캉첸중가, 마칼루, 안나푸르나 연속 패퇴 90년 가을시즌에는 에베레스트 외에도 충북연맹합동대가 캉첸중가 중앙봉(8,482m), 울산 청산악우회팀이 마칼루(8,463m), 그리고 서울의 어센트산악회가 안나푸르나 1봉(8,091m)에 각각 도전장을 냈다. 결과는 3개 팀 모두가 등정에 실패, 에베레스트와 여름시즌 낭가파르밧의 두 한국대 패퇴까지 합하면 무려 6개 팀이 연속해서 8천미터급 자이언트봉에서 고배를 마시는 저조한 기록을 남겼다. |
고도는 7,900미터. 이곳에서 동상으로 발의 통증을 호소하던 셀파는 하산하고 박대원과 1명의 셀파만이 계속해서 정상으로 나아갔다. 산소통 없이 등반을 감행한 공격조는 중앙봉으로 보이는 봉우리를 향해 마지막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곳은 중앙봉이 아니라 전위봉이었다. 등반을 속개한 두 사람은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치며 오르다가 오후 3시 30분 역부족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이들이 도달한 지점은 8,350미터, 정상을 불과 130여 미터 남겨두고 아깝게 돌아선 것이다. 원정대는 이후 재기의 기회를 노렸으나 캉첸중가는 끝내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
한편 쿰부히말의 세계 5위봉 마칼루에 도전한 한국대는 9월 3일 선발대가 베이스캠프(4,800m)를 건설했다. 이 팀은 또한 울산 지역에서 최초로 결성된 8천미터급 원정대로 주목을 받았다. 원정을 위해 사재를 쾌척한 김관준대장(50)을 비롯 이건욱부대장(41), 이상호 등반대장(31), 박규호(28), 김영태(26), 신영호(39), 김미애(여·30), 황두환대원(44·의사) 등 모두 8명으로 구성된 울산팀은 모두 청산악우회 소속 회원들이었다.
말로만 듣던 이곳의 바람은 가히 엄청난 것이었다. 워낙 바람이 심해 텐트 대신 설동을 팔 것을 고려해 보았으나 눈이 단단하지 않아 포기했다. 그런 바람을 뚫고 19일에는 4캠프(7,200m)가 설치되었다. 일단 하산한 이들은 9월 23일 제5, 6캠프를 설치하기 위해 다시 베이스캠프를 떠났다. 심한 바람으로 이미 설치해 놓은 텐트들이 일부 파손되어 있었지만 26일에는 4캠프까지 전진했다. 그런데 28일 새벽 2시경 2캠프에 눈사태가 덮쳐 텐트와 장비들을 흔적도 없이 쓸어가버렸다. 그곳을 혼자 지키던 셀파 1명은 극적으로 탈출하여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고로 등반보다 전대원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김관준대장은 철수를 명령했다. |
84년 겨울 은벽산악회의 김영자대원이 올라 산악계를 떠들썩하게 했고, 후에 프랑스대가 의혹을 제기해 다시 화제를 모았던 안나푸르나에 6년 만에 한국대가 도전장을 던졌다. 어센트산악회가 추진한 이 원정은 노멀루트인 북면이 아니라 히말라야 거벽등반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남벽을 노린 것이어서 관심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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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시즌 7천미터급 네 팀 모두 등정 90년 가을 네팔히말라야로 진출한 9개 한국원정대들 중에서 8천미터급에서는 다섯 팀 중 한 팀 만이 등정하는 저조한 기록을 보인 반면, 7천미터급 산에 도전한 4개 팀은 모두 등정하여 대조를 보였다. 이들 4개 팀은 모두 네팔 중부의 안나푸르나와 다울라기리 산군에서 등반활동을 펼쳤다. |
산비둘기산악회 닐기리 북봉원정대
한국대가 택한 루트는 남동릉, 이곳은 80년 봄 한국대(대장 오인환)가 루트 초등을 노렸으나 6,200미터에서 역부족으로 돌아섰고, 그후 82년 봄 일본대가 초등을, 83년 가을 호주팀이 재등한 루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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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 글레이셔 돔원정대
