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걷는다.[Ⅰ-2]
베르나르 올리비에 저, : 임수현 역.
6. 여인(女人)들.
터키에는 곳곳에 테러리스트들이 시민들을 괴롭히고 있어서 내가 가는 실크로드 길은 곳곳에 군인들이 통행을 통제하고 있었다. 어느 마을에서는 테러리스트로 오인해서 주민들이 군 헌병대에 신고를 해서 하룻밤을 그곳에서 지내며 고초를 겪기도 했다. 프랑스 대사관에 연락을 하도록 전화 연결을 부탁해도 그들은 막무가네 였다. 다음날 민간인이라 경찰서로 이송 되었는데, 경찰담당관은 그래도 영어로 대화가 되어 앙카라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에 전화 연결을 해주었다. 그렇게 오해가 풀리고 자동차로 내가 머문 지점까지 태워다 주기도 하고 자동차를 타고 오는데, 운전을 하는 하사관은 대장이 지시하였다고 나의 말은 듣지 않아 내가 2일 동안 걸어야 하는 거리를 4시간만에 걸으면 되는 지점에 내려 주었다.
그래서 나는 테르칸(Tercan)까지 걷기로 하였다. 테르칸 입구에 12세기 경에 놓인 낡은 다리 교각이 온전한 상태였다. 테르칸은 마마하툰의 도시였다. 마마하툰은 1191년 아버지 이제틴 살투크 2세의 공국(公國)을 물려 받았다. 터키의 잔다르크 군대를 지휘하여 아유브족의 침입을 물리쳤다. 그의 딸 마마하툰은 권력을 빼앗으려는 포악한 조카들과 맞서 10년을 무기를 손에 들고 싸웠다. 이 대찬 공주는 남편감을 물색 했으나 아무도 그녀를 휘어 잡을 남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날 중세 오스만의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되는 사원과 대상숙소, 목욕탕이 찬란 하면서도 독창적인 건축물이 남아있다. 그녀의 능도 여기에 빼놓을수 없다. 마마하툰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 후문은 암살 되었거나, 조카들이 그녀가 죽을때까지 감금 했을 거라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
오스만 투르크의 위대한 여행자 '에올리야 첼레비'가 12세기 중엽 이곳을 지나며 감탄했던 마마하툰의 영구대(靈柩臺) 또한 함께 사라졌다. 나는 그녀의 능을 운좋게도 구경할수 있었다. 마마하툰 이외도 이땅의 역사를 장식한 여성으로 '헬레나(Helena)와 이레네(Irene), 그리고 데오도라(Theodora) 이들은 터키에서 각각 자신의 시대를 풍미했던 여성들이다. 그러나 터키는 1934년부터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이 여행기는 실크로드의 길만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옛날 실크로드의 원형을 그대로 보고 느끼는데 주언점을 두고 여행하지만 가는 곳곳의 길과 숲과 산과 자연을 보고 감상을 적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언어, 음식, 의복, 남여의 다른점, 그들의 언어의 특징, 운화, 정치, 경제, 환경, 역사까지 어우러면서 여행하는 모습이 여행의 원형을 보여준다.
여행이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은 기대했던 것처럼 만족 스럽지 못했다. 언어 구사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정보수집에 가장 큰 단점일수 밖에 없다. 내가 관계를 맺고 신세를 지면서 진솔한 대화를 누릴수 있었던 가족들은 어휘나 문장을 늘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여행에서 만남은 대화에 그 포인트가 숨겨있다. 나는 같은 옷을 매일입고 걷다보니 옷이 헤어진것을 보고 이탈라이 라느 양복장이가 헤어진 곳을 수선해 주기도 하었다. 내가 아무리 우겨도 돈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여행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와 30분 동안 여행 이야기를 나누었다. 파이베랜에 도착했다. 경사진 곳에 숨어있는 흙집들은 두개의 흰건물은 사원과 학교였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파리에 있는 쿠르드 대표자를 만나러 간적이 있는데, 쿠르드 마을에 가면 큰집이 있는데 그 마을 부호의 집인데 문을 두드리세요. 여자가 문을 열어주면 "주인을 보러 왔습니다." 이렇게 말 하세요. 그 사람 집은 안전합니다. 주인이 이튼날 어느방향으로 갈거라고 물으면 방향을 정확히 알려 주세요. 그가 당신이 거처가는 모든 이들에게 연락을 해 줄것 입니다. 그렇게 하면 조금안전해 지는거지요, 꼭 잊지 마세요. 여자에겐 절대로 말을 걸어선 안됩니다. 그의 말을 기억 하면서 큰 집을 찾았다.
