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사랑의 항변

paxlee 2016. 12. 23. 22:29



'그리소스토모'라는 젊은이가 어느날 이웃 마을에 사는 눈이 부시도록 예쁘고 아름다운 '마르셀라'라는 쳐녀를

만나 수없이 많은 날들에 공을 들여 구애를 하였으나, 그 여인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그를 상대해 주지도 않았

다. 그렇게 구애를 하여도 반응이 없으니, 그는 혼자 사랑을 고민하다가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그는 죽기전에

그 여인을 향해, "매정하구려 그대여, 이 쓰라린 마음의 상처와 그대의 매정함을 그대로 말하려고 애쓰는 나의

소망에 따라 갈기갈기 찢어진 괴로운 내 가슴속에 온갖 생각이 떠오르니 그 목소리의 울림도 무섭기만 하구려.

내 비참한 가슴속에서 짜내는 소름 끼치게  나는 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다오."


"사자의 사나운 부르짖음도 승냥이의 거친 울음소리도 독사의 독기 머금은 숨결고 도깨비의 금찍한 소리도 까

마귀의 불길한 울음소리도 바다를 건너오는 바람소리도 이미 쓰러진 사나운 소의 무서운 노여움의 신음 소리

도 짝 잃은 비둘기의 구슬픈 흐느낌도 시샘많은 부엉새의 청승맞은 노랫소리도 지옥에 우글대는 요괴들이 저

마다 질러대는 고뇌의 부르짓음도 모두 한데 어울려 내 영혼의 처참한 탄식이 되려무나." "아버지처럼 자애로

운 타호 강의 백사장도 이름난 베티스 강의 감람나무도 이 소리는 들리리. 저 험한 바위와 암산의 깊은 동골 속,

어두운 골짜기 인적이 끊어져 햇빛마저 들지 않는 황량한 해변가. 먼 리비아의 들판에 찬 독스런 야수때에까지

나의 탄식은 울려 퍼져라,"


"멸시는 능히 사람을 죽이며 속절없는 의심은 인내심을 죽인다. 질투의 죽이는 힘은 더욱 무섭고, 오랜 이별로

말미암아 인생은 지긋지긋한 공허가 된다. 행복을 가져다 주는 안식은 잊힐까 두려워하는 자에게 찾아오지 않

는다. 그리고 피할길 없는 최후의 종착역은 죽음뿐, 아아, 그러나 나는 무슨 기적을 타고났기에 죽지도 않고,

이별과 질투와 멸시의 대상이 되어 속절앖는 의심에 마음 졸이며, 잊혀진 체로 홀로 고뇌의 불을 태우며 이렇게

 안타깝게 살아 있는가?" "이 캄캄한 고뇌의 심연 너머로 한 줄기 희망의 빛도 비취지 않는다. 차라리 절망 속에

서, 희망없는 불행을 끓어안고 희망과는 영원히 담을 쌓으리. 두려움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을 손가?"


"끔찍한 질투가 내 앞에 어른거리다 갈갈이 찢어진 내 상처를 보개 될 때. 나는 두 눈을 감고 모르는 체해야 하

는가? 친구여, 나의 슬픈 벗을 버리더라도 행여 슬퍼 울지를 말라. 내가 태어난 나의 불행은 그 여인의 행복을

키워 주었으니 부디 슬퍼마라, 내가 비록 무덤에 묻히더라도" 이와 같은 유시(遺詩)를 남기고 그는 죽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무덤을 파고 있을 때, 뜻밖에도 그들의 눈 앞에 너무나 아름다운 처녀

'마르셀라'가 나타났다. 지금까지 그녀를 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감탄을 연발하며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녀를 바

라보느라 넋이 빠져 있었다. 오직 '그리소스토모'의 친구 암브로시오만이 마르셀라를 보자 서릿발 같은 기세로

외쳤다.


"어찌하여 왔느냐! 산중에서 사람만 잡아먹는 이 요사스러운 두억시니 같으니라고! 흉악한 네가 죽인 이 불쌍한

 사람의 상처가 너를 다시 보고 피를 흘리는지 보려고 여길 왔느냐? 네가 그렇게 악랄하게 이룬공이 그토록 자

랑인 듯싶어 왔느냐? 저 흉악무도한 폭군 네로가 화염에 싸인 로마시를 보듯, 그 바위 꼭대기에 서서 이 비참한

모습을 보고 싶어 왔느냐? 자기 아버지 타르키니오스의 시체를 밟은 그 패륜의 딸년처럼 이 애처러운 송장을

감히 밟고 싶었느냐? 여기 온 이유를 빨리 대지 못할까? 네가 바라는 게 뭐냐? 그리소스토모는 생전에 네 말을

거역한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비록 그는 죽었지만 친구라고 자칭하는 모든 자들

을 동원하여 네가 말하는대로 해주겠다."


