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고통 극복 초인사상 산악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paxlee 2008. 6. 4. 22:24

 

        

             고통 극복 초인사상 산악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1844~1900)

니체의 철학사상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책을 읽지 않는다. 그의 책을 즐겨 읽는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평가는 극단적이다. 어떤 이는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논리의 비약이 심해 과격한 수필에 불과하다며 악평을 늘어놓고, 또 다른 이는 기독교 문명의 몰락과 허무주의의 도래 사이에서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한 세기말의 대철학자라고 한껏 추켜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니체의 철학사상이 다름 아닌 산악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니체는 19세기를 마감하는 1900년에 죽었다. 그가 남긴 저서들이 산악인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게 된 것은 20세기 초반과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이었다. 20세기 초반의 알피니즘을 풍미했던 사조는 이른바 ‘단독 등반’이다.

 

당시의 젊은 산악인들은 가이드를 대동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자일조차 사용하지 않고 홀로 까마득한 바위 절벽들을 기어올랐다. 단 한번의 사소한 실수도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지는 끔찍한 등반 형태다. 실제 이 시기에 홀로 산에 오르다 외롭게 죽어간 산악인들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았다. 그리고 훗날 우연히 발견된 그들 시체 곁의 배낭 속에서는 니체의 책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되었다.

 

목숨을 내걸고 단독 등반에 나선 산악인들에게서 염세주의적 경향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현세를 부정하거나 혐오했다. 그들은 인간이란 더 나은 존재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위대한 목표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죽음의 공포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서야 할 그 무엇으로 여겼다.

 

그들은 어쩌면 ‘초인’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대표되는 니체의 초인사상이 과연 이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을까? 니체의 초인사상을 현실 속에서 구현한 것이 과연 단독 등반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이었을까? 논증할 방법은 없다.

 

다만 시체로 발견된 단독 등반자들의 배낭 속에서 그의 책이 자주 발견되곤 했다는 것만은 에누리 없는 사실이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악마’로 취급 받았던 니체가 더욱 혹독한 비난에 시달리게 된 것은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알프스 북벽 초등 경쟁 시기였다. 이 시기의 초등 경쟁은 ‘국가주의적’ 색채가 짙었다. 당시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이 경쟁을 주도해 나갔던 민족은 독일인들이다.

 

그리고 그들을 총지휘했던 히틀러가 니체의 초인사상을 정치 이데올로기로 변질시켜 자신을 정당화하는데 이용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19세기의 마지막 해에 죽어버린 니체가 만약 후대에 벌어진 이런 사태들에 대하여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본의와는 무관하게 ‘죽음을 무릅쓴 단독 등반’과 ‘국가주의적 등반 경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니체는 과연살아 생전에 등산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나 있을까? 있다. 그것도 여러 해에 걸쳐 지속적으로 등산을 즐겼다. 전문 산악인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적어도 ‘등산 마니아’ 정도는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니체는 평생을 불행하게 살다 간 철학자다. 불과 스물다섯 살의 나이에 스위스 바젤대학의 교수가 되었을 만큼 뛰어난 학문적 역량을 갖추었지만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1870년에 벌어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평생 편두통과 정신착란에 시달렸다. 게다가 ‘추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못 생긴 외모 탓인지 여인들과의 사랑에서도 언제나 쓰라린 상처만을 맛보곤 했다. 삶에 너무도 지친 그가 교수직에서 사퇴하고 이곳 저곳을 여행하다가 결국 안주한 곳이 바로 스위스 알프스 엥가딘 지역에 있는 질스-마리아라고 하는 작은 마을이다.

 

유명한 산악관광지 생모리츠에서 불과 수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이 마을은 해발 1,800m의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니체는 1879년부터 8년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요양과 집필에 몰두하며 스스로를 치료하였다. 훗날 그의 대표작들로 꼽히는 ‘즐거운 학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을 넘어서’, ‘도덕의 계보’, ‘우상의 황혼’의 전부 혹은 핵심적인 대목들은 모두 이곳에서 쓰여진 것이다.

 

그가 이곳에 머물면서 자주 올랐던 산들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코바치봉, 라그레브봉, 데 라 마그나봉 등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코바치봉(3,451m)은 그가 가장 즐겨 올랐던 산이어서 현지에서는 ‘니체의 산’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리운다. 이를테면 그는 이 산을 오르내리며 ‘차라투스트라’와 대화를 나눴던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를 완성하고 이곳을 떠난 니체는 그 직후 심각한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켜 토리노 광장에서 졸도한다.

 

이후 바이마르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삶은 다시 처참한 불행의 연속이었다. 결국 그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기간은 알프스 자락 엥가딘에 머물던 8년뿐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가 좀 더 일찍 알프스에 들어와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신은 죽었다고 말했던 니체도 죽었다. 그의 책을 탐독하며 단독 등반에 나섰던 이름 없는 젊은이들도 죽었다. 그의 사상을 핑계 삼아 야만적인 전쟁에 광분하였던 나치주의자들도 죽었다. 영원한 것은 오직 산뿐이다.

 

● 니체의 저서에 나오는 등산 비유 문장들

 

“내 글의 공기를 호흡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그것이 높은 곳의 공기, 기운 찬 공기라는 것을 안다. 사람들은 그 공기를 느낄 수 있도록 갈고 닦아야 한다. 얼음은 가까이 있고 홀로 있음은 처절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햇살 속에 얼마나 평화롭게 자리 잡고 있는가! 숨쉬기는 또 얼마나 자유로운가! 발 밑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느끼는가! 철학은 얼음으로 뒤덮인 고산에서 자발적으로 사는 것이리라.”(‘이 사람을 보라’)

 

“(나의 철학을 이해하려면) 이 시대에 조우하게 되는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정신이 필요하다. 비유적인 의미로 높은 곳의 보다 희박한 공기에, 그리고 겨울여행과 얼음과 산에 순응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도덕의 계보학’) “진실이라는 산맥을 타는 일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오늘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든지, 그렇지 않다면 내일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힘을 단련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