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의 삶의글

-* 90세를 일기로 떠나신 장모님을 추모하며 *-

paxlee 2008. 2. 28. 10:42

 

            90세를 일기로 떠나신 장모님을 추모하며

 

사람은 저마다의 운명(運命)을 따라 살다가 예고 없이 운명(殞命)하는 것이 삶이고 인간사(人間史)이다. 한 인간의 운명은 참으로 각양각색이다. 인간이기에 정해진 길이 따로 없다. 자기 스스로 남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가기도 하고, 스스로의 길을 자기가 만들어가기도 한다. 가는 길이 쉬운 길이면 쉬운 데로 흥미와 즐거움이 줄어들고, 새로 개척해 가는 길은 고난과 어려움이 많지만 그 만큼 보람을 느끼게 해 준다. 그래서 어느 길이 좋은 길이고 행복을 가져다 주는 길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부모의 의지에 의해 인간은 목소리를 높혀 울면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백지에 자신의 인생역사를 쓰다가 쓰다가 자기의 의사와 관계없이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을 떠나면서 인간의 운명(運命)은 운명(殞命)으로 끝나게 된다.   

 

지난 12월 말 장모님께서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올해 년세가 90세여서 노환으로 시달렸으나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입원을 하셔서 치료를 받으시면서 어느 날은 조금 차도가 있어 가족을 웃는 낯으로 맞아주시기도 하셨으며, 어느 날은 갑자기 악화되어 가족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가 반복되면서 년 말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였다. 구정이 가까워 지면서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만일 구정에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나 노심초사 하면서 걱정을 하였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기도 여러 번이었다. 가족이 병원을 지켜야 도리인데도 모두가 바쁘다는 핑개로 간병인에게 부탁을 하고 가족들은 저마다의 생활전선에서 일을 하면서도 마음은 항상 병원에 가 있었다.

 

지난 일요일 새벽 6:20분에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집 사람이 먼저 병원에 달려갔지만 6:30분에 운명을 하셨다는 전언이 귀를 울렸다. 3녀 2남을 두셨지만 아무도 마지막 그 운명의 시간을 지켜드리지 못해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한을 가슴에 안게 되었다.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끝이 없지만 자식들의 부모에 대한 효는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현실의 벽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간다. 이 세상에 나를 태어나게 해 주신 부모님의 사랑으로 내가 이만큼 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부모님이 자식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은 영원하지만, 자식들은 시대의 변화를 이유로 서로 부모를 모시지 안으려 하는 세태를 볼 때마다 가슴은 무너져 내린다. 부모님과의 피로 이어진 이 연은 죽어서도 끈을 수 없는 가장 질긴 연이다.

 

을지병원에 장모님의 영정을 모셔 국화꽃으로 제단을 설치하고 장례을 준비하였다. 먼저 딸과 아들, 그리고 손자들, 사위들이 눈시울을 붉히며 모여들었다. 큰집 조카들이 달려와서 애도를 하였다. 그런데, 장모님의 친가는 양구 통천이라고 들었는데, 집 사람의 외가는 그간 한 번도 왕래가 없어 연락할 길이 없단다. 장모님께서 함구를 하고 계셨으므로 그 사연은 모른다. 위로 딸이 셋이고 밑으로 아들 형제를 두셨는데, 큰 아들은 5년전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다. 막내 아들이 장모님의 상주 노릇을 혼자하게 되었다. 큰 아들에게 전화로 연락을 주었는데, 우느라고 전화로 통화를 할 수가 없었다. 큰 며느리는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한 달여 머물다가 음력 설 조금 전에 돌아갔다.

 

그 날 저녁쯤에 큰 아들에게 전화가 왔는데, 마음은 달려가고 있은데, 영주권관계로 못 나오게 되었다면서 울부짖었다. 그러고는 장례에 보태라며 송금을 하였다. 아들 노릇을 못하는 불효자식은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사람 노릇하며 사는 것이 삶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뼈저리게 느끼며 사는 것이 삶인지도 모른다. 둘째 딸은 결혼하여 아들과 딸 하나씩를 낳아 잘 살았는데, 20여년전 어느 날 밤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여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은 후 하반신 마비가 와서 오늘날까지 휠체어에 의지하며 생활을 하여 둘째 딸은 마음고생 몸 고생이 말이 아니다. 셋째 딸은 아들 두 형제가 장성하여 자영업을 하며 그냥 산다. 막내 아들도 아들만 둘이다. 어머니와 가장 오래도록 같이 살아서 누구보다 어머니을 잘 이해하는 편이다.     

 

빈소를 지키는 첫 날은 가까운 친척과 인척들이 드문드문 찾아주어 한가한 시간이었다. 밤이 되면서 자영업을 하는 상주의 문상객들이 찾아오고, 인연의 끈을 이어주는 문상객들이 조문을 해 주었다. 90세를 넘기셨으니 호상이다. 그래서 인지 곡 소리는 쉽게 들리지 않았다.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보여주는 것으로 슬픔을 표시하는 것이 변화된 세태의 현실이다. 장모님과 두 아들이 교인이어서 목사님과 교인들이 방문하여 기도를 해 주셨다. 내일 입관예배와 모래 발인예배와 화장장예배까지 해 주신다고 하였다. 죽음 앞에서 머리가 숙여지는 것은 인간의 도리이고, 운명 이후의 세계에서의 평화로운 새 삶을 누리시기를 빌어주는 마음은 종교를 떠나서 인간의 기본적인 바램이다.

