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의 다양한 문화

-* “신혼여행은 알프스로 가자 *-

paxlee 2010. 11. 30. 22:41

 

아내여 저것이 산장의 불빛이다.

 

샤모니~투르~알베르 산장~샹페~베르비에~몽포트~딕스 산장

 

사람들은 청첩장을 내미는 내게 “이제 8849m에서 살겠수”라고 농담을 던지곤 했다. 아내 곽정혜는 에베레스트 등정자였기 때문이다. 그에겐 늘 ‘등정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는데, 그 말이 곧 알피니스트를 가리키는 건 아니지만 아내는 늘 하얀 산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그 그리움이란 게 잠깐 빛났다 사라지고 마는 산정의 메아리와 같은 것은 아니라는 걸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경상도 촌에서 자라 대학산악부를 통해 산을 알게 된 아내는 푸릇한 20대의 마침표를 에베레스트 정상에 찍었다. 어쩌면 그는 형광등 뒤에 빛나는 태양을 보지 못하고 청춘의 종착점이 그곳인양 돌진하는 하루살이처럼 모든 걸 걸었던 것인지도 몰랐지만, 나는 적어도 산에 미친 자라면, 그래서 에베레스트를 목표로 삼았다면 그래야만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례선생님은 결혼식날 주례사에서 아내를 일러 “20대에 에베레스트에 오른 독한 년”이라고 말해 좌중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으니까.


아내는 그곳에서 내려오다 손가락 다섯 개를 잃었다. 사우스 콜로 하산 중 장갑을 갈아 끼다 200m를 추락해 정신을 잃은 것이다. 마침 정상으로 향하던 중동고산악회 팀의 눈에 띄었길 다행이지, 그날 그 순간 가속도 붙은 아내의 몸이 눈처마에 걸리지 않고 캉슝빙하의 절벽까지 날아갔다면, 마침 산안개라도 몰려와 시야를 가렸다면, 그들이 어둠 속에서 잠시 길을 잃어 아내가 있는 쪽으로 지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이 정상을 포기하지 않고 줄곧 발길을 옮겼다면 지금 아내는 여전히 스물다섯 살 꽃다운 모습으로 차가운 얼음 속에 잠들어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지난 4년여 간 아내가 해온 건 손가락이 모두 떨어져나가고 상처가 아물길 기다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내는 다시 암벽에 매달렸고, 바일 한 자루만으로도 빙벽을 오르고자 했으며, 하얀 산에 오르던 날들을 추억하며 손때 묻은 장비들을 꺼내어 닦곤 했다.


“신혼여행은 알프스로 가자.”


그와 한 코펠에 밥해먹자고 약속한 후, 진행되어 온 일련의 사회형식적 과정들은 단 하나의 목표, 신혼여행을 목적으로 했다. 집을 구하거나 가구를 들여놓거나 예물이나 예단 같은 걸 넉넉하게 준비한다는 건 능력도 되지 않았지만 그런 건 함께 줄을 묶고 알프스의 설원을 가로지르는 일보다 결코 중요한 게 아니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연애시절 아내는 나와 사계절을 함께 등반했는데, 바윗길은 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해 쉬운 곳은 선등까지 할 정도로 어렵지 않게 올라갔지만 눈 쌓인 만장봉에서는 등반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손이 아프다며 내려가자고 재촉했었다. 동상은 늘 재발 가능성이 있었고, 때문에 만년설 위에서 예전과 같은 날렵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의 표정은 사뭇 어두워졌었던 것 같다.


알프스는 어디를 가도 쉽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싱거운 트레킹이나 하려고 그곳까지 간다는 건 알피니스트를 지향해온 한 사람으로서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길이 있었으니, 그곳이 오트 루트(Haute Route)였다.

 

 

푸른 빙하 호수를 끼고 있는 오니 산장. 이곳부터 스위스로 스위스프랑이 통용된다.

