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의 다양한 문화

-* 알피니즘, 그들은 왜 오르는가 [2] *-

paxlee 2012. 11. 6. 22:01

 

            알피니즘, 그들은 왜 오르는가 [2]
 
        “등반가는 깊이 있는 인생 경험을 위해 한계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들”

    나는 지금까지 24년간 고산등반을 해 왔다. 나의 관심사는 물론 어떤 봉우리를, 어떤 루트로, 어떠한 방식으로 오를 것인가였다. 또 산을 오르는 사람에 더 관심이 있어서 20대부터 전국의 많은 산악인과 교류하며 그들은 왜 산을 오르는지, 또 오르면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에 대해 질문을 했다. 그 우문(愚問)에 답은 대부분이 1922년 조지 말로리(George Mallory)가 미국 강연 도중에 말했던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Because it is There)”와 같았다. 거기에 더하여 왜 그런 골치 아픈 것을 묻느냐는 표정으로 되돌아 온 질문은 “너는 왜 오르는데, 왜 사는데?”였다. 어떠한 방법론으로 우리의 주제 ‘우리는 왜 오르는가’란 질문의 답에 접근할 것인가는 사실 수많은 크레바스와 폭풍설이 휘몰아치는 히말라야에서 길을 찾는 것만큼 어렵다.


등산, 즉 근대 알피니즘(Alpinisme)이 1786년 유럽알프스 몽블랑(4,807m)에서 태동해 1886년 에드워드 윔퍼 일행이 마터호른(4,478m)을 등정하기까지 100여 년 알프스의 등반역사와, 그 후 1883년부터 현재까지 히말라야에서의 등산 100년사는 비슷한 (발전)단계를 거쳐 왔다. 또 일본을 통해 유럽의 알피니즘을 흡수한 한국의 등산사도 유사한 순환 단계를 거쳤다.


알피니즘의 역사에서 최초로 8,000m 봉우리를 오르려 했던 사람은 머메리(A F Mummery)였다. 머메리가 낭가파르바트로 가기 전에 알프스에서는 가이드 산행이 성행했지만 그는 가이드를 쓰지 않았다. 그리고 산악활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위험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최초의 등반가였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지 않고서는, 자신과 동료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의 어깨에 짊어지지 않고서는 산악활동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들을 배울 수 없다. 때문에 불과 100여 년 전 머메리는 가이드 없는 등반가로 혼자의 힘으로 스스로 결정을 내렸으며 자신의 책임을 떠맡았다. 오늘날의 등반에서도 이것은 여전히 아주 중요한 일이다. 현대의 세계 등반가들은 머메리의 유산을 이어받은 머메리즘(Mummerism)의 후예들이라고 볼 수 있다.


▲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텐징 노르게이.

그런데 오늘날 알피니즘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 중에 큰 부분은 상업 원정대의 확산이다. 이같은 원정 형태가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8,000m급을 ‘수집(Collecting)’하는 현상을 대체하고 있다. 대부분의 상업 등반은 에베레스트산을 비롯해 쉽게 접근 가능한 봉우리들을 목표로 하며, 그 과정에서 알피니즘에 배당되는 전체 비용 가운데 가장 많은 돈을 소모하고 있다. 게다가 히말라야에서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 매체 지원 등반을 이용해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상업원정대의 확산으로 알피니즘에 큰 변화 초래


등반가들은 이상주의자이거나 꿈을 꾸는 몽상가들일 수 있다. 아주 초창기의 등반가들도 그냥 집을 떠나 산에 오른 적이 없다. 우선 상상 속에서 등반 아이디어를 먼저 구체화하는데, 이러한 아이디어가 충분히 분명해졌을 경우에만 나중에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파트너를 물색하고 돈을 구하고 출발을 했다. 길에서 마주쳤던 모든 위험이나 문제를 극복하기 아주 힘들었던 경우가 많았지만, 결국 그런 위험한 곳에서 돌아오는 데 성공했을 때는 내가 나의 판관이고 심판이며 ‘잘 해냈어’라거나 ‘완벽하지 못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오직 자신이다.


