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 심산의 와인 예찬 *-

paxlee 2008. 3. 7. 21:53

 

              심산의 와인 예찬

 

《심산의 와인 예찬》은 지난 1년간 <무비위크>에 연재될 당시 내용의 진위 여부를 놓고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그만큼 이 책은 소설과 에세이 사이에서 문학적으로 대단히 모호한 경계 위에 서 있다. 심산을 아는 사람은 이 책에 등장하는 숱한 여인들이 실존 인물일 거라고 점친다. 하지만 타고난 글재주꾼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가 어찌 진실하기만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내용은 창작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저자 자신도 글쓰기 최고의 가치를 독창성과 새로움에 두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한결같이 그에게 사랑을 가르쳐준다. 젖을 물려 준 엄마 이외의 첫 번째 여인이 첫사랑이다는 그의 정의도 자못 흥미롭다. 비릿하고 풋내 나는 첫사랑을 가르쳐준 밀히는 그래서 그의 첫사랑 여인이다. 일견 사실 같기도 한데, 이야기의 말미에다 사랑하는 처녀의 젖가슴쯤으로 풀이되는 독일의 립프라우밀히라는 와인에 대해 정보를 살짝 곁들여 놓았다. 밀히가 립프라우밀히라는 와인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건 짐작하고도 남는다.

 

소설 《하이힐을 신은 남자》를 쓸 당시 취재차 만난 게이는 이 글에서 그르나슈로 재탄생한다. 그르냐슈는 주로 레드와인을 만드는 포도 품종이다. 이것으로 화이트 와인을 만들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서 도망치게 된다는 의미에서다. 그 역시 그르나슈와의 사랑을 완성시키지 못한 자신의 유치했던 영혼을 반성하기도 한다. 이쯤 되면 이 책은 재미난 에피소드를 통해 배우는 심산만의 독특한 와인 강의로도 읽힌다.

 

 * 선 굵은 남자들의 디오니소스 축제로서의 와인

 

이 책은 크게 2부로 나뉜다. 1부가 와인과 여인에 대한 오마주라면, 2부에서는 선 굵은 남자들의 영원한 로망으로서의 와인을 다룬다. 산에서는 맥주는 너무 무겁고, 소주는 너무 독해 와인이 제격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는 작가 심산이 산사나이로 활동했던 과거 역시 이 책에서 색다른 이야기로 되돌아온다.

 

산에 다니는 사람들이 정상에 오르는 일보다 더 힘들어하는 일이 있다. 바로 산에서 죽은 이의 부고를 전하는 일이다. 그런 그에게도 몇 년 전 아콩카과 등정에 나섰다가 실종되어 버린 산(山)친구가 있다. 신혼여행까지 동했을 정도로 절친했던 그의 부인은 소식을 전해 듣고는 지리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를 만나러 갈 때면 그는 언제나 말벡(malbec)을 배낭에 짊어지고 간다. 뜨거운 사내의 심장, 잔뜩 꾸민 도회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산 밑 마을의 흙냄새가 나는 와인이 바로 말벡이기 때문이란다.

 

그런가 하면 이 책은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에피소드를 많이 담고 있다. 부산에서 한 주먹 하는 콩티 형님의 이야기는 한 편의 코믹 단막극 대본으로도 손색이 없다. 콩티 형님의 손에 어느 날 '로마네 콩티'라는 와인 한 병이 굴러들어왔다. 어떤 이가 재건축 문제로 골머리를 싸매고 있던 차에 콩티 형님이 전화 몇 통화로 간단하게 그 문제를 해결해 줬는데, 그 답례품이었던 것이다. 로마네 콩티는 와인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다. 발렌타인 30년 100병하고도 바꿀 수 없는 고가이기도 하지만,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희귀품이기 때문이다.

 

근사한 접대 골프도 아니고, 이 어이없는 와인 한 병을 받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와인을 좀 아는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렇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게 로마네 콩티 1985를 만나게 된 것이다. 급히 비행기를 타고 부산까지 달려간 자리, 시음회에 초대된 여섯 명의 잔에 와인이 따라지자 가장 상석에 앉은 콩티 형님이 큰 소리로 외친다. 완샷! 시원하게들 들자구. 깨끗이 비워진 다섯 개의 잔. 그러나 잔을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작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다섯 명의 사내. 그 어이없음과 충격, 코미디와 비극이 뒤섞인 에피소드를 읽다 보면 자연스레 흥에 겨운 디오니소스 축제가 떠오른다.

