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의 다양한 문화

-* 북한선성 12성문 종주 *-

paxlee 2011. 3. 8. 21:40

 

                   북한선성 12성문 종주

 

문 하나 열 때 마다 역사 한 장 넘어가네

 

많은 사람들이 북한산을 처음 오를 땐 우이동이나 북한산성 계곡에서 백운대를 찍고 돌아오는 걸 전부로 여기곤 하지만 차츰 산행 이력이 늘수록 능선 종주를 하고 싶어 한다. 12성문 종주는 북한산의 대표적인 능선 산행으로, 꽉 채운 당일치기 코스로 여전히 각광받고 있다.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산행스타일은 조망이 좋고 위험하지도 않은 능선을 걷는 것이라고 하는데, 북한산 성문 종주는 이런 경향과 가장 잘 맞아 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성문은 빙 둘러가며 폐곡선을 그리고 있어 열두 개의 성문 중 어느 쪽을 기점으로 삼아도 관계없지만, 대부분 자신이 가장 접근하기 쉬운 곳에서 시작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중 대서문에서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며 대남문, 대동문, 위문을 거쳐 북문과 서암문(시구문)으로 내려오는 코스는 접근이 편리하고 산행이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 가장 많은 사람들이 12성문 종주의 기본 코스로 여긴다. 북한산성을 축성한 뒤 낸 보고서인 <비변사등록> ‘북한축성별단’에는 지금과 같은 13개의 성문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지만 이후 나온 <북한지>에는 수문을 포함해 16개의 문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지금과는 부르는 이름이 다소 다르고 높이, 규모도 달라 어느 쪽이 정확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지금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성문은 중성문을 포함해 모두 13개다. 이것 말고도 북한산성 계곡 하단에 수문의 흔적이 있지만 지금은 북한동 철거공사로 접근이 막혀있다. 어쨌든 북한산의 등줄기를 타고 넘어가는 12성문 종주는 내내 장쾌한 풍경이 이어지고 가파른 구간이 많지 않아 초보자도 쉽게 도전해볼 수 있는 산행코스가 되었다.

 

대남문에서 대성문 사이의 성벽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12성문 종주 내내 시원하게 전망이 트인다.

                 

북한산 역사 따라가는 12성문 종주


북한산성의 축성은 이미 삼국시대 때부터 있었다고 하나,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춘 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인 숙종 37년(1711) 때이다. 말하자면 두 차례 엄청난 시련을 당한 뒤 만든, 소 잃고 난 뒤의 외양간인 셈인 것이다. 성이란 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기능이 첫째 목적이라고 한다면 북한산성은 수도를 보호하는 기능에서는 별 소용이 없다. 당시의 한양에서부터 한참이나 외곽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성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을 닫을 경우 문짝이 걸리게 되어있는 문지석(門持石)에서 그 까닭을 찾을 수 있다. 북한산성의 성문들은 모두 폐곡선의 안쪽에서 잠글 수 있도록 되어있는데, 전쟁이 나면 수도를 버리고 산성 안으로 피신하기 위한 용도였기 때문이다. 왕과 지도층들의 이 같은 생각이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한심하기 이를 데 없지만, 어쨌든 북한산성은 공사를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모든 성벽과 문들이 완공되기 이르렀다. 그러나 이후 한국전쟁 때를 제외하곤 이곳에서 한 번도 전란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한편으론 다행이면서도 성문 공사에 동원됐던 민초들의 고충을 생각하면 더욱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2성문 종주의 첫 번째인 북한산성 계곡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대서문은 성 안 북한동 주민들이 대대로 이용해오던 문이다. 북한동에서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건 600여 년이나 된다고 하는데, 씨 뿌릴 밭 한 뙈기 찾아보기 힘든 가파른 비탈에서 사람들의 삶 역시 궁벽하게 이어져 왔을 것이다. 1950년대까지 주민들이 나무를 해 달구지에 싣고 내려가 서대문까지 내다 팔았다고 전하는 이곳의 역사를 대서문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일제시대 때 다른 문들처럼 문루가 파괴되어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58년 최헌길 경기도지사가 복원하고 오솔길을 확장해 지금과 같은 차가 다닐 수 있는 길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대서문에서 오른쪽 능선을 따라 가파르게 솟은 의상봉을 오른다. ‘의상능선’이라고도 하는 이 길은 과거 김신조 일행 침투사건으로 1990년대 초반까지 막혀있었지만 이후 관리공단에서 몇몇 위험구간에 난간을 설치하는 등 정비해 개방했다. 벌떡 선 의상봉은 오르기 전부터 한숨이 나오게 하지만, 막상 길로 접어들면 아기자기한 바위를 오르내리는 맛이 있어 간간히 트이는 전망과 함께 재미를 더한다. 의상봉 정상까지는 40여 분. 이후론 줄곧 북한산을 빙 둘러싼 산성을 따라 크고 작은 바위 봉우리들이 한눈에 펼쳐지며 산의 속살을 보여준다.

