

프까지 올랐으나 강풍과 눈보라로 또다시 돌아

서야 했다.


날씨가 호전된 7월 15일, 박혁상, 유승태대원이 7,300미터 지점에 비박용 텐트를 쳤다. 이날 송열헌, 박명우, 윤상호대원도 3봉의 7,300미터까지 진출하면서 정상공격 기회를 노렸다. 7월 16일 새벽 5시 1봉팀의 두 대원은 정상을 향해 떠났다. 폴란드 여성산악인 봔다와 에바도 함께 정상공격에 나섰다.

 

암벽지대와 설릉지대를 로프 확보 없이 통과한 일행 4명은 오전 9시경 7,800미터 지점에 이르렀다. 여기서 유승태대원은 너무 지쳐 포기하고 박대원만이 폴란드대원들과 등반을 계속했다. 그로부터 세 시간 뒤인 12시 5분, 일행은 마침내 정상에 도착했다. 이들의 하산길은 순조롭지 않아 7,800미터 지점에서 비박을 하고 다음날 귀환했다.

한일합동대 에베레스트 등정


한국대의 고산원정 열기는 가을시즌 네팔히말라야로 이어졌다. 한 시즌에 9개 팀이 한꺼번에 네팔히말라야로 러시를 이룬 것이다. 에베레스트에 2개 팀, 캉첸중가, 마칼루, 안나푸르나 등 8천미터급에 5개 팀이 몰렸고, 닐기리 북봉, 타르케 캉, 추렌히말, 안나푸르나 3봉 등 7천미터급 산에 4개 팀이 출사표를 던졌다.


최고봉 에베레스트에는 어김없이 한국대가 찾아들었다. 이번에는 부산산악인들이 일본팀과 합동으로 남동릉에 도전장을 냈고, 남서벽에서 3회나 고배를 마신 박영배대장이 5명의 대원을 이끌고 네 번째 도전장을 던졌다. 이로써 에베레스트에는 84년 이래 7년 동안 한국팀이 한 해도 거른 적 없이 등반활동을 펼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가을시즌에는 2개의 한국대와 미국, 프랑스, 스페인, 이태리, 유고팀을 합쳐 모두 7개 팀이 최고봉에 몰려들었다.


한일 에베레스트 합동원정대



노종백대장(41·부산클라이머스)이 중심이 된 한일합동 에베레스트원정대는 부산산악인 11명과 일본산악인 3명으로 구성되었다. 한일합동 등반은 85년 타우체 원정(대장 오인환) 이후 두 번째였다. 한국측 대원은 노대장을 비롯해서 김석태(42), 김영환등반대장(31), 정영규(36), 안광춘(34), 복진영(30), 김재수(29), 최진순(여·28), 함상헌(27), 박창우(24), 이상표(25) 등 주로 부산과 대구산악인들이었고, 일본측에서는 구와하라(58), 야나기하라(30), 스기야마(22) 등 오사카산악연맹 소속 대원이 참가했다.

▲ 90년 10월 6일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한일합동대의 김재수(오른쪽), 복진영대원

한일합동대는 9월 14일 로체 페이스에 3캠프(7,250m)를 세웠다. 이어서 23일에는 사우스 콜(7,986m)에 4캠프를 설치하고 정상공격 준비를 마쳤다.
10월 1일 김영환을 조장으로 해서 복진영, 김재수, 야나기하라, 그리고 셀파 1명이 사우스콜에 올라가 정상공격 기회를 노렸다. 다음날 새벽 바람이 심하게 불자 김등반대장은 더이상 등반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후퇴를 결정했다.


10월 6일 이번에는 복진영, 김재수, 박창우, 스기야마 대원 등 3명이 2차 공격조로 지명되어 두 셀파와 함께 자정에 사우스콜을 떠났다. 일본대원은 도중에 포기하고 3명의 한국대원은 빠른 전진을 보여 오전 6시 등정에 성공했다. 이들은 무전기를 가지고 있는 셀파들을 기다리느라 2시간 30분이나 정상에 체류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이렇게 오래 머문 것은 보기드문 기록이다. 이들의 장기 체류는 복진영대원의 동상으로 이어져 그는 후에 발가락 전부를 절단해야 하는 불운을 맞았다.

 

원정대의 불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등정조를 지원하기 위해 사우스콜에 올라온 대원 중에서 함대원이 실종되는 사고가발생했다. 원정대는 남서벽을 등반중이던 한국팀에게 수색을 요청했지만 결국 찾지 못한 채 그가 단독등반을 감행하다 실족사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함대원은 에베레스트에서 첫 번째 한국인 희생자로 기록되었다. 한일합동대의 등정으로 한국은 총 12명의 에베레스트 등정자를 배출한 셈이 되었다.



한국 에베레스트 남서벽원정대



한편 남서벽에 네 번째 도전장을 낸 박영배대장(43)의 합동대는 9월 19일 쿰부빙하에 들어왔다. 대원은 박대장 외에 김홍경(32), 엄홍길(30), 김창선(30), 김기환(25) 등 6명으로 구성된 소규모팀이었다.
이 시즌 남서벽에는 스페인팀이 먼저 등반중이었기 때문에 한국대는 그 뒤를 따라 비교적 쉽게 루트를 만들어갔다. 9월 23일 2캠프를 건설하고 곧바로 남서벽 등반에 들어가 24일 3캠프(7,200m)를 설치했고, 10월 7일에는 김창선, 김기환대원이 7,800미터 지점에 네 번째 캠프를 올렸다.

 

이때 스페인팀은 꿀루와르를 통과, 8,300미터 록밴드 위까지 진출했으나 낙석으로 대원이 부상을 입자 철수를 결정했다. 베이스캠프로 내려왔던 한국대는 12일 다시 3캠프까지 올라 등정 기회를 엿보았으나 계속되는 악천후와 물자 부족으로 결국 등반을 단념하고 말았다. 이로써 85년부터 네 차례나 시도한 남서벽 등반은 다시 한국산악계에 커다란 숙제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