 

 와인은 나이 들어 만난 좋은 친구이다. 이 친구는 내게서 많은 돈과 시간과 노력을 앗아 갔지만 그 모든 것의 총합보다 훨씬 더 많은 양과 질의 행복을 내게 선사해 주었다. 이 책은 그에게 주는 나의 작은 답례품이다.

 

* 지은이 심산의 서문 가운데

 

 산에 오르고 와인을 마시며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시집 《식민지 밤노래》(1989), 장편소설 《하이힐을 신은 남자》(1992) 《사흘낮 사흘밤》(1994), 다큐멘터리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공저, 1998), 산악문학 《심산의 마운틴 오딧세이》(2002) 《엄홍길의 약속》(2005), 작법서 《한국형 시나리오 쓰기-심산의 시나리오 워크숍》(2004)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시나리오 가이드》(1999) 《시나리오 마스터》(심산스쿨 공역, 2007) 등이 있으며, 영화화된 시나리오로는 <맨발에서 벤츠까지>(1991) <비트>(1997) <태양은 없다>(1999) <비단구두>(2006) 등이 있다.

 

현재 심산스쿨(www.simsanschool.com)에서 시나리오와 와인을 가르치며 심산스쿨 대표이다.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 대표, 코오롱등산학교 강사, 한국산서회 회원, 마운틴북스 편집인 등으로 활동한다.

 

 * 그림 이은

 

만화와 일러스트를 그린다. 장편만화 《36℃의 반란》(전6권, 2002) 《분녀네 선물가게》(전10권, 2008 완간 예정)를 출간했고, 현재 온라인 잡지 <슈가>에 만화를 연재 중이며, 각종 잡지 및 사보에 일러스트를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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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 론 남부의 샤토뇌프-뒤-파프(상)

 

이십대 시절의 나는 스스로를 실연의 왕자쯤 된다고 여기고 있었다. 지금에야 제법 쿨(cool)한 척 폼을 잡고 있지만 청년시절의 나는 지나치게 웜(warm)하다 못해 거의 핫(hot)할 지경에 이르러 상처를 많이 받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게다가 왜 그리도 외로움을 많이 탔던지 혼자 있기를 너무도 두려워했었다. 덕분에 쉽사리 사랑에 빠지고, 너무도 뜨겁게 불타올랐다가, 끔찍한 상처를 받고 나자빠지기 일쑤였다.

 

곰곰이 뒤돌아보니 이십대 시절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십대시절부터 나는 만나는 여자마다 결혼해달라고 졸라댔었다. 진심으로 그러길 원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칭얼대듯 그렇게 절실하게 졸라댔었다. 하지만 결과는 매번 다를 바 없었다. 언제나 실연이다. 당시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면 다른 여자들이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가 매우 도덕적이거나 충실한 남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다만 그냥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어찌나 집요하게 졸라댔던지 나를 만났던 여자들은 대개 결혼을 약속해주었다. 하지만 말뿐이다. 시간이 조금만 흐르다보면 그녀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 나 결혼할 남자가 생겼어. 그럴 때마다 가슴은 찢어진다. 물론 세상은 당장 종말을 고할 듯 하다. 그러면 나는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퍼마시곤 했다.

 

이십대 시절의 마지막 실연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그녀 역시 예의 그 대사를 읊조리며 떠나가자 나는 도저히 제 정신으로 존재할 자신이 없었다. 그날로부터 꼬박 3박 4일 동안 위스키를 퍼마셨다. 물론 나는 빈털터리 룸펜이었으므로 그 모든 술값을 감당해준 것은 죄 없는 내 친구들이다. 녀석들은 마치 순번표라도 나누어 가진 듯 번갈아가며 나타나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내 하소연을 듣는 둥 마는 둥하다가 술값을 계산해주고는 사라져 갔다.