 

         대성문에서 바라본 대남문. 보현봉과 문수봉 사이 안부에 자리 잡은 대남문은

         12성문 중 가장 먼저 복원된 곳이다.

 

의상봉에서 내려서면 두 번째로 만나게 되는 곳이 가사당암문이다. 성 밖으로 나가면 중골이 있는 백화사쪽으로 내려가게 되고, 성 안으로는 최근 증축한 국녕사로 이어지는 계곡 안부에 자리한 문이다. 이곳은 대서문과 달리 문 위에 누각을 설치하지 않았는데, ‘암문’이라 불리는 곳들의 공통점이다. 다른 큰 문들이 성의 주된 방어를 목적으로 지어져 양반이나 세도가들이 드나드는데 쓰였다면, 작고 초라한 암문들은 밖에선 드러나지 않아 비상시 이용하는 비밀 통로였던 한편, 평민들이 오고가는 문으로 쓰였다. 

 
이제 용출봉과 용혈봉, 증취봉으로 이어지는 암릉이 계속된다. 북한산의 암릉들은 천연 성곽으로 이용돼 누구도 허물 수 없는 자연이 만든 요새였는데, 의상능선뿐 아니라 만경대 구간, 염초봉 구간 등 거대한 바위능선들은 인간이 만든 낮은 담장에 비할 바가 아니다. 몇해 전 낙뢰사고가 나기도 했던 용혈봉을 넘어 부왕동암문으로 내려서다보면 바위 아래 쉬어가기 좋은 널따란 안부가 나온다. 예전에 모 산악회에서 코스를 개척해놓은 곳으로 야영을 했던 흔적들도 있지만 지금은 그저 잠시 둘러보고 갈 뿐이다.

 

부왕동암문은 삼천사 계곡과 부왕사지를 잇는다. 이 역시 암문이지만 다른 문들에 비해 규모가 크고 형태가 단순한 사각형이 아닌 위쪽이 둥근 홍예문 형태를 하고 있다. 또 내부 성돌 틈도 석회로 마감해놓아 이 문이 다른 암문들에 비해 공을 많이 들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제 길은 나월봉과 나한봉으로 이어진다. 지금은 나한봉 일대 암릉에 우회로가 나 있어 9부능선으로 돌아가도록 되어있지만, 그보다 실제 암릉에 올라서는 게 경치가 훨씬 좋다. 마치 ‘작은 공룡능선’을 지나는 듯한 이 구간은 시원스레 트인 조망과 기암이 어우러져 북한산에서 볼수 없던 또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하지만 길이 가팔라 다소 위험하기도 한 구간이다.


