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최고의 원정대장 크리스 보닝턴 *-

paxlee 2008. 4. 3. 21:51

 

                      [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10> 크리스 보닝턴(1934~ )


         부와 명성 모두 거머쥔 '최고의 원정대장' 책쓰고 강연하고… 직업산악인 길 개척
         70대 나이 요즘에도 틈틈히 암벽등반하며, 지난해 12월엔 한국을 방문하였다.


영국 스코틀랜드 오크니의 해변에 있는 수직고 140m의 사암벽 올드맨 오브 호이. 크리스 보닝턴은 1966년 이곳을 올랐다.

 

얼마 전 딸이 있는 영국에 다녀왔다. 달새는 달만 생각하고 술꾼은 술만 생각한다던가. 나 같은 종류의 인간은 어딜 가나 제일 먼저 등산장비 가게부터 돌아보고 그 다음에 기껏 찾아간다는 곳이 산악문학 도서 코너다. 런던에서 제일 크다는 대형서점에 들어서자 내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벽의 한 면 전체가 산악문학으로만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내가 거의 반나절 동안이나 그 앞에 퍼질러 앉아 이 책 저 책을 뒤적이자 서점 매니저가 말을 붙여왔다. “특별히 찾는 책이 있나요?” 나는 최종적으로 다섯 권의 책을 챙겨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는 책이 많은 것 같지만 딱 두 종류뿐이네요. 크리스 보닝턴이 직접 쓴 책과 그에 대한 언급이 실려 있는 책.”

지난 해 영국 여행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은 런던의 웨스트엔드도 아니고 아일레이의 싱글몰트 위스키공장도 아니었다. 그곳은 레이크 디스트릭트였다. 이유는 단 하나, 그곳이 암벽 등반의 발상지였기 때문이다.

 

그곳을 한 바퀴 둘러본 다음의 감상은? 우리의 인수봉과 선인봉이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빠져 나올 때 나는 또 굳이 켄달에 가 봐야 한다고 우겼다. “켄달은 아무 것도 없는 도시야.” 그렇게 항변하는 아내에게 나는 대답했다. “그곳은 국제적인 산악영화제가 열리는 도시야. 그 산악영화제의 조직위원장이 바로 크리스 보닝턴이고.”

 

‘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이라는 연재가 석 달째로 접어들자 이따금씩 독자들의 메일을 받는다. 그들은 묻는다. “세계적인 산악인들이란 하나 같이 그렇게 요절할 수밖에 없는 건가요?” 그렇지 않다. 물론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영웅 신화를 만드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한다. 늙은 '재니스 조플린'이나 '체 게바라'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진정한 영웅들이란 존경 받으며 늙어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젊은 날의 영예를 훼손하기는커녕 끝없는 자기혁신으로 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나가는 사람. 그렇게 늙어가거나 천수를 다한 ‘행복한 산악인’들을 보면 가슴 한 켠이 뜨거워진다. 영국의 크리스 보닝턴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본명은 크리스찬 존 스토리 보닝턴이다. 1996년 영국 여왕에게서 기사 작위를 받았으니 정식으로 거명 하자면 이제 그의 이름 앞에 ‘써(Sirㆍ卿)’를 붙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그의 이름은 여전히 크리스 보닝턴이다. 1934년 영국 햄스테드에서 태어난 그는 10대 중반부터 암벽 등반에 심취했었다. 하지만 그가 택한 진로는 엉뚱하게도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왕립군사학교를 졸업한 이후 왕립탱크여단에 임관하여 3년간 북부 독일에 주둔하면서 군 수색부대의 등산 교관으로 근무했다. 이 시기에 영국인 최초로 알프스 드뤼 남서필라를 올랐다는 것은 특기할만한 사항이다. 1960년은 이 군인-등산가 최고의 해였다. 영국-인도-네팔 군(軍)원정대의 일원으로 참가해 세계 최초로 안나푸르나 2봉에 오른 것이다.

 

“저는 군 생활을 통해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기획, 조직, 지휘, 운영, 그리고 책임 지는 자세. 저는 군대에서 배운 이 모든 원칙들을 그 이후에 꾸린 저의 원정대에 고스란히 적용시켰습니다.” 서른 살이 되기 전에 그는 자신의 삶을 크게 바꿀 두 번의 결단을 내린다.