우리는 등반 현장, 그 이상의 어떠한 심판도 필요치 않으며 필요한 것은 오직 우리들 자신이다. 우리의 원칙은 우리가 만든다. 우리들 모두는 각자 자신만의 원칙을 만들어야 하며 모두를 위해 정해진 원칙 같은 것은 없다.


이것은 알피니즘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역효과로 나타날 수 있다. 누가 가이드와 함께 에베레스트를 오른다고 해도 그건 별 문제가 아니다.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다.


오늘날 히말라야에서 고정 로프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누군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이드를 둔 사람들이나 소위 말하는 고객들뿐만이 아니라 중견 등반가들도 포함돼 있음을 알 수 있다. 1895년의 머메리와 달리 현대의 중견 등반가들은 독립적이 아니라 기생적(寄生的)으로 이전 원정대의 고정 로프와 텐트, 그리고 특히 다른 이들의 트랙을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앞서 언급했던 것 같은 강렬한 자아실현의 순간을 경험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두 발에 의지할 경우에만 강렬한 경험을 안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얼마나 높이 올라가느냐, 얼마나 어려운 루트로 가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한계가 있고 저마다의 잠재력이 있다.


1895년 머메리가 당시 ‘제3의 극지(The Third Pole)’라 불리던 최초의 8,000m 봉우리를 시도하긴 했지만 그 후 55년 동안 수백만 달러의 돈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8,000m 등정에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많은 이들이 고산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1937년 독일 원정에서는 17명의 대원들이 낭가파르바트에서 눈사태로 죽음을 맞이했다.


비극은 계속되고 성공은 요원했다. 그러나 이것은 1930년대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의 등반가들이 약해서가 아니라 경험과 효과적인 장비의 부족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이들은 자신들의 한계까지는 갔다(이들이 할 수 있는 한계까지 다 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한계를 끌어올리고자 하는 이들의 열정은 아무리 못해도 지금 정도는 됐다.


세계 최고봉들에 대한 초등 경쟁이 시작됐을 때는 국가적 색채가 짙었으며 따라서 금전적인 지원도 적절히 이루어졌다. 원정대는 얼마의 돈이 들든 성공해야 했으며,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기술들도 함께 제공됐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모든 8,000m 봉우리들이 등반되었다. 기록을 보면 성공이 없었던 55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 1950년부터 1964년까지 갑작스레 모든 8,000m 봉우리가 차례로 등정됐음을 알 수 있다. 이유는 등반가들이 이러한 고봉에 접근하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높은 고도에 적응하는 법과 새로운 장비 사용법을 익혔으며, 이전의 경험들을 모두 취합해 비교적 짧은 시간에 모든 8,000m 봉우리들을 오를 수 있었다. 이 당시 등반에서는 정상에서 펄럭이는 국기가 가장 중요했다.

 

낭가파르바트에서의 헤르만 불이나 에베레스트에서의 영국인, 안나푸르나에서의 프랑스인, 이들은 모두 국기를 꺼내들었는데 그 이유는 국가에서 돈을 지불하고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가주의(Nationalism)를 표방한 첫 번째 정복의 시대가 지난 후 8,000m 봉우리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었다. 1962년 히말라야에 첫 진출한 한국은 1977년 고상돈 대원이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태극기를 휘날려 한국 국민의 자긍심을 높였고, 이러한 등반은 한국인으로서 8,000m급 봉우리가 모두 등정되는 1995년까지 계속되었다.


등정을 목표로 하는 등반가들이 있는가 하면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알피니스트들이 있다. 뛰어난 기술력과 진정한 모험 정신을 겸비한 이들은 탐험이 덜 된 지역과 벽을 찾아 알피니즘 발전에 중요한 양질의 등반을 해내는 사람들이다. 팀은 후원사로부터 돈을 받기보다 스스로 비용을 분담하며 우정을 바탕으로 구성이 된다. 이들은 자신이 아닌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질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이들의 등반은 좀더 순수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들에 더욱 잘 대처할 수 있다.