나한봉에서 문수봉까지는 아예 8부능선으로 돌아가도록 길이 나 있다. 청수동암문을 지나가게 되지만, 문화재인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청수동암문은 의상능선에서 승가봉~비봉과 연결되는 부분에 위치하는 요충지로, 성 안쪽으로는 군의 지휘소였던 남장대지와 연결된다. 문수봉을 뒤로 돌아 오솔길을 따라 나아가면 가파른 오르막을 10여분 올라 대남문의 웅장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비봉능선과 사자능선이 학의 날개처럼 펼쳐진 가운데 몸통 부분에 자리 잡은 대남문은 마치 서울 중심부를 두 날개로 껴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남문은 북한산의 모든 성문들이 누각이 없는 채로 방치되던 때 가장 먼저 복원을 시작한 곳인데, 1991년 복원계획이 알려지자 시민들이 산행길에 봉사하며 기왓장을 나르는 등 정성을 다한 끝에 지금과 같은 모습을 찾게 됐다. 대남문에서 바라보이는 두 봉우리 문수봉과 보현봉은 12성문 종주 중 몇 손가락에 꼽힐 만큼 경치가 빼어나다. 특히 문수봉 아래 자리 잡은 문수사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그만인데, 고려시대 창건한 천년 고찰인 문수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태어나기 전 그의 어머니가 백일기도를 한 곳이라고 해 1958년 이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도 들러 참배한 곳으로 유명하다.

 

험할 것 없는 암릉과 오솔길의 앙상블


대남문에서 위문까지는 산성주능선이라 불리는 구간으로 지나온 곳과 같은 바위구간은 거의 없고 평탄한 오솔길이 줄곧 이어진다. 성곽을 따라 걸으려면 대남문 문루에서 계속 능선으로 난 길로 가야하며, 문 아래쪽엔 대성문까지 우회로가 따로 나 있다.
대성문은 12성문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성밖길은 형제봉능선을 지나 북악터널 위 보토현으로 이어지고 성 안쪽으로는 행궁터로 닿는다.

 

북한산성을 연구해 온 조면구씨는 <북한산성>에서 ‘대성문은 그 주변 여건을 검토해볼 때 중요성이 크지 않지만 가장 크게 지어진 까닭은 경복궁과 가장 가까운 경로이기 때문에 유사시 임금이 행궁으로 통하는 관문이 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대성문에 관해서는 다소 엇갈린 기록들이 남아있다. <비변사등록>에는 대성문이란 이름이 없을뿐더러, 지어진 연도도 나와 있지 않다. 다만 대성문 안쪽 벽에 새겨있는 건설 책임자의 이름과 기록상 현재 대동문의 책임자가 일치하고 규모도 같아 대성문의 본래 이름이 대동문이었으며, 지금의 대동문은 소동문이라 불렸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원효봉에서 바라본 대서문. 북한동 주민들이 오랫동안 이용해오던 문이다.

 

‘왕의 문’을 지나면 보국문이 나온다. 나라를 돕는다는 거창한 이름에 걸맞지 않게 다른 암문들과 같은 초라한 사각 통로인 보국문은 과거 보국사라는 사찰이 있었기에 그렇게 불린다고 전해지며, 처음엔 동암문이라고 명명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북한산성 축성 전인 1707년 성호 이익이 쓴 <유삼각산기>에는 이곳을 석가령이라 부르고 성밖 정릉 계곡을 조계라고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보국문에서 20여분을 더 가면 대동문에 닿는다.

 

문 안쪽엔 너른 광장과도 같은 공간이 있어 여러 사람들이 쉬어가곤 하는 이곳은 언뜻 보면 대성문보다 규모가 더 커 보인다. 북한산성 내 부대들의 사령부였던 금위영을 옮긴 기록인 금위영이건기비에는 ‘당초 금위영을 소동문 안에 세웠으나 비바람에 무너질 염려가 있어 옮겼다’는 내용이 담겨있는데, 때문에 대동문의 본 이름이 소동문이었으며, 너른 광장은 금위영 터였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축성 이후 왕조가 몰락하기까지 한 번도 전란을 겪지 않은 북한산성이지만 곳곳에서 한국전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있다. 대동문 바깥쪽에 나 있는, 비행기에 쏜 듯한 총탄의 흔적들은 깊은 상처로 여전히 남아있다.


대동문에서 10여분 거리 능선엔 멀리서도 확인할 수 있는 높은 누각이 서 있다. 북한산성 내에 주둔하던 군대를 지휘할 목적으로 세운 동장대다. 동장대를 지나면 노적봉, 만경대 인수봉의 절벽이 한눈에 들어오며 장쾌한 풍경이 펼쳐진다. 과거 19야영장으로 사용되던, 현재 북한산대피소가 있는 공터는 본래 용암문 부근의 수비를 담당했던 용암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1968년 엠포르산악회에서 세운 엠포르산장과, 70년대 신축해 주능선을 지나는 이들이 쉬어가곤 했던 북한산장은 이제 무인대피소가 되어 아쉬운 모습으로 남아있다. 그 옆에 허물어진 돌덩이들에서 용암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어 쓸쓸함은 더한다.


