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가 퍼온글

-* 숲은 자연의 여러 과정이 어울린 결과물 *-

paxlee 2008. 6. 29. 18:05

          숲은 자연의 여러 과정이 어울린 결과물

 

숲은 미래를 싣고 있는 현실이라는 말이 있다. 또한 거대국가 미국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국가경쟁력이 가장 강한 나라인 핀란드의 총리 에스코 아호는 미래를 내다보는 정치지도자의 길을 숲을 가꾸는 사람에 비유한 적이 있다. 이렇듯 숲을 떠올리면 우리는 당연한 듯이 미래를 연상한다. 그만큼 미래와 숲은 개념적으로 잘 어울리는 관계를 맺고 있다.


▲ 멧돼지가 파헤친 흔적.

하지만 과연 미래란 무엇인가? 우리는 쉽게 과거, 현재, 미래라고 구분하면서 이들을 선형으로 연결하지만, 곰곰이 따지고 보면 그렇게 쉽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과거나 미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음미하는 과거는 이미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재평가된 과거, 즉 현재화된 과거다. 미래라는 것도 지금 가늠해 볼 수 있는 현재, 즉 살아 있는 현재가 뻗어갈 전망일 뿐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과거나 미래는 모두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억이 펼쳐내는 세계인 것이다.


그런데 숲은 공간에 기억이 펼쳐진 것이다. 우주의 기억인 빛, 지구의 기억인 지질, 생명의 기억인 종자, 사람의 기억인 문화가 관계를 맺어서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 숲이다. 숲에서 과거의 의미는 우주와 지구의 기억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미래의 의미는 사람에게 있다. 우리가 숲에 대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가에 따라 앞으로 숲이 전개될 방향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사람이 숲을 바꾼 경우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과거에는 땔감으로 낙엽을 긁어모은 결과 토양이 노출되어 솔숲이 번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으나 이제 산에 낙엽을 방치하여 어린 소나무들이 자라지 못하고 있다. 지금 산에 가면 사람들이 범이나 늑대를 멸종시킨 결과 멧돼지가 번성하여 곳곳에 숲 바닥을 파헤치고 다닌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런 곳에서는 갱신되는 나무들이 달라진다. 그래서 범이나 늑대를 잡은 것이 숲을 변화시킨다.


앞으로는 기후변화 등 인위적인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숲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도 숲은 변화될 것이다. 인간은 미래를 고민하는 동물이다. 지금 우리의 생각은 미래의 지평이 반영된 것이기 때문에 숲의 미래와 숲에 대한 생각은 서로 영향을 미치며 전개된다. 이렇듯 숲은 다채로운 전통매듭처럼 자연과정과 인문과정이 서로 엮어낸 것이다.


숲의 미래에 가장 중요한 핵심어는 무엇일까? 아마 사람이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앞에서 밝힌 이유 외에도 인간의 생존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숲의 미래 과제는 사람이 느끼는 아름다움이란 물음이 먼저 올 것으로 본다. 필자가 공부할 때, 인공림은 아름답지 않고 자연림만 아름답다거나, 단순림은 아름답지 않고 혼효림만 아름답다는 주장이 많았다. 그러나 한대지방의 타이가 숲은 한 수종으로 일제히 펼쳐져 있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감탄해 마지않는 아름다움을 선사하는가!


▲ (좌)우주목(원주시 신림면 성남리 성황림).(우)마을숲에 제사를 지내는 나무.

나무 없어지면 결국 인간도 멸종


필자는 이런 의문을 지울 수가 없어서 과연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황금비로 시작해서 고전주의, 자연주의, 낭만주의 등등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보고 나름대로 정리가 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예수 사진에 오줌을 뿌리고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고 하는 현대미술에 와서는 모든 것이 흐트러졌다.


이런 방황은 결국 나를 철학세계로 인도했다. 그렇게 헤매던 중 예술 경험의 진리문제를 다룬 한스-게오르크 가다머의 책을 읽으며 아름다움이란 누가 선언한 형식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지평을 여는 자유로운 추구의 한 행위에서 얻어진다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 숲을 공부하는 것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진선미는 우리가 따로 따로 말하지만 다른 길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뿌리의 다른 표정일 뿐이라는, 다시 말해서 한 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모습의 차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숲의 아름다움은 숲을 공부하면서 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같이 진동하는 공간, 진선미의 다양한 모습, 이것이 아름다운 숲의 현실이다.


아름다운 숲의 미래는 어울림에 있다. 지금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숲도 자연의 여러 과정이 어울린 결과물이다. 우주의 빛이 대지의 힘과 어울리면서 생명을 잉태하였고, 생명들이 어울리면서 숲을 창조하였다. 이렇게 생긴 나무는 다시 빛과 대지가 사랑할 수 있는 통로가 되고, 뒤늦게 진화한 인간은 나무를 통해 나의 소원을 우주의 중심과 연결시킨다. 선사시대 세계 곳곳의 우주목(宇宙木)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신단수도 그렇게 우주와 세상을 연결하고 사람의 소원을 받아주고 원망을 풀어주었다.


