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여행의 매력은 다양성이다. [54]

paxlee 2020. 2. 18. 23:20

 

나는 걷는다 [Ⅱ-1]

 

<머나먼 사라르 칸트>

1. 푹풍우 : 2000년 5월 14일, 에르주름과 도우바야지트.

나는 새벽에 아르주름(Erzurum)을 떠났다. 파리에서 출발해 세번이나 비행기를 갈아타고 이스탄불에 도착해서 앙카라를 거쳐 아르주름까지 오는 동안 작년에 횡단했던 도시와 마을풍경을 바라 보았다. 7월 햇볕은 거리를 달구고 있었다. 사마라칸트는 내가 여행을 꿈꾸던 곳이다. 그곳에 가면 4년동안 혼자 걸어서 여행계획을 세웠던 실크로드의 중간 지점에 닿게 된다. 이제 질병 때문에 여행을 중단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다시 여행을 시작하려 한다. 중국의 시안(西安)까지 가는 길에 내가 타고온 버스 기사에게 바로 여기서 내려 달라고 말했다. 운전사는 집도 없고 황향한 길에 내려 달라고 하는 나에게 "화잘실에 가려는 거죠?" 하고 말했다. "아니오, 여기서부터 걸어가고 싶어요" 그러자 운전사는 "완전히 맛이갔군" 하면서 차를 세웠다. 열달전에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생각하며 걷고 있는데, 거센 바람을 동반한 소나기로 평원이 어둑해 졌다. 가방에서 우비를 꺼낼 시간도 없었다. 우비를 꺼내 입는 동안에 내 몸은 물에 적신 솜처럼 되었다. 바람과 눈비 때문에 발이 묶였다. 얼굴에 퍼붓는 비 때문에 앞이 잘 안보였다. 사정없이 몰아치는 소나기에 몸이 흔들렸다. 손은 추위에 꽁꽁 얼어 붙었다.


올해 끝내야 하는 여정은 테헤란과 사마르칸트 사이의 20만km 에다 작년에 제대로 끝내지 못한 약 900km까지 합해서 앞으로 내가 통과해야 하는 세나라는 국제적으로 악명을 떨치는 곳이다. 이란은 이슬람 혁명이후 20년 동안 끔찍한 폭력과 잔인한 반 개혁주의를 세계 만방에 보여준 후 수년간 고립돼 있었다. 그후 이라크와 냉혹한 전쟁을 치르고 얼마되지 않아서 문호를 조금 열었을 뿐이다. 구 소련에 속했던 투르크메니스탄은 이란 다음에 거쳐야 할 곳으로, 공산주의 체제였다가 최근에 자유주의 체제로 전환한 나라이다. 우즈베키스탄 역시 과거 공산당에 속했던 구 정권이 철권정치를 하는 나라이다. 여름에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무더운 세 사막을 통과하거나 머믈러야 한다. 또 이곳은 코브라, 전갈, 파란룰라(독거미)등이 득실 거린다. 여행을 하고 있지만 건강문제는 아직도 약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약국에서 작년보다 네배나 많은 약을 처방 받았다. 2000년 이상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끈 실크로드는 끝까지 횡단하고 싶다.


나는 지금 이 나이에 계속 나이를 먹어 가기에 여행을 마칠 때까지 건강이 허럭할지 확신 할수 없다. 하지만 나는 타고난 낙천주의자다. 소나기가 그칠 무렵이 되어 몸도 따뜻하게 할 겸 최대한 빨리 겅었다. 세시간 동안 18km를 걸은 끝에 지난해 멈추었던 도우바야지트에 도착했다. 나는 다시 이 호텔에 돌아 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잠자리에 들면서 4년안에 실크로드 여행을 못하면 5년안에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잠을 제대로 못잤다. 근육이 조금 뻐근 했다. 아침에도 날씨는 흐렸다. 정오 무렵 길가에 앉아 빵과 말린 무화과로 점심을 먹었다. 터키에서 이란으로 넘어가는 국경지 퍼키 세관원은 거만하고 건방졌다. 나는 운이 좋았다. 세시간 만에 문제의 창구 앞에 도착 하였다. 여권에 도장을 찍던 세관원은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 하다며 600개나 되는 여권을 처리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이란의 첫 호텔은 터키의 호탤과 별로 다를게 없었다. 페허로 변해 일부분만 남은 채 나를 비웃는듯 했다. 내가 이란에서 실크로드 대상숙소를 처음 확인한 건물을 살펴 보았다.


