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가 퍼온글

-* 홍천강변서 20년째 농사짓는 ‘농사꾼 교수’ 최영준 [2] *-

paxlee 2010. 9. 14. 22:32

 

 

            “농사는 내 삶과 학문을 깊이 들여다보는 수신의 길입니다”

이 가을, 곡식과 과일이 마지막 땡볕에 여물어가는 풍경도, 황금 들판과 강물 위로 쏟아지는 빗소리도 인연이 닿지 않았다. 강원 춘천시 홍천강변에서 20년째 농사지으며 사는 역사지리학자 최영준 고려대 명예교수(69). 그를 서울에서 만나는 것이 영 마뜩잖았다.

지리학자 최영준 교수는 농부의 땀냄새, 흙의 향기, 거름 냄새를 사랑하는 진짜 농사꾼이다. 그의 산골생활 흔적이 검게 탄 얼굴과 굳은살 박인 손바닥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김세구 선임기자.

 

지난 9일 그의 연구실인 서울 강남구 서초동의 한 고층 오피스텔을 찾았다. 건물 앞에 마중나와 있는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새집처럼 엉클어진 회백색 머리, 가득한 잔주름과 검게 그은 얼굴은 평생 대학강단을 지켜온 노교수라기보다는 영락없는 촌로의 모습이었다. 악수를 하기 위해 잡은 손은 두툼하고 거칠었다. 그가 보여주는 손등은 쭈글쭈글했으며, 손톱에는 비누로도 잘 닦이지 않는 흙때가 진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얼마 전 <홍천강변에서 주경야독 20년>이라는 책을 냈다. 지난 1989년 강원 춘천시 남산면 산수리 홍천강변의 궁벽한 오지에 집과 땅을 마련한 뒤 써온 농사일기다. 그는 주중에는 고려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주말과 방학에는 시골에서 직접 집을 고치고 땀 흘려 농사를 지으며 자연 속에 묻혀 지냈다. 농사꾼 반 교수 반의 ‘이중생활’이었다.

그의 농사는 많은 이들이 꿈꾸는 은퇴 후의 낙향이나 전원생활과는 다르다. 부동산 투자나 귀농 목적은 더욱 아니다. 골치 아픈 도시생활의 탈출구가 아닌, 땀냄새와 생명의 가르침을 따르는 대안적인 삶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첫 질문은 좀 삐딱하게 나갔다.

- 정년퇴직한 교수로서 지금의 농촌생활이 휴식이나 현실도피의 의미가 없지는 않지요?

“바깥세상 소식에 귀를 막고 조용한 곳에서 땀흘려 일하며 공부한 것을 더욱 다듬겠다는 생각은 있지요. 그렇지만 나에게 농촌은 막연한 이상향이 아닙니다. 생산과 노동의 삶이지요. 농사야말로 욕망을 내려놓고 자연에 순응하면서 겸손하게 사는 법을 실천하는 일이자 내 삶과 학문을 깊이 들여다보는 수신(修身)의 길입니다. 밭 갈고, 씨 뿌리고, 김매고, 거두면서 팔다리에 알이 배는 힘든 노동은 ‘무소유’만큼이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는 이날 참깨를 털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빗소리가 거세진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농사는 굉장히 잘됐는데 세워놓은 참깨단이 태풍에 쓰러져 떨어지고 썩어서 참깨 소출이 절반으로 줄었다”며 농촌의 비 피해를 근심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시골집과 밭이 잡초 속에 파묻힐까 안타깝고, 폭우가 쏟아지면 산사태로 연못이 망가질까 두려우며, 겨울철 혹한으로 보일러가 터질까 걱정되어 거의 매주 시골에 간다. 내가 뿌리고 키운 작물이 제대로 돌보지 않아 죽게 한다면 그것이 비록 말 못하는 식물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가슴이 저리는 고통을 느낀다.’

그가 처음 들어간 홍천강변 골짜기는 차량 출입은커녕 농로 2㎞를 걷고, 마을 나룻배의 삿대를 저어 홍천강을 건너, 다시 1㎞ 정도 고개를 넘어가야 겨우 닿는 곳이었다고 한다. 다 쓰러져가는 함석지붕집 벽은 수수깡이 드러났고, 마당에는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그는 한 해 평균 120일 이상씩 이곳에 머물면서 농사를 지었다. 직접 밭을 갈아 고추, 고구마, 토란, 도라지, 호박, 수박을 심었다. 처음 7년 동안은 전화도 놓지 않고 지냈다. 그러면서도 학자답게 열심히 책 읽고 논문과 책을 썼다.

