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의 다양한 문화

-* 100명산 지리산(智異山 /1,915m )을 가다. *-

paxlee 2011. 3. 17. 10:27

          100명산 지리산(智異山 /1,915m )을 가다.

 

지리산은 크다. 지리산의 ‘큼’은 물리적인 길이와 높이, 넓이 따위가 정도를 넘는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동서를 가로질러 100여 리에 달하는 주능선과 거기에서 갈래 친 15개의 크고 작은 지능선이 남북을 향해 뻗었다. 부챗살 같은 산줄기의 주름 사이로는 수백갈래의 크고 작은 골들이 흐르고 흘러 섬진강과 낙동강으로 모여든다. 백두대간의 마지막 용틀임으로 우뚝 선 이 산자락은 호남과 영남에 두루 걸쳐 남원과 구례, 하동과 산청, 함양까지 5개 군과 15개 면과 읍에 그 발치를 드리웠다.


둘레만 자그마치 8백리에 달하는 이 ‘크고도 큰’ 산은 해발 1400m가 넘는 봉우리만도 20여 개를 넘게 거느리고 있다. 최고봉 천왕봉(1915.4m)과 동쪽으로 이를 옹위하여 부복한 중봉(1874m)과 하봉(1781m), 써리봉(1602m)이 이어진다. 도저한 산줄기의 흐름은 내처 서쪽으로 이어진다. 연하봉(1730m)과 촛대봉(1703.7m)을 지난 주능선은 영신봉(1651.9m)에서 낙남정맥을 분기하고도 여전히 굵은 선으로 굳건히 서진한다.

 

덕평봉(1521.9m)과 명선봉(1586.3m), 토끼봉(1534m)을 지나면 전북 전남 경남 3도를 가르는 삼도봉이다. 이어 주능선에 슬쩍 비켜 선 반야봉(1732m)을 지나 노고단(1507m)과 종석대(1356m)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돌린 산줄기는 고리봉(1248m)과 만복대(1433.4m)로 짓쳐 흐른다. 백두대간으로 불리는 이 산줄기는 북으로 북으로 이어져 마침내는 이 땅 모든 산하의 조종 백두산에 이른다.

 

촛대봉에서 천왕봉을 바라본다. 삼신봉과 연하봉, 제석봉으로 이어져 마침내 천왕봉에 이르는 주능선이 초록색의 용 등줄기처럼 꿈틀거린다. 때마침 푸른 하늘에도 용틀임 같은 구름이 흘러간다. 사진 양계탁


산이 높으면 물이 깊은 법. 동서로 가로누운 주능선에서 거의 수직으로 분기한 지능선 사이로는 이름난 계곡들이 사시장철 풍성한 계류를 쏟아낸다. 뱀사골, 한신골, 칠선골 등 북으로 흐르는 물줄기들은 낙동강의 지류인 엄천강으로 흘러들고, 왕시리봉능선과 불무장등 사이로 흐르는 피아골과 대성골 등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모두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지리산에서 흘러나온 이 물줄기를 따라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니 남원과 구례, 하동, 산청, 함양 고을이 산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자리 잡았다.

 

그보다 더 오래 전 마한의 유민들은 반야봉 아래 달궁에 자신들의 왕궁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지리산은 산자락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을 오래 전부터 먹여 살렸다. 구례와 남원, 하동은 지리산에서 비롯한 섬진강 덕분에 비옥한 들판이 펼쳐진다. 섬진강은 참게와 은어, 재첩으로도 이름자를 떨치고 있다. 산청군 단성면에는 고려 공민왕 때 문익점이 원나라로부터 붓두껍에 숨겨온 목화씨를 처음 심었던 땅이었다. 또 신라시대부터 이 산자락에는 당나라에서 전해진 차가 심어졌다. 또 고로쇠 수액이 나거나 매화나 산수유, 벚꽃, 철쭉이 필 때면 수많은 인파가 산자락을 찾는다.


지리산을 일컬어 서산대사 휴정(休靜)은 “웅장하나 수려함은 떨어진다(壯而不秀)”고 평했다. 그러나 지리산은 수려함 대신 반역조차도 기꺼이 끌어안는 한없는 모성을 가졌다. 산자락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상처입고 피 흘리며 자신의 품으로 숨어든 사람들까지도 모두 그러안아 숨겨주고 보듬었다. 조선시대 정여립의 난과 이몽학의 난, 의적 임걸년과 이인좌의 난이 이 산을 거점으로 일어났고, 구한말 동학농민군과 항일의병들이 숨어들었다. 그리고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으로 입산한 빨치산의 주 활동 무대가 지리산이었다.

