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걷는다.[Ⅰ- 1]
베르나르 올리비에 저, : 임수현 역.
Ⅰ. 아나톨리아 횡단.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까지 이르는 실크로드 1만 2000km를 걸어간 길에서 만나고 경험한 여행기이다. 저자는 기자로 은퇴 하였고, 부인을 먼저 보내고 선택한 길이다. 15년간 기자로 경제 사회 갈럼 리스트 였다. 달리기와 걷기로 건강을 지키며, 마라톤 대회에 20회 출전하였으며, 100km 행군을 하였고, 실크로드 걷기를 계획하고 터키 이스탄불에서 시작하여 이란을 거처 투루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기르키스탄~중국 서안까지 옛날 실크로드 길을 '마르크 폴로'가 1274년 중국 원나라를 방문하여 쿠빌라이 칸의 궁정에서 벼슬을 하면서 중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경험한 기록이 <동방견문록>있다. 그후 실크로드 길에 얽힌 역사적 사실을 찾아 보려고 혼자 기획하고 실천하기 위해 시작한 여행기이다.
1. 길끝의 마을들.
올리비에는 61세의 나이에 퇴직하여 10년전에 보낸 아내를 생각하며 아이들은 독립하여 살고 혼자임이 고독하여 길을 걷기로 했다. 1999년 5월 6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실크로드 대 장정을 출발하였다. 나에겐 아직 만남과 새로운 얼굴 그리고 새로운 삶에 대한 고집스럽고 본능적인 욕망이 남아있다. 나는 머나먼 초원과 얼굴에 쏟아지는 비바람과 느낌이 다른 태양빛 아래 몸을 맡기는 것을 꿈꾼다. 지금까지 너무 바쁘게 살았다. 나는 내 자리를 착실하게 지켜야 했고, 일하고 공부하고 직위에 합당한 노력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빳다. 인생의 세번째 시기에 나는 느림과 침묵에 굶주려 있다. 세상에서 걷기는 접촉을 가능하게 한다. 내 박물관은 길들과 그기에 흔적을 남긴 사람들이고, 마을의 광장이며, 모르는 사람들과 식탁에 마주앉아 마시는 수프인 것이다.
나는 은퇴후 처음으로 작년에 파리에서 갈리시아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길 중의 하나인 '산티아고 데콤포스텔라' 길을 걸었다. 2300km를 배낭하나 매고 역사와 수많은 이야기들과 지나가는 걸 지켜 보았던 풍경과 땀냄새를 풍기며 지나가는 콤포스텔라 길의 끝에서 인간과 문명의 길, 배네치아와 구 비잔틴(이스탄불)에서 중국에 이르는 실크로드 길을 걷기로 했다. 크게 몇 단계로 나누어 매해 서너달 동안 2500km에서 3000km를 걷는 여정을 계획하고 결심했다. 그 첫 여정이 될 1999년 이스탄불에서 테레란까지 게획을 세웠다. 나는 7세기 이전에 16세가 된 젊은 이었던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년)가 세상의 끝을 향해 출발했던 그 도시에 갈 것이다. 이제 나는 침묵과 꿈의 오솔길을 접어 든다. 3개월 전부터 지도, 여정, 장비, 비자, 책, 옷, 신발 등을 준비하고 예기치 못한 일에는 최소한의 여지만을 생각했다. 사막의 대상들이 수백마리의 낙타들과 함께 천천히 초원으로 들어가 보는 모습을 상상했다.
배네치아의 부흥은 실크로드의 덕분이었다. 6세기 이후 '실크로드'라는 동양으로 가는 통로가 열렸다. 징키스칸의 후예들이 추구한 '팍스 몽골리카'는 그 길을 확실하게 다져 놓았다. 알렉산드(Alexandros) 대왕이 개척했고, 파타르(Fatar) 족이 안전을 보장했던 그 길을 통해 무역이 이루어 졌고, 재물은 낙타와 야크 등에 매단 봇짐속에 감춰진체 운반 되었다. 마르코 폴로 가족 세 사람이 베네치아로 돌아온 것은 25년이 지나 1295년 이었다. 그들이 죽은 줄 알았던 가족들에게 베네치아에서 1만 2000km나 떨어진 곳에서 보고 느낀 화려함에 대하여 수다스럽게 얘기 했다. "내 여행은 정말 멋진 것이었다. 그 증거로 난 세번이나 걷는 것에는 꿈이 담겨있다. 그 증거로 나는 세번이나 죽을 뻔 했으니까" 새로운 경험은 여행이 주는 선물이다. '걷는 것에는 꿈이 담겨있다.' 걷는 것은 행동이고, 도약이며 움직임이다. 이스탄불은 인구 1300만의 초대형 도시로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다. 그러나 정치의 중심 도시는 앙카라(Ankara)이다. 그래도 이스탄불이 터키에서 가장 유럽적인 도시이다. 실크로드는 하나의 길이 아니라, 여러개의 길로 이루어져 있다.
