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설벽의 구도자' '보이테크 쿠르티카' *-

paxlee 2008. 5. 23. 22:08

 

                           '설벽의 구도자' '보이테크 쿠르티카'

히말라야 14봉을 줄줄이 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가셔브룸4봉은 여전히 낯선 존재다. 그것이 험난하지 않다거나 아름답지 않아서가 아니다. 가셔브룸4봉의 해발고도가 8,000m에서 꼭 75m 모자란 7,925m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몇 개의 산 정상에 올랐느냐를 내세우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 산은 관심권 밖에 있다.

 

하지만 진정한 히말라야 등반가들은 누구나 이 산에 대하여 선망과 외경을 가슴 속에 품어왔다.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이 꼽아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어려운 벽’은 바로 가셔브룸4봉의 서벽이었던 까닭이다. 1985년 이 산의 서벽에는 두 명의 산악인이 붙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폴란드의 보이테크 쿠르티카와 호주의 로버트 샤우어다. 멀리 떨어져서 바라볼 때는 그토록 아름다웠던 서벽도 바투 붙어서 싸움을 벌이자니 끔찍한 진실들을 드러냈다. 바위는 형편 없는 푸석바위이거나 얕은 얼음이 끼어 있었고, 얼음벽은 너무 빤질거려 하켄 하나 때려박기도 힘겨웠으며, 설벽의 눈은 너무 깊어 거의 굴을 파다시피 뚫고 들어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 지속되는 수직 빙설벽의 순수 고도차만 무려 2,500m. 당초 5일을 예상하고 꾸렸던 식량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다. 간단히 말해 죽음이 코 앞으로 들이닥친 셈이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올랐다. 용감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서벽을 통과한 그들의 눈 앞에 정상이 빤히 보였다.

 

지옥을 통과해낸 자들에게 그곳에 마저 오르는 일이 어려웠을 리 없다. 서벽의 끝에서부터 정상까지는 평탄한 설릉이 펼쳐져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쿠르티카는 서벽의 끝에서 곧장 하산을 시작했다. 그의 태도는 단호하다. “우리의 목표는 서벽이었지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하산길 역시 극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일주일 가까이 아무 것도 먹지 못했고, 나흘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으며, 끝없는 환각과 환청에 시달린 끝에 무려 11일만에 생환에 성공한 것이다. 세계 등반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등반이었지만 쿠르티카의 평가는 단순하다. “아주 교훈적인 등반이었습니다.”

 

명백히 인간의 한계 저편에서 벌어지는 이런 식의 등반을 통하여 그가 얻는 교훈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쿠르티카는 담담하게 대답한다. “히말라야의 거벽을 알파인 등반방식으로 오를 때 부딪힐 수 있는 모든 위험과 함정에 대한 교훈이죠.” 히말라야 거벽등반은 그 자체로 버겁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조차 두 가지의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전통적인 포위전술로서 고정자일을 깔고 위 아래로 오르내리며 천천히 고도를 높여가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알파인 등반방식으로서 모든 장비와 식량을 지고 오직 앞으로만 전진하는 것이다.

 

그런 방식이 너무 위험하고 고통스럽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쿠르티카가 되돌려줄 대답이란 이미 정해져 있다. “등반이란 고통과 인내의 예술입니다.” 보이테크 쿠르티카는 1947년 폴란드 남부의 작은 마을 스크진카에서 태어났다. 폴란드 산악인들의 모산(母山)으로 꼽히는 타트라 산맥의 북단에 해당하는 곳이다.

 

해발 2,000m 내외의 올망졸망한 산들로 이어진 이 산맥 자락에서 훗날 세계 산악계를 호령하게 되는 위대한 산악인들이 여럿 자라났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이다. 쿠르티카의 아버지는 폴란드에서 널리 알려진 유명 작가였으며 어머니는 따뜻한 성품의 전업주부였다고 한다. 그의 첫번째 해외원정은 1970년에 이루어진 알프스 등반이었다.

