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가 퍼온글

-* 울릉도 & 독도 [1] *-

paxlee 2008. 8. 3. 17:29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울릉도 & 독도

                   대한민국 동쪽 끄트머리를 지키는 화산섬 형제
새벽 4시, 묵호항. 하늘엔 별이 총총하다. 풍랑주의보는 해제되었다. 바람이 수그러들긴 했어도 파도는 여전히 높다. 어제는 풍랑주의보 때문에 울릉도행 오전 10시 한겨레호가 뜨지 않았다. 발이 묶인 것이다. 2시간 뒤? 3시간 뒤? 풍랑주의보가 언제 해제될지 모르는 상황. 여객선터미널 근처에서 멀리 떠나지 못하고 가까운 추암해변 등을 얼쩡거리다 그렇게 하루를 꼬박 보내고, 어두컴컴한 새벽에 배를 타러 묵호항에 나온 것이다. 아무리 그렇지만, 군사훈련도 아닌데, 새벽 4시 출항이라니!

▲ 망향봉에서 내려다본 울릉도 풍광. 동해 한가운데에서 독도와 함께 대한민국 동쪽을 지키는 울릉도는 250만 년 전 화산 폭발로 생겨난 화산섬이다.
섬 여행은 기상상태가 좌우한다. 안개와 파도는 배를 부두에 묶어놓는 심술쟁이 형제다. 특히 파도는 고약한 녀석이다. 이 녀석이 몸부림치면 출항은 연기되고, 혹 부두를 떠났다 해도 배 안에서 내내 뱃멀미로 고통을 받아야 한다. 섬에 도착해서도 울렁증과 어지럼증으로 숙소에 반나절은 누워있어야 정신을 차릴 수 있다. 특히 울릉도와 독도는 동해의 먼 바다에 외롭게 떠있기 때문에 모든 게 기상상태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묵호에서 울릉도까지는 161km. 동국여지승람 등 옛기록을 보면 예전엔 순풍에 돛을 달고 울릉도까지 이틀이 걸린 거리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포항에서 7~8시간이 걸렸다. 오늘 길손이 겨우 잡아탄 한겨레호는 시속 41노트(1kn=1,852m)로 달리니 2시간20분 뒤면 울릉도에 도착할 수 있다. 거기에 배 흔들림을 잡아주는 멀미방지장치가 돼 있다고 하니, “세월 참 좋아졌다”는 소리가 나올 법하다.

