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의 다양한 문화

-* 100명산 금오산(金烏山/977m)을 가다 *-

paxlee 2011. 3. 16. 12:50

100명산 금오산(金烏山/977m)을 가다

 

산행코스 / 탐방안내센터~대혜폭포~할딱고개~약사암~현월봉~할딱고개~탐방안내센터

 

3월의 산은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을 기다리는 시기이므로 실상 삭막하기 그지없다. 산 끝자락에는 물오른 가지마다 색색의 봄꽃들이 꽃망울을 터트리지만 산의 품속은 봄의 싱그러움이나 연두빛의 산뜻함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 잎조차 다 떨어뜨린 작년 늦가을의 모습을 겨울이란 냉동고에 꽁꽁 얼려뒀다 이제 막 3월 봄 햇살 아래 꺼내 해동시키는 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겨울산의 황홀한 설경에 한껏 높아진 심미안에 도무지 성에 안 찰 풍경이다. 3월 중순 펑펑 내리는 눈을 보고 ‘눈부신 설산을 다시 보는구나!’ 싶어 입가에 웃음이 자꾸 삐져나왔다. 다음날 제가 이 시절의 주인공인양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눈꽃이 피어올랐다. 눈 속에 덮여버린 매화꽃에 대한 애석함은 아주 잠깐이었다.

 

30년만에 폭설이 내린 3월의 금오산에서는 따뜻한 봄 햇살 아래 딱 하루동안 눈꽃축제가 벌어졌다.

 

눈이 내린 다음날은 온종일 찌뿌듯하더니 산행날은 일기예보대로 최상의 날씨였다. 파란 하늘 아래 흰 산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구미에 몇 년 만에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린 것이라 그런지 산을 찾은 등산객들이 제법 많았다. 금오산도립공원관리소 청원경찰 현영길씨와 구미 케이블 HCN 새로넷방송의 ‘김상사의 아웃도어’ 촬영팀 김영규 박정묵 김현애씨가 함께 했다. 탐방안내소가 있는 입구에서부터 시작되는 케이블카를 타면 해운사까지 5분 만에 닿지만 걸어가도 30~40분이면 너끈하다.

 

돌을 깔아 잘 정비된 등산로 우측으로 돌탑들이 이어진다. ‘21C 돌탑’이라 이름붙인 이것들은 1999년 3월부터 21세기를 앞두고 구미시민의 화합과 힘찬 도약을 기원하고 탐방객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21기의 돌탑을 축조한 것이다. 금오산에 흩어진 자연석들을 이용하여 세웠다는데 높이가 작은 것은 2m부터 큰 것은 7m까지 그 크기와 높이가 매우 다양하다. 계곡을 따라 등산로가 이어지는데 케이블카 종점 주변에 영흥정(靈興井)이 있다. 바위산인 금오산은 가뭄이 들면 물이 귀하다.

 

사시사철 충분한 식수 확보를 위해 지하 수맥을 탐사해 4번의 시추 끝에 지하수를 개발했다. 그 지하수가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영흥정이라 이름 짓고 표석도 세워놓았다. 금오산은 강우기를 제외하고 계류의 흐름이 풍부하진 못해도 각 지역마다 샘이 많아서 식수에 곤란을 겪지는 않았다. 다만 금오산에 묘를 쓰면 1년간 비가 안 온다는 말이 있어 오래도록 비가 내리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이 몰려가서 묘를 파내거나 주인에게 파내라고 시킨 후 금오산에 기우제를 지내곤 했다고 한다.

 

신라말 도선이 창건한 대혈사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철화스님이 지금의 절을 복원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해운사를 지나면 곧 우렁찬 소리를 내뿜는 거대한 폭포를 보게 된다. 깎아지른 절벽에서 떨어지는 대혜폭포는 그 높이가 27m라 규모도 커 대단한 볼거리다. “아무래도 바위산이 되어서 이 계절에 이정도의 수량을 구경하기 힘든데 올해는 눈도 많고 봄비도 많이 내려서 수량이 풍부하다”며 설명한 현영길씨가 “좋은 때에 왔다”고 덧붙인다. 금오산관리사무소 청원경찰인 탓에 현영길씨는 매일같이 금오산을 오르내리는 것이 그의 일이다.

 

금오산 정상까지 얼마나 걸리냐는 질문에 “워낙 자주 다니기에 1시간 5분 정도”라고 대답한다. 쉬엄쉬엄 오르긴 했지만 대혜폭포까지 거의 한 시간이 걸렸던 터라 일행들은 화들짝 놀랬다. 대혜폭포 오른편으로 병풍처럼 늘어선 바위벼랑을 끼고 북쪽으로 가면 도선굴이 있다. 구미공단과 낙동강, 그 멀리 해평의 냉산까지도 조망되는 곳으로, 도선대사가 이곳에서 참선하여 도를 깨우친 곳이라고 한다. 그 넓이가 16척, 높이가 15척, 안으로 깊이가 24척에 얽어 만든 집이 두 칸이었다고 하는, 내부가 30평정도 되는 꽤 큰 굴이다. 임진왜란 때 인동과 개령의 수령과 향민들의 피난처였는데 길이 워낙 험해 왜군들이 빤히 보고도 접근하지 못 했다고 한다.