어찌 제사장인 단군뿐이었으랴! 이름이 남지 않은 백성들의 기도도 극진하였으리라. 태양과 대지가 어울리듯이 군왕과 백성이 어울린다. 신화에서는 이를 천신과 지신으로, 또는 천신과 수신으로 기리며 신성한 숲을 찬양한 것이다.


이래서 아름다운 숲의 미래는 과거의 신화와 어울린다.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면 어울리기 어려워 보이는 것도 기억의 공간으로 불러내면 같이 짝을 짓는 것이다. 신화는 기억을 생산하는 우리 내면의식의 원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함석헌 선생도 “신화는 있었던 일이 아니요, 있어야 할 일이다. …중략…신화는 이상이다. 이상이므로 처음부터 있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한다. 신화를 가진 숲은 지금까지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신화를 가진 숲의 미래는 아름답고 건강하다.
 

숲 통해 태풍 막은 조상 지혜 배워야


숲의 미래가 우리 인간 때문에 불안하다. 인간이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여 지구 기온이 올라가서 나무들이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다. 산업혁명 이전에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280ppm이었으나 2005년에는 379ppm으로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지난 100년간 전 지구의 평균 온도는 0.74℃ 상승했다. 우리나라는 두 배가 넘는 1.5℃나 올랐다.


기온이 1℃ 올라가면 현재의 기후에 적응한 숲은 북쪽으로 약 150km를 이동해야 하지만, 종자가 작아서 이동속도가 빠른 식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이 산악이 많은 지형에서는 산꼭대기로 올라간 식물이 더 이상 올라갈 곳은 없고, 멀리 건너뛸 수도 없어 대부분 절멸할 위기에 처할 우려가 있다. 구상나무, 가문비나무, 분비나무와 같이 남한에서는 높은 산에서만 사는 나무는 특히 더 위험하다.


야생화도 위험하다. 얼레지나 복수초, 한계령풀 같이 숲 바닥에서 나뭇잎이 크기 전에 잎을 내고 광합성을 하여 에너지를 만든 후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나뭇잎이 자라면 땅 속에서 잠자는 식물은 견디기 어렵다. 기온이 1℃ 상승하면 나뭇잎이 피는 시기는 1주일 정도 빨라진다. 만약 나뭇잎이 빨리 자라서 그늘을 만들면 이들은 그만큼 에너지를 만들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러면 이들의 개체군은 점점 줄게 되고, 이들과 어울려 사는 곤충이나 작은 생물들 역시 살아남기 어려워진다.


나뭇잎이 빨리 자라는 데 적응해서 야생화가 자신들의 꽃을 빨리 피워도 문제는 여전하다. 이런 꽃에서 꿀이나 꽃가루를 얻는 곤충이 이만큼 빨리 나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식물 역시 꽃가루받이를 하지 못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고 생명의 그물은 점점 끊어지게 될 것이다.

▲ 담양 관방제림. 홍수방지를 위해 만든 숲이 지금은 쉼터가 되었다. 숲과 인간, 과거와 미래의 관계.

지난 100년간 인류가 올린 기온상승은 자연적으로는 1만 년 이상의 변화에 해당한다. 자연도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기후변화는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인간이란 단 한 종에 의해 촉발된다는 것이 문제다. 생물의 진화는 보통 1만 년 이상이 걸린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인류가 촉진한 변화에 생물다양성이 건강하게 적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와 같이 생태계의 안정성이 점점 약해지고, 기온이 올라가면 병충해도 만연한다. 과거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대벌레의 피해가 남쪽에서 북쪽과 내륙지역으로 확산되고, 아열대성 수목병균의 하나인 푸사리움가지마름병도 리기다소나무에 피해를 주며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우리 인간이 지구 기온을 올리고, 무역이나 여행으로 생태계의 질서를 교란할수록 인간도 살기 어려워진다. 동물도 서로 맞추며 살기 어렵다. 네덜란드에서는 지난 23년간 봄 기온이 올라가 곤충은 9일 일찍 자란 반면, 박새의 번식시기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새 새끼가 먹이를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시기와 곤충량의 최성기가 빗나가게 된 것이다. 이렇게 재편되는 소용돌이 속에서는 인간도 제거될 수 있다. 숲의 미래에 인류의 생존이 달려 있는 것이다.


문제가 더 심각한 것은 이런 변화를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기온상승에 따라 나무들이 단계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환경은 변해도 오래 버티다가 갑자기 병해충이 창궐하거나 집단적으로 고사하는 것이 문제다. 숲이 버티는 것을 보며 안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죽어나갈 때 후회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기후변화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감지하기에는 느리지만 축적되면 엄청난 재앙을 초래하는 냉혹한 현실이다. 
 

