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한국 히말라야 원정대 [8-2] (1990년) *-

paxlee 2007. 9. 27. 16:44
캉첸중가, 마칼루, 안나푸르나 연속 패퇴


90년 가을시즌에는 에베레스트 외에도 충북연맹합동대가 캉첸중가 중앙봉(8,482m), 울산 청산악우회팀이 마칼루(8,463m), 그리고 서울의 어센트산악회가 안나푸르나 1봉(8,091m)에 각각 도전장을 냈다. 결과는 3개 팀 모두가 등정에 실패, 에베레스트와 여름시즌 낭가파르밧의 두 한국대 패퇴까지 합하면 무려 6개 팀이 연속해서 8천미터급 자이언트봉에서 고배를 마시는 저조한 기록을 남겼다.


충북연맹 캉첸중가 중앙봉원정대



대산련 충북연맹이 파견한 90한국 캉첸중가원정대는 8월 13일 본대가 출발했다. 이들은 캘커타 화물의 통관 지연으로 카라반 출발이 늦어져 9월 21일에야 얄룽빙하 5,350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건설했다. 이들의 목표는 캉첸중가 산군에서 아직 한국대가 시도하지 않은 중앙봉이었다. 주봉은 87년 겨울 부산 대륙산악회 이정철대원이 동계 2등을 기록하며 올랐었다.

▲ 캉첸중가 2캠프(6,250m) 바로 밑에서 발견된 예티(?)의 발자욱

23일부터 등반을 개시한 원정대는 두 번에 걸친 폭설로 일주일 만인 30일에 제 1캠프(6,000m)를 설치했고, 10월 2일에 2캠프(6,250m), 8일에 3캠프(6,900m), 그리고 10일에는 4캠프(7,200m)에 진출, 정상공격 준비를 마쳤다. 10월 12일, 공격조 박경식대원과 셀파 2명은 새벽 5시 마지막 캠프를 출발했다. 커다란 크레버스를 우회하여 65도 경사의 꿀루와르를 오르는 데 5시간 걸린 끝에 소련대가 비박지로 사용했던 커다란 바위를 만났다.

 

고도는 7,900미터. 이곳에서 동상으로 발의 통증을 호소하던 셀파는 하산하고 박대원과 1명의 셀파만이 계속해서 정상으로 나아갔다. 산소통 없이 등반을 감행한 공격조는 중앙봉으로 보이는 봉우리를 향해 마지막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곳은 중앙봉이 아니라 전위봉이었다. 등반을 속개한 두 사람은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치며 오르다가 오후 3시 30분 역부족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이들이 도달한 지점은 8,350미터, 정상을 불과 130여 미터 남겨두고 아깝게 돌아선 것이다. 원정대는 이후 재기의 기회를 노렸으나 캉첸중가는 끝내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울산 청산악우회 마칼루원정대



한편 쿰부히말의 세계 5위봉 마칼루에 도전한 한국대는 9월 3일 선발대가 베이스캠프(4,800m)를 건설했다. 이 팀은 또한 울산 지역에서 최초로 결성된 8천미터급 원정대로 주목을 받았다. 원정을 위해 사재를 쾌척한 김관준대장(50)을 비롯 이건욱부대장(41), 이상호 등반대장(31), 박규호(28), 김영태(26), 신영호(39), 김미애(여·30), 황두환대원(44·의사) 등 모두 8명으로 구성된 울산팀은 모두 청산악우회 소속 회원들이었다.


이들은 캉첸중가팀과 마찬가지로 캘커타로 선박 수송한 화물의 통관 지연으로 9월 9일에야 본대가 카트만두를 떠났다. 먼저 도착한 선발대는 본대가 합류할 때까지 동남릉루트에 제1캠프(5,400m)와 2캠프(6,100m)를 구축해 놓았다. 본대가 헬기 두 대를 동원해 눔까지 장비를 수송하여 9월 16일 합류하자 나머지 캠프에 대한 루트공작이 이어져 17일에는 6,700미터의 동남릉 콜에 3캠프를 설치했다.

 

말로만 듣던 이곳의 바람은 가히 엄청난 것이었다. 워낙 바람이 심해 텐트 대신 설동을 팔 것을 고려해 보았으나 눈이 단단하지 않아 포기했다. 그런 바람을 뚫고 19일에는 4캠프(7,200m)가 설치되었다. 일단 하산한 이들은 9월 23일 제5, 6캠프를 설치하기 위해 다시 베이스캠프를 떠났다. 심한 바람으로 이미 설치해 놓은 텐트들이 일부 파손되어 있었지만 26일에는 4캠프까지 전진했다. 그런데 28일 새벽 2시경 2캠프에 눈사태가 덮쳐 텐트와 장비들을 흔적도 없이 쓸어가버렸다. 그곳을 혼자 지키던 셀파 1명은 극적으로 탈출하여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고로 등반보다 전대원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김관준대장은 철수를 명령했다.


