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의 삶의글

-* 101세에 떠나가신 고모님을 추모하며 *-

paxlee 2008. 2. 16. 15:15

 

              101세에 떠나가신 고모님을 추모하며

 

100세를 넘게 사신다는 것은 장수의 의미도 있지만, 그기에 따른 고통도 함께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우리나라의 평균 년령이 80세에 육박하고 있으나, 100세를 넘어 사신다는 것은 그렇게 흔치 않는 일이다. 우리의 가족과 혈족 가운데 100세를 넘게 사신분은 아마도 우리 고모님이 처음이신 것같다. 그렇게 오래도록 살아오신 그 길은 그렇게 행복하지 만은 않았다.

 

우리 고모님이 살아오신 한 세기 100년은 우리의 역사 만큼이나 풍랑의 세월속에서 힘겨운 삶을 살으셨다. 조선조 말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태어나셔서 일제의 강점기의 갖은 고초를 경험하면서 성장을 하여 괴산에 사시는 경주이씨 가문의 유학자이신 고모부님과 결혼을 하셔서 2남 2녀을 낳으셨다. 그 때만 해도 유학자의 선비정신으로 사시는 고모부님을 대신하여 집안 대소사를 주관하셨다고 들었다.

 

큰 딸은 청주로 시집을 가서 잘 사시고, 둘째 아들은 은행원 이었다. 그런데 형수님이 기독교 신자여서 가정의 화목을 위해 형님도 교회를 다니셨는데, 30대 말 즈음에 7월 17일이 공휴일이어서 교회에서 교인들과 한탄강에 물놀이를 갔다가 점심을 먹고 물에 들어갔다가 그만 그 물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가장 먼저 하늘나라로 승천을 하였다. 자식을 먼저 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고모님이 80대에 고모부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큰 아들은 경제기획원에 근무를 하였는데, 정년이 가까워 지면서 지방공무원으로 고향의 선거관리워원장을 하면서 고향 집에서 출퇴근을 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날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어 지방병원에서 서울병원으로 이송을 하여 치료를 받아도 회복가능성이 없다고 집으로 모시고 가라는 권고를 받고 죽음을 받아드리며 집으로 옮겨갔다.

 

집에 도착하여 밤을 세며 지켜보고 있는데, 미동도 하지 않던 형님이 조금씩 반응이 보여 다음날 다시 서울로 모셔와서 다시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그렇게 몇 일을 경과를 보는데, 나도 그 때 병원에서 형님을 보았지만 죽음을 기정 사실로 받아드렸는데, 식물인간의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깨어나셨다. 정신을 회복하고 보니 너무 오랜시간 뇌사상태가 오래 지속되어 몸은 척추에서 부터 하지까지 마비가 되었다.

 

다리는 반대로 휘어져 휠체어를 타고 병원생활을 하였다. 몇 군데의 병원을 거치며 한방병원에도 입원을 하였고, 재활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았지만, 치료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가 죽는다고 생각하였던 형님이 다시 살아 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마도 그 일을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서울에서 괴산까지 엠브란스를 타고 먼 길을 달려 가면서 뇌에 어떤 충격을 주어서 회복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형님도 2남 2녀을 두었는데, 막내아들 결혼식에는 휠체어를 타고 지켜보셨다. 그리고 그 지루한 몇 년의 병원치료에도 더 이상의 효과가 없어 시골에 내려가 3년여를 더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막내 딸도 남편이 은행에 근무를 하다가 40대에 1남 2녀를 남겨두고 너무 일찍이 하늘로 떠났다. 두 딸은 아직 남아 있지만, 남편과 두 아들을 가슴에 묻고도 100세를 넘게 살아오신 고모님의 마음을 바라보면 가슴이 아프다.

 

시골 집에서 고모님과 큰 형수 고부지간에 큰 집을 지키며 사셨는데, 형수도 가슴알이를 많이 하여서 그런지 심장에 무리가 와서 그런지 심장이 좋지를 않아 한 달에 한 번 서울병원에서 약을 복용하며 사셨는데, 병세가 더 악화되어 고모님을 모셔야 하는 현실에 고모님의 도움을 받으시며 생활 할 수가 없어 공기가 좋은 곳에서 요양을 한다며 집을 떠나고, 달랑 고모님 혼자서 생활을 하셨다.

 

그러다 보니 청주에 사는 큰 딸이 드나 들면서 돌보아 드리고 있는데, 청주 큰 누나도 80이 넘어 힘겨워 하셨다. 그래서 가족회의를 거처 지난 봄부터 초정 노인요양소에서 생활하시다가 이곳 요앙병원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 하셨다는 연락을 받고 어머니와 두 동생과 함께 빈소에 다녀왔다. 아들이 없는 고모님의 빈소가 얼마나 쓸쓸할까 걱정을 하면서 달려갔는데, 다행이 큰형님의 두 아들과 작은 형의 아들이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작은 며느리, 그리고 손녀 사위들이 공간을 지켜주고 있어서 형님들의 일을 대신 해 주는 모습속에서 고모님의 지난 날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가졌다. 너무 오래도록 사시면서 가족들에게 무거운 짐을 안겨주신 고모님도 이젠 무거운 짐을 훌훌 털어버리고 하늘나라로 편안하게 떠나시게 되었다. 호상이어서 곡소리가 뜸 했지만, 가족들의 진정한 마음이 한곳에 어울어진 조카들의 모습은 대견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