2. 2천년의 사장, 바자르.

정오 무렵 카폴리크(Qapulik)에 도착했다. 그곳은 구명가게도 식당도 없었다. 걸어서 2시간 거리에 있는 다음 마을역시 가게라곤 없었다. 한끼의 거리를 걸어야 할것 같았다. 누군가가 차 한잔을 주었다. 차를 마셔고 있는데, 자그마한 여자가 쟁반에 빵과 치즈, 요구르트를 담아 가지고 왔다. 소말리아라는 여자는 그늘에서 식사를 함께 하자고 했다. 사람들은 식사를 하는 외국인을 보려고 여자의 집으로 몰려 왔다. 사람들이 보는 조용한 앞뜰에서 여 주인이 가져온 음식을 모조리 먹었다. 소말리아는 바이란의 두번째 아내였다. 바아란의 아내들은 각각 다른집에 살았고, 그는 기분에 따라 골라가며 잠을 잤다. 소말리아는 쾌할한 여자였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막내가 두살 이었다. 그녀가 생활하는 한칸짜리 방에는 못 세개가 박혀 있었고, 그기에 옷을 걸어 두었다. 그녀는 날 헛간으로 데리고 갔다.

 

창문도 없는 그곳에 배틀이 있고 그위에 짜다만 직물이 걸려있었다. 그녀와 여자 아이 하나가 배틀에 앉아서 날렵한 손 놀림으로 직물을 짰다. 두살베기 막내는 엄마 무릎위로 기어 올라가 스웨트를 들어 올리고 젖을 빨았다. 그래도 소말리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소말리아는 내가 떠나기 전에 낮잠을 자라고 모두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초라한 집의 양탄자위에 누워 한 시간동안 모든 걸 잊고 잠을 잤다. 다시 길응 나설때까지도 더위는 한창이었다. 모란드(Morand)에 도착한 나는 관광객을 위한 궁전을 찾기위해 뺑뺑 돌았다. 50km를 걷고 나니 너무 지쳐서 승합 택시를  탔다. 다른 승객들이 외국인인 나를 반기며 내리기 전에 내 요금을 내 주겠다고 했다. 운전수는 호텔에 도착하자 1만리알을 달라고 했다. 그가 요구한 요금은 처음 말한 액수보다 열배는 비쌌지만 값을 따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쳐 있었다. 나는 침대에 쓰러져 이튿날 아침까지 곤히 잤다. 이란에서 가장 아름답고 오래된 건축물중 하나로 모자이크 타일로 유명한 이 사원에 안타갑게도 들어 갈수가 없었다.

 

주변에 비즈니스 센터를 건설 하느라고 기중기가 움직이고 울타리가 세워져 있었다. 아침이 되자 이름마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네명의 매력적인 여성과 함께 푸른 타일로 장식된 불르모스크(사원)에 갔다. 마시드와 그의 딸 바하르와 그의 친구 바리바와 파루제가 나와 동행 했다. 아제데도 합류했다. 세번의 강력한 지진으로 심하게 손상된 모습이었다. 이슬람 사원 주변의 땅을 파던 중 수많은 보물단지가 뱔굴 되었는데, 그것이 그만 사라져 버렸다. 그 보물단지는 절천지 원수 이스라렐의 박물관에서 다시 모습을 보였다. 아직도 범인이 누구인지 수사 중이라고 했다. 실패로 끝난 이번 방문 때문에 낙심하자 뮤즈들은 나를 위로 하기 위해 엘골리(Elgoli) 공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왕족이 살던 곳으로 이슬람 혁명이후 일반에 공개됐다. 이 공원은 공개되고 입장도 무료지만 도심에 떨어져 있어서 차를 타고 가야 하기 때문에 부자들만 갈수있었다.

 

여기에는 19세기 말에 경치를 즐기고 자신을 뽑내기 위해 사륜 마차를 타고 숲으로 갔던 우아한 파리 사람들이 느겼을 분위기가 있었다. 사람들은 산책을 하며 서로 인사를 했다. 여자들은 스카프가 흘러 내려서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은지 발목까지 내려오는 옷의 단추를 잠그지 않아서 맨다리가 보이지 않는지를 조심했다. 사복을 입은 경찰이 많이 다니기 때문이었다. 산책하는 사람들은 서로 조심했다. 손을 잡거나 단순한 접촉이나 소박한 만남으로도 징계를 당하거나 체포될수 있었다. 감시자들이 탄압하는 이런 엄격한 사회에서 청소년들은 조심스럽게 전화번호를 교환할 뿐이며 이 마저도 부유한 계층에 국한된 특전이었다. 이란 사람 대부분은 시아파 교도이고, 쿠르드 사람들은 순나(Sunnah : 예언자의 언행을 적은 코란을 보완하는 자료)를 따르는 정통 이슬람 교도 들이다.