어센트 안나푸르나 1봉원정대



84년 겨울 은벽산악회의 김영자대원이 올라 산악계를 떠들썩하게 했고, 후에 프랑스대가 의혹을 제기해 다시 화제를 모았던 안나푸르나에 6년 만에 한국대가 도전장을 던졌다. 어센트산악회가 추진한 이 원정은 노멀루트인 북면이 아니라 히말라야 거벽등반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남벽을 노린 것이어서 관심을 끌었다.


이 벽의 제8등을 노리고 안나푸르나빙하에 들어온 한국대는 박봉래 단장(58)과 전두성대장(37)을 비롯 김융기부대장(36), 조양호(40·의사), 노영수(32), 유순복(31), 안충근(27), 노원일(28), 이정권(25), 신동석(25), 황규화(24), 김민성대원(34) 등 모두 12명으로 구성되었다.

▲ 90년 안나푸르나 1봉 남벽 원정대 발대식
    

한국대는 본격적인 등반을 개시한 일주일 만에 4,800미터에 제1캠프와 5,100미터 지점에 2캠프를 설치했고, 8월 31일에는 6,100미터에 3캠프가 구축되었다. 중간에 셀파의 우두머리인 사다가 말썽을 부려 해고하자 셀파들이 등반을 거부해 대부분의 루트공작은 대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3캠프부터는 등반이 매우 어려워졌다. 루트의 난이도도 문제였지   만 매일같이 폭설이 내렸다. 한국대는 일주일간 시도하던 리지를 포기하고 500미터가량 좌측으로 우회하여 4캠프 예정지가 바로 보이는 꿀루와르로 진입했다. 70여도 경사에 400미터에 달하는 이 꿀루와르를 등반하다 눈사태를 만나 4명의 대원들이 극적으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꿀루와르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등반이 재개되어 4캠프 예정지를 눈앞에 두게 되었으나 이때는 이미 식량은 물론 대원들의 체력도 거덜나 버렸다. 여기서 대장단은 숙의끝에 철수를 결정했다. 이미 10월 하순으로 접어들었으나 이때까지 이들이 오른 고도는 6,700미터에 불과했다.

가을시즌 7천미터급 네 팀 모두 등정


90년 가을 네팔히말라야로 진출한 9개 한국원정대들 중에서 8천미터급에서는 다섯 팀 중 한 팀 만이 등정하는 저조한 기록을 보인 반면, 7천미터급 산에 도전한 4개 팀은 모두 등정하여 대조를 보였다. 이들 4개 팀은 모두 네팔 중부의 안나푸르나와 다울라기리 산군에서 등반활동을 펼쳤다.


산비둘기산악회 닐기리 북봉원정대

▲ 정상에선 박주홍대원

7천미터급 4개 팀 중에서 가장 먼저 승전보를 올린 것은 닐기리 북봉(7,061m)원정대였다. 산비둘기산악회가 꾸린 이 원정대는 강한철대장(35), 정기화부대장(34), 박주홍(27), 박용환(26), 김연수대원(25) 등 5명으로 구성된 소규모팀이었다.


이들은 일찌감치 카트만두를 떠나 8월 17일 3,800미터에 1차 베이스캠프를 건설했다. 안나푸르나 산군에 있는 닐기리는 북봉, 중앙봉, 남봉으로 이루어졌는데 주봉이라고 할 수 있는 북봉의 초등정은 1962년 일본대가 북벽을 통한 서릉으로, 2등은 81년 일본대가 동릉으로 이룩했다.

 

한국대가 택한 루트는 남동릉, 이곳은 80년 봄 한국대(대장 오인환)가 루트 초등을 노렸으나 6,200미터에서 역부족으로 돌아섰고, 그후 82년 봄 일본대가 초등을, 83년 가을 호주팀이 재등한 루트였다.
원정대는 8월 5일 카트만두를 떠나 12일간의 카라반끝에 베이스캠프를 건설했고 26일에 제1캠프(5,200m), 9월 1일 2캠프(5,800m), 6일에는 3캠프(6,500m)를 설치했다. 비교적 순조로운 등반이 계속되었다.


9월 7일, 오전 8시 박용환, 김연수대원과 셀파 2명이 마지막 캠프를 떠나 4시간 만에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들이 오른 정상은 83년 호주팀이 오른 곳으로 이곳을 초등정한 일본대의 정상과는 다른 곳임이 밝혀졌다. 일본대가 오른 정상은 좌측 칼날능선을 10시간 정도 가야만 하는 거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들이 오른 곳이 닐기리 북봉의 정점이었는지는 명확한 자료가 없어 가려지지 않았다. 산비둘기팀은 9월 8일 두 번째 등정길에 나서 박주홍대원과 셀파 1명이 오전 7시 36분 정상에 올랐다.