'마르셀라'는 이렇게 말했다. "오, 암브로시오, 제가 온 이유는 당신이 말씀하신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전 저 자신을 위하여 여기에 나타난 거예요. 모든 사람들이 '그리소스토모'의 고뇌와 죽음을 내 탓으로 돌리고

비난하는 게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알려 주고 싶었어요. 그러니 여기 계신 분들은 제 말을 잘 들어 주세요.

리를 아시는 분들에게 사실을 납득시키는 데 많은 시간이나 많은 말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당신네들의

말씀에 의하면 하느님은 저를 아름답게 만드셨나 봅니다. 그래서 당신네들은 저의 미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를 사랑하게 된다고 하면서 그 사랑의 대가로 제가 당신들을 사랑할 의무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하느

님께서 주신 선천적인 판단력에 비추어 아름다운 모든 것은 사랑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그러나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받는 자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을 사랑해야 돤다는 것은 아

무래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의 용모가 못생겼다면 호감이 가지 않을 텐데,  '나는 네가 아름다운 여자니

까 사랑한다. 그러니 내가 비록 용모가 추하더라도 나를 사랑해라.'하고 말한다면 그야말로 말이 안 됩니다. 설

령 양쪽이 똑같이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이로 인해 이들의 마음마저도 같다고 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쌍

방이 아름답다고 해서 모두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아름다움은 눈을 즐겁게 하지만 마음을 즐겁게 하지

는 못합니다. 그저 아름답다고 모두 사랑하고 마음을 준다면 어떻게 될지 모를 정도로 마음이 갈팡질팡하여 대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사람은 무수히 많고, 또한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도 한이 없기 때문

입니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진정한 사랑은 절대로 나뉠 수 없고, 강요되지않고 마음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제가 믿는 대로라면 왜 당신네들은 저를 사랑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억지로 제 의지를 꺾으려고 하시나

요? 그렇지 않다면 말씀해 주세요. 만약 하늘이 저를 아름답게 만들지 않고 밉게 만들엇을 때도 당신네들이 저

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면 타당할까요. 더욱이 당신네들이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제가 갖고 있는이 미

모가 제가 선택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청하거나 고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렇게 생기도록 은총을

베풀어 수신 게 아니겠어요? 독사가 날 때부터 갖고 있는 독으로 사람을 죽였다 해서 그 독을 갖고 있는 걸  탓

할 수는 없는 것처럼 저도 용모가 남보다 뛰어나다 해서 남에게 욕먹을 이유는 전연 없다고 생각해요. 정숙한

여인의 아름다움이란 마치 먼 곳에 있는 불이나 뾰족한 칼과 같아서 가까이 가지 않는자는 타거나 베이지

않는 법입니다."


"순결이나 부덕은 영혼의 장식이니 이런 것 없이는 아무리 육체가 아름다워도 결코 아름답게 보일 리가 없지요,

 만약 순결이 육체나 영혼을 가장 아름답게 장식하는 미덕의 하나라면, 왜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받는 여인은 그

것을 잃어야 하나요? 그 여인의 순결을 잃도록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는 사나이의 욕심을 체우기 위해서인가

요?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웠습니다. 그리고 자유스럽게 살기 위하여 저는 광야의 고독을 택한

것입니다. 이 산의 나무들은 나의 친구들이고, 이 개울의 맑은 물은 저의 거울이예요. 나무와 물에게 나는 나의

생각과 아름다움을 전달합니다. 저야말로 떨어진 불이고 멀리 치운 칼이에요. 저를 보고 반한 분에게 저는 충고

로써 그 잘못된 생각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만약 사랑이 마음이라는 것이 희망으로 지탱되어 있더라도 나는 그

리소스토모나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희망을 주지 않았어요. 결국 어느 누구에게도 주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소스토모를 죽인 것은 저의 매정함이 아니라, 그의 집착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겠지요. 그의

생각이 순수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들어주어야 했다고 그 죽은 책임을 제게 뒤집어씌운다면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의 무덤을 파고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때 전 이렇

게 말했던 겁니다. 나의 뜻은 영원한 고독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이 우주의 대지만이 나의 아름다움이 시들고

부서졌을 때도 그 열매를 즐길 수 있는 것이라고요. (처녀로 살다가 늙어 죽으면 땅에 묻힐 거라는 뜻). 그렇게

알아들을 만큼 타일렀건만 그는 고집을 부려 순리에 역행하고  바람이 부는데도 노를 멈추지 않았으니 결국  자

기의 오기 때문에 물속에 빠진 격이 되고 말았지요. 그러니 아무도 원망할 수 없지요. 제가 그의 비위를 맞추었

다면 제가 진실하지 못한 여자가 되고, 또 제가 저의 바른 양심과 의지를 배반한 것이 되지요."