 

첫째는 군인과 산악인 사이의 결단. 그는 주저 없이 산악인의 삶을 택했다. 두 번째는 직장인과 산악인 사이의 결단. 산에만 오르면서 생활을 꾸려갈 수는 없다. 그래서 두 번째 결단이야말로 가장 힘겨웠노라고 그는 실토한다. 하지만 유니레버라는 회사에 취직하여 마요네즈 외판원으로 9개월 동안 일한 다음 그는 과감하게 사표를 내던졌다.

 

“남은 삶 동안 마요네즈를 팔아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끔찍하게 느껴졌어요. 대신 저는 ‘직업 산악인’이 되기로 결심했죠. 원정대를 기획하고 조직하고 기업들로부터 협찬을 받아오는 일, 그리고 원정의 결과로 책을 쓰고 사진을 판매하는 일 등을 통하여 생계를 꾸려나가는 방식입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활동들을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크리스 보닝턴이 이런 사업을 막 시작하던 1960년대에만 해도 너무도 생소하게 여겨졌던 일들이다. 이를테면 그는 길 없는 곳에 길을 내는 ‘개척 등반’을 한 셈이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벤처 사업가’다. 그는 이 벤처 사업에서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단지 아이디어 하나로만 성공한 것은 아니다. 그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만한 원정을 기획하고, 최고의 산악인들로 원정대를 꾸렸으며, 기어코 그들을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 치열했던 과정을 일일이 카메라에 담고 하나 같이 두툼한 하드커버 책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그가 ‘20세기 최고의 원정대장’이라고 불리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가 ‘리더십’ 문제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강연자로 손꼽히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크리스 보닝턴을 ‘성공한 직업 산악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다. 하지만 그렇게만 이야기한다면 그의 매력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진정으로 등반을 즐기는’ 사람이다. 언젠가 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누군가 물었다. “당신은 8,000m 이상의 산 14개를 오르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까?” 크리스 보닝턴은 그 매혹적인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렇게 반문했다. “그런 등반이 정말 즐거울까요?”

 

그는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그 일로 부와 명성을 얻은 행복한 사람이다. 올해 72세가 된 크리스 보닝턴은 아직도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살며 틈날 때마다 암벽 등반을 즐긴다. 내년에 다시 그곳을 방문하게 되면 그의 작은 시골풍 별장에 꼭 들러 보고 싶다.

 

◆ 크리스 보닝턴의 세계 초등기록과 저서들

14권의 산악문학 저서… 작가로도 유명하다.

 

1960년에 안나푸르나 2봉에 올랐다. 1961년에는 히말라야의 눕체에 올랐고, 알프스의 몽블랑을 새로운 방식(프레니 중앙 필라를 통하여)으로 올랐다. 1963년에는 남미 파타고니아의 파이네 중앙탑에 올랐다. 1965년에는 브루야르 오른쪽 필라를 통하여 몽블랑에 올랐다. 1966년에는 아이거 북벽을 직등했고, 기이한 형태의 바위탑 올드 맨 오브 호이에 올랐다.

 

1970년에는 안나푸르나 남벽을 올라 ‘히말라야 거벽 등반’의 시대를 열었다. 1974년에는 창가방에 올랐다. 1975년에는 3년 전에 실패했던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올랐다. 세계등반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등반이다. 1977년에는 카라코람의 오그리(바인타 브락)에 올랐다. 이 등반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으나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1980년에는 중국 신장성의 콩구르에 올랐다. 1983년에는 인도의 쉬블링 서봉에 올랐다.

 

그는 직업산악인으로 나선 1966년에 ‘나는 산에 오르기로 결심하였다’를 출간한 이후 지금까지 모두 14권의 산악문학 저서를 집필하였다. 이들 중 ‘안나푸르나 남벽’(1971)과 ‘에베레스트의 나날들’(1986)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2년에 출간된 ‘산악인들’은 훌륭한 세계 등반사 교재로 쓰이고 있으며, BBC 14부작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방영되기도 하였다. 국내에 출간된 책은 산뿐 아니라 바다, 사막, 극지, 하늘 등 모든 분야의 모험가들을 다룬 ‘퀘스트’(생각의 나무, 2004) 하나 뿐이다.

