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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2월 18일 길상사 뒤쪽 조그만 숲길에서 잠시 산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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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이상 산을 다녔다. 우리나라의 웬만한 산은 다 올랐다. 가고 또 갔다. 10대 때부터 바위도 했다. 북한산, 도봉산 암벽은 숱하게 탔다. 인수봉 암벽엔 그의 발자국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올랐다. 대학 들어갈 때 좋아하는 산에 계속 오를 수 있을 것 같아 지질학과를 선택하려고까지 했다. 그렇다고 세계의 고산에 도전하는 전문 클라이머는 아니다.
‘한국의 철강 왕’ 박태준 회장을 20여 년간 보좌하며 포스코 3대 회장을 지낸 정명식(丁明植·77) 전 한국산악회 회장 얘기다. 포스코 회장을 지내기까지의 스토리는 무궁무진하다. 지나고 나서 들으면 ‘아, 그렇구나’ 정도로 느껴지지만 실제의 삶은 누구나 그렇듯 도전으로 점철돼 있다. 정 회장은 그 도전을 성공으로 이끈 주인공이다.
그의 삶은 한국의 노년 세대들이 대개 그렇듯 대한민국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6년제이던 중학시절에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았다. 미군정 시절엔 고교를 다녔다. 시대의 어지러운 상황을 감수성 예민한 시기에 모두 겪었다. 산에 다녔다. 경기중학 산악부 창립자에 가까울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대학 입학해선 아버지의 사망과 6·25 전쟁을 겪는다. 서울대 공대 산악부를 창립한다. 피난생활 후 서울로 올라와 대학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다. 이것만 하더라도 일제, 해방, 미군정, 한국전쟁 등 격변의 한국 현대사를 전부 몸소 체험한 역사의 산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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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직하고 난뒤 북한산 산행.
- 그의 인생 첫 전기는 유학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가 1955년. 전화(戰禍)로 초토화된 대한민국 복구에 모두가 힘쓸 때다. 진학한 공대 대학원은 실험실이나 실험 기자재라곤 찾아볼 수 없고, 강의실만 덩그러니 있던 시절이었다. 미국 주도의 ICA(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국제협력기구·지금의 AID)가 한국 부흥을 위해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빠른 시일 내 체계를 잡기 위해 교육기관은 공대, 의대, 농대를 집중 지원했다. 공대는 사회시설을 복구하기 위해서였고, 의대는 전염병 방지 등 의료기관을 확립할 필요가 있었고, 농대는 시급히 식량을 자급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이와 더불어 유능한 인재를 선발해서 미국의 시스템을 교육받게 유학을 보냈다. 교수와 대학원생 거의 전부 짧게는 3개월, 길게는 2~3년까지 공부했다.
철강왕 박태준 회장 20여년 보좌
그는 가장 젊은 사람에 속해 미네소타 대학원에서 토목공학 석사공부를 했다. 한달 180달러를 받았으니, 일당으로 치면 6달러였다. 당시 우리나라 1인당 GNP가 100달러가 채 안되는 시절이었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학생 신분으로서 그만하면 만족할 만한 수준이었다. 물론 학비와 책값 등은 모두 따로 지원 받았다. 중·고 시절에 산을 그렇게 좋아했지만 제대로 된 등산화나 발에 맞는 등산화를 신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곳 미네소타에 와서 처음으로 발에 맞는 등산화를 신어봤다. 등산화에 발을 맞추다 난생 처음 발에 맞는 등산화를 신은 것이다. 그러나 미네소타엔 산이 없어 등산할 수 없었다.
3년만에 석사학위를 받고 59년 귀국했다. 학교에 자리를 잡기 위해 시간강사를 했다. 바로 위 선배까지 교수로 쉽게 임용됐다. 그도 ‘쉽게 나겠지’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주위에서도 조금만 더 참으라고 격려했다. 생활은 힘들었지만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참았다. 일은 많았다. 시간강사 하느라 강의준비를 해야 했고, 미국 유학 갔다 왔다고 수당도 거의 없는 미국의 복구지원팀 고문관 통역까지 떠맡겼다. 교수 증원 승인허가는 쉽게 나지 않았다. 정부 예산 자체가 절대 적었던 시절이라 한번 중단된 예산이 다시 늘지도 않았고, 조금 늘었다 하더라도 워낙 쓰일 때가 많던 시절이었다. 언제 다시 승인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생활은 점점 더 힘들었다. 그새 결혼해서 아이는 셋이 됐다.
마침 그 때 한국의 첫 설계사무소가 59년 문을 열었다. 엄청난 사회간접시설 공사가 잇따르자 이전까지 주먹구구로 하던 설계를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 내무부 토목국장을 했던 김해림씨가 개업한 것이다. 민간이 국가 주요사업에 처음으로 설계 공급을 시작했다. 임시 생활방편으로 설계 주임으로 일을 시작했다. 시간강사에 고문관 통역에 설계사무소 주임까지 1인3역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설계사무소 일은 생활비를 벌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이후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주요 수단이 돼 버린다. 아마 대학교 전임강사로 발령이 났다면 그의 인생은 교수로 정년퇴직하고 끝났을 것이다. 운명의 방향은 그의 의도와는 다른 곳으로 흘렀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설계사무소에서 그가 처음 맡은 일이 식수를 제대로 공급하는 상수도사업이었다. 지금의 남산 1호 터널 옆에 있는 보광동 취수장이 그의 첫 작업 결과였다. 부산까지 지원했다. 낙동강 물을 끌어다 쓰는 상수도사업도 그의 작품이다. 공사비가 없어 차관신청도 그가 직접 했다. 사업계획도 냈다. 문서도 직접 작성했다. 북 치고 장구 치고 ‘원맨쇼’하듯 바빴다. 그의 인생에 가장 바쁜 시기가 세 번 있었다. 처음이 49년 고교시절 1년에 100회 이상 산에 다닐 때였고, 두 번째가 설계사무소 일을 한 시기였고, 세 번째가 포항제철(포스코 전신)에 있을 때였다.
설계사무소에서 바쁘게 일할 때도 학교에서 교수로 발령 내면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65년까지 끝내 안 났다. 절망적이었고, 자존심도 무척 상했다. 대한민국에서 못 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