자연은 교향곡, 멋대로 부리면 깨져


세계적으로 소빙기에 접어든 17세기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심각한 기상변동을 겪었다는 기록이 많다. 숲을 신성하게 여기며 신화를 꿈꾼 우리 조상들은 이런 재앙에 맞서 숲을 조성하며 삶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천연기념물 제366호로 지정된 담양의 관방제림이다. 영산강이 담양을 지나며 큰물이 자주 나자 조선 인조 26년(1648) 당시 도호부사가 둑을 쌓고 나무를 심었다. 이런 전통 마을숲은 전국적으로 약 500군데가 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 선조들은 기후변화에 직면하여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지혜롭게 대처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주거지를 정할 때 강풍과 홍수를 피할 수 있고 양지바른 곳을 찾았다. 작은 지형적인 결함은 나무를 심어서 보완하였다. 지금 우리가 마을 숲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런 산물이다. 새마을운동과 도시화로 인해 무수히 파괴되었지만 지금도 전국에 수백 곳이 남아 있다.


그 중 천연기념물 제150호인 경남 남해의 물건리 방풍림은 태풍 매미 뿐만 아니라 과거 몇 번의 태풍을 맞아서도 굳건히 버티었다. 물론 몇 그루는 바람을 막다가 넘어갔지만, 아직도 수백 그루가 지키고 서 있다. 더구나 이 나무는 쓰러질 때까지 바람을 막았기 때문에 일을 하다가 넘어진 것이다. 그래서 다른 나무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고, 농지와 마을이 건재할 수 있었다.


숲의 미래에 개체는 중요하지 않다. 한 나무가 지키다가 쓰러지면 다시 다음 나무가 지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적 격랑이 일던 민주화 시대에 어느 분은 아름다운 경구를 우리에게 선사했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손잡고) 숲이 되어 지키자고.” 생태학적인 차원에서는 생물은 개체가 아니라 개체군의 존속으로 존재가치를 드러낸다.

▲ 잡초의 화원. 이들이 먼저 수고하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숲이 만들어질 수 없다.

이런 숲은 하늘과 땅이 서로 사랑한 결과다. 하늘이 햇볕을 쪼이고 땅이 물을 내놓아 서로 사랑하는 과정에서 나무들이 자라는 것이다. 나무는 물이 태양을 향해 솟아오르는 길이면서, 태양의 힘이 땅속으로 뻗어 들어갈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나무가 곧은 것이나 굽은 것이나 모두 그 나름대로 그리움이 만나는 길이다. 이 그리움은 독선과 욕심을 가리고 생명의 공간을 연출한다. 너무 밝은 태양도 물을 받으면서 생명의 하늘이 될 수 있고, 어둡고 축축한 땅도 햇볕이 스며들어 생명의 대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온실가스와 같은 물리적인 요소만으로 기후를 설명할 수는 없다. 기후란 기본적으로는 하늘과 땅의 끝없는 사랑의 움직임이지만, 그 사이에 태어난 생물이 이어줌으로써 안정되는 시스템인 것이다. 부부가 처음 만나 사랑을 하고 자식을 낳지만, 나중에는 자식이 부부를 이어주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구 차원으로 보면 나무뿐만 아니라 여러 권역이 관계된다.


그래서 기후변화협약에서는 기후시스템을 대기권, 수권(水圈), 생물권, 지질권, 그리고 서로간의 상호작용의 총합으로 정의했다. 이런 기후시스템을 안정시키는 것은 여러 세대와 여러 집안이 모여서 이루고 있는 사회 시스템의 안정화와 같은 이치를 따른다. 기후변화에 대비하고 숲의 미래를 밝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전통과학을 되살리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천지인(天地人), 하늘과 땅의 사랑은 사람을 통해서도 펼쳐져야 한다.


역사와 생활에서 축적된 기억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고 있는 세계의 통일성을 형성한다. 우리가 정체성을 묻는 것은 세계를 닫는 것이 아니라 세계로 나아갈 문을 다는 것이다. 신화는 막힌 것이 아니라 인문의 틀을 보여주고, 과거와 미래는 양끝이 아니라 사회와 숲에서 함께 맥동치는 우주의 숨결이다.


이런 숲의 미래를 꿈꾸기 위해서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사람의 힘이 아무리 세도 사람은 자연을 엮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거미줄 한 올에 불과하며, 생태계의 안과 밖은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한 행동은 모두 우리에게 되돌아온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자신과 우주에 대해서 성찰하자. 이웃과 대화하고 나무와 대화하자. 이 때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나 혼자 고집을 부려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반증 가능하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라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또한 이름 없는 것들의 힘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나무에 비료와 물을 주지만 이름 없는 것들이 무수히 관계하고 나서야 나무 한 그루가 제대로 클 수 있는 것이다.


숲은 교향곡이다. 여기서 자기 멋대로 하면 전체가 깨진다. 적응할 줄 알아야 한다. 이제 숲에 가보자. 이미 무수히 많은 사람이 와 있을 것이다. 목재나 신물질과 같은 경제적 가치를 찾는 자, 업무에서 벗어나 휴식을 원하는 자, 삶을 묻는 자, 이렇듯 숲의 미래는 우리 사회를 연결해 준다. 그래서 나무를 심는 것은 미래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즐기는 것이다. 거두기만 하는 자는 키우는 자의 기쁨을 모른다. 과거의 숲이 재산이었다면, 미래의 숲은 아름다운 삶을 위한 기회의 공간이다.  

 / 신준환 국립산림과학원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