오트 루트란 프랑스 샤모니에서 스위스 체르마트까지를 잇는 길이다. 직선거리 약 70km, 도상거리로는 100km쯤 되지만 코스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150km까지도 늘어난다. ‘높다’는 뜻의 프랑스어 오트(Haute)처럼 말 그대로 2500~3000m 고도가 계속 이어지는 오트 루트는 1861년 처음 시도되어 1911년에야 마르셀 쿠르츠와 로제트 두 사람이 스키로 완전히 연결했다고 한다. 크레바스만 조심한다면 다른 고봉들이 가진 곤란보다는 훨씬 수월하면서도, 좁은 정상에서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세상이 그 길에 펼쳐질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오트 루트를 목표로 삼고 자료를 찾아봤지만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몇몇 외국 가이드산행 웹사이트에서 오트 루트와 관련한 자료들이 나왔지만 정확한 지도까지 공개돼 있는 건 아니라서 대략적인 루트 표시만을 놓고 구글어스에서 길을 찾아보는 게 전부였다. 이마저도 각각의 사이트들에서 제시하는 루트가 달라 어느 게 좋은지는 직접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외국 서적판매 사이트를 통해 가이드북도 찾아봤지만 영문판으로 된 건 거의 없었다. 그마저도 우리가 가고자 했던, 눈과 빙하가 있는 고도로의 알파인 오트 루트는 아니었고 대부분 여름엔 평범한 초원으로 변하는 동계 스키 루트 위주였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오트 루트를 시도한 팀은 두 팀뿐이다. 한 차례 알프스 경험이 있던 아내는 그동안 ‘익스트림 허니문’이라는 멋들어진 제목의 계획서를 만들었고, 원정대 발대식 같았던 결혼식을 마친 후 본격적인 등반 시즌이 시작되는 7월 초 그 높은 길을 향해 떠나게 되었다.

 

샤모니에서 체르마트까지 100km 달하는 빙하 트레킹


한국에서 샤모니까지 갈 때 가장 가까운 공항은 스위스 제네바를 거치는 것이다. 유럽 직항편을 타면 12~14시간이 걸리지만 우리는 가장 싼 표를 찾다가 제네바행을 못 구하고 오밤중에 떠나 중동에 들러 가는 취리히행을 탔다. 그러나 취리히에서 열차를 타고 샤모니로 가다 허둥대는 바람에 10초 차이로 갈아탈 열차를 놓쳐 결국 마지막 환승역인 스위스 마르티니에서 샤모니행 몽블랑 익스프레스 막차를 보내고 말았다. 결국 200프랑이라는 거금을 내고 택시로 샤모니역에 내리자 허긍열(본지 알프스 통신원)씨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샤모니 거리는 10년 전과 5년 전에 와 보았을 때와 달라진 게 없어보였지만, 세월을 확인할 수 있는 건 빙하의 모습에서였다. 몽블랑이 내민 혓바닥 같은 보송 빙하가 한눈에 보기에도 제법 짧아져 있던 것이다. 10년째 샤모니에 살고 있는 허씨에 따르면 그전엔 여름철에 보송 빙하에 가서 빙벽등반도 하곤 했는데 이제 세락이 자주 무너져 내리고 등반을 할 만한 얼음벽도 남아있지 않아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위도가 높아 여름철엔 밤 10시까지 해가지지 않는 탓에 어스름한 샤모니 슈드 광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조문행·조성주씨와 늦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작년까지 이곳에서 기념품점과 숙소 ‘알펜로즈’를 운영하던 조문행씨는 사업을 늘려 한식당 ‘산마루’를 개업하고, 조성주씨는 요리사로 활약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한국시간으로 치면 아침 7시까지 퍼마시는 동안 아내는 닭살 돋은 팔뚝을 비비며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나도 곧이어 골아 떨어졌다.
우리는 첫날 오후 늦게야 샤모니에 도착했기 때문에 다음날은 장비와 식량 등을 준비하고 몇 가지 정보들을 찾아본 후 출발하기로 했다. 서점에 가보니 오트 루트와 관련한 자료들을 한쪽에 따로 정리해 구비하고 있었다. 사진집이나 가이드북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지도였는데, 스위스에서 발행한 2만5천분의 1 지도가 가장 정밀해보였다. 대략적으로 계획한 루트로는 중간에 버스와 열차로 이동하는 곳을 제외하면 7장 분량이었다.

 

 

투르 마을에서 콜데발므로 가는 곤돌라에서 본 풍경. 멀리 몽블랑이 보인다.

샤모니에서 투르 마을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한 후 콜데 발므에서 시작해 알베르 프리미어 산장, 오니 산장, 샹페, 베르비에, 몽포트, 프라플리 산장, 딕스 산장, 비그네트 산장, 베르톨 산장, 쉐니벨 산장을 거쳐 체르마트까지 가는 루트였다. 처음엔 중간에 샹페 마을로 내려와 생피에르에서 그랑콩비엥(4314m)을 넘으려했지만, 허긍열씨가 그곳을 넘기엔 너무 위험할 것이라고 조언을 해줘 루트를 베르비에로 돌아가는 것으로 잡았다.