 

마지막 순간에 기절한 나는 이틀 쯤 지난 후에 세브란스 응급실에서 눈을 떴다. 당시 나를 담당했던 의사가 썩소를 지으며 내게 툭 던졌던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내 평생 당신만큼 혈중 알콜농도가 높은 사람은 처음 봤소".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슬프고 웃기는 격언은 이런 것이다. 세월이 약이겠지요. 심지어 세월이라는 표현조차 너무 거창하다. 그냥 약간의 시간만 흘러가면 된다. 그러면 속없는 나는 그녀의 결혼식에 간다. 결코 깽판을 치려거나 자학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진심으로 그 결혼을 축복해주기 위해서였다. 신부대기실에서 나를 맞는 그녀들의 표정도 가지가지였다. 으이구 이 화상아, 여기까지 뭐 하러 왔어? 미안해, 너도 얼렁 좋은 여자 만나. 너 축의금은 안 내고 밥값만 축낼 거지? 아 참, 옛날에 네가 나한테 빌려간 책, 내 새 주소로 좀 보내줄래? 돌이켜 보면 그런 결혼식조차도 즐거운 추억거리다. 오죽하면 내가 농담 삼아 밝히곤 했던 나의 취미생활이 결혼하기로 한 여자 결혼식에 참석하기였겠는가?

 

슬프고도 웃기는 것이 세월이지만,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가르침을 주는 것 역시 세월이다. 세월이라는 것이 많이 흘러 나도 결혼이라는 것을 하고 난 다음 마주치게 되는 그녀들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깨달음을 내게 선사해주었다. 너 그때 왜 나를 버렸니? 내가 짐짓 익살맞은 표정으로 그렇게 물어보면 그녀들은 한결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헛웃음부터 내지르고 만다. 나 정말 기가 막혀, 내가 널 버렸다고? 그럼, 버렸지, 나랑 결혼하겠다고 철썩 같이 약속해놓고 딴 남자랑 결혼했잖아!

 

이쯤에서 그녀들은 혀를 끌끌 차며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기 마련이다. 넌 말만 그랬지 전혀 결혼할 자세가 되어 있지 못한 애였어. 네가 친구나 애인으로서는 나름 근사했다는 거 인정해. 하지만 남편감으로는 정말 빵점, 아니, 거의 마이너스였다구.

서른을 훌쩍 넘기고 나서야, 그리고 나 역시 결혼이라는 걸 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이십대 시절의 나는 남편감으로서는 정말 최악의 상대였다는 것을. 당시의 나는 돈을 십 원 한 푼도 벌지 못하고 있었다.

 

돈을 벌 능력은커녕 그럴 의지조차 전혀 없었다. 덕분에 당시의 애인들은 언제나 내게 용돈을 주어야만 했다. 하지만 청년시절의 경제적 능력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 문제는 내가 줄곤 딴청을 피웠다는 사실이다. 오해 없기 바란다. 한 여자를 만나면서 동시에 다른 여자들도 만났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 딴청의 대상은 무엇이었던가? 산이었고, 문학이었고, 혁명이었다. 이제는 모두 다 버젓한 학부모이자 우아한 귀부인이 되어버린 그녀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네가 그때 나를 얼마나 외롭게 했는지 알아? 싸우고 헤어져도 전화 한 통 없고, 갑자기 보름씩 소식이 끊겨 애간장이 다 타버린 다음에 쓰윽 나타나서는 기껏 한다는 말이, 설악산에서 바위 하고 왔어! 도대체 그런 남자를 믿고 결혼하겠다는 여자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할 말이 없다. 그리고 미안하다. 하지만 그녀들이 조목조목 짚어대는 전과기록(!)의 항목들은 끝이 없다. 너, 나랑 만날 때, 맨날 옛날 애인들 이야기한 거 알어? 도대체 어떤 여자가 자기 애인의 옛날 여자들 이야기를 듣고 싶대? 여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속마음이야 어땠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들은 언제나 자기 이전의 옛애인들에 대하여 궁금해 했고 이것 저것 물어왔다. 내 잘못이라면 대사란 언표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현재 만나고 있는 그녀의 함정인지도 모르고 옛애인들과의 추억들을 미주알 고주알 보고하는 병신짓(!)을 일삼아왔다. 그리고 그 결과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연들이 생겨났다. 그녀들끼리 서로 알게 되고, 만나게 되고, 심지어는 친해지게 된 것이다.