다행히도 낯선 산악 지대를 탐험하는 것이 등반의 기술적 난이도보다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 즉 탐구적인 영혼을 가진 많은 알피니스트들이 아직도 존재한다. 매년 이런 탐험을 위한 원정들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들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등반 전문지에 실리는 약간의 정보들뿐이다.

 

▲ 노을을 보고 있는 등반가.

보닝턴, “이 게임은 신중해야 하며, 가혹하다”


에베레스트 초등자들과 나중에 보닝턴 같은 등반가들이 이 산에서 얻은 명성은 이제 다른 이들에게 팔려 넘어갔다. 많은 이들이 이 명성을 사고 싶어 한다. 이들은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 실제 활동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다만 그 명성만을 사고 싶어 한다. 시장이 있다면, 그리고 누군가가 이것을 공급해 주기만 한다면, 시장은 완벽하게 잘 돌아갈 것 같다.


2012년 봄시즌 에베레스트 노말루트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대부분 상업등반대의 고객들이었다. 요즈음 히말라야의 8,000m급 등반을 하는 사람은 70% 이상이 상업등반대의 고객이며, 이들은 산소와 고정로프 등 모든 편의성을 동원해 정상에 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고객의 상당수가 8,000m급 14좌 완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100%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누군가 ‘에베레스트, 돌아올 수 없는 길(Everest, up and not back)’, ‘에베레스트, 힘든 길(Everest the hard way)’, ‘에베레스트, 잔인한 길(Everest the cruel way)’, 심지어 ‘에베레스트, 미친 길(Everest the crazy way)’이란 선전문구가 실린 브로셔에 에베레스트를 담아 판다고 해도 쉽게 팔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는 고객들이 간절히 에베레스트의 명성을 사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은 모두가 중요해지고 싶어 하고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고서 갈채 받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크리스 보닝턴은 최초로 등반된 8,000m 거벽인 안나푸르나 남벽의 원정을 이끌었고, 1975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초등의 주인공이다. 그의 접근방식은 고봉에 대한 전반적인 관념을 모두 바꾸어 놓았다.


“안나푸르나나 에베레스트로의 대규모 원정을 조직하면서 등반가들은 재정적인 문제, 상업적인 이용, 대중적인 이해관계 등에 복잡하게 관여함으로써 등산의 그 순수한 단순성과 낭만을 가끔씩 잃어버린다. 그러나 이런 일엔 매력이 있다. 적어도 내 개인적인 입장에선 그렇다. 이것은 또한 게임으로 치러져야 하는 게임이다. 이 게임은 신중해야 하고, 가혹하다. 여기엔 어떠한 산들보다 더 많은 유혹과 함정들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극복하면서 그 자신만의 특별한 스릴과 도전을 맛볼 수 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산으로 돌아간다”고 그는 얘기하고 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1970년에서 1980년까지는 8,000m 고봉에 있어 최고의 순간들이었다. 이 때 세계 산악계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웠다. 즉 혼자서, 혹은 타국의 등반가들과 함께 팀을 꾸릴 수 있는 돈이 있었다. 후원사로부터 돈을 받기도 한층 쉬웠으며 더 이상 8,000m를 일생에 단 한 번 간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일 년에 한 번, 아니 두 번까지도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점점 더 어려운 벽에 도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알파인스타일(Alpine style)의 신봉자들은 진정한 동기유발은 마음에서부터만 비롯되는 것으로 보았다. 위험은 산악활동의 일부고 산의 일부이며 그것은 다름 아닌 한계를 시험하고자 하는 열정이다. 젊은 등반가들은 특히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싶어 한다. 더욱이 순수한 알파인스타일로 8,000m를 등반한다는 것, 독립적으로 바닥에서 정상까지 오른다는 행위는 극한으로 치닫는다. 이 방식의 선구자는 누가 뭐래도 벼랑 끝의 삶에 수많은 경험을 갖고 있는 라인홀트 메스너.