▲ 울릉도 행남등대에서 저동항으로 이어지는 해안 산책로. 가파른 해벽을 따라가며 해안 절경을 즐기는 재미가 쏠쏠하다. (왼쪽) / 도동항에서 행남등대로 이어지는 해안 산책로의 해식 동굴. 이 구간에선 이런 해식 동굴을 여러 개 지난다. (오른쪽)
하지만 이렇게 파도가 심한 날엔 멀미방지장치도 그다지 소용이 없는가 보다. 승객들은 대부분 비닐봉지에 머리를 박고 기도를 한다. 길손도 마찬가지. 한겨레호는 예정대로 오전 6시20분에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렇게 뱃멀미에 시달렸는데, 비록 양귀비가 눈앞에 서있다 해도 어찌 손을 내밀 수 있겠는가. 도동약수공원에서 톡 쏘는 탄산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나니 그제야 울릉도의 아름다운 풍광이 길손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독도와 더불어 대한민국 동쪽을 지키는
든든한 수문장인 울릉도는 동해의 거센 파도와 바닷바람이 빚은 화산섬이다. 역사를 간단히 짚어보면, 지구는 46억 년 전 태양계의 수많은 미행성들이 충돌해 뭉치면서 탄생했고, 불덩어리였던 원시지구가 점점 식으면서 44억 년쯤 전엔 육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29억 년 전 한반도가 태어났고, 오늘날처럼 자리가 잡힌 것은 1억5천만 년쯤 전이다. 당시 일본열도는 한반도에 붙어 있었다. 그러다 2천5백만 년쯤 전 일본열도가 떨어져나가면서 동해가 열렸다. 그리고 드디어 450만 년 전부터 250만 년 전 사이에 바다 속 화산이 폭발해 독도가 탄생했고, 250만 년 전엔 역시 화산폭발로 울릉도가 생겨났다. 울릉도·독도 형제 중 나이로 보면 독도가 형님인 셈이다.
▲ 망향봉에 설치되어 있는 독도전망대. 날이 맑으면 독도가 육안으로도 보인다. 우리 조상은 예로부터 독도를 울릉도에 속한 섬으로 여겨왔다.
그렇다면 현재 울릉도에서 가장 오래된 생명체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도동항 가파른 바위벼랑에서 뱃멀미에 지친 길손을 내려다보던 향나무다. 높이 4m, 둘레 2m에 이르는 이 향나무의 수령은 2,000~2,500년으로 짐작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5,000~6,000년 정도로 내다보기도 한다. 어쨌든 울릉도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이 향나무는 울릉도에 사람이 살기 이전부터 척박한 암벽에 뿌리를 내리고 오가는 이들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사람들은 언제부터 울릉도에 살기 시작했을까. 학자들은 청동기시대나 철기시대 초기부터 울릉도에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현포·남서·저동 등에서 고인돌·무문토기·갈돌·갈판 등이 발견되었는데,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하고 1997년 출간한 ‘울릉도 지표조사 보고서’를 보면 울릉도에서 발견된 무문토기·신라토기·적갈색 토기 3가지 가운데, 무문토기는 기원전 3세기경의 것이고, 신라 토기는 6세기 중엽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최소 2,300년 이전부터 울릉도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역사적인 기록은 512년(신라 지증왕 13) 강릉의 군주 이사부가 우산국(울릉도)을 정복하여 신라에 복속시키면서부터 등장한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적혀있는 기록을 정리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 톡 쏘는 맛이 일품인 도동약수. 옛날 왜군과 싸우던 장군의 갑옷에서 흘러내린 쇳물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왼쪽) / 도동약수공원에 세워져 있는 안용복장군의 기념비. 동래 출신인 안용복장군은 조선시대 울릉도와 독도를 드나들던 일본인들을 쫓아낸 분이다. (오른쪽)
‘강릉 동쪽 바다에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곳에 울릉도가 있다. 이 섬은 둘레 2만6,730보다. 이 섬에 사는 오랑캐들은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몹시 교만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이에 왕은 이사부 장군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했다. 이 때 이사부는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에 싣고 위협했다. “너희가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놓아 버리겠다.” 이에 오랑캐들은 두려워하여 항복했다.’

예전에 일본인들은 이사부 기록을 허구라고 몰아세웠으나 이건 분명히 역사적 사실이다. 지금까지 연구한 성과를 보면, 한반도 해안지방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우산국은 울릉도와 독도,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동해 바다를 기반으로 살아가던 소규모의 해양왕국이다. 우산국의 도읍지는 울릉도 북동쪽, 지금의 북면 현포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곳에 촌락과 7개의 석불과 석탑 등이 있었고, 19세기 말 개척 때만 해도 석실고분이 무려 40여 기가 있었다. 지금도 10여 기의 고분이 남아있다.

우산국은 본토에서 전해진 무문토기와 철기문화를 발전시키고 해양왕국답게 발전된 항해술로 동해안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독도는 울릉도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울릉도와 독도는 모두 우산국의 영역이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 (1) 저동항 풍경. 도동항이 관광지 냄새가 물씬 풍기는 항구라면 고깃배 드나드는 저동항은 울릉도 어민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속살 같은 항구다. / (2) 항구 작은 덕장에 내걸린 오징어. 본격 오징어철이 되면 울릉도 해안은 어디를 가나 새하얀 오징어로 뒤덮인다. / (3) 오징어 조형물과 뾰족 솟구친 송곳산이 돋보이는 추산마을 풍경.
 