꼭 필요한 짐들만 챙겼다고 생각했는데도 60리터 배낭은 꽉 차서 무게가 20kg에 육박하는 것 같았다. 체르마트에 도착하면 마터호른도 등반해야겠다는 욕심에 안자일렌용 짧은 로프를 놔두고 7mm 60m 로프와 캠 2개, 카라비너 몇 개와 연료도 더 챙겨 넣었기 때문이다. 산장에서 자면 이보다 훨씬 가볍게 지고 갈수 있겠지만 한 사람이 하룻밤에 10만원대에 이르는 산장비는 큰 부담이었기에 아내와 나는 전 구간 야영을 하며 가기로 결의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오랜 만에 어깨에 뻐근함을 느끼며 허씨에게 빌려온 샤모니 버스카드를 내밀고 투르행 버스에 올랐다. 샤모니 계곡을 오가는 버스들은 요금이 2유로지만 관광 시즌인 7~8월과 스키 시즌에 시내 숙박시설에 묵는 사람들은 무료로 태워준다. 30여분 만에 투르에 도착했지만 곤돌라는 9시부터 운행한다고 했기에 정거장 앞 식당에 들어가 간단한 아침을 먹었다. 이제 막 시즌이 시작된 것인데도 곤돌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제법 있었다. 정시 운행을 시작한 곤돌라를 타고 중간역에서 리프트로 갈아탄 후 콜데발므에 내리자 시원한 바람과 함께 드류, 에귀베르트, 몽블랑 등 하얀 설산과 침봉들이 한눈에 펼쳐졌다. 


능선 허릿길로 난 완만한 초원은 그리 힘든 곳은 아니었지만 배낭 무게 탓에 발걸음이 계속 더뎌졌다. 1시간여 가로지르니 빙하가 시작됐고 함께 출발했던 다른 팀들은 이미 저 앞에서 개미만 하게 보이게 되었다. 눈 위에 난 사람들의 흔적을 따라 2시간여를 더 가니 바위 위에 알베르 프리미어 산장이 보였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음식을 주문해 먹거나 휴식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이곳에서 하루를 보낸 후 다음 날 투르 빙하 일대의 산들을 등반하려고 온 것 같았다. 오믈렛으로 간단히 식사를 마친 우리는 이제부터 안전벨트를 차고 가다가 적당한 곳이 나오면 로프를 사용하기로 하고 산장을 출발했다.

 

 

완만한 오니 빙하를 따라 내려오고 있는 사람들. 뒤로 보이는 봉우리는 포르탈레(3344m).

샤모니를 떠나기 전 조문행씨는 요즘 매일 오후만 되면 날씨가 안 좋아지니 적어도 오후 4시 전에 산행을 마치라고 조언했었는데, 투르 봉을 끼고 돌아나가는 동안 정말로 북쪽에서 검은 적란운이 일고 있었다. 구름은 침봉을 휘감아 돌기도 하고 가끔 쿠르릉 소리를 내는 걸로 봐서 엄청난 소나기를 지니고 있는 듯 했지만 바람은 줄곧 남동풍이 불었기에 별로 걱정은 하지 않고 있었다. 첫날 적어도 투르 봉 줄기를 넘어가는 콜까지는 올라서야 다음 날 산행이 편할 것 같았기 때문에 걸음을 계속 옮겼는데,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며 사방에서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안되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황급히 조금 전 지나다 보아둔 평평한 바위지대로 걸음을 몇 발짝 옮기는 사이 우박이 쏟아지며 돌풍이 불어댔다. 불과 50m쯤 떨어져 있는 그곳까지 달려가 배낭에서 텐트를 꺼내 치는 동안 아비규환처럼 얼음알갱이들이 뺨을 후려쳤다. 천신만고 끝에 텐트를 치는데 성공했지만, 그동안 배낭 속 모든 장비들이 젖어버렸다. 이제 오후 3시가 지났을 뿐인데 컴컴한 어둠 속에서 텐트 안에 축축한 침낭을 펴고 있자니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다 텐트가 찢어지기라도 하면 어쩌지’, ‘내일도 날씨가 좋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이런 저런 고민을 하는 사이 어제의 피로가 몰려들고 스르르 눈이 감겨왔다. 얼음 알갱이들은 바람을 타고 날아와 쉴 새 없이 텐트를 두들겨댔고 샤르도네에선 눈사태가 쏟아져 내렸다.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코펠을 텐트 밖에 내놓았다. 눈보다는 빗물이 먹기 좋았기 때문이다.

