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의 다양한 문화

-* 꿈의 '안나푸르나' 라운딩 <3> *-

paxlee 2010. 12. 23. 20:31

 

안나푸르나 라운딩 6일째 시작이다.

 

지난 밤은 야크를 놓아 기르는 목장이라는 뜻을 가진 '야크카르카(Yak Kharka, 4,018m)에서 하루를 묵었다. 

 

마낭(Manang, 3,540m)부터는 롯지가 만원이었다. 마낭 주변은 경치도 뛰어나고 토롱라를 향한 베이스캠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어서 늦게 도착하는 트레커들은 숙소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야크카르카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쯤이었는데 벌써 롯지들은 만원이었다. 독일에서 온 부부 트레커와 하룻밤을 같이 보낼 수 밖에 없었다. 맨 바닥에 침대가 다섯 개 있는 큰 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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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나푸르나 산군을 돌아오는 베시사하르에서 출발 나야풀까지

 약 250km에 이르는 트레킹 코스다. 

 

어제 마낭(Manang, 3,540m)을 지나면서부터는 고소에 대한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급한 경사길이 자주 나타나면서 오르막에서는 숨이 차기 시작하고 걷는 속도도 많이 느려졌다. 마낭에서 고소 적응을 위해 하루를 쉬었어야 하는데 쉬지 못해 갑자기 몸 상태가 나빠질까 걱정이 됐다. 야크카르카에 도착하자마자 고소적응을 위해 베낭을 벗어두고 롯지 뒤에 있는 봉우리로 올라갔다. 롯지에서 고도가 200m쯤 될 것 같다. 200m를 올리는데 30분 정도 시간이 걸렸다. 고소에 대한 느낌이 확 달려든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비아그라 한 알을 반으로 나눠 반을 삼켰다.

고산을 많이 다녔던 산 선배들이 고소증세에 특효라며 비아그라를 꼭 가져가라고 했다. 이렇게 높은 산에 혼자 올라와서 비아그라를 먹게 되다니... 그 후에도 토롱페디에서 잠자기 전에 한 알, 새벽에 토롱라로 출발하면서 다시 한 알을 삼켰다.

 

어쨌든 비아그라 먹고 무사히 토롱라를 넘었으니 고소증세에 비아그라가 특효라는 선배들의 경험을 임상실험을 통해서 증명했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나의 비아그라 첫 임상실험은 또 다른 확신을 갖게 했다.

비아그라가 고소증세에는 특효약이었지만 원래 생각했던 비아그라 약효는 전혀 없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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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크카르카에서 본 안나푸르나의 아침. 산 위로 보름달이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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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르초' 네팔인들의 신앙이 묻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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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크카르카에서 토롱페디로 가는 길의 구름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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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나푸르나의 빙하들. 멀리서도 빙하가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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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롱페디 가는 길의 롯지 Ledar.

롯지 지붕위에서 트레커들과 포터들이 설산을 배경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오늘은 안나푸르나 라운딩의 하일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토롱라(Thorung La Pass, 5,416m)를 넘기 전 마지막 롯지인 토롱페디(Thorung Phedi, 4,450m)가 목적지다. 거리는 길지 않지만 토롱라를 무사히 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날이다.

 

야크카르카의 새벽은 추웠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짐을 쌌다. 포터를 깨워 15kg되는 짐을 맡겨 토롱페디로 출발시켰다. 포터를 먼저 보내면서 토롱페디에 방이 없으면 마루든 식당이든 화장실 바닥이든 무조건 잠자리를 만들어 놓아야 한다고 부탁아닌 협박을 했다.

시즌에는 많은 트레커들로 붐비기 때문에 너무 늦게 올라가면 숙소가 없어 난감한 경우도 있었다. 토롱페디에서 숙소를 잡지 못하면 고도가 500m나 높은 하이캠프(4,925m)까지 가거나 다시 되돌아 내려와야 할 지도 모른다. 