이렇듯 사서에 등장한 전투는 지금의 서면소재지 해안가에 있는 사자바위와 투구바위 전설로 남아 지나는 이들의 눈길을 끈다. 이렇게 신라가 우산국을 정벌한 이후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한 주변 도서는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대한민국까지 줄곧 우리의 영토로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런데, 여말선초에 왜구의 침략이 심해지자 위정자들은 공도정책(空島政策), 말 그대로 섬을 비우는 정책을 쓰게 된다.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백성을 지키기 위한 소극적인 방편이었다. 조선 건국 후에도 한동안 이 정책은 유지되었다. 그러다 큰 섬들은 성종(재위 1469-1494)대를 전후하여 다시 주민이 거주하기 시작하였지만, 작고 외딴 섬들은 16~17세기에야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었다. 울릉도 공도정책도 이런 흐름의 하나였다.
▲ 울릉도는 평균 경사도가 25°나 되기 때문에 가파른 밭에서 경작하는 광경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가파른 더덕밭 너머로 펼쳐진 바다가 더욱 평평해 보인다.
 
1416년(태종 16) 조정은 울릉도에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하는 공도정책을 발표하게 된다. 당시 울릉도엔 고려 말 부패와 정권의 불안정으로 가혹한 세금을 피해온 사람들 수백 명이 살고 있었다. 조정에선 이들을 본토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당시 기록을 보면 울릉도 사람들은 송환에 순순히 응하지 않았던 것 같다. 1417년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임명된 김인우는 울릉도에서 15가구 86명의 주민들이 있음을 발견했으나 단 3명만 설득할 수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 1425년(세종 7)에 역시 김인우를 다시 파견해 주민들을 불러들였다. 이어 1438년(세종 20)에도 66명을 송환했다. 뿐만 아니라 1441년엔 울릉도를 수색해 다시 70여 명을 송환했다.
 
이 과정에 주모자는 교수형에 처하고 나머지는 노복으로 삼을 정도로 울릉도 공도정책은 강경했다. 이후 송환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정기적으로 배를 띄워 울릉도 주변을 감시했다. 이와 더불어 삼봉도(독도)에도 백성들이 숨어산다는 소문이 돌자 그곳을 탐색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울릉도 서쪽 끄트머리에 자리한 태하엔 성하신당(聖霞神堂)이라는 해신당이 있는데, 여기엔 공도정책 시기에 탄생한 한 편의 슬픈 전설이 전한다.
▲ (1) 울릉읍 도동리에 있는 봉래폭포. 원시림 사이로 떨어지는 이 폭포의 하루 유량은 3,000톤이 넘어 울릉읍 주민들의 귀중한 상수원으로 쓰이고 있다. / (2) 울릉도 개척민들의 목숨을 이어줬다는 명이(산마늘). 예전엔 산기슭에서 흔히 볼 수 있었으나 요즘엔 높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 (3) 태하동 성하신당에 모셔져 있는 동남동녀상. 조선 초기 공도정책을 쓸 때 희생당한 소년소녀의 전설이 서려있다.
 
조선 태종 때 김인우는 안무사를 명받아 울릉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기 위해 병선 2척을 이끌고 이곳 태하에 도착했다. 안무사는 울릉도를 수색해 주민들을 찾아냈다. 이윽고 울릉도를 떠나기 전날 밤, 잠을 자는데 안무사의 꿈에 해신이 나타나 말했다.

“너의 일행 중에 동남동녀 2명을 두고 떠나거라.”

그러나 안무사는 개의치 않고 이튿날 아침 출항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갑자기 거센 풍랑이 일었다. 풍랑은 이튿날도 계속되었고, 날이 갈수록 점점 심해졌다. 안무사는 문득 며칠 전 꿈이 떠올랐다. 주민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보니 예쁘장한 소년 소녀가 눈에 띄었다. 안무사는 머뭇거리다 말했다.

“너희들은 지금 이 길로 내가 머물던 숙소로 올라가 필묵을 가져오너라.”
▲ 노인봉이 굽어보고 있는 현포 앞바다. 울릉도 바다는 이렇듯 어디를 가나 투명한 옥빛이다.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은 마을로 달려 올라갔다. 그러자 그 순간 신기하게도 풍랑이 잦아들며 순풍이 불었다. 안무사는 그 틈을 타 닻을 올린 뒤 태하를 떠났다. 무사히 육지에 도착한 안무사는 두고 두고 그때의 일이 마음에 걸렸다. 몇 년이 지난 뒤 다시 안무사가 되어 울릉도를 찾은 김인우는 태하 주변을 수색했는데, 그 때 자신이 유숙하던 곳에 동남동녀가 꼭 껴안은 형상으로 백골이 되어 있었다. 안무사는 이들의 고혼을 달래기 위해 참회의 뜻으로 그 자리에 사당을 지어 제사지내고 돌아갔다. 성하신당의 유래다.

