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K2 등반대의 ‘감동적 비극’ [1] *-

paxlee 2010. 8. 18. 21:42

 

        폭풍설의 K2에서 벌인 필사의 동료 구출작전

1953년 미국 제3차 K2 등반대의 ‘감동적 비극’

파키스탄에 위치한 카라코람산맥의 ‘카라코람’이라는 말은 티베트어로 ‘검은 바위’라는 뜻인데,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이 산맥에는 수많은 적갈색 암봉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마천루처럼 하늘 높이 치솟아 있다. 이 산맥의 서쪽 끝에 세계 제2의 고봉 K2(8,611m) 가 자리 잡고 있다.


K2의 ‘K’는 카라코람(Karakoram)의 약자이고, ‘2’는 측량 일련번호이다. 1892년 영국인 마틴 콘웨이의 탐험으로 이 지역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1909년 이탈리아의 아브루치 공(公)이 이끄는 원정대가 K2의 가파른 남동릉 상의 6,250m 지점까지 진출했다가 악천후를 만나 퇴각하며 이 산을 ‘등반 불가’로 판정했다.


그러나 1938년 찰스 휴스턴 대장의 미국 제1차 K2 등반대가 이 산에서 최초로 괄목할 만한 등반업적을 이룩했다. 찰스 휴스턴 대장은 미국 하버드대학 산악부 출신으로 1936년 영국 산악인 오델과 공동으로 가르왈 히말라야의 난다데비(7,816m) 등반대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그 자신도 남벽으로 정상 아래 300m 지점까지 진출한 경력이 있다. 그는 1950년 틸만 등과 네팔의 쿰부 아이스 폴 밑까지 진출해 다음해 영국 에릭 십튼 정찰대의 길을 터놓았다.


날로 기량 향상되는 현지인들과 캠프3까지 짐 운반


빌 하우스 대원이 K2 남동릉 상의 제1 난코스인 경사도 80도, 높이 30여m의 좁은 침니를 최초로 돌파해, 오늘날 이 침니는 ‘하우스 침니’라고 불린다. 대원들은 제2 난코스인 일련의 거대한 바위스텝, 즉 7,400m 지점에 위치한 ‘블랙 피라미드’를 돌파하고, 숄더(Shoulder) 위쪽 설원의 7,925m 지점까지 진출했는데, 악천후와 보급품 부족으로 인해 다 잡아 놓은 토끼를 놓치고 말았다.


1939년 프리츠 비스너가 이끄는 미국의 제2차 K2 등반대는 이탈리아 아브루치 공을 기념해 K2 남동릉 상의 단속적(斷續的)인 몇 개의 작은 능선들과 슬랩, 암탑들로 이루어진 루트를 ‘아브루치’ 능선으로 명명했다. 비스너 대장과 셰르파 파상 다와는 무산소로 이 능선의 상부 8,382m 지점까지 진출하는 위업을 달성했지만, 캠프7에 혼자 체류하던 미국의 백만장자 두들리 울프 대원의 구조를 시도하던 3명의 셰르파가 눈사태로 불귀의 객이 되어, K2에서 최초로 4명의 희생자가 발생하는 것으로 등반이 끝나고 말았다.


1953년 찰스 휴스턴은 또 다시 미국 제3차 K2 등반대를 이끌었다. 부등반대장은 22년간의 알래스카와 알프스의 등반경력을 지녔고 1938년의 휴스턴 대에도 참가했던 로버트 베이트스가 맡았다. 27세의 물리학자 조지 벨, 26세의 지질학자 아트 길키, 또 한 명의 지질학자 디 모울나르, 시애틀 출신의 산악인 피트 쇼닝, 28세의 철학과 대학원생 봅 크레이그, 이렇게 5명이 대원으로 참가했다.

 

이들은 모두 미국의 로키산맥, 시에라네바다, 북미의 브리티시컬럼비아, 남미의 페루 안데스 등지에서 다년간 등반경력을 쌓은 베테랑 산악인들이었다. 또한 베이스캠프까지 포터들 관리와 수송을 담당할 사람으로는 현지 언어에 능통한 영국군 대위 토니 스트리더가 선발되었다. 등반대는 스카르두에 집결해 포터들을 선발하고 짐을 꾸렸다. 그들은 계곡 양쪽으로 하늘 높이 치솟은 거대한 암탑들과 그 밑으로 격류가 노호하는 계곡 속으로 200km 거리가 넘는 대장정인 캐러밴을 시작했는데, 구간에 따라 목숨을 담보로 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1938년과 1939년 두 차례 미국 등반대가 이용했던 옛날 강둑 길의 중간이 끊겨, 그들 일행 175명은 ‘자크(zak)’라는 이름의 염소 가죽으로 만든 뗏목을 이용해 폭이 90m가 넘는 깊은 급류의 브랄두(Braldu)강을 이틀 만에 모두 건넜다. 그들은 계곡 위쪽에서 악명 높은, 공포의 ‘로프’ 다리를 이용해 또 다시 강을 건너는 고행을 감수해야 했다. 그들은 최종 마을인 아스콜에 못 미친 지점의 천연 노천 온천에서 오랜만에 목욕하는 호강도 누렸다.


