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의 다양한 문화

-* 알피니즘, 그들은 왜 오르는가 [3] *-

paxlee 2012. 11. 8. 23:14

              

                알피니즘, 그들은 왜 오르는가 [3]

 

쿠르티카의 산악관은 동양적 사상까지도 포함


쿠르티카가 산을 대하는 모습은 유럽인이지만 동양적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


“동양의 종교적 철학적 전통들은 ‘도(道)’라고 불리는 아주 명확하고도 적절한 개념을 창조해 냈다. 도는 식사나 싸우는 방식, 그리고 적절한 중재와 호흡 등과 같은 그런 실질적 모든 일상생활의 다양한 면들을 지배하는 기술적인 지침들을 가진 한 체제와 윤리적인 한 양식에 의해 규정된 삶과 행동의 한 특별한 방식을 의미한다. 도의 법도를 지킴으로 인해 좀더 높은 수준의 지혜를 얻는다거나 결의가 굳은 요기들과 승려들의 경우, 주변세계와 인간 본연의 마지막 통찰을 얻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감히 나는, 등산이 가지고 있는 놀랄 만한 본질로 인해, 아마도 등산이 육체적·정신적 성장의 한 귀중한 방도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도의 전통을 언급하면서 나는 이 방도를 ‘산의 길’이라 부르고 싶다”고 하며 등반은 고통을 이겨내는 ‘인내의 예술’이라 표현했다.


▲ 가셔브룸4봉. 대담한 등반의 가장 멋진 예는 1985년 이루어진 쿠르티카의 이 봉 서벽등반이다.

 

또 다른 등반을 살펴보자. 1988년 겨울시즌 타워체(6,564m) 북동벽에 도전했던 미국인 제프 로(Jeff Lowe)와 존 로스켈리(John Roskelly)는 다음과 같이 등반의 곤란함을 표현했다.


“이 벽에서의 등반 행위는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감당 못할 일이다. 3분의 2는 미쳐 있어야 하고, 3분의 1은 술에 취해 있거나 루트에 대해 전혀 무관심해야 한다. 등반할 때 전체 구간을 생각하지 말고, 바로 앞에 있는 구간이 마지막 피치라고 여기고 등반하라.”


이렇듯 극한의 등반은 이를 뛰어넘을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동시대의 등반가들에게 용기보다 장애물로 작용하기도 한다.


1990년대에는 기술적으로 더 힘든 벽과 더 낮은 봉우리들을 포함하는 등반들이 많아졌는데, 어쨌거나 이들은 좀더 안전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즉 더 많은 지원을 받으며, 갑작스런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하산이 가능하다는 점, 보통 좀더 짧은 루트나 최소한 좀더 짧은 구간에 어려운 지점이 몰려 있다는 점, 그리고 팀의 규모가 크고 변형된 알파인스타일(캡슐 방식이나 하단부에 부분적으로 고정 로프 설치)으로 이루어진다는 점 등을 그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가셔브룸IV봉과 같은 등반의 예외성은 이런 정도의 업적을 다시 이루어내기가 당사자들 자신도 힘들다는 사실로 입증이 된다. 예를 들어 샤우어는 그 이후로 이렇다 할 등반을 전혀 하지 못했으며 쿠르티카 또한 그 만큼 훌륭하고 중요한 성과는 이뤄내지 못했다.


한편 1991년 안드레이 스트렘펠리(Andrej Stremfelj)와 마르코 프레제이(Marko Prezelj)가 이룬 캉첸중가 남봉(Kangchenjunga South Summit, 8,476m) 등반에서는 완전히 다른 무엇인가가 있었다. 스트렘펠리의 이 등반에 대한 생각은 2년 전 시샤팡마 남벽 원정 때 처음 든 것으로 꼬박 2년간을 이것을 위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이 등반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원정의 모든 것은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렇듯 강렬한 동기부여는 성공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들은 고정 로프 한 조각으로 확보를 본 짧은 구간 외에 거의 로프 없이 등반했다. 앞서 오른 적이 있었던 지역을 등반하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또한 이토록 힘이 들 것이라고도 예상치 못했다. 완전히 다 오르고 나서야 이 루트에서 로프 없이 내려오기가 너무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힘든 루트로 하산해야 했다.


캉첸중가 등반 후에 안드레이와 마르코는 이와 유사한 어떤 활동도 할 수 없었으며 2년 후 K2 서벽으로 갈 기회가 있었지만 어떠한 열의도 느낄 수 없었다. 캉첸중가에서와 같은 등반은 몇 년 치의 기력을 모두 소진시킨다.