 

이제 그녀들끼리의 야릇한 우정 혹은 희한한 공모에 대해서 말할 때가 되었는데 벌써 지면의 끝이 보인다. 시나리오작법에 빗대어 이야기하자면 이제 겨우 1장을 끝냈을 뿐인데 서둘러 3장을 마무리하라는 격이다. 어쩔 수 없다. 이 스토리는 2회에 걸쳐서 연재하는 수밖에. 그래도 주어진 러닝타임이 다 되어가니 일단 마무리는 한번 지어보자.

 

서로를 잘 알고 지내며 심지어 친하기까지 한 옛애인들의 사회(society), 그것을 편의상 전직애인연합이라고 해두자. 그렇다면 과연 전직애인연합과 가장 잘 맞아 떨어지는 이미지의 와인이란 어떤 것일까? 그 복잡미묘한 구성과 저마다 다른 개성들 그리고 그 모두를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아우르는 커다란 스케일을 한 병에 구현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프랑스의 론(Rhone) 지방은 다시 북부와 남부로 나뉜다. 론 북부는 내가 좋아하는 시라(Syrah)를 메인 품종으로 하여 와인을 만드는 곳이다. 하지만 론 남부는 전혀 다르다. 흔히들 론 남부를 와인 블렌딩(blending)의 천국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다종다양한 포도품종들을 뒤섞어 와인을 만든다. 심지어 적포도 품종과 청포도 품종이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의 몸을 섞어 전혀 새로운 향과 맛을 만들어낸다. 론 남부를 대표하는 블렌딩 와인의 걸작이 바로 '샤토뇌프-뒤-파프(Chateauneuf-du-Pape)'이다.

 

굳이 영어로 표기하자면 '뉴 캐슬 오브 포프(New Castle of Pope)'로서 교황의 새로운 성이라는 뜻이다. 14세기에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겨진 다음 여름별장으로 사용했던 곳이 바로 이 지역이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샤토뇌프-뒤-파프에는 무려 8종류의 적포도 품종과 5종류의 청포도 품종이 들어간다. 가장 섬세하고 화려한 블렌딩 기법이 적용된 와인이다. 각각의 품종들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다음 회를 기약하는 수밖에 없다.

 

오늘은 그 전체적인 인상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 샤토뇌프-뒤-파프의 맛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메인 품종 하나만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불성설 이다. 샤토뇌프-뒤-파프는 다양한 추억들의 용광로이다. 이 와인에는 그리움 혹은 향수가 짙게 배어있다. 뜨거운 열정과 냉정한 균형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드문 와인이다. 나는 세월이라는 그 슬프고도 웃기는 단어와 이토록 잘 어울리는 다른 와인을 알지 못한다. 전직애인연합이다.

 

   * 전직애인연합의 절묘한 블렌딩(하)

 

사람들은 특정한 해를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기억한다. 어떤 이는 1988년을 서울올림픽이 열린 해라고 기억할 것이고, 또 다른 이는 그 해를 죽 쒀서 개 준 해라고 떠올릴 것이다. 유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의 전리품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어이없게도 노태우가 당선되어 집권한 해이기 때문이다. 아니다, 그가 취임한 것은 1987년 연말이었던가? 벌써 20년 가까이나 과거로 밀려난 해이고 보니 기억마저 가물가물하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1988년은 아주 선명하다. 나는 그 해를 어른이 된 이후 처음으로 애인 없이 생일을 맞은 해였다고 기억한다. 꿀꿀한 생일을 코 앞에 둔 어느 날이었다. 형 며칠 전에 세브란스에 실려 갔었다면서? 깔깔대는 웃음소리 밑에 연민을 감추고 그렇게 내게 전화를 걸어온 친구는 그르나슈(Grenache)였다. 낼 모레가 형 생일인데 만날 사람도 없겠네? 나랑 점심 먹을래?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퉁명스러운 투정을 부렸다.