 ‘산을 오르면서보다 내려오면서, 혹은 추락하면서 더 많은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삶이란 한 개의 카테고리에 놓을 수 없는, 항상 틀에 박힌 관념을 뛰어넘는 역설이듯 등산도 단순히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고 내면으로 깊이 파고드는 행위다. 산은 어떤 가능성이자 모험이며, 적극적인 자연 체험이며, 창조적인 유희의 스포츠이며, 존재를 인식하는 행위이며, 차안과 피안을 잇는 다리이며, 한층 높은 의식 세계의 탐구인 것이다.’


그가 쓴 <죽음의 지대>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함축시켜 놓았다. 


1980년대에는 뛰어난 많은 알피니스트들이 히말라야에서 순수한 방식으로 저마다 고유의 등반을 시도했다. 낮은 히말라야 봉우리들(6,000m급)의 벽면을 “빅월 등반(Big-wall climbing)”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차별화하고 비교적 안전한 방식으로 고도에서의 경험을 확보한 이 세대의 알피니스트들은 8,000m급에서 수많은 좋은 등반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한계가 높아짐에 따라 죽음의 대가도 치러야 했다.


대표적인 사람들로는 알렉스 매킨타이어(Alex MacIntyre), 피에르 베갱(Pierre Beghin), 미로슬라브 스베티칙(Miroslav Sveticic), 예지 쿠쿠츠카(Jerzy Kukuczka) 등이 있다.


등정에서의 알파인스타일 등반이 갖는 문제점도 또한 드러났다. 이 세대는 한 세기가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히말라야를 올랐으며 알파인스타일을 극한으로까지 가져갔기 때문에 장차 더 위대한 업적을 세우거나 더 힘든 루트를 하려면 대단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8,000m급 등반은 물론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하긴 하지만 노멀 루트를 이용한 등반은 뛰어난 성과로 간주되지 않은 지 이미 오래다. 이러한 등정의 수집 열풍은 알피니즘의 방향을 질보다는 양과 끈기, 그리고 일 년에 두 세 차례 원정대에 참여하고자 하는 투지 쪽으로 바꾸어 놓았다. 한국의 8,000m급 14좌를 등정했다고 주장하는 엄홍길·박영석·한왕용·오은선·김재수도 이러한 부류로, 등반의 난이도보다는 등정을 목표로 했다고 볼 수 있다.


대담한 알파인 등반에서 변치 않는 한 가지 특성은 등반가를 완전히 소진시키는 극심한 심리적 압박감이다. 이러한 등반을 하고 난 후의 등반가들은 몇 년, 아니 어쩌면 영원히 이렇게 힘든 등반을 다시 할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듯 대담한 등반의 가장 멋진 일례로 1985년 로버트 샤우어(Robert Schauer)와 보이테크 쿠르티카(Voytek Kurtyka)의 가셔브룸 IV(7,925m)봉 서벽 등반을 들 수 있다.


알파인 등반의 백미라 할 수 있는, 가히 시대를 앞선 등반이었다. 많은 난관들, 빈약한 지원, 높은 고도, 낯선 루트를 통한 하산 등 모든 상황들이 등반의 가치를 높이는 데 이바지했으며 유일한 단점은 주봉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등반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는 등반 도중 일정 지점이 지나면 탈출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틀림없이 매우 큰 압박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런 등반에서는 살고 싶으면 무조건 등반을 해서 올라갔다가 다른 루트로 내려오는 수밖에 없다. 이것은 아주 큰 동기부여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악천후나 건강 문제가 발생할 경우 극복할 수 없는 문제로 돌변할 수 있다.

          

       - 글 / 김창호·8,000m급 13좌 무산소등정자 -

       - 대한산악연맹 창립 50주년 기념 심포지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