정년퇴임을 한 뒤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시골에서 보낸다. 비슷한 시기에 정년을 맞은 부인 손정리 한국교원대 명예교수(68)와 함께 이른 새벽 새소리에 잠에서 깨어 하루종일 밭일, 논일을 한다. 논 300여평, 밭 700여평, 과수원 400여평은 부부가 감당하기에는 꽤 큰 농사다. 먹을거리를 자급자족하고도 남아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 그래도 밥벌이를 위한 귀농자나 전업 농부보다는 호화로운 생활 아닙니까.

“부부가 모두 대학교수라는 신분과 경제적인 여유는 분명히 큰 장점으로 작용했을 겁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집을 현대식으로 고치지도 않았고, 생각과 생활도 진짜 농사꾼이 되어가고 있어요. 아예 주민등록까지 이전하고 마을 사람들의 추천으로 농협 조합원 자격을 얻었거든….”

- <택리지와 풍수> 논문을 쓴 지리학자로서 홍천강변에서 이상향의 모습을 찾은 겁니까.

“처음부터 가장 발전이 더디고 개발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곳을 물색했어요. 내가 연구한 택리지와 풍수는 길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결론입니다. 우리 집은 대한제국 말기에 참봉벼슬을 하던 사람이 낙향해 지은 집으로 낡았지만 기품이 있었어요. 풍수이론에 따라 연못을 만들고 벚꽃과 철쭉을 심어 비보(裨補)를 했지만 그건 조경의 관점이죠. 풍수상 난을 피할 수 있는 피병피세지(避兵避世地)라고는 해도 서향인 데다 좌우 비례도 좋지 않은 곳입니다. 사랑채에 앉으면 멀리 홍천강이 내려다보이고, 늦봄이면 100년이 넘는 철쭉꽃이 아주 아름답게 피는 경치는 자랑할 만하지요.”

- 책의 서평을 보면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땀 흘려 일한 노동으로 소박한 밥상을 차리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언급하고 있던데요.

“생활은 비슷할지 몰라도 소로의 문장과 철학에는 비교할 수 없지요. 대신 소로보다는 내가 더 행복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소로는 외로움 때문에 2년2개월 만에 숲속의 생활을 접었지만 나는 평범하고 평화로운 시골마을에서 이웃과 어울려 편안하게 생활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나는 소로보다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를 더 좋아합니다.”

- 라비의 어떤 점을 좋아하십니까.

“라비는 프랑스 시골마을에서 부인 미셸과 함께 농사일을 하면서 생명농업을 전파하고 있어요. 인간성 회복과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실천합니다. 나도 왕겨, 음식물찌꺼기, 낙엽, 오줌 등을 섞혀 발효해 퇴비를 만듭니다. 도시에서는 지저분하다고 하는 것들이 농촌에서는 다 소중한 거름이 되는 겁니다. 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으니 지렁이와 미생물이 살아납니다. 논밭은 온갖 곤충과 새와 동물들이 몰려와요. 올해도 고라니 가족이 홍천강을 헤엄쳐와서 콩과 고구마, 단호박을 많이 갉아먹었어요. 사과, 배는 까치가 못쓰게 만들지요. 이제 고약한 퇴비 냄새가 향긋하게 느껴져요.”

- 처음 농촌생활하실 때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요.

“3년 동안은 비포장 농로와 고갯길을 걷고 작은 배로 강을 건너다니며 솥, 밥상, 식량, 침구 등을 날랐어요. 벌에 쏘이거나 팔이 부러졌는데도 병원이 멀어 발을 동동 굴렀지요. 무엇보다도 그때는 농사가 뭔지 전혀 몰랐어요. 이웃사람들을 따라 하면서 일일이 농사일을 배워야 했어요. 처음 10년은 농사의 기본을 익히는 시간이었습니다.”

- 고향이 농촌이 아닌가요.

“도시 출신으로 평생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만 했으니 농사와 거리가 먼 사람이지요.”

- 시골집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던데….

“불편하다면서 돌아서는 사람들이 더 많지요. 벌레가 많고 잠자리가 불편하니 못견디지요. 이곳은 휴식을 위한 곳이 아니라 농사일을 하는 곳이거든요.”