6. 큰 고통의 산
이질로 엉망이 된 몸 때문에 사흘간 굶은 탓으로 길을 떠날수 없었다. 배낭을 질수 있으려면 몇일 더 쉬어야 할것 같다. 배에서 아메바가 들끓고, 토하고, 피와 점액을 배설 하면서 만신창이가 되었다. 저녁무렵 조금 증세가 호전되어 위험을 무릅쓰고 큰 길에 나가 보았다. 영어를 구사하는 일반 여행자들이 짧은 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사륜 구동차를 타고 모헙ㅁ 떠나고 있었다. 나는 저울에 올라가 보았다. 눈금은 내가 예상한것 보다 너무 내려가 있었다. 저울의 조정이 잘 되어 있나 살펴 봤으나 문제가 없었다. 저울에는 60kg을 가르키고 있었다. 이스탄불에서 걷기를 시작 할때 74kg 이었다. 두달간 걷고 에르주름에서 1주일전에 잰 몸 무게가 71kg 이었는데, 사흘 동안 심하게 앓아 먹지 못했다고 해도 11kg이나 빠졌다. 이튿날 아침 호텔을 옮겼다. 나를 진찰한 의사는 "다시 길을 떠나려면 여러 주가 지나야 할겁니다" 지금 상태로는 2~3주는 더 안정을 해야 가능하다고 했다. 하루에 35km를 걸어야 하는데, 이렇게 지체를 하다가 비자 기한이 7월 14일까지 인데, 나의 이란 비자는 15일 밖에 유호하지 않다. 29일이 되면 비자를 갱신해야 한다. 비자 발급 기간이 보통 2주는 걸린다.
나는 아무리 빨라도 8월 15일 경에나 여행을 재개할수 있을 것이다. 회복기 환자가 무더운 날씨속에 걷는 것은 무리다. 나의 시간표는 걷고, 먹고, 숙박하는 것이다. 전화벨이 울렸다. 의사 선생이 이스탄불에서 전화 했다. "당신의 서류를 검토해본 후에 당신을 담당했던 의사들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국으로 돌아 가셔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내 상태로는 비행기에 탑승 할수가 없었다. 나는 단 몇분도 앉은 자세로 있을수가 없었다. 두시간 후 구급의사가 전화해서 방법은 하난 뿐이라고 말했다. 앰브란스를 타고 도우바야지트에서 이스탄불까지 가는 것이다. 저녁에 자동차가 보스포루스 연안에서 출발하면 내닐 아침에 도착 할 것이다. 의사가 알려주기를 두명의 운전기사와 한 명의 간호사가 동행하는데, 여정은 무척 불편하고 피곤할 것이라고 했다. 대안이 없었다. 이질이 악화되면서 통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여행을 계속하기도 힘든 마당에 아쉬워하지 말라고 했다.
약속시간에 앰브란스는 떠날 것이다. 그동안 배낭에 넣어 다니면서 읽지 못했던 <론리 플리넛>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잠들었다. 약을 먹었는데도 아메바들이 다시 내 창자를 갉아 먹고 있었다. 배의 통증이 전신을 자극 했다. 배 속에서 미생물들이 요동치는 것을 달래보려고 지치고 쇠약해진 몸으로 시내로 나왔다. 나는 도시의 긴 끄트머리에서 아라라트 산의 그 완벽한 삼각형이 수평선에 걸린 모습을 감상했다. 오늘은 그 산이 넘을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거리에 상점들이 열리고 물건들이 쌓여있다. 이곳 환경은 너무 지나치게 더러웠다. 일곱시 반경에 호텔로 돌아온 나는 차를 몇잔 마시고 작은 빵조각도 오랫만에 씹어 먹을 수 있었다. 고통이 줄어 들면서 시간 가는 것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걸을수 없으니 여행 욕구를 희생하는 수 밖에 없다. 이 여행에 가진 나의 호기심은 모두 세가지 였다. 첫째는 아라라트 산이다. 그런데 산을 오르는 것은 PKK(테러리스트) 와 전쟁이 시작 되면서 군대가 막고 있었다. 그 다음은 30km 떨어진 이란 국경과 가까운 곡쿠루 운석이다. 지나가는 길에 그곳에 들을 계획이었다.
