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히말라야 철인 박영석 *-

paxlee 2007. 1. 23. 11:34

 

히말라야의 철인 박영석

 

히말라야의 산군(山群)에는 수천개의 산이 있지만 그 중에서 8000m가 넘는 산은 14개뿐이다.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8848m)를 비롯, K2(8611m) 칸첸중가(8586m) 로체(8516m) 마칼루(8463m) 초오유(8201m) 다울라기리(8167m) 마나슬루(8163m) 낭가파르바트(8125m) 안나푸르나(8091m) 가셔브룸Ⅰ(8068m) 브로드피크(8047m) 시샤팡마(8046m) 가셔브룸 Ⅱ(8035)가 그것이다. 14개 자이언트 봉의 완등이 세계적인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이탈리아가 낳은 철인 라인홀트 메스너와 폴란드의 예지 쿠크츠카의 선의의 경쟁에서 시작 되었다.

 

1970년 낭가파르바트 등정을 시작으로 히말라야에서 정력적인 등반을 시도했던 메스너는 쿠크츠카의 막판 추격을 몇 개월 차이로 뿌리치고 1986년 로체를 등정함으로써 전인미답의 기록을 세웠다. 8000m급 하나만 등정해도 대단한 평가를 받던 시절에 14개를 모두 완등 했다는 소식은 산악인은 물론, 문외한들까지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수많은 산악인이 인간한계에 도전하다가 목숨을 잃는 판국에 14개를 등정하고도 살아남았다는 것은 신의 축복으로까지 여겨졌다.

 

그후 지금까지 14개봉 완등에 성공한 산악인은 95년에 스위스의 에라르 로레탕이 메스너와 쿠크츠카의 뒤를 이었고, 96년 폴란드의 크리스토프 비엘리츠키, 같은해 멕시코의 카를로스 카르솔리오, 그리고 99년 4월에 스페인의 후아니토 오야르자발이, 그리고 이탈리아의 세르지오 마르티니, 한국인 엄홍길, 이어서 박영석 대원이 철인 대열에 합류했다. 그 후 한완용 대원이 14좌를 완등하여 한국인의 기상을 높혔다.

 

세계 산악계의 흐름은 ‘등로주의’에 집중되고 있어 쉽게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는 ‘더 어렵고 더 힘들게’ 오르는 것을 추구한다. 박영석 대원이 93년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성공한 것이나, 91년과 93년 두 차례에 걸친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95년 에베레스트 북동릉 등반에 도전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쉽게 오르면 아무래도 성취욕이 떨어지고, 가장 쉬운 루트인 노멀코스로 정상에 오르는 것은 보편화 되어있어 정상에 오르기보다는 어떻게 오르느냐에 관심이 더 집중되고 있다.

 

키 175cm에 73kg인 박영석씨는 등반이 끝나면 그 체중에서 10kg 이상 빠져나간다고 한다. 프로 산악인 체질에도 몸무게가 그렇게 빠질 만큼 등반이 고통스럽다는 얘기다. 그는 회복이 빠른 편이어서 남들은 한 달이 지나도 원래 몸무게로 돌아오지 않는데, 그는 보름만 지나면 회복이 된다고 한다. 그는 산악인들에게는 극약이라고 불리는 술과 담배를 등반 중에도 마다하지 않는다. 술은 베이스캠프에서 틈틈이 마시고 담배는 7000m 지점까지도 피운다고 한다.

 

그가 산악인이 되기로 한 것은 ‘우연’ 때문이었다. 2남 4녀 가운데 장남인 그는 딸 넷을 낳고 본 장손이라 어려서부터 부모의 극진한 보호 아래 자랐다. 누나들을 ‘언니’라고 부르며 응석받이로 자라던 그를 남자답게 만든 이는 산을 좋아했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일요일이면 어린 영석의 손을 잡고 동네 뒷산과 북한산 등지로 끌고 다녔다. 하지만 그에게 산이란 공부를 하지 않으려는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고교시절까지 공부와 담을 쌓고 지내던 그에게 산은 별 의미가 없었다.