이런 슬픈 사연까지 잉태한 울릉도 공도정책. 일본인들은 그 빈틈을 파고들었다. 물론 공도정책을 쓰는 중에도 우리 조정에선 군사를 보내 정기적으로 울릉도·독도 부근을 순찰했지만, 감시가 소홀해질 때마다 일본인들은 울릉도에서 벌목하든지 독도 주변에서 어로행위를 자행하곤 했다. 예로부터 바다로 나가 끊임없이 주변국을 노략질하던 나라가 아니던가.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1614년(광해군 6) 대마도주에게 울릉도에 일본인들의 왕래를 금지하는 금약을 준수하라는 서계를 보낸 일, 1693년(숙종 19)과 1696년에 동래 어부 안용복이 울릉도 근해에서 일본인들의 어로행위를 발견하고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소유임을 확인받은 일 등등이 그것이다. 그러다 안용복이 2차 도일 담판 후 철종 때까지 일본은 비교적 잠잠해졌다. 
    

1881년(고종 18). 드디어 울릉도에 새로운 시대가 찾아오게 된다. 조정에서 울릉도 공도정책을 폐기하고 개척령을 반포한 것이다. 당시 현지조사를 위해 파견된 울릉도검찰사(檢察使) 이규원(李圭遠·1833-?)이 쓴 <울릉도 검찰일기>는 지금도 소중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 성인봉의 칼데라 화구가 함몰하여 형성된 나리분지 전경. 울릉도 전체에서 유일한 평지라 개척민들 수백 명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다.
배 3척에 102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울릉도를 찾은 검찰사 일행의 탐방 기간은 1882년 4월29일부터 5월13일에 이르기까지 만 14일간이었고, 울릉도에 상륙해 조사한 기간은 5월1일부터 10일간이다. 검찰사 일행은 험한 산길과 해변을 탐험하듯 다니며 샅샅이 조사하면서 울릉도의 실태를 꼼꼼히 파악했다.

그 내용을 간추려보면, 수백 년간의 공도정책에도 불구하고 울릉도엔 전라도·경상도 등 내륙 각지에서 건너온 여러 계층의 백성들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숫자는 벌목인 91명, 약초꾼 9명 등 모두 116명이나 되었다. 더불어 울릉도에서 벌목 중인 일본인들도 무려 70~80명이나 되어 일본 정부가 약속한 울릉도 금령이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알고 육지로 돌아온 후 일본 외무대신에 항의문을 발송하기도 했다. 이외에 농사가 가능한 장소, 마을을 이룰 수 있는 장소, 식수가 있는 수원지, 배를 댈 수 있는 포구 등을 꼼꼼히 조사하였다.

▲ 미역취로 묵나물을 만드는 울릉도 주민. 이 과정을 거친 뒤 바닷가에 널어놓고 말린다. (왼쪽) / 노인봉과 송곳산이 굽어보고 있는 현포항 전경. 학자들은 삼국 시대 우산국의 도읍지가 바로 이곳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른쪽)
검찰사가 돌아가 보고한 지 4~5일만에 임오군란이 일어나는 등 국정이 매우 어수선했지만, 개척령의 기본방침은 바뀌지 않아 정부는 울릉도 개척에 적극 나서게 된다. 당시 검찰사의 성실한 답사보고서가 기초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개척 당시 울릉도 행정의 중심은 성하신당이 있는 태하였다. 이규원 검찰사 일행도 태하의 학포 마을에 처음 도착했다. 개척령이 내려진 그 이듬해 16가구 54명이 정부 주도하에 공식적으로 첫 이주를 하게 되는데, 이들 역시 태하의 학포 마을로 입항했다. 이후 태하는 울릉도의 관문으로서 울릉도 군청까지 자리 잡았으나 1914년 일제가 군청을 도동으로 이전하면서 지금의 한적한 고을로 물러앉게 되었다.