 

너 지금 나 약 올릴라 그러는 거지? 그르나슈는 여전히 예의 그 하이톤의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제멋대로 약속을 잡아버렸다. 애인 없다고 저 혼자 방구석에 쳐박혀 찡찡대지 말고 좋은 말 할 때 나와! 하지만 정작 생일날 아침이 되자 그녀는 약속을 번복했다. 12시 말고 11시, 그 한정식집 말고 고 옆의 커피숍에서 만나. 그르나슈는 이십대 중반의 한 세월을 함께 보냈던 애인이다. 외모는 전형적인 톰보이 스타일인데 성격마저 그러하여 흡사 남동생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묻는다. 한때 애인이었다가 이후 친구로 남을 수도 있는가? 내겐 그런 친구들이 많다. 그르나슈 역시 그런 친구다. 내가 뭐랬어? 루싼느(Rousanne), 걔는 첨부터 형이랑 안 맞았다구, 어쩜 그렇게 여자 보는 눈이 없을까? 나는 커피 리필을 시키며 그녀에게 눈을 흘겼다. 너 지금 그걸 위로랍시고 하는 거야? 아침부터 자는 사람 불러내갖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그르나슈는 그러나 대뜸 제멋대로 내 말끝을 잘라먹는다. 나도 바쁘거든? 형 만날려고 회사에다가 거짓말 하고 나온 거거든? 그러니까 고마운 줄이나 아셔.

 

사실은 고마웠다. 그래서 한정식집으로 이동해 자리를 잡고 마주 앉으면 볼멘소리 로나마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려 했었다. 그런데 그녀는 한정식집 앞까지 가서는 팩 돌아서며 내 어깨를 떠미는 것이었다. 꼭 점심 같이 먹고 싶었는데 나는 회사로 돌아가야 돼. 어이가 없었다. 야, 너, 지금 정말...그럼 나 혼자 밥 먹으라고? 그르나슈는 귀엽고도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활짝 웃었다. 형 혼자 밥 먹는 거 무지 싫어하는 거 나도 잘 알아. 그러니까 걱정 붙들어 매고 일단 들어가 보라니깐? 그녀는 내 뺨에 살짝 키스를 해주고는 막무가내로 내 등을 떠다밀었다.

 

생일 축하해, 힘 내고, 건강하고, 밥 잘 먹고! 여전히 사태 파악을 못한 내가 한정식집 현관에서 다시 나오려 할 때 등 뒤에서 무르베드르(Mourvedre)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여기, 나 여기 있어! 정갈한 한정식집의 작은 독방에 무르베드르와 마주 앉아 있으려니 헛웃음부터 터져 나왔다. 그르나슈가 연락한 거니? 무르베드르도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저 언니를 누가 말리겠어? 전채요리를 내 접시 위로 놓아주고 있는 무르베드르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르나슈보다 일 년쯤 전에 만나던 친구인데 당시에는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었다. 어쩐지...이 집에서 점심 먹자고 했을 때 내가 눈치 챘어야 하는 건데. 무르베드르는 어이 없다는듯 도리질을 하면서도 편안하게 말을 이어갔다. 여기 이제 내 단골집도 아니고, 오빠하고 나만의 단골집도 아니야. 나 가끔씩 그르나슈 언니하고도 여기서 만나서 밥 먹고 그래. 언니가 저번에 프랑스 갔다올 때 내 논문 자료들도 이 만큼 챙겨줬어.

 

무르베드르는 더 이상 철부지 여대생이 아니었다. 허랑방탕한 애인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고 이룰 수 없는 꿈 때문에 세상을 무작정 증오하던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나와 헤어지겠다고 결심하게 만들었던 새 애인하고는 지금도 매주 함께 성당에 다닌다고 했다. 확정된 논문의 청사진을 그려 보일 때는 젊은 소장학자로서의 포부와 가능성이 내 눈을 부시게 했다. 나랑 헤어진 다음에 훨씬 더 멋진 사람이 된 거 같구나. 무르베드르는 수줍게 웃으면서도 부드럽게 나를 타박했다.

 

오빠도 이제 정신 좀 차려,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야? 나는 멋쩍게 꼬랑지를 내렸다. 예전에 내가 너한테 잘 못 했던 거, 이제는 다 잊어버렸니? 그녀는 후식으로 나온 녹차를 홀짝거리며 피식 웃었다. 잊지는 못하지, 하지만 용서는 해줄게. 정식집 앞에서 헤어질 때 그녀는 내게 새로운 약속장소를 알려줬다. 인사동의 그 찻집 알지? 여기서 택시타면 십오분 안에 갈 거야. 이제는 감을 잡았다. 찻집 이름만 듣고도 그곳에 누가 나와 있을지 빤했던 것이다.