 

금오산의 명물, 오형돌탑과 마애보살입상

 

약사암 작은 암봉 위에 세운 누각의 범종은 일년에 두 번 1월 1일, 사월 초파일에 타종을 한다.

 

대혜폭포부터는 나무계단이 이어진다다. 김영규씨가 “2년 전 만해도 바위 벼랑을 따라 할딱고개를 올라야 해서 오르기 꽤나 힘들었는데 공단에서 나무계단을 설치하면서 많이 수월해졌다”고 한다. 계단을 한참 올라가니 ‘할딱고개’라는 안내판이 나오는 쉼터다. 정상까지 이제 1단계지점이다. 금오산 등반 코스 중 가장 숨이 찬 지점이라 해서 예로부터 할딱고개라 불려졌다. 안내판에는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면서 다시 한 번 숨을 고르라 권유한다. 그 말대로 앞쪽이 탁 트인 조망처라 금오산저수지와 그 너머 구미 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계단에 일행들의 호흡은 가빠지고 말수는 줄어든다. 계단이 끝나도 만만치 않은 경사길이 계속된다. 이쯤 되면 평소 등산을 자주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구분된다. 선두 그룹은 어느새 꽁무니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가 버렸고 후미 그룹은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도 영 속도가 시원치 않다. 대혜폭포에서 오른 지 1시간이 조금 못 미처 갈림길이 나온다. 좌측은 마애석불 0.6km, 우측은 성안을 지나 정상까지는 0.9km라 알리는 안내판에서 아직 보이지도 않는 정상이건만 아주 지척처럼 느껴진다. 성안을 지나 정상까지는 많은 이들이 지나간 터라 러셀이 되어 있는데, 좌측의 길은 러셀이 거의 안 되어 있다시피 하다.

 

보물 490호인 마애보살입상이 있는 곳까지 가 보고 더 나아갈지 다시 돌아올지 결정하기로 했다. 무릎 이상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가노라니 허공을 향해 불쑥 튀어나온 암반 위에 돌탑이 여러 기 서 있었다. 오형돌탑이라는 팻말을 매단 여러 무리의 돌탑은 21C돌탑과 달리 돌탑을 손보고 있던 한 중년 남성이 6년을 걸쳐 만든 것이었다. 금오산을 다니다 돌탑을 쌓다보니 하나 둘 늘게 되었다며 속사정은 얼버무리며 다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작품들은 하나하나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돌탑들은 꼭대기에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무언가를 형상화해 놓았다.

 

꼭대기에 동굴처럼 만들고 불상을 갖다 놓은 석굴암탑, 뫼 산자 모양으로 돌을 쌓은 산탑, 사자모양 사자탑, 알을 품은 암거북이탑,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씨가 탔던 우주선 로켓모양의 탑 등등 만든 이의 정성과 수고로움이 그대로 나타나는 한편 그 모양도 아주 기발했다. 특히 석굴암탑의 부처님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데, 이는 동굴 바닥에 십 원짜리 동전을 두어 밖에서 들어온 빛이 반사돼 부처님 얼굴에 어리도록 해 놓은 것이었다. 오형돌탑을 구경한 후 10여분 정도 더 가니 마애보살입상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제법 넓직한 터가 있고 암벽에 남향으로 조각된 보살상은 특이하게도 모서리를 중심으로 좌우벽에 걸쳐 부조로 조각되어 있었다.

 

풍만한 인상과 천의 자락을 조각한 수법으로는 10세기 이후로 조성이 된 듯 한데, 편편한 면을 두고 굳이 보살이 모서리에 조각된 예는 아직 어디에서도 발견되거나 조사된 바가 없을 정도로 특이한 경우라고 한다. 이곳부터 약사암으로 향하는 등산로는 발자취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거진 눈밭이었다. 현영길씨가 “이곳은 계곡길이라 눈이 많아 위험할 수 도 있고, 돌아가더라도 레셀이 잘 된 길로 오르는 것이 더 빠를 것”이라고 했지만 눈 앞에 약사암이 빤히 보여 다시 돌아가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약사암에서 점심공양을 하기로 한 터라 시간을 단축할 필요도 있었다. 잠시 동안 고민한 후 러셀을 해서라도 바로 약사암으로 나가기로 했다. 백운봉을 중심으로 살짝 돈 후 약사암을 향해 바로 계곡을 올려치는 것인데 수북한 눈으로 때때로 허벅지까지도 닿기도 했지만 길은 생각만큼 험하지 않았다. 이제껏 올라오면서 몸이 풀렸는지 뒷사람들과 간격까지 벌여가며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가볍게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러셀이 힘들어도 올해 마지막 심설산행이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에 즐겁기까지 했다.