 

거리로는 하루에 충분히 갈 수 있지만 고소적응이 안된 상태에서 하이캠프까지 900m를 올린다는 것은 바로 실패를 의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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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롱페디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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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사태 지역의 외길. 이 길 끝에 토롱페디 롯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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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샹디 나디(강)의 원류가 되는 협곡 위로 실핏줄같은 길이 수천년 전부터

네팔인의 삶을 연결해왔던 길이다.

 

토롱페디(Thorung Phedi, 4,450m)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가 넘어서였다. 산사태로 무너져 내린 긴 돌길을 따라 토롱페디 입구에 도착하니 포터인 기리가 롯지 벽에 몸을 기대고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는다. 많이 지쳤구나. 기리의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하루도 쉬지 못하고 엿새를 강행군 했으니 좋은 고객이 걸린 건 아니었을 것이다. 

 

"방 잡았니?"

"방이 없다는데....."

"뭐? 지금 농담하니? 아무데나 잡아놓으라고 했잖아"

"방은 없는데 괜찮으면 여기서 자도 된대" 하면서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트레킹 가이드들의 방으로 맨 바닥에 침대를 놓은 허름한 방이었다.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화장실 바닥도 아니고 어차피 내일 새벽 3시에 출발해야 했으므로 숙소에 마음 쓸 필요가 없었다.

 

토롱페디(Thorung Phedi, 4,450m)는 토롱라(Thorung La, 5,416m)를 넘기 위한 사실상의 마지막 캠프이다. Thorung Phedi의 Phedi는 고개의 뿌리(Foot of the Hill)라는 의미라고 하니 여기가 Thorung La의 시작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침대에 베낭을 내려놓고 카메라만 들고 나왔다.

하이캠프까지 올라갔다 내려올 요량이었다. 고소적응도 해야 하고 내일 새벽에 올라가야 하는 길이다. 주변 사진을 찍기에도 좋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롯지에서 하이캠프까지는 거리는 멀지 않아도 고도차가 500m인 거의 수직에 가까운 경사였다.

 

잔 자갈길이라 밑으로 돌이 구르면 멈추지 않고 아래까지 굴러 떨어졌다. 다섯 걸음 걷고 쉬고 다섯 걸음 걷고 또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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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롱페디의 롯지 식당. 유럽 트레커들이 대부분이다.

 

하이캠프에서 토롱페디로 다시 내려오니 토롱페디의 롯지 식당은 발디딜 틈도 없이 트레커들과 가이드, 포터들로 붐볐다. 트레커들은 롯지에 도착하면 별로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식당에 모여 낯선 사람들과 여행이야기를 하거나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저녁을 먹고 차 한잔 마신 뒤 어두워지면 각자 방으로 돌아간다.

 

토롱페디 식당에는 100여명의 트레커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현지인들을 빼고는 동양인 트레커는 나 혼자였다.

 

마늘 수프와 달밧으로 저녁을 먹고 새벽 3시에 출발하겠다며 마늘 수프와 뜨거운 물 1리터를 예약한 뒤 방으로 돌아왔다. 마늘 수프는 입맛에도 맞았지만 고소증에 효과가 있다고 해서 매 끼니마다 주문을 했다. 주둥이가 큰 날진 물통에 채운 뜨거운 물은 여러가지로 유용했다. 커버가 된 날진 물병에 뜨거운 물병을 채워 침낭에 넣고 자면 새벽까지 온기가 남아 있어서 난방이 없는 롯지에서 따듯한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 물은 다음날 식수로 사용한다.

 

한 밤에 포터 기리가 방으로 찾아왔다.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비상약으로 넣어간 타이레놀을 줬다. 비아그라 한 알을 반으로 나눠 반은 잠자기 전에 먹고 반은 새벽에 출발하면서 먹으라고 줬다. 기리는 나보다 하루 먼저 고소증세를 보였고 많이 지쳐 있었다. 하산길에도 지친 기리 때문에 몸 고생과 마음 고생을 하게 됐지만 착하고 순진했다. 세 살 난 아들이 있는 스무살의 가장이었다.