- 시골생활이나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마음가짐은 무엇입니까.

“진짜 농사꾼이 되고 싶다면 과거를 싹 잊어야 합니다. 도시에서의 직업이나 대우 등을 내세우면 안돼요. 부지런하고 겸손하고 인내심을 가져야 해요. 진심으로 예의를 갖춰 대하면 마을 어른들이 농사의 지혜를 가르쳐준다거나 더 많은 도움을 줍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 내게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는 5~6년이 걸렸습니다. 10년이 지나서야 내가 외지인이 아니라 진짜 마을 사람이 됐어요.”

- 지리학자로서 땅의 의미와 자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요.

“지리학이란 학문이 땅과 땅 위의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것이죠. 땅에서 나서 땅이 베푸는 대로 살다가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잖아요. 농사짓는 사람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땀을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앉아 있는 지모(地母)에 대한 애정과 감사 때문에 땀을 흘리는 겁니다. 일본 농부들은 평소에 농사짓던 땅에서 쓰러져 그곳에 묻히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내가 떠나면 밭모퉁이에 묻어달라고 아들들에게 말했어요. 땅과 자연을 살아 있는 존재로 인식하면 함부로 훼손시킬 수 없습니다.”

결국 이야기는 오지까지 스며든 과소비적인 삶의 문제, 무분별한 개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인터뷰하는 동안 그는 여러 차례 책을 펼쳤다. 그가 지리학자의 꼼꼼한 관찰력으로 직접 홍천강 주변을 돌아다니며 그린 조감도와 약도를 일일이 손으로 짚어가며 변화를 설명했다.

- 20년 동안 홍천강 주변 환경이 많이 바뀌었지요.

“이곳도 개발 바람을 피해가진 못했지요. 거의 자연상태였던 이곳이 최근 5년 사이에 완전히 성형수술을 당했어요. 홍천강변 둑방길과 벼랑길이 콘크리트로 포장됐고, 집 뒤로 양평에서 춘천 가는 도로가 개통됐습니다. 이제는 밤마다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에 시달리고 있어요. 개발업자들은 지도에 직선으로 줄을 긋고, 마구 산을 깎고, 굴을 뚫어요. 강변의 아름다운 굴곡과 산과 들의 구릉은 중장비를 동원해 단 며칠 만에 평탄화, 직선화시켰어요. 기하학적으로 정리된 토지는 부동산이 되고 말았어요.”

말이 나온 김에 ‘한반도 대운하’ 등 현 정권의 핵심 정책을 설계한 류우익 주중대사 이야기를 꺼냈다. 류 대사는 최 교수의 서울대 지리학과 후배이자 지리학자라는 같은 길을 걸었다. 류 대사가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내는 등 정권의 실세로 활동하는 동안 그는 홍천강변에서 삽을 들고 땅을 팠다.

- 류 대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제는 좀 있다고 보지만… 후배니까….”

- 그런 입신양명을 생각해보신 적은 없나요.

“나는 교수로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사람들 모이는 자리에서 떠드는 걸 싫어해요. 아늑하고 고요한 골짜기에 틀어박혀 낮에는 김매고 밤에는 작은방 느티나무 책상에 앉아 글쓰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 지리학계에서도 대운하에 대한 논의가 있었나요.

“내가 80년대 초 <남한강 수운 연구>라는 논문을 썼어요. 그 후 한 사립대학 이사장이 한강과 낙동강 운하와 관련된 학술심포지엄에 나와달라고 해요. 한강과 낙동강을 어떻게 운하로 연결하느냐며 거절했어요. 그때부터 대운하 계획이 세워졌다고 하더군요. 가뭄과 홍수를 분산, 조절시키기 위한 도수로라면 몰라도 운하는 문제가 많은 계획입니다.”

- 4대강 사업은 어떻게 보십니까.

“하상이 높아졌기 때문에 토사를 어느 정도 준설을 할 필요가 있어요. 다만 너무 한꺼번에 하는 게 문제지요. 자연의 주인은 인간이 아닙니다. 업적을 위해 자연을 함부로 파헤치면 큰일납니다.”

- 홍천강 주변이 개발되면서 어떤 문제가 생겼나요.