 

27m의 높이에서 우렁찬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대혜폭포는 은혜가 크다 하여 그 이름이 붙었다.

 

벼랑에 매달려 허공에 뜬 약사암


고개를 올라서니 약사암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천길낭떠러지 벼랑 위에 지어진 약사암은 의상대사가 수련하고 득도해 이 절을 세웠다고 전하나 기록은 없다. 다만 약사암의 모습에 관한 기록이 있다. 최인재의 <일선지>에 의하면 ‘약사봉은 천애 낭떠러지 아래 있으며 나무판자 다리를 놓아 들어갈 수 있으나 그 아래는 아득하기만 하여 가히 굽어 볼 수 없다’고 했다. 점심공양을 달게 먹고 약사암 앞뜰에 오르니 뒤도 벼랑, 앞도 절벽이다. 정면에는 금오산의 절벽과 능선이 늘어섰고 좌측에는 구미 시가지가 펼쳐진다.

 

약사암 건너편에 큰 바위 하나로 이루어진 절벽 위에 범종이 걸린 누각이 들어서 있다. 누가 어떻게 저 절벽 위에 아슬아슬한 누각을 짓고 종을 달았을까 싶은데 감탄이 절로 나온다. 1년에 두 번, 1월 1일 자정과 사월 초파일에 타종을 한다. 약사암의 주지 성관 스님은 “30년 동안 여기서 살면서 이번 같이 눈이 많이 온 건 처음이인데 거의 50cm정도 쌓인 것 같다”며 뜰에 쌓인 눈을 쓸어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절벽 위에 매달린 절인데 절 아래는 모두 물탱크라고 한다. 바위산 정상에 자리한 절이라 물이 아주 귀하기 때문이다. 약사암에서 2.2.km 떨어진 성안에서 물을 급수하는데 겨울에는 얼어서 물이 안 나오기에 여름에 받아놓은 물로 겨울을 난다고 한다.

 

왜 물도 없는 곳에 절을 세운 것인가 물어봤다. “의상스님은 수행 중에 땅에서 솟는 물을 안 먹었어요. 천수,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 내지는 이슬을 먹고 살았던 겁니다. 그래서 의상스님이 창건한 사찰은 물이 부족합니다. 영주 부석사도 물이 넉넉지 않은 절이지요. 대개 의상스님이 창건한 사찰은 물이 귀하고, 원효스님이 창건한 절은 물이 풍부한데, 물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고 알려져 있죠.” 그야말로 경치가 빼어난 약사암에 물이 부족한 문제점이 있으니 다 좋을 수는 없는 가 보다.

 

약사암에서 바라본 풍광도 좋지만 맞은편 조망바위에서 바라보면 벼랑 좁은 틈 사이에 세워져 흡사 공중에 떠 있는 것 같고 범종 누각과 약사암까지 걸린 흔들다리도 멋진데, 그 뒤로 구미 시내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지상에 속해 있으되 지상에 닿아 있지 않는 모순된 절, 허공에 떠 있는 모습이 세속에서 벗어난 듯하다. 조망바위는 정상에서 헬기장을 지나 5분 정도 돌아가면 나온다. 약사암에서 동국제일문을 지나 10분을 걸어 오르면 금오산 현월봉 정상이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정상은 지금은 철수하고 없는 미군 송신탑이 철조망을 두른 채 남아있어 일반사람들의 발길을 막고 있다.

 

주인 없이 버려진 흉물들의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그 언짢은 기분이 오래가지 않을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한 점 구름 없이 파란 하늘을 향해 뻗은 눈 덮인 나뭇가지들이 흰 산호초 군락 같은 모습이었다. 이제껏 구미만 보여주던 조망은 남쪽 칠곡과 김천쪽으로도 비로소 트인다. 하산 길에서 대혜폭포를 지나자 갑자기 눈이 없어지기 시작해 금오산 입구 주변은 언제 눈이 왔냐는 듯 따뜻한 햇살에 모두 녹고 없었다. 800m 남짓 내려오면서 눈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지난 겨울에서 본 그 어떤 것보다 더 화려한 눈꽃은 어떤 봄꽃보다 찬란했다. 금오산 품에 들어갔으나 그것은 짧게 피고 진 눈꽃처럼 사그라질 겨울의 품이었고, 그 품에 안겨 미련 없을 작별인사를 나눈 것이었다.

 

백운봉을 두르는 등산로에서 만난 조망처에서 내려다본 구미 시가지. 구미 시가지와 가까이에 자리한 금오산은 평일에도 많은 이들이 찾는다.

 

                         - 글 김 난 기자 / 사진 양계탁 기자 / 월간 마운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