2. 나뭇꾼 철학자.
배낭은 무거웠다. 파리에서 짐을 쌀때도 무게를 줄이려고 몇번이고 풀었다 다시 쌌다. 배낭 자체 무게가 2.5kg 이다. 3kg에 가까운 책과 지도, 옷은 티셔츠 두벌, 반바지 한개, 양말 한컬래, 얇은 바지 하나, 침낭하나, 담요하나, 주머니 칼, 칫솔, 초경량 카메라, 아무리 줄여도 12kg 아하로 줄일수는 없었다. 여기에 물 2ℓ의 수통과 빵, 치즈, 과일 등은 추가하니 배낭 무개가 15kg이 됐다.
3.의구심
갈림길에서 두 남자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들에게 베이 괴이(Bay kay)로 가는 길을 물었다. 한 사람은 오른쪽길, 다른 사람은 왼쪽 길로 가란다. "두 길이 모두 베이괴이로 통하나요?" 그들은 동시에 아니라고 대답했다. 또 다른 두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다투는 것을 보고 끼어 들었다. "우리도 베이쾨이에 갑니다. 따라 오세요" 그들과 왼쪽길로 갔다. 자전거에 친절하게도 배낭을 실어 주었다. 갑자기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베이괴이 입구에서 나는 자전거를 탄 친구들과 헤어졌다. 배낭을 다시 매고 길을 떠났다. 급류를 따라 이어진 험준한 협곡에는 일요일이라 소풍을 나온 몇몇 가족들이 맨발로 물에서 놀고 있었다. 그렇게 급류를 따라 가다가 나무꾼을 만나서 물어보니 급류를 건너야 한다고 해서 신발을 벗고 물을 건넜다. 마을을 지나고 저 고개를 넘어서 걷고 또 걷는다.
나는 앞으로 떠미는 통제되지 않은 충동은 내가 애써 숨기려 하는 어떤 두려움과 뒤섞여 있다. 끝까지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래서 한 걸음이라도 걸을수 있는한, 그리고 배낭을 짊어질 힘이 남아 있는한, 목표에 이르길 갈망 하면서 걷고 또 걷는다. 나에게 주어진 이 의무는 바로 내가 정한 것이기에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 하였지만, 매년 네 단계로 나누어 시안까지 걸어가겠다는 목표가 있다. 하지만 1년을 더 추가 한다고 한들 뭐가 그리 중요 하겠으며, 내가 해결해야 한다. 문제는 하나 뿐이다. 이 나라의 비자 만료 기간전에 이란 국경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다시 갈림길에서 망서리게 되었다. 그때 개짓는 소리가 들렸다. 그 집 주인에게 길을 물었다. 샤즈괴이로 가려면 2,3km를 되돌아가서 좌측길로 가라고 알려 주었다. 하지 때라 저녁 8시가 넘어니 밤이 되었다. 더 갈수 없어 야영을 하기로 했다. 마침 빈터가 있어 그 주위를 맴돌다가 인가를 발견했다.
나는 제일 크고 예쁜집을 골라서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연 노인이 들어 오라고 했다. 네브자트는 일흔살의 농부였다. 병든 아네와 딸 슈크라네와 살고 있었다. 3층자리 집은 넓고 안락했다. 샤워를 하고나니 피로가 좀 가셨다. 중앙아시아의 이전설같은 길은 애초에 아랍인들이 개척한 것이었고 그 후엔 이슬람인들이 누볐다. 아랍문화에서 여행과 교역은 서로 관련 되있다. 유목민의 후손인 마호세트로 상인들을 따라 다녔으며, 망명생활은 그대로 여행이 되었다. 아랍의 유목민들은 프랑스의 푸아테에등 광활한 영토를 확보해 나갔다. 몽골 유목민의 후손인 오스만인은 현제 커키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가 이슬람 교도로 통합된 후 각 부족은 무역과 여행이라는 이중의 유산을 물려받아 꽃피웠다. 아랍인이 최초로 여행과 문학을 연결했다. 9세기 말에 '마자르'는 중앙아시아와 말레이시아 그리고 인도 여행기를 썼다. 또 한명의 여행가인 톨레도의 알가르나터는 마르코 폴로 보다 100년 앞선 12세기에 자신이 발견한 세계를 이야기 하고 있다.