 

천둥 속의 하룻밤


5시면 동이 트기에 일찌감치 눈은 뜨고 있었지만 침낭에서 나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동안 바로 옆을 지나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20번쯤 되풀이된 후에야 텐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사방 산안개가 둘러싸고 있었지만 위험한 구름은 아니라서 운행은 할만 했다. 배낭을 꾸리고 아내와 안자일렌을 한 후 앞장서 오르기 시작했다. 이정표 하나 없는 눈밭이지만 발자국을 따라 나름대로 길은 나있었기에 지도와 대조해가며 어렵지 않게 목표한 곳을 찾아갈 수 있었다. 다음 목적지인 트리엥 산장으로 가는 길은 투르에서 뻗어 나온 능선 중 하나를 넘어야 했는데, 우리는 가장 가까운 콜 슈페리어 드 투르를 오르기로 했다. 콜로 향하는 설벽은 경사 40도 정도였지만 지난 흔적이 있어 어렵진 않았다. 허나 문제는 어제 날씨로 인해 더욱 무거워진 배낭과 아직 적응되지 않은 고소환경이었다. 


“100발자국 오르고 한 번씩 쉬자.” 


속으로 100을 세고 한 번씩 쉬어 가다보니 30여 분만에 콜에 올라설 수 있었지만, 키가 작은 아내는 그동안 150발자국씩을 걷느라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고 했다. 콜에 올라서 본 트리엥 플라토는 드넓었다. GPS 좌표와 지도를 비교해보면, 아래로 난 길이 맞는 듯 했지만 아내는 마침 투르에서 내려오는 사람에게 트리엥 산장에 대해 물었다. 어린 아들과 함께 줄을 묶은 그는 서툰 영어지만 “10분만 내려가면 산장이 보인다”고 일러주었고, “우린 허니문 중”이라는 아내의 자랑 섞인 설명에 감탄을 내뱉었다.


허나 그의 말처럼 10분을 가도 산장이 보이는 건 아니었다. 이곳은 가끔 이정표들이 눈에 띄었지만 1시간 거리라고 쓰여 있으면 2시간을 걸어야 하는 게 맞았다. 배낭 무게와 짧은 다리가 그 원인이었다. 계속되는 가스 속에 가끔씩 나타나는 크레바스들을 건너 2시간을 가다보니 그제야 안개 사이로 절벽 위에 산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시간이 이르고, 산장에 들를 특별한 이유도 없었기에 바로 지나쳐 오니 빙하로 내려섰다. 모레인이 시작되며 장비를 풀고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지만 오니 산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30분을 더 내려가서 이제 뱃가죽이 달라붙어 후들거릴 즈음에야 푸른 빙하호수 옆에 선 산장이 보였다.

산장은 늘 가파른 절벽 위에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대부분 100년 넘은 산장들은 처음 지어질 당시엔 빙하 바로 앞에 있었지만 그동안 얼음이 녹으며 지금처럼 바위 위에 올라서게 됐다는 것이다. 산장 발치에서 헉헉대고 있자니 아내는 먼저 올라 배낭을 놔두고 내려와 내 배낭을 받아 들었다.

“남들이 보면 가녀린 여자를 혹사시킨다고 하겠군요.”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난 대부분 아내의 발자국만을 따라온 것이었다.
산장은 천국이었다. 우린 화장실 수도꼭지에서 콸콸 쏟아지는, 그러나 먹지 말라고 쓰여 있는 물을 받아 라면을 끓여먹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한동안 늘어져 있다가 다시 발길을 옮겼다. 라프레야에는 아래 샹페 마을까지 리프트가 다녔다. 샹페에서 다음 마을 베르비에까지는 지도상으로 그리 먼 곳이 아니었기에 인포메이션에 들러 택시를 물어봤지만, 안내 데스크에 있던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비싸니 타지 말라는 것이었다. 대신 그는 대중교통편을 알려주었는데, 버스 2번, 열차 2번을 갈아타는 스케줄로, 차로 20분이면 갈 거리를 2시간에 가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스키리조트로 유명한 베르비에에 내리자 이미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은 시간이었다.