용암문 또한 암문으로 성내 중흥사와 태고사를 연결하는 통로가 된다. 쉽게 쓸 수 없었던 용(龍)자가 암문에 들어가 의아하지만 문 위쪽, 만경대 능선 상의 용암봉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본래 용암봉 암문, 또는 용암 암문으로 불리던 곳이다. 용암문을 지나면 노적봉과 갈라지는 능선 고갯마루를 지나 위문까지 작은 바위들을 지나야 하는 구간이 나타난다. 위문 거의 다 가서 철주난간이 박힌 사면에서 바라보는 백운대 남면의 모습은 웅장하기 그지없다.

 

가파른 계단길을 오르면 백운대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 위문에 닿는다. 위문이라는 이름은 일제시대에 붙여진 것으로, 본 이름은 백운봉 암문이었다. 지킬 위(衛)자를 썼으니 그 뜻은 나쁠 것이 없는데 그래도 백운봉 암문이라는 말이 더 입에 감기는 맛이 있다. 위문 양옆으로는 성벽을 복원해놓았지만, 굳이 그 벽들이 아니라도 만경대와 백운대의 가파른 바위들이 천연의 요새 역할을 해주는 곳이다. 백운대 정상을 들러도 좋고, 북적이는 것이 싫다면 다시 발을 돌려 북한산성 계곡 쪽으로 내려가면 된다.

 

빠듯한 하루 코스로 계획하기 좋아


위문에서 북문까지는 또 다시 원효능선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곳은 염초봉 구간이 전문 장비가 필요한 암벽 구간이라 쉽게 걸어가기 힘들기 때문에 계곡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북문으로 올라서는 게 좋다. 약수암터를 지나 계곡길로 줄곧 내려가다 보면 표지판이 있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상운사와 북문 방향 오른쪽으로 길을 틀어야 한다. 모노레일이 깔린 곳을 지나 가파른 계단길을 20여분 오르면 북문에 닿는다.


지금까지 지나왔던 다른 문들과 달리 북문은 훼손 상태가 심각하다. 본래 다른 문들처럼 문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오래 전에 소실돼 흔적을 찾기 힘들고, 문 위쪽도 구멍이 뻥 뚫려 노출돼 있어 을씨년스럽다. 지난 1988년에는 큰 비로 성벽 일부가 붕괴되기도 했던 곳이다. 이 문을 지나면 효자동쪽으로 내려갈 수 있어 지금도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다른 문들이 새롭게 복원돼 문짝이 달려있는데 비해 북문은 이 같은 시설이 없어 오솔길 사이로 들여다보면 옛날 생각이 나기도 한다.


북문을 지나 원효봉에 오르면, 12성문 종주의 보너스 같은 마지막 선물이 남아있다. 원효봉 정상에서 바라보이는 백운대와 만경대, 노적봉의 모습은 전국 어느 명산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장엄한 스케일의 파노라마다. 마침 성문 종주를 마칠 즈음이기에 서쪽 하늘에 석양이 물들기 시작한다면 온통 낯을 붉히는 거석들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 서암문으로 향하는 길, 내리막 중간에 갑자기 나타나는 서암문도 북문과 같이 문루가 소실됐지만, 시구문이라 불리며 성내 시신들이 나가던 곳이라는 말과는 달리 포근함이 느껴진다. 오히려 뻐근한 다리와 지친 육체를 달래줄 무한한 평화가 찾아오는 걸 느낀다면, 12성문을 걸으며 그 이름과 역사를 다 외진 못한다 한들 아쉬울 것 없다.

 

원효봉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면 백운대와 만경대, 노적봉의 파노라마가 한눈에 들어온다.


                      -  글 이영준 기자 / 사진 양계탁 기자 / 월간 마운틴 100 명산 북한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