세명의 아랍인 여행자 이븐(Ibn)은 세계에 대해 아주 세새한 것까지 묘사해 놓았다. '이븐 파들란'은 10세기에 불가리아와 러시아를 방문 했는데, 이는 '카르피니'가 1245년 외교임무에 발을 디딘 것보다 300년 가까이 앞선 것이다. 12세기 말 '이븐 주바리르(Ibn Jubayr)는 아랍의 영토가 된 스페인을 떠나 매카까지 성지순례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 오면서 지중해 연안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게 묘사를 했다. 가장 훌류한 아랍 여행자는 누구보다도 14세기의 '이븐 바투파'라고 할수 있다. 아라비아는 소아시아, 러시아, 인도, 중국, 스페인과 사하라 등의 지역이 미지의 땅을 벗어나 모습을 드러 내게 된 것도 바로 그의 덕이다. 나는 이스탄불을 떠난 후 12일이 지났고, 300km를 걸었다. 그러나 데헤란 까지는 아직도 2500km 이상이 남았다. 그곳까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내가 버틸수 있을까? 피곤함이 몰려와 잠이 들었다. 일어나니 게속해서 말썽을 부리던 발의 통증이 호전된것 같다. 이제는 거리를 단축하고 분말약을 뿌린것이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오늘은 파킬라르로 가는 해발 1200m의 길을 올라갔다. 나는 언어 문제로 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복습노트를 만들어 하루에 다섯개의 새 단어를 외웠다. 나는 고집스럽고 성실한 여행자 였지만 여전히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여 고생을 했다. 터키인들은 말을 빨리하고 문장의 구조도 무척 달랐다. 다시 한번 말해 달라고 하면 귀가 어두운 줄 알고 말의 속도는 그대로 소리만 크게 질러 됐다. 게레대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나는 오래되고 낡았지만 멋진 실크로드 대상 숙소를 발견했다. 건물주인은 키 작은 남자는 내가 대상숙소로 사용하던 건물에 관심을 보이자 3층 건물에 수 많은 방들이 있는 곳을 보여주었다. 그의 이름은 세이트라고 하였다. 낡은 건물을 수리 하려고 정부에 예산을 청구 했지만 2년째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지하 마구간에는 말 한마리가 편히 쉬고 있었다. 실크로드의 역사를 증언해주는 이런 멋진 건물도 머지않아 사라져 버릴것 같다. 우리가 대화를 하는 동안 찻집에서 한무리의 사람들이 나의 대화에 끼어 들었다. 이 건물은 대략 600년 전쯤에 세워졌을 거라고 했다. 결국 이야기는 800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갔다.
4. 왔노라, 보았노라.
하루에 평균 30km를 걷는 것이 단련이 되면 육체의 개념 자체가 무화되곤 한다. 모든 종교에서 순례의 전통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몸의 단련을 통해 영혼을 고양하는 일이다. 발은 땅을 딛고 있지만 머리는 신을 향한다. 이런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고통 스러운 것만 생각한다. 마조히즘이나 종교적인 이유로 자갈위를 무릎이나 맨발로 걸으며 스스로를 고문하는 사람들에게 그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루 30km 범위내에서 가면 걷는 것은 기쁨이며, 부드러운 마약과도 같다. 홀로 외로이 걷는 여행은 자기 자신을 직면하게 만들고, 육체의 제약에서 주어진 환경속에서 안락하게 사고하던 스스로를 해방시켰다. 아주긴 도보여행을 마친후에 거의 모두가 예외없이 변모된 자신을 바라볼수 있다. 자기의 삶속에서 고생해보지 않은 사람을 성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냥 막연하게 기대에 머무는 것이 일반적이다. 도보의 고행도 그 목적을 달성했을때 육체와 영혼은 그만큼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볼수 있다는 것이다.
