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의 삶의글

-* 어머니, 우리 어머니 *-

paxlee 2010. 9. 16. 21:55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당신의 이름은 어머니입니다.

 

2010, 08, 22. 일요일. 대구서 외삼촌이 오셔서 어머니에게 다녀왔다.

 

어머니에게 다녀와서 어머니 이야기를 한 번 쓰려고 지금까지 망서리느라고 아직 어머니에 대한 글을 쓰지 못하였다. 어머니하고 이름을 부르면 먼저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어머니를 생각만 하여도 아픔이 가슴을 파고든다.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알면서도 효도하지 못하는 내가 원망스럽다. 어머니와 아들 그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어디에 있으며, 그 보다 더 소중한 사연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더 이야기 하기가 두렵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합니다.

 

어머니의 연세는 올해 89세이시다. 치매로 요양병원에 입원하고 계시는데, 이제 노쇠 하셔서 바로 바라볼수가 없다. 대구에서 외삼촌이 오셔서 같이 어머니를 뵈려 갔다. 어머니는 지금 충남 서천군에 있는 군립병원에 입원중이시다. 대전에 계실때 인연이 되어 천주교재단에서 운영하는 병원이다. 서울에서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하던지, 장항선 열차를 이용하여 방문하는데, 서울에서 3시간 거리이다. 어머니가 이곳에 입원을 하신것은 이제 1년이 조금 넘는다.

 

외삼촌을 모시고 동생 내외와 나 이렇게 출발을 하였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려가다가 중간휴게소에서 한번 쯤 쉬어서 가야한다. 병원에 방문하여 어머니를 뵈오면 나는 그래도 알아보는데, 외삼촌이 뵙고 인사를 드려도 알아보지를 못하신다. 이름을 되고, 몇 번 이야기를 하면 차츰 기억을 더듬어시는지 차차 아는 것 처름 표현을 하신다. 외삼촌이 어머니를 바라보시는 표정은 남매의 애정으로도 어찌하지 못하는 아픔의 표정이 역역하다. 삶의 막다른 골목을 바라보는 듯 그 애절한 눈동자는 물기가 어리고 있었다. 

 

외삼촌 형제중에 어머니가 첫째이시고, 둘째 이모님은 여주에 계시는데, 그 이모님도 병원에 입원하고 계시지만, 아무도 알아보지를 못하는 상태이며, 셌째 이모는 고향에 홀로계시지만, 그 이모님도 암으로 고생을 하시고, 그리고 대구 외삼촌이 넷째이고, 다섯째 막내 외삼촌은 몇 년전에 가장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셨다. 외삼촌이 이번 기회에 어머니와 이모님들을 한 번 만나 보셔야 하겠다는 계획으로 올라셨다고 하였다. 

 

3년 전 어느날 파출소 순경이 전화를 하여 어머니가 이곳에 와 계시니 모셔가라는 연락을 하여 가셔 모셔왔다. 그 때부터 어머니는 치매증세가 시작 된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 후 잘 계시던 어머니는 시골에 가서 사시겠다고 고향에 데려다 달라고 막무가네로 역정을 내시기를 몇 달 동안 계속되었다. 고향에 가시면 혼자 가서 계시게 할 수가 없어서 보내드리지 못하였다. 그 증세가 점점 심해지느라고 그런지 어머니의 역정을 감내할 수가 없어, 고향 집에 모셔다 드리는 방법 외에는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동생과 번갈아 가며 고향을 방문하여 보살펴 드리지만, 모시고 있을 수가 없어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고향의 이웃 사람들과도 본 정신이 아니어서 그런지 말의 전후가 맞지 않는 사연으로 오해와 원망이 오가는 상태가 연출되기도 하여 아들로서 이웃 사람이 오해하는 그 의미를 설명을 드려도 이해가 되지않는 점들이 점점 내가 그곳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 내 자신이 원망스럽기만 하였다. 결국 그곳에 오래 계시지도 못하고 다시 서울로 모셔 와야만 하였다.   

 

서울에 와서도 누군가가 어머니와 함께 하면서 모셔야 하는데, 형제들 모두가 어머니 옆에 붙어서 모실 수 있는 형편의 여유로운 사람이 없어 고민을 하다가 천주교 신부님과 수녀님과 상의를 하여 그곳에 모시기로 하였다. 늙고 병든 노모를 자식이 모시지 못하고 병원에 모셔야 하는 자식의 마음은 쥐구멍이라도 찾아 몸을 숨겨야 하는 그런 심정이었다. 부모님이 우리를 이 만큼 키워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이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님을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 없이 원망스럽다.

 

서천요양병원은 시골의 한적한 곳이어서 공기가 맑고 깨끗하며 시설이 좋은 곳이다. 한 병실에 6명씩 입원이 되어있고, 언제 방문하여도 직원들은 친절하고, 깔끔하게 정리정돈이 되어 있고 환경은 좋은 편이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좀더 자주 방문하지 못하는 현실이 더욱 죄 스럽다. 형제들이 자주 방문을 한다고 하지만, 거리가 가까우면 좀 더 많은 시간을 같이 할 수 있지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은 자꾸만 낭떨어지의 난간에 서 있는 것 처럼 불안하고 가슴에는 태풍이 밀려오는 것 같다.

 

힐 체어를 빌려 어머니를 모시고 밖에 나와 햇볕을 조금 쬐여주는 시간을 가지며 이야기를 나누어도 어머니는 오히려 낯선 밖의 환경에 불안을 느끼시는지 그만 들어가자고 말씀을 하신다. 이렇게 밖의 바람을 쐬어주지 않으면 3층 입원실 침대에서 겨우 화장실을 오고가는 그것이 전부인것이다. 옆 침대에 계시는 분도 같은 증세로 같은 말을 하고 또 하고 하는 것을 보면 이렇게 늙어서 몸을 움직이는 것 조차 어려운데, 기억까지 흐리게 하는 병세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보는 아들의 마음은 오늘도 가슴이 무너지고 있다.

 

오전에 어머니께 가서 겨우 몇 시간 함께 하는 시간을 뒤로 하고 어머니를 그곳에 남겨놓고 떠나와야 하는 자식의 마음은 캄캄한 밤 길을 걷는 침묵의 정적이 가슴을 제어온다. 어머니가 우리를 이 만큼 키우시면서 고생하신 그 은혜를 우리는 그 만분의 1도 보답해 드리지 못하는 불효를 불효를 감당할 길이 없다. 이번 추석에 또 어머니를 뵈러가야하는 마음은 벌써부터 무거운 돌로 누르는 것처럼 가슴은 아프고 아려온다. 어머니, 병들고 늙어신 어머니 죄송합니다. 

 

어머니의 일생은 참으로 굴곡이 많은 삶이셨습니다. 일제시대의 수탈을 당하는 그 참상을 겪으셨으며, 그리고 해방의 기쁨도 잠간, 6,25의 동란을 몸소 겪으시면서 보리고개에 초근목피를 경험하면서도 우리들을 이 만큼 키워주셨습니다. 젊어서 시머니 앞에서 눈도 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삶을 살으셨으나, 정작 며느리를 본 후에는 시어머니 노릇을 해 보지도 못하시고, 며느리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변화된 세월앞에 복, 복도 없는 어머니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아들로서 너무너무 죄송하옵니다.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