다음해 처음 멘룽체를 등반한 것도 이에 비할 수는 없지만 순수한 알파인스타일로 이루어진 가장 아름다운 히말라야 등반 가운데 하나로 이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이 등반은 1999년 갸충캉(Gyachung Kang, 7,952m) 북벽 등반과 마찬가지로 대상지 선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 등반에 속한다. 아직 등반되지 않은 좋은 알파인스타일 등반을 할 수 있는 ‘숨겨진’, 혹은 잊혀진 봉우리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알피니즘의 발전에 막대한 영향 미친 토모 체슨 현상


이 부분에서 토모 체슨(Tomo Česen) 현상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믿든 믿지 않든 체슨은 1990년대 초반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그의 등반 증거에 대해 논란이 있기 이전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었으며, 일련의 그의 업적들은 알피니즘의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큰 원정에 참여하면서 고소 적응력을 키웠다. 그는 슬로베니아의 율리안 알프스(Julian Alps)에서 성장했으며, 돌로미테와 알프스의 거벽에서 기량을 닦았다. 언제나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았으며 최종 목표를 향해 모든 힘을 집중시켰다. 1989년에는 쿰바카르나(Kumbhakarna 또는 Jannu, 7,710m) 북벽 등반의 성공으로 알파인 세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그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무장이 잘 돼 있었으며 속도를 내기 위해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다. 그의 친구들, 특히 솔로 등반을 시작하지 않았을 때 그와 함께했던 친구들이 그의 강인함을 입증할 수 있는 산증인들이다. 슬로베니아에는 그의 모방자들이 생겨났으며, 이는 외국에서도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체슨을 가장 가깝게 따라한 사람으로 슬라브코 스베티칙(Slavko Svetičič)이다. 1990년 이루어진 스베티칙의 안나푸르나 서벽 등반은 지금은 거의 기억되지 않는다. 그는 순수한 알파인스타일로 사흘간 혼자서 거대한 벽을 올랐으며, 일부 루트는 초등이었다. 대부분의 어려운 지점들을 통과하고 정작 날씨로 인해 정상에는 도달하지 못한 채 그는 생소한 북벽을 따라 하산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체슨은 솔로 등반이라는 위험한 게임을 그만두어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있었고 스베티칙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체슨은 로체에서 기력이 소진됐음을, 그리고 다시는 이런 식의 등반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인생에서 고산등반만으로 결코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중단을 선택했다.


악명 높은 로체 사건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는 여기서 중요치 않지만 신뢰의 문제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누군가의 말을 계속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언제일까? 많은 후원금이 걸리고 난이도가 높은 등반에는 믿을 수 있을 만한 증거가 필요하다. 앞으로 시대를 앞서 업적을 남기고자 하는 등반가들은 이러한 증거에 대해 좀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제2의 체슨 사건은 밀레니엄에 들어서 터졌다. 남성 최초 메스너에 이어 ‘여성 세계 최초 8,000m급 14좌 완등’이라 타이틀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오은선은 캉첸중가 등정 의혹으로 체슨의 경우와 같은 결과를 낳았다.


알파인스타일의 등반에는 몇 가지 한계가 있다. 8,000m급, 특히 최고봉들에서 가장 큰 문제는 높은 고도에서 보조 산소 없이 장시간 머물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로 등반의 난이도를 들 수 있는데, 이는 특히 바위에서 그러하다. 극심한 추위에서 장갑이 없이 긴 벽을 등반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며 장갑을 낀 채로는 멀리까지 등반할 수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아주 까다로운 일부 벽들은 세미 알파인스타일로 성공적인 등반이 이루어졌다(1997년 마칼루 서벽의 러시아 등반 등). 여기서는 루트 하단부에 약간의 고정 로프만 설치하고, 거의 아무런 장비도 이용하지 않으며 고소 포터도 없었다. 이러한 방식은 가능한 한 순수성을 유지하면서 훨씬 더 난해한 알파인 등반을 가능하게 한다. 이후 세대들은 난이도의 한계를 훨씬 더 끌어올릴 것이다. 한계선의 확장은 언제나 낮은 봉우리에서 시작되어 높은 산들로 옮겨지며, 발전을 위한 필수 동반자는 훈련 방식의 진보와 등반가의 마인드 변화다.

 

▲ 동료의 시신을 운구해 내려오고 있는 한국 산악인들.