지나가든 어떤 마을 이름이 '실크로드'였다. 또 더 멀리 보이는 촌락의 이름은 '비단마을'이었다. 최소한 내가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나 실크로드의 흔적을 말해주는 것은 그것들 뿐이었다. 산허리 길을 돌아가자 크고 흰돌에 'ne mutlu Turkum diyene' 라고 써놓았다. '터키 말로 가장 카다란 행복' 이라는 뜻이다. 나는 질레(zile)라는 도시에 도착해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 찾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쉽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수염이 까칠하고 구리빛 피부의 한 남자가 들어 오드니 나의 배낭을 주시하드니 자연스럽게 내 테이블에 앉았다. 차를 마시고 내 수첩에 자신의 이름을 쓴 다음 다른 사람의 이름을 쓰고 설명했다. "오늘 저녁 카리반 사리에 도착 하거던 이 친구 집에가서 묵으시오, '괴흐 베크다슈'라고 하는 내 친구인데 내가 보냈다고 하면 잘 대해 줄거요"
지금 이 시간에 나는 해발 450m 지점에 있다. 여기서 카라반사리 마을은 헐벗고 구불구불한 준평원 이었다. 괴흐베크타슈의 집은 길 끝에 있었다. 그는 몸집이 거대했으며 굵은 콧수염이 얼굴을 뒤덮다시피 했다. 무스타파의 이름을 대자 흔쾌히 문을 열어 주었다. 그의 진짜 이름은 데메르지 이고 괴흐는 별명이었다. 아주 예리한 눈썰미를 가졌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괴흐의 아들 중 하나는 겨울엔 이스탄불의 장식 가계에서 일하다가 여름에는 농사일을 돕기위해 집으로 왔다. "괴흐 당신 자녀는 몇입니까?" "넷이지오" "여자아이 둘과 당신 아들은 보았는데, 넷째는 아들입니가. 딸입니가?" 그게 아니라, 아들 넷에 딸이 다섯이란 말이요" 딸 둘은 어머니가 저녁식사 하는 것을 돕고 있었다.
막내딸 사티가 우리앞에 높은 삼각탁자를 가져왔고, 그 위에 큰 접시와 음식을 펼쳐 놓았다. 분쇄한 밀과 토마토, 양파와 야구르트 등이 아궁이에서 갓꾸어낸 팬케이크와 함께 나왔다. 괴흐는 차를 끊여 냈다. 식사가 끝나자 샤티가 물항아리를 들고 아버지 앞에 앉아서 대야와 수건을 차례로 건냈다. 그는 앉은체 손과 입을 씻었다. 그러더니 내게 자신처럼 하라고 권했다. 마치 노예를 부리듯 하는 것이 어린 소녀에게 모욕적이라고 느꼈기에 거절했다. 나는 응접실 맞은편 방에서 잤다. 그의 집은 방이 다섯개 있었다. 침대는 나무침대에 메트리스가 놓여 있었다. 다음날 새벽에 괴흐는 마을 어귀까지 동행해 주었다. 오늘 갈 마을은 야일라 몰루는 예전에 바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5. 1000km.
무더위 속에서 35km를 걸은 탓에 바지와 서츠는 땀으로 젖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외계인 처럼 보았다. 반바지에 찌든 모습이 괴상하게 보였나보다. 앞으로 도시에 들어 갈때는 가능하면 긴바지를 입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곧 이란에 도착하게 된다. 아무리 더워도 이란에 가면 코란의 규칙을 사수하는 것이 임무인 무시무시한 코미테(경찰)에게 체포되지 않으려면 팔다리를 감싸고 걸어야 할 것이다. 파자르에서 호텔에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셀주크 시대의 대상 숙소를 방문하러 갔다. 입구는 놀라웠다, 첫번째 문은 낮았지만 훌륭핬다. 로마식 아치의 가장자리가 다듬어져 있었다. 1mm 정도의 얇은 돌들이 촘촘히 아치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지그재그 모양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알아보려 했지만 아무런 형상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몸을 숙여 다리 사이로 보았드니 모든 그림이 뚜렸하게 사람의 윤곽을 나타내고 있다. 원호(圓弧)를 따라 그려진 형상들을 세어보니 정확하게 열네개 였다. 잘 재단된 거대한 돌로 이루어진 큰 기둥들이 웅장한 로마식 아치를 지탱했다. 1000년의 세파에도 이 건물은 굳굳이 견뎌내고 있었다. 여기서 알게된 몇몇 교수들이 영어 연습을 할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을 기쁘하며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대상숙소에 대해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주민들이 건물을 방치하고 있었다. 철학자 이기도 한 그 교수는 "인살라(알라의 뜻이라면)" 하고 말했다.
2500년 동안 주인이 열네번이나 바뀌었던 토카트는 13세기 이후 지면이 500m 높아 졌는데, 이는 수차례 지진이 발생하여 이웃의 언덕들과 이어진 충적토 지층이 밀려 내려간 결과였다. '피크메드레세'에 지금은 박물관 이지만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셀주크 왕조시대의 터키의 여섯 번째 도시였던 이곳은 티무르 시대에 몽골인에게 점령된 이후 몰락했다. 오스만 시대에 이곳이 실크로드의 교차로 여서 중요한 곳이었다. 이곳에 아름다운 호텔 '라티포홀루 카나구아'도 방문했다. 서로 다락다락 붙은 집들은 오래된 시를 읽을때 처럼 감동적이었고, 반항적이고, 연대적이고, 고집스러운 정신만이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집에도 영혼이 있는 법이다 사원의 그늘 밑에서 세분의 노인을 만났는데, 모두 깃발처럼 치렁치렁한 흰수염을 휘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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