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의 다양한 문화

-* 100대 명산 소백산(小白山/1439.5m)을 가다.[3] *-

paxlee 2011. 3. 19. 23:35

 

100대 명산 소백산(小白山/1439.5m)을 가다.[3] 

 

죽령탐방지원센터~제2연화봉~국립천문대~제1연화봉~비로봉~비로사

 

흠뻑 핀 눈꽃 사이로 터진 함박웃음

 

 흰 눈이 천지를 가둬 온통 하얗게 변해버린 그곳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밥을 벌어먹고 사는 일은 중요하지 않게 됐다. 아니 상념이 끼어들 틈조차 없는 온전한 ‘白山’이었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완벽하게 하얀 세계 앞에 덤벼드는 것은 무엇이든 색을 잃고 말았다. 세계 안에 존재하는 것은 입가를 덧그리는 웃음뿐이었다.


흰색은 빛의 색이다. 가시광선 영역의 색을 모두 합쳤을 때, 즉 빛의 7가지 파장이 모두 반사됐을 때 우리 눈은 하얗게 인식한다. 색상값이 없는 무채색 흰색. 눈의 세상에서 진공 상태의 뇌가 된 것은 아마도 그래서인 듯하다. 머릿속에 얼룩덜룩 색을 지니고 엉켜있던 모든 것들이 반사되고 오직 하얀 눈만 남았다.

 

제1연화봉에 이르기 전 나무계단을 줄지어 오르고 있는 산행참가자들. 비로봉 정상까지 곳곳에 오르막 계단이 이어진다.


전국이 눈에 덮인 1월 12일. 서울, 경기, 충북, 영동 지방에 대설주의보가 발효됐다는 뉴스를 보고 불안한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언제나처럼 광화문에서 출발하는 버스에 몸을 싣자 더욱 불길한 소식이 전해진다. 산행 스태프끼리는 지난여름부터 1월이 오면 맘껏 흰 눈을 퍼먹을 수 있다고 모두 모여 한껏 퍼먹어 보자고 별러왔던 날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토록 고대했던 날 하필이면 대설주의보가 내리고 입산 통제됐다는 소식까지 들려와 근 6개월 동안 터질 듯 부풀었던 가슴의 바람을 단번에 빼버린단 말인가. 풀죽고 쪼그라든 가슴에 주름이 하나 깊어지고 이렇게 하나 더 배워간다. 자연은 수단과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 겨울 소백산을 쉽게 생각했던 적은 없었지만 오만하게도 산이 사람을 받아주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던 것이다. 어떻게든 올라가 기분대로 누릴 생각만 했던 지난날들이 부끄러워진다.


심설산행에 대비한답시고 전날부터 설쳐댔더니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단양 즈음이었다. 마을도 강도 산도 눈에 잠겨 있었다. 설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풍경을 바라보며 다시 조금씩 가슴이 부푸는 것을 느낀다. 흰 눈으로 뒤덮인 소백산을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되뇌인다. 흰색은 희망의 색이기도 하다. 거대한 숲 만개한 설화 추억을 새기고


다음날 아침, 소백산이 문을 열어주었다. 들머리인 죽령탐방지원센터 입구에서 관리사무소직원이 “오늘 제대로 좋은 구경하시겠네요”라며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산을 올라가는 이도 올라갈 수 있도록 준비한 이도 설레는 기색이 완연하다. 지난밤 사이에도 눈이 내렸는데 어느 틈에 이렇게 등산로를 정비해놓은 걸까. 사람들이 지나다니기 쉽도록 길 양옆으로 쌓인 눈이 치워져 있었다.