 

이때의 등반에서 그랑드조라스와 드뤼에 새로운 루트를 만든 그는 이후 폴란드 산악계를 이끌어갈 젊은 인재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쿠르티카가 ‘알파인 방식으로 히말라야에 오르겠다’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게 된 데에는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원정대원으로서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다. 1974년의 폴란드 로체남벽 원정대와 1976년의 폴란드 K2동릉 원정대에서 그는 소위 ‘포위전술’의 불합리성과 비효율성을 간파해냈던 것이다.

 

“제가 두 세 명으로 이루어진 단촐한 원정대를 꾸리고, 알파인 방식의 속전속결을 추구하는 이유는, 그것이 가장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대규모 원정대의 포위전술이야말로 무모하고 위험하지요.”

이후 쿠르티카는 당대 최고의 산악인들도 혀를 내두를 만한 놀라운 등반들을 여럿 해냈다. 그를 세계 등반계에 널리 알린 것은 1978년의 창가방 남벽 등반과 1980년의 다울라기리 동벽 등반이다.

 

그는 이 등반에서 “스피드야말로 최선의 안전책”이라고 주장하면서 거의 자일도 사용하지 않은 채 속도등반을 펼쳤다. 1983년에 감행한 가셔브룸1-2봉 연속등반, 1984년에 감행한 브로드피크 북봉-중앙봉-주봉 종주등반 등은 그 이전까지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던 쾌거로 꼽힌다. 그가 이런 최첨단 스타일의 등반을 통해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길을 찾는 겁니다. 단순한 길이 아니라 동양철학에서 이야기 하는 ‘도’(道)와 같은 어떤 것이지요. 저는 등반에도 어떤 ‘도’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제 등반 역정은 곧 삶의 도(道) 그것을 찾는 과정이겠지요.”

 

▲ 예지 쿠쿠츠카와의 우정과 이별


"8,000m가 안되더라도 등반 가치 높은 산 무궁무진" 동료 예지 쿠쿠츠카와 다른길을 가다.

 

폴란드를 대표하는 산악인 하면 흔히 예지 쿠쿠츠카를 떠올린다. 라인홀트 메스너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8,000m 산 14개를 모두 완등했으니 그럴 법한 현상이다. 대중적인 지명도 측면에서 본다면 보이테크 쿠르티카가 예지 쿠쿠츠카의 그림자 속에 묻혀버린 형국이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또 다른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두 사람은 거의 동년배지만 등반 경력으로 보면 쿠르티카가 한 수 위다. 실제로 한 동안 쿠쿠츠카는 쿠르티카의 '지휘'를 받으며 등반 활동을 해왔다. 이를테면 쿠르티카는 쿠쿠츠카의 '사수'였던 셈이다.

두 사람이 함께 했던 등반 중 인상적인 것은 1982년의 마칼루 서벽 등반이다. 쿠르티카는 서벽 등반이 실패로 끝나자 미련을 버렸다. 하지만 쿠쿠츠카는 열흘 후 혼자 노멀루트를 통해 정상에 오른다.

 

두 사람의 스타일 차이가 확연하다. 1983년 가셔브룸1-2봉 연속등반과 1984년의 브로드피크 종주등반에서도 두 사람은 최강의 파트너였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이후 쿠쿠츠카는 라인홀트 메스너와의 '히말라얀 레이스'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쿠르티카는 그를 만류하지도 않았지만 함께 참여하지도 않았다.

 

"단지 8,000m급 산이라고 하여 오르고 싶어한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방법이 노멀루트로 오르건 포위전술에 의한 것이건 아무 상관도 없습니까?" 쿠르티카는 누구를 비난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스스로를 설득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8,000m가 안되더라도 등반 가치가 높은 산들은 무궁무진합니다. 제가 찾는 '길'은 아마 그런 이름 없는 산들의 어느 절벽에 있을 겁니다."

                                                [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