3. 대상 숙소.

아침 아홉시가 되자. 달아 오르는 열기 때문에 짧게 자른 머리위를 덮어야 했다. 짐을 꼼꼼히 뒤져본 다음 결론을 내렸다. 모자를 잃어 버렸다. 이런 일이! 내 모자에 여행의 동반자 내 머리의 친구, 3년 전부터 5000km를 함께했던 친구, 그 친구없이 계속 여행하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색이 바래고 형태가 없는 박물관이나 어울릴 그 진(Jean) 모자는 내 보물 1호다, 모자를 안쓰고 걷는다? 그럼 신발도 안벗을 이유가 없지, 이제부터 사막을 어떻게 대적한다? 엄청나게 더울때 모자를 물에 적시면, 두꺼운 천이 오랫동안 신선한 물기를 간직한다. 도로 위에서 모자는 깃발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런 모자를 어디에서도 본적이 없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일주일전에 어떤 도시에서 당신을 봤는데, "이 모자를 보고 당신을 알아 봤어요" 어디에 가든지 내 모자를 빌려 쓰보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마 잠깐 이라도 외국인이 되고 싶어서 였던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모자를 사겠다고 하거나 다른 물건과 교환 하자고 했다. 그때마다 차라리 날 밟고 지나가는게 낫다고 말하며 모자를 탐내는 사람들을 물리쳤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지막으로 모자를 본게 언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매일 그랫던 것처럼 가방위에 얹어둔 모자가 어딘가에 떨어진 것 같았다. 나는 모자를 찾기로 결심했다. 북쪽으로 올라는 지프를 세워서 문짝에 매달려 길가를 샅샅이 훑어보며 모자가 나타나기를 바랬다. 하지만 결국 카라시야샤만까지 되돌아 왔고, 모든 것이 헛 수고가 됐다. 누가 모자를 주워 갔거나 바람에 날려 간것 같았다. 잔뜩 풀이 죽어서 어제 묵었던 식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주인은 뚱한 표정을 짓고 돌아온 나를 문지방에서 반갑게 맞이한 뒤, 내가 아침식사를 했던 테이블로 데리고 갔다. 모자가 바로 거기에, 옆에 았는 의자에 의젓하게 놓여 있었다. 난 모든 사람들에게 차를 돌린뒤 돈을 두고 나왔는데,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친절한 운전사 하나가 내가 고생한 것이 측은 했는지 물었다. "모자가 없어진 걸 어디서 알게 됐어요?" "10km 쯤 떨어진 데서요" 사실 10km보다 훨씬 먼 거리였지만, 내가 셀수있는 페르시아어는 10까지 였다. 그는 내 가방을 낚아채 10t 짜리 새 트럭의 조수석에 놓드니 나더러 올라 타라고 했다. 그는 정확히 10km 떨어진 곳에 내려 주었다. "고마워요, 길을 가다보면 또 보게 될지도 모르죠" 그리고 그는 떠났다.


4. 목마름

아나톨리아 고원을 출발해서 평원쪽으로 내려갔다. 7월이 되면 일년중 가장 더운달에 테레란과 메세도사이에 있는 카비르 사막에서 밤낮을 생활해야 하는데, 차츰 익숙해 지겠지만, 적응하는 데도 한계라는 것이 있다. 탈수 현상이 가장 치명적이다. 말랑말랑한 프라스틱으로 된 물통 두개중 하나에 빨대를 꽂고 서츠깃에 작은 관을 연결해 걸으면서 마실수 있도록 했다. 한통의 물을 마시는 동안 다른 통엔 정제를 넣어 소독을 해서 한시간 내에 마실수 있는 물을 만든다. 물통 하나에 2ℓ씩 물을 담는다. 그러면 배낭무개는 17kg이다. 어디를 가든 디젤기관이 작동되는 펌프관을 통해 우물물을 끓어 올릴수 있고 식당앞에 있는 샘물을 물통에 채울수 있었다.