사박슥 사박슥. 눈 밟는 소리가 도시에서와 다르다. ‘사박’까진 눈 때문에 나는 소리이고 ‘슥’은 걸을 때마다 스패츠가 스치며 나는 소리다. 참가자들은 산행을 시작하기 전 주차장에서 간단한 체조로 몸을 풀고 방한모, 장갑과 함께 스패츠를 착용하는 등 오늘 산행에 대한 복장과 마음가짐을 단단히 했다. 이번 산행에는 만화 <식객>의 작가 허영만 화백과 스포츠조선에 <좀비콤비>를 연재하고 있는 김행장 작가도 참가했는데, 체조를 마친 허 화백이 “이 정도면 스패츠하고 가야하는 거 아냐”라고 물으니 김 작가가 “아닙니다. 화백님 명성에 금이 갑니다”라고 답해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해외 원정 보다 국내 등반이 더 어려워. 힘들어도 고소증이라고 핑계 대고 쉴 수도 없고 마냥 따라가야 돼.” 점점 눈길 위를 걷는 일행들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슬슬 걷는 속도가 느려질 무렵 한 산행 스태프가 진지한 목소리로 국내 등반의 고충을 이야기해 또 한 번 웃음이 터진다. 웃자고 한 소리지만 일리 있는 이야기라 더욱 공감이 간다. 정비된 길이라 해도 무릎까지 푹푹 빠지지 않는다 뿐이지 눈 위를 걷는 것이었으므로 체력이 많이 요구됐다. 그리 경사진 길도 아니건만 숨이 가빠온다.

 

아스라이 깔린 운무 너머 굽이져 흐르는 산줄기가 한 폭의 그림 같다.


때마침 나타난 반가운 전망데크에서 뒤떨어진 일행들을 기다리며 숨을 고른다. 커플들은 두터운 눈옷을 갈아입은 소나무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특히 이번 산행에는 다양한 커플이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 우리나라 스포츠클라이밍을 대표하는 선수 김자하·김자비·김자인 삼남매를 기른 김학은·이승형 부부는 27년 전 소백산에서 처음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고 한다.

 

또 결혼한 지 1달된 신혼부부 신주현·이정희씨 역시 작년 겨울 처음 함께 산행했던 소백산의 추억을 되새기고자 참가한 경우. 이들은 등산복을 입고 웨딩촬영을 했을 만큼 산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참가한 신현철·이은경 커플은 사랑이라는 에너지원을 따로 쓰기 때문인지 숨찬 기색도 없이 시종일관 다정한 모습으로 산행을 즐겨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전망데크에서 적당히 휴식을 취한 후 연화봉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긴다. “자, 다들 뒤를 보세요”라는 누군가의 외침에 돌아보니 걸어온 길 저 너머로 신선이 살 법한 진풍경이 펼쳐진다. 아스라이 깔린 운무 위로 굽이져 흐르는 산줄기가 한 폭의 그림 같다. 여기서 카메라를 든 이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작품세계에 추가할 사진 한 컷씩은 건져갔을 것이다.

 

장관을 뒤로 하고 앞을 향하니 이번에는 무지개가 떴다. 선물을 보따리 채 풀어놓는 기막힌 산행이다. 휘영청 뻗은 능선 위로 마중나온 북서계절풍, 제2연화봉에서 연화봉까지는 급한 오르내림 없이 평탄한 길이다. 하얀 눈꽃이 달라붙어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라푼젤이 사는 첨탑 같은 천문대를 지나 연화봉에서 점심을 먹는다. 눈길 산행에 다들 심하게 허기가 졌던지 맛있게 도시락을 까먹고 아직도 갈 길이 먼 비로봉을 향해 바삐 몸을 움직인다.

 

연화봉 전망대를 내려서면 왼편은 희방사로 하산하는 길이고 비로봉은 오른쪽 길이다. 그 유명한 소백산 눈꽃터널의 장관은 여기서부터 펼쳐진다. 거대한 숲 사이 만개한 설화를 본 참가자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온다. 탐스럽게 내려앉은 눈꽃 사이 피어오르는 함박웃음. 눈꽃의 향연은 보는 이들의 온마음을 달콤한 행복감으로 꽉 채워주었다.


눈꽃터널을 빠져나오면 칼바람이 온몸을 휘감는다. 눈꽃이 만발했던 나무들이 사라지고 휘영청 뻗은 능선 위엔 시베리아에서 부는 북서계절풍만이 마중나와 있다. 참가자들은 바라클라바 위에 재킷의 모자까지 뒤집어쓰고 목 끝까지 지퍼를 올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바람이 그리 센 편은 아니다. 그래서 절정에 오른 눈꽃을 구경할 수 있었던 한편 진정 살을 에는 칼바람이 무엇인지 그와 마주할 것을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아쉬움을 남겼다.

 

연화봉에서 제1연화봉에 이르는 구간 소백산 눈꽃터널의 장관이 펼쳐진다.