초기에 울릉도를 찾은 개척민들이 가장 큰 집단을 이루고 살던 곳은 바로 성인봉 북쪽의 나리분지였다. 평균 경사도가 25°나 되는 울릉도에서 성인봉의 칼데라 화구가 함몰하여 형성된 나리분지는 사람이 살기에 아주 적합했다. 개척 당시 나리분지 거주민은 93가구 5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은 울릉도에 흔한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억새로 이엉을 엮어 지붕에 얹었다.

▲ 나리분지에 남아있는 너와집. 백두대간 산골에서 볼 수 있는 강원도 너와집과 구조가 아주 비슷하다. (왼쪽) / 너와분지에서 더덕을 캐는 너와동 주민들. (오른쪽)
우리 전통 가옥에서 통나무를 ‘우물 정(井)’자 형으로 네 귀를 맞추어 쌓아 만든 집을 귀틀집이라 하는데, 울릉도에서는 이를 투막집이라고 부른다. 전체적인 구조는 강원도 산골의 귀틀집과 거의 비슷하지만, 울릉도 전통 민가인 투막집의 특징은 우데기다. 이는 눈이나 비바람을 막기 위해 집 바깥쪽에 기둥을 세우고, 억새·옥수숫대 등으로 엮은 이엉을 설치한 바깥벽을 말한다.
 
보통 부엌·화장실·장독대 등이 모두 우데기로 둘러싸여 있어 내부에 활동공간이 생기게 된다. 바람이 많이 불고, 겨울엔 눈이 3m까지 내리는 울릉도 기후에 아주 알맞은 시설인 셈이다. 현재 나리분지엔 지붕을 너와로 이은 너와집 1개소, 섬에서 많이 나는 솔송나무와 너도밤나무를 우물 정 자형으로 쌓고 틈은 흙으로 메워 만든 투막집 4개소를 도지정문화재로 보호하고 있다.

하지만 개척민들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특히 먹을거리가 마땅치 않았다. 다행히도 울릉도는 나물 천국이었다. 섬초롱, 전호나물, 취나물, 부지깽이, 참나물, 명이…. 숲엔 먹을 수 있는 나물이 지천이었다. 문제는 이른 봄이었다. 긴 겨울을 지나고 나면 식량이 모두 떨어져 개척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곤 했다. 이때 잔설을 뚫고 솟아나는 명이는 반가운 생명줄이 되었다. 당시 개척민들이 산에 올라 눈을 헤치며 캐온 이 나물를 삶아먹고 ‘명(命)’을 이었다 해서 ‘명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한다.
▲ 하늘나라 선녀가 변했다는 전설이 전하는 일선암. 고깃배 한 대와 멋진 구도를 이루고 있다.
명이의 학명은 산마늘로, 울릉도를 비롯해 육지의 강원도 등 고지대에서 자란다. 울릉도 사람들은 이 명이로 김치도 담그고, 절임도 한다. 그냥 뜯어다 쌈 싸먹기도 한다. 무엇보다 고기 특유의 잡내를 없애주기 때문에 요즘엔 울릉도 상차림에 빠지지 않는 최고의 효자 나물로 대접받는다. 이렇듯 명이는 단백질 공급원이었던 깍새(슴새)와 더불어 개척민들의 허기를 달래준 양대 생명줄이었다. 또 울릉도는 호박 하나가 20kg에 이를 정도로 아주 잘 자랐는데, 지금은 울릉도 호박엿이 별식이지만, 호박 역시 개척 당시엔 식량 대용이었다.

먹는 얘기가 나온 김에 하나만 더 꺼내자면, 요즘 유명 호텔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울릉 약소’의 시초는 1883년 4월 개척농민(6가구 54명)들과 함께 들어온 소 암수 1쌍이다. 이어 1892년 주민들은 콩 50석을 주고 울진에서 송아지 5마리(암 3, 수 2마리)를 들여와 울릉도 남동쪽의 사동 지역에서 기르게 되는데, 1920년대엔 매년 수십 마리씩 육지로 내다팔 수 있었고, 1960년대엔 매년 100~200마리씩 육지로 출하했다. 육지산 소보다도 고가였으나 당시 포항엔 울릉도 약소를 구입하기 위해 온 상인들로 붐볐다고 한다. 지금 울릉도 전역에서 자라고 있는 소는 700여 마리에 이른다고 한다.

/ Summer Gy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