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의 삶의글

-* 손 병 선 *-

paxlee 2008. 1. 20. 13:27

           

                     - 손 병 선 -

 

사람마다 그 사람의 고유한 이름이 존재한다. 손병선 그는 72세를 일기로 현실을 떠났다. 거의 10년 가까이 병석에 누워 병과 싸우다 결국은 지고 말았다. 부인의 지극한 정성과 사랑이 항상 함께 하였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뚜렸한 병명도 모른체,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거의 방 구석에 갖혀 약으로 연명을 해 온 삶이었으니 얼마나 지독한 한 많은 삶을 살았겠는가. 그러니 그 부인이 생활전선에 나가 6남매를 키우고 공부시켜 결혼을 시켜 손자도 보았으나, 아직 막내 딸은 결혼을 시키지 못하였다며 만나는 사람마다 그것을 한으로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1남 5녀의 아버지로 그리고 사랑하는 부인의 남편으로 힘들게 어렵게 이 세상을 살았다.  그는 위로 누님 세분과 형님 한분과 더불어 5남매의 막내동이로 귀여움을 많이 받으며 살았을 것으로 생각이 되지만, 그는 어려서 어머니를 여이면서 고생을 하면서 자라났다. 아버지는 유학자로 근처에서는 유지로 살았지만, 일을 할 줄 모르는 선비였다. 그래서 가족은 늘 곤궁하게 살았다. 그의 고향은 문경이다. 그곳에서 큰 누나는 상주로 시집을 갔고, 둘째 누이는 여주로 시집을 갔으며, 세째 누이는 역시 가까운 상주로 시집을 갔다.

 

사람은 누구나 이사를 하면서 삶을 꾸려 나간다. 직장을 따라 떠나기도 하고, 교육을 위해 이사를 하기도 하면서 삶의 터전을 옮겨 다닌다. 그도 어머니가 안 계시는 어린시절의 고생은 보일수 없는 눈물을 많이 흘리며 자라났다. 어버지는 큰 누님의 집으로 들어가셨으며, 형님은 6.25사변으로 군에 입대를 하고, 그는 셋째 누나에게 맞겨졌다. 어머니가 안계신 가정은 이렇게 뿔뿔이 헤어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의  고생을 어떻게 다 말 할 수 있겠습니가, 그러나 그는 굳굳하게 일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성장을 한 후 적령기가 되어 지금 부인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농촌에 살면서 땅 한 평없이 생활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곤궁하고 어려운 일인가는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을 그 현상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부인이 얼마나 부지런하고 건강한지 열심히 일을 하면서 딸을 낳고, 이어서 아들을 하나를 낳고, 또 아들 하나 더 낳으려고 딸을 넷이나 더 낳았다고 합니다. 없는 집에 자식이라도 많아야 한다고 하였지만,  그의 어깨는 그 만큼 더 무거울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 가족이 오손도손 살아가는 즐거움이 있었지만, 농촌생활은 역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형님이 제대를 한 후 대구에서 자리를 잡고 살면서 농촌에서 고생하는 동생을 보고는 그 고생이면 대구에 가면 더 낳을 생활을 할 수 있다며 대구로 이사를 시켰습니다. 이렇다 할 직장생활은 하기 어려웠으나, 농촌에서 뼈대가 굳은 건강이 있었기에 부부가 함께 일을 하면서 차츰 생활의 안정이 되어가고 아이들도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무럭무럭 자라 주었습니다. 몇 년 후에는 평리동 변두리에 집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활이 안정되어가고 아이들도 자라서 학교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정은 한결 평화스럽고 화목하여 졌는데, 그는 시름시름 몸이 아프다면서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부인이 억척같이 일을 하여서 생활의 안정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첫 딸을 출가 시키고, 아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삼성에 입사를 하여 수원으로 발령을 받아 떠나고, 두째, 세째, 그리고 막내가 항상 가정을 화목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몇 년 지나 아들을 결혼시키고, 두째, 셋째도 결혼을 시켰습니다.

 

막내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돈을 모아 늦게 대학에 진학을 하여 지금은 고등학교 교편을 잡고 있습니다. 결혼 적령기가 되었는데, 결혼을 미루고 있어 그는 이 세상에서 한 가지 마무리를 못하고 떠나는 것은 한으로 여기며 한 많은 세상살이를 마감하였습니다. 손병선 그의 부음을 듣고 동생 둘과 셋이서 대구를 향해 가면서 그와의 많은 추억이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언제나 인자한 모습으로 정으로 대해 주셨는데, 살아 계실 때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죄송한 마음이 앞을 가렸습니다.

 

자동차의 레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으며 대구의료원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장례식장에는 많은 문상객이 모여있었습니다. 그의 사진앞에 서서 사진을 한 동안 바라보았습니다. 분향을 하고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절을 하면서 그의 삶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상주는 아들 하나 이지만, 사위가 넷이나 되어 상가의 분위기는 활기가 넘처 보였습니다. 늘 느끼는 일이지만, 상가에는 특히 아들 딸이 많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 번 더 해 보았습니다. 지금은 하나 아니면 둘인 사람들의 상가는 얼마나 쓸쓸할 것인가를 느껴보게 합니다.

 

여주 둘째 누나의 가족들은 12시가 다 되어 도착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5남매의 가족들이 다 모이지는 않았지만 많이 모이고 사촌, 육촌까지 친족과 인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고인의 명복을 비는 자리는 뜨거운 열기를 느끼게 하였습니다. 그의 형님의 며느리와 딸들, 그리고 사위들이 문상객을 접하고 대접하는 모습에서 그의 한 많은 삶의 수고가 녹여지고 있음을 가슴으로 느껴지게 하였습니다. 상조회에서 오신 두분의 도우미들의 역할도 상가에서는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밤을 가족과 친족 문상객들의 조문을 받으며 그가 이루어 놓은 삶의 흔적들은 그가 없어도 굳굳하게 이어 갈 것이다. 밤을 새우고 발인식을 하고는 집에 잠시 들렸다가 화장장으로 갔다. 요즈음은 매장보다는 화장을 선호하는 추세여서 그런지 화장을 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8시 조금 지나서 도착을 하니 10구의 화장이 진행중이어서 차례를 기다렸다. 10시쯤에 운구가 옮겨져 화장터널로 들어갈 때 그 시간은 한 많은 눈물이 그냥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그와의 영원한 이별을 하였다.

 

1시간 20여분이 지나서 그는 재가 되어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영혼이 떠난 시체는 그냥 자연속에서 오랜 시간을 두고 흔적없이 사라지는 것이나. 이렇게 화장을 하는 것이 더 깨끗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뼈도 형체가 없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것을 기계에 넣고 돌리니 재가 되어 나왔다. 삶이 이렇게 허무할 수가 없었다. 조그만 함에 넣어 차에 실고 절에 모시려 떠나고 나는 그곳에서 인사를 나누고 서울로 향했다. 손병선 그는 나의 작은 외삼촌이시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막내 동생이다. 외삼촌의 명복을 빌면서 이글을 적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