 

바람소리는 점점 세지고 있었다.

새벽은 아직 멀었는데 머리는 쥐어짜는 듯이 아파오고 속은 메스꺼웠다. 뒤척여봐도 웅크려봐도 아픔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4,450m. 토롱페디의 밤은 그렇게 고통이었다.

 

 

새벽 3시.

안나푸르나 라운딩 7일째를 맞았다.

대망의 정상 토롱라를 향하는 날이다.

 

포터 기리가 점점 힘에 겨워하고 있어 그에게 맡겼던 짐 중 일부를 내 베낭으로 옮겨서 기리의 짐 무게를 줄여주었다. 어차피 둘 중 한명이라도 토롱라를 넘지 못하면 묵티나트로 가지 못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가야 할 처지였다.

짐을 넘겨주면서 기리에게 부탁했다.

 

지금 바로 출발해서 뒤도 돌아보지 말고 무조건 토롱라를 넘어.

 

토롱라를 넘어가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기리를 먼저 출발시켰다. 이제 되돌아 오는 선택은 없어졌다. 어떻게든 토롱라를 넘는 수 밖에...

 

새벽 4시. 토롱페디 출발.

 

헤드랜턴을 켜고 어제 오후에 답사했던 하이캠프 가는 길을 다시 밟아 나갔다. 고소 증세와 베낭 무게 때문에 발이 자꾸 헛디뎌 지고 미끄러졌다. 5,000m의 고소에서는 공기중의 산소량이 거의 반으로 줄어든다. 낮은 곳에서도 비탈길을 오르면 숨이 차오르는데, 고소이다 보니 평지에 있을 때보다 4배나 숨을 더 쉬어야 했다. 속도가 나지 않았다.

 

한 시간 걸려 하이캠프에 도착했다.

하이캠프에서 고소증세에 시달리며 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렸다.단체 트레커가 출발했다.

그들을 뒤따라가기로 했다. 트레킹 전문 셀파가 속도를 조절하고 있으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안나푸르나의 설산 꼭대기들이 어제처럼 아침햇살을 반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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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롱페디에서 하이캠프를 지나 토롱라로 향하는 트레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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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롱라 정상이 보이는 마지막 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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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롱라 정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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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롱라에서 본 안나푸르나 봉우리들.

 

정상이 보인다.

토롱라 정상에는 돌을 쌓아 만든 작은 오두막 찻집과 정상을 표시하는 '타르초'가 세찬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오전 7시 40분. 

 

, 나는 얼마나 고통스럽게 이 길을 걸어 왔는가.

내가 견디며 걸어왔던 길은 왜 이렇게 험하고 옹색한 것이었을까.

저 푸른 하늘과 구름과 안나푸르나의 봉우리들은 눈부시게 서있는데, 작은 몸 하나를 이 곳까지 끌고 온 것은 무엇을 위함인가.

 

정상을 바로 앞에 두고 멈춰서서 뒤를 돌아본다.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몸을 가느다란 막대기 두 개에 의지한 채 고개를 숙였다. 생채기 나고 옹이졌던 그 동안 내가 걸어온 모든 세월들을 다 털어내 버릴 듯 '꺼이꺼이' 소리를 삼키며 한참을 울었다.

 

정상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내 몸이, 내 영혼이 이 땅과 하나되어서 같이 숨쉬기를 열망하는 것일 뿐. 세속적인 다툼과 승부가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고립이라는 것!

 

모든 관계에서 떨어져 있어보면 그 모든 관계들이 명확해진다. 내가 걸어왔던 길, 또 걸어가야 할 길. 나와 관계했던 모든 인연들이 이 고립에서 비로소 새로운 의미를 갖는 것이다.

                       

- /바람처럼/ - 카메라와 길을 가다 / blog.chosun.com/tellme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