동아대 글레이셔 돔원정대

▲ 정상에 선 백진국대원

같은 안나푸르나 산군의 글레이셔 돔에 도전한 동아대산악회 원정대는 9월 2일 베이스캠프를 건설한 지 8일 만에 정상에 오르는 쾌거를 올렸다. 글레이셔 돔은 이미 84년 10월 27일 강릉합동대 엄개성대장에 의해 북면루트로 등정된 바 있다. 글레이셔 돔이란 산명은 1956년 마차푸차레봉을 정찰하러 안나푸르나 남쪽 빙하로 들어온 영국의 로버츠가 빙설로 덮인 둥근 모양의 산을 발견하고 명명한 데서 비롯된 것인데, 86년 네팔정부가 ‘타르케 캉(Tarke Kang)’이란 네팔명을 붙였다.


이 산에 도전한 동아대팀은 정민규대장(34)을 비롯해서 이석호등반대장(28), 김인숙(여·26), 윤종호(24), 백진국대원(23) 등 5명으로만 구성된 단촐한 원정대였다. 이 원정은 동아대학교 개교 44주년 및 부속병원 설립 기념으로 추진된 것이었다. 6년 전의 강릉팀과 같은 북면으로 등반루트를 잡은 이들은 초반부터 속공전략으로 나섰다. 9월 3일 제1캠프를 설치하고 5일에 2캠프(6,200m), 그리고 7일에는 3캠프(6,400m)를 설치하면서 등정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8일 새벽 4시 윤종호, 백진국대원과 셀파 2명이 2캠프를 떠나 정상을 향했다. 그러나 이들은 고도차 1,000미터를 극복하지 못하고 정상을 200여미터 남겨두고 후퇴했다. 9월 10일, 이번에는 백진국대원과 셀파 2명이 재차 정상공격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3캠프에서 새벽 3시 40분에 출발했다. 이들은 전날 퇴각지점을 8시경 통과해서 12시 40분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마지막 캠프를 떠난 지 9시간 만의 등정이었다.


포항 거봉산악회 추렌히말원정대



한편 마나슬루 산군의 추렌히말에 출사표를 던진 포항 거봉산악회는 이 산의 서봉과 중앙봉을 동시에 등정하면서 기염을 토했다.

김규영대장(29)을 비롯해서 오흥일부대장(29), 김육년(27), 홍성춘(26), 장이석(26), 임종걸(23), 권오수대원(22) 등 7명은 모두 포철공고 동문으로 개교 20주년을 맞아 포항제철의 지원을 받아 원정대를 꾸렸다. 이들은 모두가 히말라야 초행길이었는데도 전대원 등정이란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8월 14일 74명의 포터를 거느리고 카라반을 시작한 원정대가 카페빙하 최남단 4,550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건설한 것은 8월 26일, 이틀 뒤부터는 본격적으로 등반을 개시했다. 9월 2일, 구스퉁 북릉 하부의 빙하에 제1캠프(5,050m)를 설치하고 다음날에는 구스퉁 북릉을 올라서 추렌히말의 3개 봉우리가 잘 보이는 곳에 2캠프를 설치했다. 6일에는 다울라기리 6봉 서릉의 하단부에 3캠프(6,280m)를, 9일에는 복병처럼 숨어 있는 크레바스지대를 통과하여 추렌히말 동봉의 삼각형 설벽 밑에 4캠프(6,600m)를 설치했다.

 

그리고 11일에는 부대장과 두 셀파가 동봉으로 이어지는 급경사의 설벽을 통과, 중앙봉 남면쪽으로 고정로프를 이용해 하강하여 5캠프(6,870m) 설치를 마쳤다. 9월 13일 전대원이 4캠프를 출발하여 5캠프를 향했다. 중도에 홍성춘, 장이석대원은 역부족으로 후퇴했고 나머지 5명의 대원들은 눈보라에 시달리며 마지막 캠프에 도착했다. 9월 14일 새벽 4시 40분, 먼저 오부대장과 김육년, 권오수대원, 그리고 두 셀파가 서봉을 향해 출발했고, 5시 10분에 김규영, 임종걸대원이 중앙봉을 향했다.


중앙봉 공격조는 날카로운 설릉상의 조그만 암릉을 몇 개 넘어 오전 9시 20분 정상에 다다랐다. 서봉 공격조는 5캠프에서 중앙봉의 남쪽면으로 오르다가 좌측 설사면으로 길게 트레버스하여 설릉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9시 30분에 그 설릉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날카로운 정상에 도달했다. 7명의 대원 중 5명이 그것도 2개의 정상에 동시에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중앙봉은 70년 가을 일본대 이후 두 번째 등정이었고, 서봉은 네 번째 등정으로 기록되었다.