 

탐관오리의 학정과 관군을 피해 숨어든 민초들과 동학군에게 그곳은 푸른 학이 사는 이상향 청학동이었을 것이며, 징병과 징용을 피하고 조국 독립의 열망을 꿈꾸던 항일 결사와 한국전쟁 전후의 빨치산에게 지리산은 온전한 ‘산사람’의 터전이자 변혁의 거점이었으며, 유일한 해방구였다. 그리고 종래에는 그들의 사지(死地)였다. 헐벗고 굶주린 민초들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고 또 그들의 최후를 묵묵히 지켜본 지리산은 바로 한국 현대사의 처절한 현장이었다. 모든 게 산이 ‘큰’ 탓이었다. 


1953년 빗점골에서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의 수첩에는 시 한 편이 적혀 있었다.
智異風雲當鴻動  지리산의 풍운이 바야흐로 크게 움직이니
伏劍千里南走越  검을 품고 남쪽으로 천리길을 달려왔네
一念何時非祖國  뜻은 한시도 조국을 생각지 아니한 적 없고
胸有万甲心有血  마음속엔 끓는 피가 솟구치네.

 

지리산은 그 이름부터 전래하는 이칭과 별칭이 많다. 백두산에서부터 그 맥이 흘렀다는 두류산(頭流山), 백두산의 맥이 잠시 머무른다는 두류산(頭留山), 중국 전설의 삼신산 중 하나인 방장산(方丈山), 한자로도 地理山, 地異山 등이 제 각각 쓰였다. 이성계가 왕위를 찬탈하고자 명산을 두루 찾아 치성을 올릴 때 백두산과 금강산은 이를 수긍했으나 지리산만은 끝내 거절하여 그 뜻이 다르다는 뜻으로 지리(智異)라 불렸다는 속설도 전한다.  


1967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리산 내에는 동물 2718종과 식물 1372종이 서식한다고 하니 이 자리에서 일일이 그 종류를 헤아리기란 부질없는 짓이다. 2000년도에는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지리산 반달가슴곰이 촬영되기도 했고, 최근에는 반달가슴곰을 방사하기도 했다. 산자락 명승마다에는 대가람이 자리를 틀어 곳곳마다 문화재와 유적지가 즐비하다. 우리나라 31본산의 하나이자 10대 사찰 중 하나인 구례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544년) 연기조사가 창건했다.

 

화엄사에는 화엄사각황전(국보 67호), 화엄사석등(국보 12호), 사사자삼층석탑(국보 35호) 등 국보 3점과 화엄사대웅전(보물 299호) 등 보물 4점이 있다. 화엄사와 같은 해 창건된 연곡사에는 우리나라 부도 중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연곡사동부도(국보 53호)가 있다. 하동의 쌍계사와 칠불사, 유평리 대원사와 천왕봉 아래 법계사, 마천의 벽송사, 남원 산내의 실상사와 백장암 등 신라시대 세워진 고찰들이 빙 둘러 늘어선 지리산 자락에는 총 7점의 국보와 23점의 보물이 있으며, 한때 400여개의 암자가 산 속에 있었다고 전해지니 지리산은 그 자체로 거대한 가람이었다.


             이제 산으로 든다.

 

어느 비 개인 날 아침, 지리산 일출봉 뒤편에서 바라본 기암기석과 구름의 조화. 사진 강병규 


지리산에는 이름난 10개의 경치가 있다. 노고단의 구름바다(老姑雲海), 피아골의 단풍(稷田丹楓), 반야봉의 해넘이(般若落照), 연하천의 선경(煙霞仙境), 벽소령의 달(碧沼明月), 세석철쭉, 섬진강의 맑은 흐름(蟾津淸流), 불일폭포, 칠선계곡, 천왕봉 해돋이(天王日出)가 바로 그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은 노고단에서부터 천왕봉까지 이어지는 주능선 종주를 꿈꾼다. 이틀이나 사흘쯤 걸리는 이 산행을 위해 그들은 경건하게 배낭을 꾸려 밤 혹은 새벽기차를 타고 남원이나 구례를 거쳐 노고단을 올라 지리산에 든다.