세계 최대 빙하의 하나인 발토로 빙하를 덮고 있던 바위, 모래, 자갈도 빙하 이동과 함께 끊임없이 위치를 변경해, 길도 없는 이곳을 통과하는 데 5일씩이나 걸렸다. 그들이 발토로 빙하와 고드윈 오스틴 빙하가 만나는 지점의 모퉁이에 도달했을 때, K2의 상부를 가려버린 커다란 구름 띠와 정상에서 강풍이 토해내는 깃털 모양의 눈가루 때문에 K2 정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그 날 오후 늦은 시각에 해발 5,029m 지점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을 때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밤새 폭설이 내려, 베이스캠프까지 짐을 운반한 후 바위 밑에 들쥐들처럼 옹기종기 한데 모여 앉아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웅크린 채 밤을 보낸 발티 포터들의 고통이 가중되었다.


다음날 날이 맑게 개어 북쪽을 제외한 3면으로 아름다운 풍광이 진면목을 드러냈다. 남쪽에 아름다운 초골리사(7,620m)봉이 새색시처럼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동쪽으로 스컁캉리(Skyang  Kangri)의 계단이 바라보였다. 서쪽 사보이아빙하 위쪽으로 무명 봉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쪽으로 K2 정상은 여전히 구름에 가려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휴스턴 대장과 3명의 대원들이 포터들에게 임금을 지불하고 짐 상자를 열어 짐을 정리하는 동안 베이트스와 길키 두 사람은 빙하 위쪽 빙탑들 사이로 전진해 아브루치 능선 아래 해발 5,395m 지점에서 안전한 캠프1 후보지를 물색하고 돌아왔다. 다음 3일 동안 매일같이 8명의 등반대원과 6명의 훈자 포터들은 각자 대략 18kg의 짐을 캠프1으로 운반했다. 신설 위에 쨍쨍 내리쬐는 뙤약볕은 복사열을 내뿜어 빙하 위의 공기를 화덕 속처럼 달구어 놓았다. 그들이 운반하는 짐은 그다지 무겁지 않았지만, 아직 고소적응이 되지 않은 대원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 C4 아래 오버행.

광포한 폭풍이 K2 등정에 대한 확신 깨뜨려


K2의 남동릉은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능선 상에 두서너 동의 텐트를 설치할 캠프지를 찾아내기가 수월치 않아 보였다. 그들의 계획은 남동릉 상의 해발 7,772m 지점에 캠프8를 구축해 4명의 지원조를 투입하고, 해발 8,230m 지점에 최종 캠프9을 구축하고 2명의 공격조를 투입할 작정이었다.


6월 29일까지 캠프2(5,883m)가 구축되었고, 난코스 구간에 고정 자일이 설치되었다. 이틀 후 길키와 크레이그, 휴스턴 세 사람은 캠프2로 진출했고, 다른 대원들과 훈자 포터들은 짐을 운반했다. 선발대는 5일간 고정 자일을 설치하며 전진해 낙석 위험이 없는 안전한 장소에 캠프3(6,309m)를 구축했다. 그들은 애당초 훈자 포터들에게 캠프2까지만 짐 운반을 시킬 계획이었으나, 훈자 포터들은 고산 등반 경험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파른 설벽, 빙벽을 잘 등반했다. 날마다 그들의 등반기량이 향상되어, 대원들과 셰르파들이 서로 자일 파트너가 되어 캠프3까지 짐을 운반하게 되었다.


7월 10일 밤 최초로 사나운 폭풍설이 그들을 강타해 눈보라가 그들의 텐트 속까지 파고들었다. 다음날 해가 뜨자 폭풍설은 그쳤으나, 신설이 덮인 암벽은 등반이 더 어렵고 위험했다. 벨과 모울나르 대원이 약간 오버행 암탑을 돌파하고 캠프4(6,553m)까지 진출했다. 그들이 얼음이 덮인 암벽으로 등반을 지속할 때 날마다 기상 상태가 악화되어, 혹한 속에서 크나큰 시련을 겪었다. 이전에 몬순이 카라코람 지방까지 침투한 경우가 없는데도 유달리 그 해에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초원에 생명수를 실어 나르는 비구름이 엄청나게 많은 양의 수분을 거기서 다 토해내지 못하고 여분의 수분을 폭설로 바꾸어 K2에 퍼부으며 미국 대에게 위협을 가했고, 실망과 패배와 종국에는 비극까지 안겨 주었다.