 

밤은 깊어가고 조문객은 왁자지껄하게 살아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상주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려고 노력하는 모습들이었다. 복잡하게 분주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 앞에 맞이하는 죽음의 순간을 지켜보면서 삶의 허무를 되돌아보기도 하며, 삶의 자세를 다시 가다듬기도 하는 계기를 마련하면서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삶을 바라보자고 다짐도 해 본다.  2시가 지나면서 조문객은 모두 돌아가고 가족들만이 빈소를 지키는 시간이 되었다. 부득이 한 사람들은 돌아가기도 하고, 한 쪽에선 지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잠을 자기도 하고, 한 켠에서 고인의 삶을 돌아보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으로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하나 둘 빈소와 접객소에 쓰러졌다.

 

그래도 아들과 딸들이 책임감을 가져 늦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둘째 날은 모든 장례 절차를 준비하면서 한 번 더 확인을 하고 조문객을 맞이하기로 하였다. 상가의 오전시간은 가장 한가한 시간이다. 10:30분에 교회에서 목사님이 오셔서 입관예배를 드리고, 11시에 입관을 하였다. 이 의식이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신체의 변화를 확인하는 자리이며, 어머니와의 마지막 대면이 이루어 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 자리는 그냥 바라보기만 하여도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어머니와의 마지막 이별을 눈으로 확인하는 시간은 삶의 처음과 끝이 주마등같이 지나간다. 조금 더 편히 모시지 못한 후회가 가슴을 때린다. 이 의식이 끝나야 비로서 상주로서 복장을 갖추고 문상객을 맞이한다.

 

장례는 화장을 하기로 정하고 벽제지나 용미리 추모의 집에 모시기로 하였다. 큰 딸과 두째 딸이 병원에서 사망진단서를 발부 받아 사망신고를 하고 장례절차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였다. 12시가 지나면서 하늘에선 하얀 서설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눈은 내리고 쌓여갔다. 상가를 찾아오시는 분들의 교통불편이 예상되어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오시는 분들 마다 길이 막혀서 고생하셨다는 말을 하셨다. 막내아들의 장인은 강릉에서 오는 길에 평소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하시며 밤 늦게 도착을 하셨다. 상가를 방문하여 조문하는 것은 우리의 전통문화이므로 종교를 떠나 예의를 표하는 방식은 조금 다를 수 있으나, 모두가 고인을 향한 추모 객들의 마음은 밤 12시가 지나서도 계속되었다.

 

오늘은 장모님이 이성에서 마지막 날이라 하늘에서 장모님의 한 많은 삶을 돌아보시고 하늘의 눈물을 대신하여 이토록 많은 눈을 계속하여 내려 주시는 것 같다. 밤새 내리던 눈이 언제 그쳤는지 모르겠다. 내일 장례절차에 차질이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밤을 지세고 발인 준비를 하였다. 화장장 시간이 오후 1:20분이어서 발인시간은 11로 잡았다. 시간은 충분하여 여유를 가지고 준비를 하였다. 오전 10:30분에 교회에서 발인예배를 해 주시고 절차를 밟아 발인 예를 드리고 11시에 병원을 출발하였다. 길에 내린 눈은 모두 녹아있어 불편은 없었다. 도봉산 수락산에는 하얀 눈이 그대로 쌓여있다. 장모님께서 이성을 떠나는 날 이 세상에서 행한 모든 잘 못한 언어와 행동을 저 하얀 눈으로 덮어 주시고 영원히 평화의 세계로 가시는 길 진심으로 명복을 빌어 드립니다.

 

벽제 화장장에 도착하니 12시 전이었다. 조금 기다렸다가 시신을 임시 안치소에 안치를 한 후 우리는 예약된 화장시간을 기다렸다. 23기의 화장장은 풀 가동을 하고 있었다. 1:05분 경에 안내를 받아 운구를 하여 6번 화장장에 도착하여 장모님의 관이 화로에 들어갈 때, 그 시간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가장 슬프고 가슴이 찢어지는 한이 서리는 시간이다. 장모님의 시신과 영혼이 영원히 분리 되어 시신은 이곳에 두고 영혼은 하늘나라로 올라가게 된다. 그 애절한 움음소리도 서서히 줄어들고, 다음은 교회 목사님의 마지막 예배시간이다. 기도하고 찬송하며 고인의 명복을 비는 시간으로 이 세상의 마지막의식은 끝을 맺는다. 우리는 화장시간이 끝날 때까지 가장 슬픈 아픔의 시간을 지루하게 기다렸다.

 

2시가 다 되어 장모님의 시신은 다 삭은 뼈 조각과 재로 변하여 우리 앞에 나타 나셨다. 그 뼈 조각을 모아 분쇄기에 넣고 돌리니 고운 재 가루가 되어 준비한 항아리에 넣어 봉하여 인계를 받았다. 그곳에서 15km 정도 거리의 용미리 제2 추모의 집 납골당에 안치를 하였다. 추모의 집은 생각보다 엄숙하고 깨끗하여 장모님을 좋은 곳에 모시게 되어 마음이 놓였다. 장모님을 보고 싶으면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장모님의 집은 아주 작은 공간이지만 장모님의 평소 성격에 닥 맞는 주위가 깨끗하고 꽃으로 장식된 주위환경이 너무 좋았다. 우리도 장모님의 사진을 준비하여 삼오날에는 문패와 조화의 화관을 달아 드리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