그리고 8일 새벽 4시 윤종호, 백진국대원과 셀파 2명이 2캠프를 떠나 정상을 향했다. 그러나 이들은 고도차 1,000미터를 극복하지 못하고 정상을 200여미터 남겨두고 후퇴했다. 9월 10일, 이번에는 백진국대원과 셀파 2명이 재차 정상공격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3캠프에서 새벽 3시 40분에 출발했다. 이들은 전날 퇴각지점을 8시경 통과해서 12시 40분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마지막 캠프를 떠난 지 9시간 만의 등정이었다. |
그리고 11일에는 부대장과 두 셀파가 동봉으로 이어지는 급경사의 설벽을 통과, 중앙봉 남면쪽으로 고정로프를 이용해 하강하여 5캠프(6,870m) 설치를 마쳤다. 9월 13일 전대원이 4캠프를 출발하여 5캠프를 향했다. 중도에 홍성춘, 장이석대원은 역부족으로 후퇴했고 나머지 5명의 대원들은 눈보라에 시달리며 마지막 캠프에 도착했다. 9월 14일 새벽 4시 40분, 먼저 오부대장과 김육년, 권오수대원, 그리고 두 셀파가 서봉을 향해 출발했고, 5시 10분에 김규영, 임종걸대원이 중앙봉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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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오름산악회 안나푸르나 3봉원정대
안나푸르나 3봉은 1984년에 조선대산악회팀(대장 고광수)이 남면루트로 시도했으나 6,700미터에서 패퇴했고, 86년 서울산악회가 역시 남면으로 강가푸르나와 연속등정을 노렸으나 제대로 등반이 이루어지 못했었다. 따라서 1봉, 2봉, 4봉은 이미 한국대에게 등정이 되었지만 3봉만은 정상을 내주지 않고 있었다. 한오름산악회는 이 산의 북면으로 등반루트를 잡고 9월 18일 베이스캠프(4,500m)를 건설했다.
25일 제1캠프(5,400m)를 설치하고 27일 급경사의 설벽을 통과하여 2캠프(6,150m)를 올렸다. 10월 1일, 셀파들만으로 루트공작을 한 끝에 6,450미터에 3캠프를 설치했다. 여기서 4캠프를 생략하고 김길우대원과 셀파 셋이서 정상공격을 시도했지만 등반속도가 느려 스노우밴드 지점에서 후퇴했다. 10월 5일 다시 정상공격에 나선 김대원과 세 셀파는 13시간 18분간 등반끝에 마침내 정상에 섰다. 한국대의 이 등정은 인도, 일본, 이태리, 영국, 스위스, 네팔팀에 이어 8번째 등정으로 기록되었다. |
한맺힌 히말출리 서봉 동계초등 90년 겨울시즌 히말라야로 향한 한국대는 유일하게 계명대산악회가 파견한 히말출리(7,893m)원정대뿐이었다. 계명대 팀은 전년도 원정에서 숨진 고 정재홍대장을 추모하고 이 산의 겨울철 초등을 목표로 다시 등반대를 결성하게 되었다. 네팔 중부 마나슬루 산군에 있는 히말출리는 주봉 외에도 서봉(7,540m)과 북봉(7,371m)으로 이루어졌는데 서봉은 78년 봄 일본대가, 북봉은 85년 가을에 울산원정대(대장 이규진)가 초등정했다.
주봉은 60년 일본대가 남벽루트로 초등정한 이래 17회의 도전이 있었으나 단지 6회의 등정이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특히 겨울철에는 86년 폴란드대가 시도했으나 서릉 6,200미터에서 단념하고 어느 팀도 등정에 성공하지 못했다. 산명 히말출리(Himalchuli)는 네팔어로 ‘날카로운 산’이란 뜻으로 등반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봉의 동계초등을 목표로 한 계명대팀은 박동설대장(31)의 지휘아래 류구열(25), 이석환(25), 박근영(25), 이종선(23), 홍정기대원(24) 등 대부분 재학생으로 구성되었다.
- 출처 / www.himalayaz.co.kr / 월간 마운틴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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