“오지까지 포장도로가 뚫리고 몇 천원 하던 땅값이 몇 십만원씩 오르니까 갈등이 끊이지를 않아요. 도시로 떠나 땅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람들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나타납니다. 농촌에서는 땅과 길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요. 그런데 땅을 사서 들어온 외지인들이 30년 넘게 왕래했던 길에 구역표시를 하고 막아버리는 겁니다. 이래저래 볼썽사나운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농촌은 그나마 우리 삶의 아름다운 전통이 남아 있는 곳이었어요. 그것이 폐기처분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 농촌이 어려운 것이 개발 때문만은 아니지요.

“승용차가 몰려들어 온갖 도구를 동원해 물고기의 씨를 말리고 오리 같은 야생동물을 사냥합니다. 숙주인 다슬기를 마구 잡으면서 반딧불이도 사라졌어요. 가져온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려서 몸살을 앓지요. 도둑들은 야산에 심어놓은 장뇌삼을 캐가고 더덕, 두릅은 물론 붓꽃과 할미꽃 같은 야생화까지 싹쓸이해갑니다. 농사일로 집을 비운 사이 패물, 농산물 판매대금까지 훔쳐갑니다. 우리집도 현판, 가구, 돌확, 토기들을 도둑맞았어요.”

- 농사가 주는 가르침은 무엇인가요.

“뿌린 만큼 열매를 거두는 것이 땅의 정직한 진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동을 신성하다고 말하면서 땀 흘려 일하기를 꺼립니다. 체육관에 가서 흘리는 땀은 고급스럽고 노동으로 흘리는 땀은 천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저는 농사일을 하면서 세속의 명리보다 훨씬 귀한 것들을 얻고 있습니다.” 그는 “농사도 하나의 창작이고 땅 위에 만드는 하나의 예술”이라고 했다. 참 아름답고 멋진 낙도(樂道)의 경지다.

영준 교수는 누구
한국 역사지리학의 뛰어난 성과로 꼽히는 ‘영남대로’ 대표적 저술

1941년 서울에서 났다. 해방 전 부모를 따라 평양에서 살다가 개성, 서울을 거쳐 인천에서 중·고교를 다녔다. 중학교 때 조회시간에 전교생 앞에서 ‘반도 국가인 이탈리아와 한국의 공통적인 운명’에 대해 발표했다. 교장 선생님의 칭찬과 권유로 지리학자의 꿈을 품게 됐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리학과와 루이지애나주립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학과 교수를 지냈다. 2007년 정년퇴임했고, 지금은 명예교수이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이다.

부인은 도예가인 손정리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학술원 회원이자 성균관대 명예교수였던 불문학자 손우성 선생이 장인이다. 홍천강변 그의 집에서 <손우성의 유럽여행기>를 펴냈으며 2006년 102세로 별세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옛길의 역사를 연구한 <영남대로>는 한국 역사지리학의 뛰어난 성과로 꼽히며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72년에 연구를 시작해 90년에야 책을 냈다. 그가 처음 쓴 ‘영남대로’라는 용어는 학계의 공식 명칭이 됐다. 또 답사과정에서 낙동강 내성천 합류지점에 있는 백포나루의 삼강주막을 처음 발굴해 세상에 알렸다.

이후 ‘남한강 수운에 대한 연구’ 등 우리 국토의 역사를 인문지리학의 관점에서 살펴본 <국토와 민족생활상>, 사라져가는 짚가리의 모습을 글과 사진, 스케치에 담은 <한국의 짚가리> 등 중요한 저서를 잇달아 발표했다. 이 두 권은 홍천강변 시골집에서 원고를 정리했다.

밖에 공저로 <담론과 성찰1> <용인의 역사지리> <경기지역의 향토문화> <경상남도의 향토문화>, 주요 논문으로 <풍수와 택리지> <무카디마를 통해 본 이븐 할둔의 지리학> <천수만 지역의 어업환경 변화와 어촌> 등이 있다.

요즘은 ‘개화기(開化期) 경상남도의 가옥과 취락 연구’를 위해 답사여행과 자료조사를 하고 있다. 합천군·산청군·진남군 등 3개 군의 가옥과 농토, 지주, 소작농들을 조사해 조선시대 농촌생활을 분석 중이다. 또한 틈틈이 실크로드 답사여행을 다녀온다. 실크로드를 통한 농업문명의 전파경로를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할 계획이다.

 

              -- [김석종이 만난 사람] 김석종 문화에디터 / 경향신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