 

20세기 최후의 위대한 알파인 등반을 빼놓을 수 없다. 토마즈 휴마르(Tomaž Humar)는 1999년 혼자서 다울라기리(Dhaulagiri) 남벽을 올랐다. 의심할 나위 없이 이것은 훌륭한 알피니스트의 뛰어난 업적이지만 이 등반을 생각하면 두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등반은 과연 어느 정도까지의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다시 말해 객관적인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되는 식으로의 위험이 등반의 난이도를 어느 정도까지 높여줄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러한 방식이 또한 등반의 시장 가치를 높여 주는 것일까?


두 번째 의문은 매체와 후원사의 압박 아래서 이루어지는 등반 보고의 타당성에 대한 것이다. 토마즈는 자신의 등반이 이 벽의 초등이라고 선언했지만 사실상 초등은 18년 전 그의 히말라야 멘토인 스테인 벨락 스라우프(Stane Belak Šrauf)에 의해 이미 이루어졌다. 두 개의 루트 모두 같은 지점에서 끝나며, 정상 바로 아래인 이 지점에서 불가피한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같은 결정들을 내리게 된다. 즉 휴마르와 슬로베니아 팀 모두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정상을 포기했다.


벨락의 1981년 등반 또한 소수 전문가들에게만 알려져 있다. 역사의 저울 한 쪽에 벨락과 그의 친구들의 등반을, 다른 한 쪽에 토마즈의 등반을 놓고 본다면 거의 같은 무게로 평형을 이룰 것이다. 토마즈는 2009년 11월 9일, 다울라기리와 같은 단독등반으로 랑탕리룽(7,227m)을 등반하다 조난사했다.


한국은 1962년부터 2011년까지 히말라야 등반에서 8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작년에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박영석·신동민·강기석과 촐라체 북벽에서 김형일·장지명을 잃어 그 슬픔이 채 가시기 전 올해 에베레스트에서, 아이거 북벽에서 조난사고는 이어졌다.


등반가들에게 가장 깊은 감정은 죽음과 연관된 것


등반가들에게 있어서 가장 깊은 감정은 죽음과 연관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모든 탐험과 위대한 등정, 그리고 위험한 장소나 어려운 장소, 노출된 장소로 나가는 매순간, 우리는 죽음의 가능성을 실감하고 우리의 모든 능력과 열정, 본능, 그리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죽음을 피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런 다음 우리는 벅찬 감정을 느낀다. 이때의 감정은 너무 깊고 강렬해서 다시 한 번 느끼고 싶게 만드는데 어쩌면 이것이 가장 큰 위험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등반, 산악활동, 모험들은 스스로 소멸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명 우리의 가장 깊은 감정의 내부가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며 모두들 그 답을 찾고 있다.


우리는 또한 산을, 우리 내면의 지도를 연구하기 위한 매개체로 이용할 수 있으며, 돌아온 뒤의 등반가의 얼굴을 보는 것도 중요하다. 1953년 낭가파르바트에서 내려온 헤르만 불의 얼굴이나 1990년 봄 로체 남벽을 마친 토모 체슨의 얼굴을 본다면 당신이 알고자 하는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얼굴은 지도와 같으며 특히 등반을 마친 후, 모험을 끝낸 후의 얼굴은 더욱 그러하다.


히말라야에서 대조난사고가 발생하면 언론매체에서나 일반 대중은 왜 죽을 줄 알면서 그 위험한 곳에 갔느냐고 반문한다. 마치 산과의 게임에 지면 죽음을 의미하는 러시안 룰렛처럼 일종의 자살행위가 틀림없다는 가정 하에 근거한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만난 국내외 등반가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죽고 싶은 희망이 아니라 완전하게, 충만하게, 강렬하게 살고 싶은 삶에 대한 희망이었다. 이들보다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진실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를 만나기란 드물다.


등반가는 등반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생 경험을 풍부하게 하고 깊이 있게 하기 위해 한계 열정을 불태운다. 또 그들은 말이나 글보다는 행위로써 자신의 꿈을 실천한다는 건 확실하다.


마지막으로 우리들의 산친구이였던 윤치원을 얘기하고자 한다. 그는 2011년 마나슬루 정상 등정 시도 중 동료 대원과 실종·조난사했다. 고소증세와 탈진으로 정신이 혼미한 동료와 함께 7,500m 죽음의 지대에 치원은 남았다. 당시 20여 년간의 히말라야 등반 경험이 있던 치원은 거기에 남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료 옆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우리는 지금 윤치원에게 “당신은 왜 산에 오르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을까! 또, 치원이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면 그는 히말라야에 또 갔을까?

       

          - 글·김창호·8,000m급 13좌 무산소등정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