한오름산악회 안나푸르나 3봉원정대

▲ 정상에선 김길우대원과 셀파장부

90년 가을시즌의 마지막 승전보를 보내온 팀은 부산 한오름산악회의 안나푸르나 3봉원정대였다. 송표명대장(42)과 박봉립부대장(39), 김길우(25), 김양섭(30), 유정남대원(여·27) 등 5명으로 구성된 이 원정대는 한국인에게는 아직 미등으로 남아 있던 안나 3봉에 도전, 베이스캠프 설치 13일 만에 정상에 오르는 개가를 올렸다.


 

 

안나푸르나 3봉은 1984년에 조선대산악회팀(대장 고광수)이 남면루트로 시도했으나 6,700미터에서 패퇴했고, 86년 서울산악회가 역시 남면으로 강가푸르나와 연속등정을 노렸으나 제대로 등반이 이루어지 못했었다. 따라서 1봉, 2봉, 4봉은 이미 한국대에게 등정이 되었지만 3봉만은 정상을 내주지 않고 있었다. 한오름산악회는 이 산의 북면으로 등반루트를 잡고 9월 18일 베이스캠프(4,500m)를 건설했다.

 

25일 제1캠프(5,400m)를 설치하고 27일 급경사의 설벽을 통과하여 2캠프(6,150m)를 올렸다. 10월 1일, 셀파들만으로 루트공작을 한 끝에 6,450미터에 3캠프를 설치했다. 여기서 4캠프를 생략하고 김길우대원과 셀파 셋이서 정상공격을 시도했지만 등반속도가 느려 스노우밴드 지점에서 후퇴했다. 10월 5일 다시 정상공격에 나선 김대원과 세 셀파는 13시간 18분간 등반끝에 마침내 정상에 섰다. 한국대의 이 등정은 인도, 일본, 이태리, 영국, 스위스, 네팔팀에 이어 8번째 등정으로 기록되었다.

한맺힌 히말출리 서봉 동계초등

계명대산악회 히말출리 서봉 동계원정대



90년 겨울시즌 히말라야로 향한 한국대는 유일하게 계명대산악회가 파견한 히말출리(7,893m)원정대뿐이었다. 계명대 팀은 전년도 원정에서 숨진 고 정재홍대장을 추모하고 이 산의 겨울철 초등을 목표로 다시 등반대를 결성하게 되었다. 네팔 중부 마나슬루 산군에 있는 히말출리는 주봉 외에도 서봉(7,540m)과 북봉(7,371m)으로 이루어졌는데 서봉은 78년 봄 일본대가, 북봉은 85년 가을에 울산원정대(대장 이규진)가 초등정했다.

 

주봉은 60년 일본대가 남벽루트로 초등정한 이래 17회의 도전이 있었으나 단지 6회의 등정이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특히 겨울철에는 86년 폴란드대가 시도했으나 서릉 6,200미터에서 단념하고 어느 팀도 등정에 성공하지 못했다. 산명 히말출리(Himalchuli)는 네팔어로 ‘날카로운 산’이란 뜻으로 등반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봉의 동계초등을 목표로 한 계명대팀은 박동설대장(31)의 지휘아래 류구열(25), 이석환(25), 박근영(25), 이종선(23), 홍정기대원(24) 등 대부분 재학생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일찌감치 카라반을 떠나 11월 18일에는 베이스캠프에 도착했고 24일에 제1캠프(5,750m), 29일에 2캠프(6,350m)를 올리면서 사실상 동계시즌 이전에 등반을 개시한 셈이었다. 12월로 접어들어 히말출리 등반의 가장 큰 관건인 100여미터 급경사의 대설벽을 돌파하여 12월 4일 3캠프(6,750m)설치를 마쳤다. 12월 7일에는 4캠프(7,240m)가 어렵게 설치되고 류구열, 이석환대원과 셀파가 계속해서 7,500미터에 5캠프를 설치하고 정상공격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이때부터 눈보라가 불어닥치면서 악천후가 계속되자 이들은 이틀간이나 버틴 끝에 3캠프로 후퇴하고 말았다.


원정대는 여기서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최종 캠프에서 주봉 정상까지는 불규칙한 크레바스와 깊은 눈으로 접근이 곤란하다고 판단한 이들은 목표를 주봉에서 서봉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서봉 등정길에 나선 원정대는 한 차례 정상공격을 시도했으나 무위로 끝났다. 그리고 12월 19일 3캠프를 홀로 떠난 이석환대원이 8시간의 사투끝에 마침내 강풍이 몰아치는 서봉 정상에 올라섰다. 베이스캠프 설치 32일 만의 일이며 이 산의 겨울 첫등정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 출처 / www.himalayaz.co.kr / 월간 마운틴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