- 글 / 산악문학작가 심산 / 한국일보 2006, 05, 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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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야에서든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 있다. 세계 산악사를 살펴보면 뚜렷한 족적을 남긴 많은 등반가들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선구자들 가운데도 오랜 세월 자신만의 색깔을 고수해온 몇 안 되는 산악인 중에서 나이가 들어 늙어가면서도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며 도전을 멈추지 않는  영국의 크리스 보닝턴 경( Sir Chris Bonington·74)은 산악인의 존경받는 인물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산악인이며 ‘알피니즘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그가 2007년 12월 초 한국을 방문했다. 그의 이번 방한은 이랜드그룹에서 새롭게 진행하는 아웃도어 브랜드 버그하우스(Berghaus) 명예회장 자격으로 이뤄졌다. 브랜드 홍보에 의미를 둔 방문이지만, 그의 첫 방한은 우리나라 산악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끌었다.

팔순을 바라보는 영국의 노 산악인은 방한 첫 공식일정으로 북한산 산행을 택했다. 평생을 등산의 세계에서 살아온 그가 한국의 산에 대해 궁금증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 12월5일 우이동 오투월드에서 엄홍길 대장과 김창호씨 등 한국 산악인들과 해우하고 산행을 시작했다. 그는 산을 오르며 북한산의 첫 인상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 북한산에 올라 인수봉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크리스 보닝턴 경.
“인수봉을 보니 등반하고 싶은 열망이 가슴 속에서 일어납니다. 저렇게 멋진 바위를 가지고 있는 한국 산악인은 정말 행운아들입니다. 전 세계를 다녀봤지만, 한 나라의 수도에 이런 크고 아름다운 암장이 있는 곳은 처음 봅니다.”

그의 반응은 이전에 한국을 방문했던 여러 해외 산악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도시 인근에 이런 대형 암장이 자리한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드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인수봉과 백운대, 영봉 등의 지명을 정확히 기억했고 수시로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확실히 저명한 저술가다운 남다른 모습의 산악인이었다.
        북한산 영봉에 오른 그는 건너편에 솟은 인수봉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전체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 루트가 몇 개나 있는지, 암질은 어떤지 등 많은 질문을 던졌다. 특히 확보용 볼트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얼마나 많이 사용하는지, 루트의 그레이드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등도 궁금해 했다. 지금도 바위타기를 즐기는 현역 클라이머다운 호기심이었다.

이미 잘 알려진대로 크리스 보팅턴은 뛰어난 등반가인 동시에 세계적인 산악 저술가다. 남들이 찾지 않는 어렵고 멋진 산을 골라 오른 것은 물론, 일찍이 그 기록을 책으로 엮어 꾸준히 세상에 내놓았다. 1966년 첫 저서인 <나는 산에 오르기로 결심했다(I Chose to Climb)> 이후, 2005년까지 20여 권의 책을 출판하며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금도 많은 산악인들이 그의 책을 통해 등반과 모험의 세계에 눈을 뜬다.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출간된 책은 등반뿐 아니라 바다, 사막, 극지 등 모든 분야의 모험을 다룬 <퀘스트(Quest)>뿐이다.

직업 산악인의 삶 택해 성공 거둬

▲ 엄홍길 대장과 함께 북한산을 오르고 있는 보닝턴 경.
“77년 오거봉 초등반이 가장 기억에 남아”

12월5일 저녁 7시 서울 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 강연회를 통해 한국 산악인들은 그의 리더십과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 그는 이 자리에서 50여 년 동안 펼친 자신의 등반을 1시간20분여에 걸쳐 축약해 소개했다. 보닝턴이라는 거인의 일생을 조명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우리 산악인들과 크리스 보닝턴의 만남은 잠깐이라도 소중하고 유익했다.

그는 원정대장으로 굵직한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이미 70년대부터 수많은 미답봉을 직접 오른 바 있는 뛰어난 등반가다. 그는 강연회에서 자신에게 전환점이 됐던 것들을 골라 크게 세 부분으로 주제를 나눠 등반을 소개했다. 가장 먼저 꺼낸 이야기는 카라코룸의 오거봉(바인타브락) 초등 스토리다. 그는 이 봉우리를 가장 험난하고 기억에 남는 등반으로 꼽았다.