“형! 생강 먹고 생각 좀 하세요.”
“알겠어! 이 마늘 먹은 마누라야.”


갈등의 발단이 된 건 숙소에서 아내가 이것저것 체크하고 준비하느라 바쁜 동안, 땀에 절어 벗어놓은 옷들 중 내 것만 내다 널었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저녁을 먹는 내내 아내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결국 이틀 만에 팀 워크에 위기가 닥쳤다. 중요한 건 서로 아무리 삐치더라도 다음 날이면 곧바로 줄을 묶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나는 곧 꼬리를 내려야 했다.

 

저기 마터호른이 보인다
베르비에에서는 몽포트까지 길게 케이블카와 곤돌라가 연결돼 있었는데, 걸어간다면 하루로도 부족할 길이었다. 당연히 케이블카를 탔는데, 1시간쯤 걸려 휑한 눈밭에 내리게 되었다. 지도상으론 몽포트에서 딕스 산장까지 거리가 좀 멀긴 했지만 고도가 높지 않고 호숫가를 따르는 길이 대부분이라 거기까지 가 묵는 걸 목표로 하고 출발했다. 그게 바로 오산이라는 걸 깨달은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미 해가 중천에 뜬 상황의 눈밭은 몇 발자국에 한번씩 크레바스를 만난 듯 비명을 지르며 소스라칠 정도로 허리까지 빠져들곤 했고, 허우적거리며 빠져나오고 나면 기운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됐다. 멀리 콜데샤우를 넘는 사람들이 하도 더디게 올라가기에 곧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설벽에 붙으니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형, 여기 너무 위험해요.”
마지막 경사 50도쯤 되는 설벽을 가로지르던 아내는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섰다. 배낭에 있던 피켈을 꺼내 쥐어주고 한발 한발 “단디(단단히) 조심하라”고 당부하곤 바로 뒤따랐지만 나도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내는 왼손이 불편했기에 특히 왼쪽으로 기운 설벽에서는 피켈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 공포에 질리곤 했다. 그는 “추락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콜을 넘어서면 그나마 나은 길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아직 시즌이 이른 탓인지 눈 쌓인 곳들이 많았다. 2km를 지나는 데 4시간이 걸리고 나서야 오늘 산장까지 가기는 글렀다는 걸 인정하게 됐다. ‘그랑 데저트’라고 이름 붙은 빙하 호수 옆에 텐트를 치고 밤을 보냈다. 사방 살아있는 것이라곤 파리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적막한 풍경이었다.

다음 날 점심 무렵 프라플리 산장에, 물론 또 ‘떡실신’이 돼서 마지막 몇십미터는 아내가 배낭을 들어주어 도착한 후 오늘은 딕스 산장까지 가되 몸을 추스를 겸 산장에서 자기로 했다. 산장지기 아주머니에게 전화로 예약을 부탁하니, 그곳까진 빨리 가도 6시간이라며 걱정하는 눈치다. 표지판엔 3시간 거리라고 나와 있었는데. 발걸음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호숫가로 난 비포장도로는 눈길이나 돌길보다도 훨씬 지루하고 힘들었다. 호수가 끝나고 모레인 지대의 급경사 오르막이 시작되며 아내는 조금씩 지친 기색을 보이더니 마지막으로 저 고개 하나만 넘으면 산장이 보일 것 같은데 주저앉아버렸다. 멀리 능선 사이로 마터호른이 보였다 사라지곤 했다. 나는 아내가 지고 가던 로프와 크램폰을 내 배낭에 옮겼다.


“하루 종일 들게 하더니 30분 남겨두고 인심 쓰는군요.”
“우리도 그냥 남들처럼 동남아나 갈걸 그랬다.”


아내는 말이 없었다.
“이 길을 혼자 가라고 했다면 절대 못 갔을 것. 그리고 다시 가라 해도 안갈 것”이라는 게 한참 후 돌아온 그의 대답이었다. 딕스 산장에 불빛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나무 십자가가 선 정상에서 마지막 설원을 지나 흐느적거리며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콜데 룩스에서 딕스 호수로 내려서며 본 풍경. 딕스 산장은 저 멀리 검은 삼각봉 몽블랑드셰일롱 앞에 있다.

                이곳에서 꼬박 6시간은 걸린다.

 

                    - 글 \ 사진 이영준  기자 - 월간 마운틴 2010. 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