그때 대상들은 하루평균 8시간에서 12시간을 걸었다. 한 노인이 25km 거리에 있는 니크페이(Nikpei)에 가면 아직도 상태가 양호한 대상 숙소를 볼수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은 니코패이 까지 가려면 50km을 걸어야 하니 긴구간을 걸어야 한다. 나는 카하브의 어느 뷔페(길거리 식당)에서 차거운 과일쥬스 2잔을 마셨다. 저녁 8시 반이 되어서 니크페이로 이어지는 사거리에 도착했다. 뷔페에서 센드위치를 주문했다. 30대 남자가 대상숙소를 찾아요? 자기 집 근처에 있다고 말했다. 대상숙소는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무너진 벽이 있어서 짐작할수 있었다.


5. 사막.

오후에 50대 남자 가이드 아크바르를 만났다. 이튼날 아침 해가 뜨자 우리는 테헤란 남부의 성스러운 도시 콤을 향해 출발했다. 테헤란의 기운은 섭시 46도 였다. 우리의 첫 숙박지는 도자기와 양탄자로 유명한 도시 카샨아다. 우리는 걸어 가다가 '왕의 정원'의 커다란 나무들이 드리운 그늘에서 차를 마셨다. 이곳은 오아시스에 물을 공급하는 필 수원 덕분에 생긴 것이다. 아바스 1세 치하에 설계된 이 정원은 마법과 같았다. 고비노(1816~1882.프랑스의 동양학자), 잔 디필라푸아, 그레이엄 그린(영국 소설가), 피터 플레밍(영국 여행작가)이 늘 예술과 시인이 모여 들었던 곳이다. 우리가 도착한 도시는 죽은 도시 같았다. 기온이 섭씨 50도를 못돌고 있었다. 저녁 6시가 되자 거리는 활기를 찾기 시작 하였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펜트를 가려고 공원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간단하게 빵과 치즈로 저녁을 먹었다. 어떤 남자가 자기 집으로 와 달라고 말을 건넸다.


그의 청을 거절 하는데 10분이 걸렸다. 내일 새벽에 나마크 호수에 가려면 새벽 4시에 출발해야 하므로 잠자리에 들려고 할때 험상궂은 인상의 건강한 남자 네명과 차도르를 한 여자 하나가 다가왔다. 여자는 영어로 두개의 질문을 통역 했다. "당신의 종교는 우엇입니까?" "이란 사회를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슬쩍 덫을 놓으려는 극단적인 보수 주의자들이다. 나는 그들의 방문에 감사 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크바르와 나는 지금 몹시 피곤한 데다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며 위기를 벗어났다. 그리고 그들이 떠났지만, 십분뒤 경찰이 닥쳤다. 경찰하나가 총을 내보이며 여권을 보여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물러갔다. 아크바르는 넓은 4인용 텐트 안에서 자고, 나는 침낭에서 잤다. 600g에 방수 처리된 침낭 이었다.


안내인 모크타르는 커다란 사륜구동 차를 끌고 와서 우리를 태우고 아직 깜깜한 밤에 나마크 호수를 향해서 갔다. 이 거대한 사막에서 낙타의 먹이가 되는 뾰족한 풀이 여기저기에 돋아 있었다. 대상들의 짐을 날랐던 그 낙타들이 지금은 털과 고기를 얻기위해서 기른다. 낙타는 한번에 65ℓ의 물을 마시고 한달을 견딜수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4~5일에 한번 물을 먹인다고 한다. 모래길이 흔들리는 차속에 시달려서 마련자브에 도착했을때 녹초가 되었다. 몇세기 동안 말라버린 호수는 금이간 넓은 소금 벌판이 돼 있었다. 저쪽끝에 아바스 시대의 대상 숙소 하나가 당당하게 서있었다. 카나트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모여든 저수지 근처에 있는 오래된 나무가 드리운 시원한 그늘 아래서 식사를 했다.


사막이 시작되기 전 마지막 마을 잔다크의 첫 집에서 만난 메흐디는 우리를 자기집에 데리고 가서 베틀을 보여주며 자랑을 했다. 그의 아내와 아들들과 차례로 베틀에 앉아 일을 했다. 수지로 된 받침대 다르 위에는 씨실과 설레가 촘촘히 설치되어 있고, 그 위로 가족들이 날랜 손놀림으로 직물을 짜는 데, 열을 받을 때마다 빗처럼 생긴 망치같은 디프틴으로 눌러준다. 지금 직조중인 양탄자는 가로 길이가 1,4m이고 세로 길이가 2,2m 짜리다. 하루에 10시간 일하면, 6개월 후에 완성 된다고 한다. 기본 재료비는 2,000 프랑인데, 완성된 양탄자는 6,000프랑에 판다. 집집마다 베틀이 한대 이상씩 있다고 한다.