1920년 이지역에 거대한 운석 직경 60m, 깊이 30m가 넘는 거대한 틈을 만들었다.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거대한 틈이었다. 세번째는 내 행동 반경안에 있는 도시에서 5km 떨어진 지점에 이나라의 가장 아름다운 보물중의 하나인 아샤크파샤 요새(궁전)이다. 나들이가 힘든 나는 화장실용 화장지를 잔뜩 준비해서 택시 운전사와 흥정을 했다. 다른 승객을 태우지 않고 나를 요새까지 대려다 주고, 대기 하였다가 나를 호텔까지 데려다 주는 것이었다. 앉을수 없어 나는 뒷좌석에 드러누웠고, 운전사에게 가축떼를 지나는 것은 가급적 피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100m도 가지 못했는데 나의 몸이 폭발할것 같았다. 나는 기사에게 호텔로 대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호텔방에 누워 자려고 했다. 정오가 조금 지나자 몸이 한결 나아졌다. 방에 누워 있을수만 없어서 밖으로 나갔다. 그 택시 운전사가 다시 왔다. 이번에는 운전사가 아주 조심스럽게 운전을 했다. 도착하는 순간 나는 밖으로 급히 나가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후 상트패테르 부르크 박물관에 보관 된 금을 입힌 문은 러시아 인들이 가져가고 없었다. 그리고 많은 곳이 파괴되어 있었다.
나는 볼일이 너무 급해 식당 화장실까지 갈수가 없어 궁전의 외딴 구석에 작은 추억을 남겨놓고 올수밖에 없었다.돌위에 새겨진 수치 스러운 세월과 시간이 흘렀음에도 변함없이 남아있는 것은 평원위의 성채에서 바라본 기가막힌 전망이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성에서 나오자 택시 기사가 문앞에서 충실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들이 때문에 몹시 피곤해진 나는 호텔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 밤 10시 경에 앰블런스가 왔다. 서너 시간 잠을 자고 새벽 3시경에 출발하기로 합의 했다. 간호사가 내 피부를 꼬집어 보드니 "탈수가 심하시군요, 물을 많이 마셔야 해요." 라고 했다. 나는 들것 위에 누웠고, 간호사는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나는 수치심을 꾹 참고, 아픈 배를 끌어안고 자동차에 실려 여태까지 걸어 왔던 길을 거슬러 가고 있는 것이다. 병원에 도착하는 데 23시간이 걸렸다. 나를 검진 하던 의사가 내 엉덩이를 보드니 "여기가 왜 이래요" 하고 놀란다.
내가 간호사가 연고를 발랐다고 했드니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 화상처럼 엉덩이가 부풀어 올랐다. 내가 통증을 계속하자 모르핀을 놓았는지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나니 아침 여섯시 였다. 8시가 되어 의사들의 한 무리가 나를 진찰했다. 내가 파리로 돌아가 급히 수술을 받을수 있게 회복 하려면 며칠간 이곳에서 치료를 받으며 쉬어야 했다. 이스탄불에서 파리까지 비행기로 네시간이 걸린다. 가장 큰 문제는 전립선 상태였다. IMA의 현지 직원인 귀나이가 나를 만나러 왔는데, 그는 아주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전립선 질환은 곧 회복 될거고요, 이곳 바탄(Vatan) 조국 병원 의료진은 매우 뛰어납니다. 제가 나흘후에 떠나는 파리행 비행기표를 예약 했습니다. 마르폴로 이래 실크로드 전체를 다녀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래전부터 나는 자아를 탐구하는데, 모든 고독한 나날이 지나고 나는 노력과 시련, 예외적인 일들을 통해서 진정으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을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몇 시간후면 비행기가 나를 파리로 데려간다. 그러나 내 마음은 다른 세상에서 그것던 것처럼 내가 쓰러진 그곳, 로우바야지트의 길가에 머물러 있다. 몇 주일후 아니 몇 달후에는 나는 다시 거기에 내 충실한 신발 자국을 남길 것이다. 그리고 얼굴을 동쪽으로 향해 다시 길을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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