"그리소스토모는 이 모든걸 알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어요. 누가 미워하지도 않았는데 공연히 홀로 절망에

빠져 있었어요. 그래 이제 와서도 그의 불행이 저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속은 사람이라면 투덜거릴 수

도 있겠지요, 약속한 희망을 배신당한 사람이라면 절망할 수도있습니다. 제가 승낙을 했다면 자신을 가질수도

있고, 제가 마음을 허락했다면 우쭐델 수도 있어요. 그러나 약속한 바도없고 자신을 속이지도 않았고 또 사랑하

지도 않았으며 더욱이 마음을 준 적도 없는 그 사람 때문에 나를 인정머리 없는 계집애라느니 살인자라느니 하

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 하늘은 아직 저에게 천생연분을 만나게 해주지 않았으며, 또한 스스로 짝을 골라야 한

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어요. 이와 같은 사실을 자기 개개인의 욕심 때문에 저를 탐내는 자들에게 다

알려 주었으면 해요."


"그리고 앞으로는 어떤 사람이 저 때문에 죽는다 해도 질투나 불행에 빠져 죽는 건 아니라는 걸알아주세요. 누

구도 사랑한 적이 없는 자는 아무에게도 질투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나요? 실망을 시킨다는 것

이 꼭 업신여긴다는 뜻은 아니에요. 저를 매정하다고 하는 사람은 저를 쫓아다니지 마세요. 사나운 맹수에다

두억시니이고, 재수없는 계집에다 사랑할 줄 모르는 계집이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그런 사내들을 찾지 않으며

상대도 않고 아는 체도, 따라다니지도 않을 테니까요. 그리소스토모가 조급한 성미인데다 욕심을 채우지 못해

서 죽었는데 왜 저의 정숙한 행실과 조심스러운 태도가 비난을 받아야 합니까? 제가 나무들과 더불어 살면서

의 순결을 지키겠다고 하는데 인간이 사는 속세에서도 제가 순결하게 있기를 바라는 장본인들이 왜 저의

순결을 짓밟지 못해 안달인가요?"


"당신들도 아시다시피 저는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재산도 가지고 있어요. 자유로운 몸이니 누구에

게 매이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고 또 미워하고 싶지도 않아요. 이 남자를 속일 필요

도 없고 또 저 남자한테 매달릴 필요도 없어요. 이쪽 남자를 조롱하면서 저쪽 남자들 한테는 잘하는 따위의 짓

하지 않을 거예요. 이 마을 양치기 처녀들과 재미있게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또 내 산양들을 돌보는게 저의

없는 즐거움이랍니다. 저의 소망은 이 산 근처에 숨어 살고 있어요. 그 소망이 이 산을 떠난다면 그때는 천국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영혼이 그 옛 보금자리로 돌아가기 때문일 거예요." 이렇게 말을 마치자 마르셀라는

아무 대답도 듣고 싶지 않은 양 몸을 돌려 가까운 숲속으로 몸을 감추고 말았다.


모두 그녀의 미모도 미모지만 달변에 감동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쏜 미모와 아름다운 시

선의 화살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처럼 마르셀라가 방금 그렇게 일깨워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뒤쫓아가려

하였다. 그러나 저렇게 고결한 생각을 가진 분을 귀찮게 따라다니면서 괴롭혀서는 안되고, 세상의 올바른 마음

을 가진 사람들이 존경하고 받들어 모셔야 할 것이다. 이 아가씨야 말로 이 세상에서 올바른 뜻을 갖고 살아가

려는 단 한 분이라는 것을 정녕 주장하노라. 암브로시오는 자기의 착한 친구에 대한 장례을 빨리 끝내고자 했

다. 그들은 끝까지 그자리에 남아 무덤을 다 파고 그리소스토모의 유시  원고뭉치를 다 태우고 난 후 입관할 때

는 적잖은 눈물을 흘렸다. 


무덤의 비석이 완성 될 때까지 임시로 큼직한 바위로 덮었는데 암브로시오는 비석이 완성되면 다음과 같은 비

문을 새기겠다고 말했다. "여기에 사랑하다 간 불쌍한 젊은이의 얼어붙운 시신이 누워 있노라. 아픈 사랑을 이

루지 못한 한 목동이, 아름다운 여인의 매정하면서도 수줍고 냉담한 연민 때문에 사랑의 여신도 그를 위해 자기

의영토를 넓혔노라." 모두들 무덤 위에 꽃과 나무가지를 뿌리며 고인의 친구 암브로시오에게 조의를 표하고는

작별인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