"최근 몇년동안 여러 사람이 사막에서 사라졌어요" 메흐디가 말했다. 완벽한 사각형 도로는 순식간에 끝없는 평원 속으로 빠져 들었다. 너무 멀어서 경계를 구분할수 없었다. 손에 잡히지 않은 이 안개는 땅을 어둡게 만들어서 형체도 없고 솜처럼 부드럽게 보이게 했다. 모래 언덕도, 구릉도, 풀 한포기도, 눈을 고정시킬 바위하나 없었다. 바로 카비로 사막의 중심에 온것이다. 지표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사막에 들어와 있다는 느낄수 있었는데, 아크바르의 원기 왕성한 차는 시속 140km로 달렸다. 바람이 작은 모래 폭풍이 비틀 거리면서 형체없는 탑을 만들며 흩어졌고, 뜨거운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차를 타고 달린지 두시간, 황갈색의 벽같은 것이 갑자기 지평선 위에 나타났고, 우리는 빠르게 접근해 갔다. 정상적으로 모알레만에서 서쪽으로 비 소음이 들어가야 셈난에 닿는다. 군대가 셈난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길을 막았다. 그래서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담간으로 향했다.


나는 오늘 26km를 걸었으나 앞으로 5km를 더 걸어야 한다. 완만하고 평평한 경사지에 두개의 큰 건물이 보였다. 하나는 아주 낡은 성채였고, 다른 하나는 대상숙소 였는데, 묵직한 자물쇠가 잠겨 있었다. 오늘도 과거의 대상숙소에서 못자게 될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안쪽에 이슬람 사원이 있는데, 그 앞에는 신자들을 테우고 온 버스와 트럭이 주차되 있고 머리가 하얕게 센 키작은 남자가 다가왔다. 나는 그 남자에게 "어디서 먹고 잠을 자죠?"  대답없이 이슬람 사원에서 줄을 서며 모호하게 동쪽을 가리켰다. 나는 돌에 앉아 기다렸다. 나는 거의 30분 동안 무작정 기다렸다. 그때 바짝 마른 남자가 이슬람 사원에서 나와 개들이 반기는 집에 들어 갔는데, 조금 후에 나오더니 내 쪽으로 왔다. 그의 경계심은 호기심 때문에 와르르 무너졌다. 그의 이름은 빌리이고 쉰여삿살로 이곳의 유일한 주민이며 건물 관리인 이었다. 그는 내 여권을 보자고 했다. 여권을 보더니, 긴장을 풀고 차를 마시러 오라고 했다. 그렇게 조금씩 서로 알게 되면서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드니, 침대가 네개있는 옆방에서 자도 된다고 했다.


발리는 재미있는 사람 이었다. 나는 피로에 지처 편하게 잠을 잤다. 아침 7시에 날 깨운 발리는 셈난의 집을 되돌아 가라고 했고, 교대가 끝나고 돌아가야 할 발리를 방해하지 않으려면 빨리 집을 챙겨서 나가야 한다. 발리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손자에게 줄 베지를 준 뒤 나왔다. 다시 길을 떠났다. 33km 안에는 마을이 없다. 갈증으로 고통 스러웠다. 입에 물을 가득 물고 있어도 목구멍과 입천장이 바짝 마른 느낌이었다. 나는 탈수증에 걸리기 직전이었다. 최대한 일찍 그리고 최대한 늦게 걷고 가장 더운 오후 1시에서 4시 사이에는 쉬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금을 마무리 먹어도 탈수증에 빠질수 있다. 담간까지는 15km가 남았다. 담간은 파르디아의 수도인 동시에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 이었다. 하지만 친기스칸에게 수차례 공격을 당하고 파괴되어 폐허에서 완전히 일어서지 못한채 지방도시로 머물고 말맜다. 담간의 탑중 하나는 "마흔명의 처녀"라고 불린다. 무어족에게 패한 스페인 북쪽 왕국의 기독교도 왕들이 클라비흐의 승리때까지 매년 이슬랍의 승자에게 "100명의 처녀"를 제공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