노고단 고개에 오른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동쪽 끝 아스라이 물러 선 천왕봉. 긴 여정의 종착지가 아득하다. 그러나 갈길 멀다고 한숨 먼저 쉴 일은 아니다. 사방을 둘러보라. 눈앞에 펼쳐진 구름바다는 그대로 뛰어들고만 싶다. 심원골과 산동면 일대를 뒤덮은 구름바다는 노고단 고개에 선 그들을 선계의 신선으로 만든다. 구름바다에 슬몃슬몃 잠긴 노란 원추리 꽃밭도 노고단의 여름 얼굴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주능선에서 살짝 비껴 앉은 반야봉은 갈길 먼 종주객들에게 외면 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일부러 발길 돌린 그들의 노고를 단박에 보상한다.

 

구름바다 위로 황금빛으로 물들어 사그라지는 낙조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장엄한 감동으로 남는다. 반야봉 아래 삼도봉은 전남, 전북, 경남 삼도의 경계가 된다. 과거 날날이봉이라 부르던 것을 격이 맞지 않는다며 바꾸어 부르고 있다. 그곳에는 삼도를 구분하는 삼각형의 커다란 황동 표지탑이 있다. 삼도봉에서 남으로 뻗어가는 헌칠민틋한 산줄기가 바로 그 이름도 흔연한 불무장등이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르는 이 우람한 산줄기는 통꼭봉(904.7m)과 황장산(942.1m)을 불끈 돋우고 화개에서 잦아든다. 경상도 말로 장등이는 큰 덩치를 이른다.


명선봉과 연하천을 지나면 벽소령이다. 이곳에는 빨치산 토벌을 위해 닦았다는 군사도로가 아직도 남아있다. 지리산을 동과 서로 구분하는 기준이 되던 벽소령은 달밤에 지나가는 것이 제격이다. 달빛은 그들의 발걸음에 차곡차곡 부서져 세석평전까지 따라올 게다.


‘호야’와 ‘연진’의 전설이 서린 세석평전에는 다른 산에서는 볼 수 없는 놀라운 풍광이 펼쳐진다. 약 30만평에 이르는 산상 평원에 온통 철쭉이 흐드러진 장관은 실로 경이로운 것이다. 이 산상 평원에서는 신라 화랑도가 수련을 했고, 청학동으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있다고도 전해진다.


지리산의 경이로움은 또 있다. 해발 1000m를 넘어 이어지는 주능선 곳곳에서 적당한 간격으로 샘이 솟는다. 임걸령샘과 총각샘, 벽소령샘, 선비샘, 세석샘, 장터목샘과 천왕샘이 그것이다. 남부능선 상에도 딱 맞춤한 자리마다 음양수와 한벗샘이 솟으니 그 길을 지나는 그들에게는 무한히 느꺼운 일일 뿐이다. 방화와 전화로 인해 불탄 고사목이 송곳처럼 꽂힌 제석봉 넘어 통천문을 지나면 마침내 천왕봉이다.

 

온통 바위로 무장한 천왕봉에는 사시장철 거센 바람이 휘몰아친다. 천왕봉에서 해돋이 광경을 보려면 삼대가 덕을 쌓아야 된다는데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주능선 종주의 마지막을 천왕봉 일출로 삼아야 하는 이유다. 한 발 한 발 상봉을 향하는 발걸음은 진지한 수행자의 그것이어야 한다. 발걸음 하나 역시 그들이 쌓아가는 작은 덕에 다름 아니다.

 

천왕봉에 선 그들이 온 천지를 물들이며 떠오르는 해를 봤다면 이제는 다음 대를 위해 다시 덕을 쌓을 일이다. 그러나 설령 해를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리 아쉬워하지 말자. 발아래 깊이 잠든 세상이 여명 속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그 신통방통한 광경은 언제나 펼쳐질 것이며, 남한 내륙의 최고봉에서 맞는 신새벽의 신선한 공기는 오직 그곳을 오른 그들만의 차지일 테니.

 

철쭉이 지기 시작하는 초여름. 신록으로 물드는 산길을 지나는 등산객들의 행렬. 장터목으로 넘어가는 언덕과 제석봉 일원에 아직 빛바랜 철쭉이 남아있다. 사진 강병규

 

                - 글 윤대훈 기자 /·사진 강병규 사진가 양계탁 기자 / 월간 마운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