 

오산고교 2학년 때인 80년 여름에 우연히 시내에 나갔다가 시청 앞에서 카 퍼레이드를 보았는데, 마나슬루 등정에 성공하고 돌아온 동국대 원정대를 보는 순간 ‘아, 저게 내가 할 일이다’고 마음이 움직여 동국대 산악부에 들어가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그는 동국대 산악부에 들어가기 위해 대학입시를 준비했다. 공부엔 취미가 없는 그였지만 동국대 산악부의 멋들어진 카 퍼레이드를 생각하며 머리띠를 동여맸다. 재수까지 하면서 마침내 동국대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했다.

 

그때 제겐 동국대가 하버드나 옥스퍼드 못지 않았어요. 산악부로는 국내 최강이니까요. 그 자부심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동국대 산악부는 군대보다 더 기강이 심하다. 호랑이새끼를 키우는 이곳에서는 선배들로부터 기합을 받아도 좋았고, 훈련산행에 들어가 무거운 장비를 메고 깔딱고개를 오르내려도 힘든 줄을 몰랐다. 그 흔한 미팅 한 번, 데이트 한 번 안 해 봤을 정도로 산에 미쳤다. 주말이면 산에 들어가 살았으니 여자와 만날 시간조차 없었다.

 

그에게 고산 해외 원정이란 목표가 마음속에 자리잡은 것은 2학년 겨울, 일본으로 북알프스 등반을 갔을 때였다. 그해 북알프스에는 눈이 엄청 많이 내렸다. 조난자도 많이 생겼을 만큼 코스가 위험하였다. 수많은 산행을 했지만 그때 처음으로 위험한 산행을 하면서 묘하게도 그런 고비를 넘기면서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결심하였다. 군대에 갔다 와서 복학한 그는 공부는 제쳐놓고 알프스 3대 북벽 원정을 계획했다.

 

하지만 경비를 조달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다. 부모의 반대가 엄청났던 것이다. 아들을 남자답게 키우려던 아버지도 아들이 취미로 산에 가는 것은 말리지 않았지만 본격적인 산악인으로 나서려는 것은 극력 반대했다. 하지만 양친의 눈물어린 호소도 한번 마음을 잡은 아들에게는 한 치도 먹혀들지 않았다. “이번 한 번만…” 하면서 나가기 시작한 아들은 지금까지 이 약속을 한 번도 지킨 적이 없다.

 

알프스 3대 북벽을 다녀온 박영석씨는 89년 동국대 랑시사리 원정대의 대장이 되어 처음으로 히말라야 원정길에 나섰다. 당시 네팔에서 그의 원정대는 ‘기레하시(‘자투리’란 뜻의 일본어) 원정대’라 불렸다. 워낙 경비가 부족했던 터라 다른 대학팀의 찢어진 텐트를 얻어 이리저리 기워 쓴 것이 놀림감이 됐던 것이다. 하지만 이 원정에서 그는 적은 예산으로 등 반할 수 있는 지혜를 터득했고, 2년 후 동계 랑탕리봉 초등에 성공해 세계 산악계의 주목을 받았다.

 

미친듯이 산에만 다니느라 데이트할 시간조차 없었던 그에게 시집을 오겠다는 참한 규수가 있었다. 오산고 다닐 때 알게 된 후배가 있었는데, 그 아이 집이 오색에서 기념품점을 한다기에 설악산에 놀러갔을 때 들렀는데, 누나라고 소개해 주었다. 마침 동갑내기로 서울에서 사는 데다가 같은 이태원이어서 그때부터 집안끼리도 왕래하면서 아주 친하게 지냈다. 둘 다 한 우물만 파는 성격이라 다른 사람을 사귄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나이가 들자 자연스럽게 결혼을 했다.

 

부인 홍경희씨는 “남편이 산에 미친 사람인 것은 알았지만 결혼하면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산을 포기할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믿었던 남편은 집안일은 아내에게 죄다 떠맡기고 오히려 더 신이 나서 산을 탔다. 한 번 한다면 하는 남편의 성격을 잘 알기에 말린다고 들을 사람도 아니고 오히려 부부 사이만 나빠질 것 같아 마음대로 하라고 내버려뒀다고 하였다.

