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담양 관방제림. 홍수방지를 위해 만든 숲이 지금은 쉼터가 되었다. 숲과 인간, 과거와 미래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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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0년간 인류가 올린 기온상승은 자연적으로는 1만 년 이상의 변화에 해당한다. 자연도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기후변화는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인간이란 단 한 종에 의해 촉발된다는 것이 문제다. 생물의 진화는 보통 1만 년 이상이 걸린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인류가 촉진한 변화에 생물다양성이 건강하게 적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와 같이 생태계의 안정성이 점점 약해지고, 기온이 올라가면 병충해도 만연한다. 과거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대벌레의 피해가 남쪽에서 북쪽과 내륙지역으로 확산되고, 아열대성 수목병균의 하나인 푸사리움가지마름병도 리기다소나무에 피해를 주며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우리 인간이 지구 기온을 올리고, 무역이나 여행으로 생태계의 질서를 교란할수록 인간도 살기 어려워진다. 동물도 서로 맞추며 살기 어렵다. 네덜란드에서는 지난 23년간 봄 기온이 올라가 곤충은 9일 일찍 자란 반면, 박새의 번식시기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새 새끼가 먹이를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시기와 곤충량의 최성기가 빗나가게 된 것이다. 이렇게 재편되는 소용돌이 속에서는 인간도 제거될 수 있다. 숲의 미래에 인류의 생존이 달려 있는 것이다.
문제가 더 심각한 것은 이런 변화를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기온상승에 따라 나무들이 단계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환경은 변해도 오래 버티다가 갑자기 병해충이 창궐하거나 집단적으로 고사하는 것이 문제다. 숲이 버티는 것을 보며 안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죽어나갈 때 후회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기후변화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감지하기에는 느리지만 축적되면 엄청난 재앙을 초래하는 냉혹한 현실이다.
자연은 교향곡, 멋대로 부리면 깨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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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소빙기에 접어든 17세기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심각한 기상변동을 겪었다는 기록이 많다. 숲을 신성하게 여기며 신화를 꿈꾼 우리 조상들은 이런 재앙에 맞서 숲을 조성하며 삶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천연기념물 제366호로 지정된 담양의 관방제림이다. 영산강이 담양을 지나며 큰물이 자주 나자 조선 인조 26년(1648) 당시 도호부사가 둑을 쌓고 나무를 심었다. 이런 전통 마을숲은 전국적으로 약 500군데가 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 선조들은 기후변화에 직면하여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지혜롭게 대처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주거지를 정할 때 강풍과 홍수를 피할 수 있고 양지바른 곳을 찾았다. 작은 지형적인 결함은 나무를 심어서 보완하였다. 지금 우리가 마을 숲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런 산물이다. 새마을운동과 도시화로 인해 무수히 파괴되었지만 지금도 전국에 수백 곳이 남아 있다.
그 중 천연기념물 제150호인 경남 남해의 물건리 방풍림은 태풍 매미 뿐만 아니라 과거 몇 번의 태풍을 맞아서도 굳건히 버티었다. 물론 몇 그루는 바람을 막다가 넘어갔지만, 아직도 수백 그루가 지키고 서 있다. 더구나 이 나무는 쓰러질 때까지 바람을 막았기 때문에 일을 하다가 넘어진 것이다. 그래서 다른 나무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고, 농지와 마을이 건재할 수 있었다.
숲의 미래에 개체는 중요하지 않다. 한 나무가 지키다가 쓰러지면 다시 다음 나무가 지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적 격랑이 일던 민주화 시대에 어느 분은 아름다운 경구를 우리에게 선사했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손잡고) 숲이 되어 지키자고.” 생태학적인 차원에서는 생물은 개체가 아니라 개체군의 존속으로 존재가치를 드러낸다.
- ▲ 잡초의 화원. 이들이 먼저 수고하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숲이 만들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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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숲은 하늘과 땅이 서로 사랑한 결과다. 하늘이 햇볕을 쪼이고 땅이 물을 내놓아 서로 사랑하는 과정에서 나무들이 자라는 것이다. 나무는 물이 태양을 향해 솟아오르는 길이면서, 태양의 힘이 땅속으로 뻗어 들어갈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나무가 곧은 것이나 굽은 것이나 모두 그 나름대로 그리움이 만나는 길이다. 이 그리움은 독선과 욕심을 가리고 생명의 공간을 연출한다. 너무 밝은 태양도 물을 받으면서 생명의 하늘이 될 수 있고, 어둡고 축축한 땅도 햇볕이 스며들어 생명의 대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온실가스와 같은 물리적인 요소만으로 기후를 설명할 수는 없다. 기후란 기본적으로는 하늘과 땅의 끝없는 사랑의 움직임이지만, 그 사이에 태어난 생물이 이어줌으로써 안정되는 시스템인 것이다. 부부가 처음 만나 사랑을 하고 자식을 낳지만, 나중에는 자식이 부부를 이어주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구 차원으로 보면 나무뿐만 아니라 여러 권역이 관계된다.
그래서 기후변화협약에서는 기후시스템을 대기권, 수권(水圈), 생물권, 지질권, 그리고 서로간의 상호작용의 총합으로 정의했다. 이런 기후시스템을 안정시키는 것은 여러 세대와 여러 집안이 모여서 이루고 있는 사회 시스템의 안정화와 같은 이치를 따른다. 기후변화에 대비하고 숲의 미래를 밝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전통과학을 되살리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천지인(天地人), 하늘과 땅의 사랑은 사람을 통해서도 펼쳐져야 한다.
역사와 생활에서 축적된 기억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고 있는 세계의 통일성을 형성한다. 우리가 정체성을 묻는 것은 세계를 닫는 것이 아니라 세계로 나아갈 문을 다는 것이다. 신화는 막힌 것이 아니라 인문의 틀을 보여주고, 과거와 미래는 양끝이 아니라 사회와 숲에서 함께 맥동치는 우주의 숨결이다.
이런 숲의 미래를 꿈꾸기 위해서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사람의 힘이 아무리 세도 사람은 자연을 엮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거미줄 한 올에 불과하며, 생태계의 안과 밖은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한 행동은 모두 우리에게 되돌아온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자신과 우주에 대해서 성찰하자. 이웃과 대화하고 나무와 대화하자. 이 때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나 혼자 고집을 부려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반증 가능하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라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또한 이름 없는 것들의 힘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나무에 비료와 물을 주지만 이름 없는 것들이 무수히 관계하고 나서야 나무 한 그루가 제대로 클 수 있는 것이다.
숲은 교향곡이다. 여기서 자기 멋대로 하면 전체가 깨진다. 적응할 줄 알아야 한다. 이제 숲에 가보자. 이미 무수히 많은 사람이 와 있을 것이다. 목재나 신물질과 같은 경제적 가치를 찾는 자, 업무에서 벗어나 휴식을 원하는 자, 삶을 묻는 자, 이렇듯 숲의 미래는 우리 사회를 연결해 준다. 그래서 나무를 심는 것은 미래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즐기는 것이다. 거두기만 하는 자는 키우는 자의 기쁨을 모른다. 과거의 숲이 재산이었다면, 미래의 숲은 아름다운 삶을 위한 기회의 공간이다.
/ 신준환 국립산림과학원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