“오거봉 등반은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대에 함께했던 더그 스코트의 제안으로 시작됐습니다. 6명이라는 작은 팀으로 휴가처럼 생각하고 시작한 등반이었는데, 제가 겪은 가장 고통스러웠던 원정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저는 대규모 원정대 보다는 이런 알파인스타일의 등반을 훨씬 좋아합니다.”

영국에서 오거봉이라 부르는 바인타브락은 이들이 초등한 77년까지 20여 팀이 도전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 봉우리였다. 또한 더그 스코트와 크리스 보닝턴이 오른 뒤에도 2004년까지 재등에 성공한 팀이 없었을 정도로 어려운 봉우리다.

이들은 이 괄목할 만한 등반을 끝내고 하산하는 도중 심각한 사고를 당했다. 스코트는 두 다리가 부러졌고 보닝턴은 여러 대의 갈비뼈를 다친 것이다. 다행스럽게 이들은 며칠 동안의 악전고투 끝에 무사히 하산할 수 있었다. 그가 이 등반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으로 꼽은 이유에는 분명 생사를 넘나든 경험이 한 몫을 했다.

▲ 김창호씨와 등반기를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보닝턴 경.

오거봉 등반에 이어 그는 1981년 중국이 개방한 미답봉 콩구르(Kongur·7700m)에 도전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 봉우리는 당시 세계의 미답봉 가운데 두 번째로 높은 산이었다. 그는 피터 보드맨, 조 태스커, 딕 렌쇼 등과 함께 나흘 동안 설동에서 비박하며 분투한 끝에 정상에 섰다.

영국을 대표하는 최고 등반가들이 함께한 이 등반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그가 대장으로 조직한 에베레스트 북동릉 원정에서 보드맨과 태스커가 사망해 콩구르는 이들의 마지막 등반으로 남게 됐다. 렌쇼 역시 그 이후 타계해 콩구르 초등팀 가운데 생존한 사람은 이제 보닝턴뿐이다. 에베레스트에서 동료를 잃는 아픔을 겪었지만, 그의 등반에 대한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
한국 다시 찾아 인수봉 오르고 싶다”

그는 자신의 최고 등반으로 1983년 인도 가르왈히말의 시블링 초등을 꼽았다. 동네 치과의사인 짐 포더링햄과 단둘이 이룬 성과였다. 그의 표현을 빌면, 시블링은 ‘인수봉처럼 아름다운 화강암벽’이지만, 한사람이 서 있기도 힘든 칼끝 같은 봉우리라고 한다. 그는 순수한 알파인스타일로 오른 시블링 등반을 가장 자랑스럽고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시블링 등반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택하는 그의 등반철학을 잘 보여준 사례라 하겠다.

 
▲ 크리스 보닝턴 경 강연회장 전경. 200여 명의 산악인들이 모여 성황을 이뤘다.

 

강연회 마지막 부분은 다양한 모험과 등반을 동시에 펼친 50대 이후의 활동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는 1983년 남극 빈슨매시프 등정에 이어 1985년 에베레스트를 남동릉으로 올랐다. 세계 최고봉을 가장 어려운 루트로 오른 등반대를 지휘하긴 했지만 그가 직접 에베레스트를 오른 것이 이것이 처음. 미답봉을 추구하는 그의 원칙을 꺾은 첫 등반이었다.

그는 강연회를 마치며 “나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10년 정도 도전을 계속할 것”이라며, “세계 곳곳에 지금까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봉우리들이 산악인의 도전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 산악인 여러분도 도전을 멈추지 않기 바란다”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그는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수행한 업체 관계자들이 놀랄 정도로 처음 보는 한국 산악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주한 영국대사를 만난 자리에서도 ‘산악인들끼리는 어디서나 잘 지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다. 그는 언어의 장벽도 산이라는 공통분모 앞에서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방한 일정 동안 여러 차례 한국을 다시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강연회 다음날 영국대사관에서 열린 버그하우스 런칭 기자회견에서도 이러한 뜻을 재차 밝혔다. 다음번 한국에 올 때는 반드시 인수봉을 오르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북한산 영봉에서 인수봉을 바라보던 그 뜨거운 눈빛의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알피니즘의 전설 크리스 보닝턴과 한국의 인연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인수봉 정상에 선 그의 모습을 기대해 본다. 


- 글 김기환 기자 / 사진 허재성 기자  / 월간 산 [459호] 20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