비교적 순탄하게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능선이 길게 이어지면서 이제 참가자들은 묵묵히 바람의 지대를 걷는다. 정상 바로 아래는 경사가 급한 계단길이다. 비로봉에 한 발 디뎌보려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줄지어 선 계단 옆으로 산악회 이름을 쓴 종이며 음식물 찌꺼기들이 버려져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 정상은 더했다. 뭐가 보이지도 않았지만 보인다 해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인파로 미친 듯이 붐볐다.

 

날씨가 맑았다면 장쾌하게 흐르는 백두대간 능선을 짚어볼 수 있었을 테지만 오늘처럼 흰 구름과 흰 눈으로 뒤범벅이 된 날에 기대할 수 있는 조망은 아니다. 사람들에 이리저리 치이는 정상에서 서둘러 자리를 빼 비로사로 내려선다. 제법 가파른 하산길은 나무 계단이 설치된 경사 급한 내리막과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돌아드는 길이 반복된다. 비로봉에서 비로사로 내려가는 이 길은 소백산 등산로 중 가장 아름다운 오솔길이라고 한다.

 

스르르 쌓인 눈이 녹아가는 이 길의 나뭇가지 위에서 온종일 눈부셨던 빛의 색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즐거운 꿈을 지키기 위해 잠잘 때 흰색 옷을 입었다고 한다. 우린 오늘 하루 원 없이 희망의 옷을 입고 행복한 꿈을 꾸었다. 


이달의 초청 강사


‘트랜스 히말라야’ 탐사한 고산거벽 등반가 임성묵씨

 

1월 12일 오후 9시, 경북 영주시 풍기읍 희방식당에서 산행참가자들을 대상으로 고산거벽 등반가 임성묵씨의 강의가 열렸다. 이날 ‘트랜스 히말라야 탐사’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 임씨는 지난해 2월 23일부터 65일간 동부 티베트를 탐사하며 수집한 자료를 사진과 영상을 통해 소개했다. “트랜스 히말라야란 히말라야 산맥 너머에 있는 산맥들을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히말라야 뒤편에는 대산맥들이 시작되는 파미르 고원과 ‘대산맥의 안식처’ 티베트 고원이 있고, 동부 티베트에는 6천~7천미터 미등봉이 많이 존재합니다.” 


임씨는 아직까지 생소한 용어인 트랜스 히말라야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지도의 공백지대로 남아 있는 이 지역에 대해 미국·일본·영국은 이미 개척등반을 시작했다”며 “그들에게 뒤처지기 싫었다”고 탐사 이유를 밝혔다. 임씨가 탐사한 지역은 니엔칭탕굴라, 캉리갈포, 헝단 산맥이다. 그는 당시 기차, 버스, 도보, 말 등 모든 이용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1만5천km를 탐사했으며 6천미터급 미등봉 50여 개의 정보를 수집했다.  


이날 강연에서 임씨는 ‘하늘을 향한 검’이라 불리는 남체바르와 남벽 등 국내에 공개된 적 없는 미등봉 자료 사진들을 선보여 참가자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무엇보다 참가자들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그와 함께 탐사를 마친 대원이자 올봄 그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 스즈키 히로코씨의 사진. 임씨는 2004년 중국 원정 등반에서 처음 본 히로코씨에게 만난 지 이틀 만에 청혼했다고 밝혀 큰 박수를 받았다.


임씨는 2001년 파키스탄 히말라야 카체브랑사 북봉을 세계 초등하고 혼보로 피크를 신루트로 개척했으며 이후 힌두쿠시 무스듬 피크와 파키스탄 히말라야 아딜 피크 북서벽 신루트 개척, 트랑고 타워 서벽 등을 신루트로 등반했다. 2004년 중국 곤륜산맥을 6개월간 탐사하고 이듬해 티베트를 10회 탐사한 그는 지난해에 이어 트랜스 히말라야 탐사에 집중할 예정이다. 그는 앞으로도 신루트와 초등루트를 개척하며 알파인 스타일의 등반을 추구할 계획이다.


소백산 산행 참가 독자
김종민 정진경 이은경 신현철 류증수 백송희 신주현 이정희(서울) 이상돈(성남) 김지연(원주) 서재석(평택) 신법규(부천) 김선(대전) 조경식 박창배 김창수 윤성하 김남숙(영주)

                - 글·사진 주성희 기자 / 월간 마운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