등반대가 고도를 높일수록 지세가 더욱 험난해졌고 추위와 강풍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들은 미국식 사고방식대로 등반은 어디까지나 스포츠에 불과하고 사활이 걸린 도전은 아니라는 신념이 확고했기 때문에, 무모한 도전은 가급적 피하고 모든 등반계획이 상황에 따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수정되었다. 그들은 캠프마다 충분한 식량을 비축해 두고 풍부한 안전등반 경험을 바탕으로, 철저한 대비로 위험을 최소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빙사면에 강열한 땡볕이 비치면 얼음이 녹으며 얼어붙어 있던 작은 돌이나 큰 바위가 떨어져 나와 예기치 않은 낙석이 되어 그들에게 폭격을 가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7월 14일 또 한 번의 사나운 폭풍설이 여러 캠프에 흩어져 있던 대원들을 엄습했다. 20일까지 전 대원들은 캠프4에 집결해 거기서부터 훈자 포터들의 지원 없이 대원들만의 힘으로 등반을 진행하려고 했다. 캠프4 위 절벽 돌파가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 아브루치 능선상의 고도 6,706m 지점에 위치한 대리석 버트레스(바위 기둥) 상의 갈라진 좁은 틈이 바로 ‘하우스 침니’로서 이곳의 경사도는 80도로 맨 몸으로 오르기에도 벅찬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오르려면 더욱 힘들고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침니 상하에 설치한 도르래에 길이 73m의 나일론 로프를 통과시켜 일종의 공중 삭도(索道)를 만들고, 그것을 이용해 하루 반 만에 408kg의 식량과 장비를 침니 꼭대기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만일 대원들이 침니로 직접 짐을 운반했다면 5일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그들은 7월 22일 침니 꼭대기 조금 위쪽에 캠프5(6,706m)를 구축했다. 그날 저녁부터 3일간 폭풍설이 계속되어 대원들은 그 기간에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26일 8명의 전 대원은 짐을 짊어지고 등반을 재개해 7,102m 지점에 두 동의 텐트로 캠프6를 구축하고 크레이그, 벨, 휴스턴 세 명이 그곳에 머무르고 나머지 대원들은 캠프5로 하산했다.


다음 이틀 동안 그들은 혹독한 추위와 강풍과 씨름하며 루트개척을 계속했는데, 핸드홀드가 적은 가파른 암벽에 얼음이나 가루눈이 덮여 있어 등반이 무척 힘들었다. 강풍이 등반 중인 휴스턴 대장의 몸 구석구석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특수 내복을 두 벌 껴입고 보온 바지와 재킷, 방풍복 바지와 이중 파카를 입고 3중 장갑을 끼고 한국산 방수화를 신고 있었는데도 혹한의 마수(魔手)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블랙 피라미드’ 위쪽에 어렵사리 캠프7(7,559m)을 구축하고, 악천후에 아랑곳하지 않고 릴레이식으로 거기까지 짐을 운반하여 비축해 두었다. 1938년과 1939년 7, 8월에 미국 K2 등반대는 오랫동안 좋은 날씨의 혜택을 누렸고, 모든 사람들은 이 시기를 K2 등반의 최적기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1953년 7월에는 악화일로인 K2의 날씨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30일, 쇼닝과 길키 대원이 캠프7에서 60여m 위쪽 빙벽에 깎아 놓은 좁은 레지로 올라가 비박했다. 다음날 두 사람은 두 시간 동안 아주 가파른 빙벽에 계속해서 스텝 커팅을 하면서 90여m를 더 오르고, 그 위쪽의 경사도가 완만한, 눈 덮인 빙벽의 180여m를 킥스텝으로 힘겹게 오른 후 심설을 헤치고 등반해 넓은 설원 7,772m 지점에 마침내 캠프8를 구축했다.


31일, 흐린 날씨에 찬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날씨가 좋아지면 정상공격을 시도할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휴스턴은 세 명의 대원들과 캠프6에서 캠프8로 향했다. 그들은 고소적응이 잘된 상태여서 등반속도가 빨랐다. 캠프7에는 12일치 식량이 비축되어 있어 식량이 떨어질 염려도 없었다. 그들은 침낭, 식량과 연료, 여분의 텐트를 짊어지고, 추락하지 않도록 주의 깊게 서로를 확보하며 하루 만에 670여m의 고도를 돌파하고 캠프8에 머물고 있던 쇼닝과 길키 두 대원과 합류했다.


캠프6에 머물고 있던 베이트스와 스트리더 대원도 조만간 그들과 합류하기를 열망했다. 대원들은 캠프8로 더 많은 식량을 운반하기 위해 캠프7에서 전 대원들이 랑데부하기로 무전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기상악화로 캠프6의 두 대원은 올라오지 못했고, 캠프8에 머물고 있던 대원들만 캠프7로 하산해 식량을 운반해 왔다.


그 날 땅거미가 지고 있을 때, 그들이 등로 표시를 위해 15m 간격으로 설사면에 박아놓은 버드나무 막대기들을 따라 베이트스와 스트리더 대원이 몹시 지친 몸으로 캠프8에 도착했다. 이제 앞으로 4일간만 아니 3일간만 좋은 날씨가 지속된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K2 정상을 밟게 되리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일주일 내내 K2 주변으로 모여들던 먹구름이 드디어 광포한 폭풍을 터트렸기 때문이다.

▲ 1953년 미국대의 등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