 

맙소사, 비오니에(Viognier)하고도 약속을 잡아놓은 거야? 넌 비오니에 아주 질색했잖아. 무르베드르는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가기 위해 육교를 올라가며 손을 흔들었다. 옛날 얘기야, 걔도 알고 보니 참 근사한 얘였더라구. 만나면 손 한번 잡아봐, 요즘 도예에 빠져서 손에 각이 제대로 잡혔어. 비오니에는 그르나슈와 헤어진 다음 만났던 친구다. 도예가 남편을 만나 아이도 낳고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은 익히 듣고 있었다. 그 남편은 내게 자기가 만든 근사한 재떨이를 하나 선물해주기도 했었다.

 

비오니에는 나를 만나자마자 대뜸 결혼이나 빨리 하라고 윽박질렀다. 애를 낳아봐, 인생의 완전히 다른 차원이 열려. 언젠가 네가 왜 살아야 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지? 애가 그걸 가르쳐 줄 거야, 이제 허튼 짓들 좀 그만 하고 빨리 결혼해서 애를 낳으라구. 그녀는 두툼하게 굳은 살이 박힌 손으로 내 뺨을 어루만지며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었다. 얼마 전에 또 실연 당했다면서? 그래서 그런지 얼굴이 말이 아니네...내가 좋은 차(茶) 가져 왔거든? 집에 가져가서 아침 저녁으로 꼭 마셔, 맨날 술만 퍼먹지 말고 쫌. 그날은 하루 종일 그런 식이었다.

 

1988년의 내 생일, 나는 현직 애인을 가지고 있지 못했지만, 자기들끼리 연락을 취하여 서로 번갈아가며 나를 만나준 전직 애인들을 여럿 만났다. 그 중의 제일 압권은 맨 마지막에 만난 쌩쏘(Cinsault)였다. 십대 후반의 한 시절을 나와 함께 보냈던 그녀는 일찌감치 결혼하여 아이를 두 명이나 낳았는데, 마땅히 그 아이들을 맡길 데가 없어 둘 다 데리고 나온 것이다. 사내아이는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상태였고 딸아이는 아직 유치원에도 가지 못한 꼬마였다. 나는 쌩쏘와 함께 그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랜드로 갔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깔깔댔고 청룡열차를 타며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 해가 뉘엿뉘엿 해져서 우리들의 그림자가 땅바닥에 길게 누울 즈음이었다. 야릇한 행복감이 온몸을 감쌌다. 나도 누군가와 결혼하여 이렇게 아이들을 낳고 그들과 함께 청룡열차를 타러 다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너무도 간절하게 피어올랐다.

 

훗날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도 기뻐해준 사람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전직애인연합이다. 내가 작가가 되고 돈도 제법 벌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도 대견(?)하게 여겨준 사람들도 바로 이들이다. 그들은 애증이 마구 뒤섞인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네가 이렇게 사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때 좀 생각해볼 걸 그랬네. 너 예전에 맨날 나한테 용돈 뜯어갔지? 이제 나 볼 때마다 맛있는 거 사줘야 해! 그들과 나는 같은 세상을 살아간다.

 

쌩쏘의 아들이 대학입시를 치룰 때 가장 믿을만한 상담자는 바로 나였다. 프랑스에 있는 그르나슈의 딸에게 한글로 된 팝업북을 선물해준 것도 나였다. 내 딸에게 리틀타익스 자전거를 물려준 것은 무르베드르였고, 심산스쿨을 열었을 때 도착한 멋진 화분을 직접 만들어준 것은 비오니에였다.

 

그르나슈, 시라, 무르베드르, 까리냥, 쌩쏘, 마르싼느, 루싼느, 비오니에, 클레레트...그들 각자는 모두 결코 대체될 수 없는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함께 몸을 섞으면 그 이전에는 존재할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작품이 하나 탄생한다. 그것이 바로 샤토뇌프-뒤-파프이다. 1988년의 그날처럼 전직애인연합의 멤버들을 모두 한꺼번에 만나볼 수 있는 그런 축복 받은 날이 내 삶에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그날 마시게 될 와인이야 이미 정해져 있다. 바로 다양한 개성들이 조화롭게 몸을 섞고 있는 프랑스 론 남부의 걸작, 샤토뇌프-뒤-파프이다.

 

  - 출처:심산의 와인예찬 http://www.simsanschoo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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