 

91년 박씨는 선배 산악인이 경영하던 네팔 카트만두의 ‘빌라 에베레스트’를 인수했다. 빌라 에베레스트는 침대가 30개 정도 있는 음식점 겸 여관으로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한국 산악인들이 등반 전후에 들렀다 가는 곳이다. 이걸로 큰 돈을 벌지는 못하겠지만, 앞으로 히말라야를 오르는 데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 1년이면 6개월을 가족과 함께 이곳에서 생활하며 운영해왔다.

 

“저 때문에 가족들의 희생이 컸다고 하였다. 그게 제일 마음에 걸려요. 아내에게는 단 한 번도 생활비를 줘본 적이 없어요. 서울에 오면 부모님 집에 얹혀 지냈다. 아이들과도 제대로 놀아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아이들과 친밀한 정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목욕탕 나들이 덕분이라고 하였다. 모처럼 집에 머물 때는 두 아들과 목욕탕에서 놀기를 즐긴다. 다행인 것은 지난 3월부터 처음으로 아내에게 생활비를 주게 되었다. 영원무역에서 과장 직함을 받아 비록 근무는 하지 않지만 월급이 나왔다.

 

지금까지 산을 오르며 가장 슬픈 순간은 함께 등반하던 동료가 사고로 죽었을 때라고 말한다.  93년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등정하고 대학 후배 두 사람과 함께 힐러리 스텝을 내려왔는데, 뒤따라오던 후배 진섭이가 내려오질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진섭이 산소통에 이상이 생겨 호흡이 곤란해저 죽을 지경이었다. 무산소 등정이라 거의 탈진 상태였지만 기를 쓰고 힐러리 스텝을 도로 올라가 진섭이를 데리고 내려왔다. 캠프가 있는 사우스콜이 저만치 보여 ‘이제 다 왔다’ 싶어서 진섭이와 묶은 줄을 풀었다.

 

기력을 좀 회복한 진섭이가 오히려 탈진한 저 때문에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 간신히 내려와서 텐트 속으로 들어가 뻗어버렸다. 아침에 눈을 뜨니 옆 텐트에서 자던 후배가 ‘진섭이가 안 보인다’고 한다. 서로 옆 텐트에서 자는 줄 알고 신경을 안 썼다. 나중에 낭떠러지에 떨어진 진섭이 시체를 찾아서 화장을 하는데… 정말 내가 죽는 게 낫지 그 날은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의 영향으로 지금도 기침을 자주 할 만큼 기관지를 많이 상했다.

 

그때 얼마나 고생이 심했던지 다시는 무산소 등반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등반을 감행하는 무모함이 있었지만 산은 오를수록 더욱 힘들고 조심스러워진다. 그래서 요즘은 살아서 돌아오기 위해서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고 말한다. 박영석씨의 돌파력과 배짱은 국내 일류 산악인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그는 91년 봄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중 150m를 추락해 얼굴이 으깨지는 중상을 입은 적이 있다.

 

캠프2까지 후송된 그의 얼굴을, 당시 같은 루트를 등반 중이던 미국 원정대의 팀 닥터가 마취도 없이 ‘쌩으로’ 수십바늘을 꿰맸다. 지금도 얼굴에 핀이 3개나 박혀 있다. 95년 북동릉 등반 때는 눈사태에 휩쓸려 셰르파와 함께 700m를 떠내려가다 셰르파는 죽고 그는 갈비뼈가 부러진 채 살아남았다. 베이스캠프로 돌아온 그는 후배들이 악전고투하는 것이 안쓰러워 깁스를 한 채 7000m까지 올라가 북릉으로 루트를 바꿔 후배들의 정상 등정을 돕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어차피 내려올 건데 왜 그리 기를 쓰고 올라가느냐’고 묻곤 한다. “산을 오른다는 것은 탐험과 개척정신의 발로라고 생각한다고 그는 말한다.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산행의 좋은 점을 가르치고 자주 산행을 하면서 심신을 단련시키고 자연과 더불어 인생을 배우고 고산 산행에서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면서 성취감과 감동을 경험하는 탐험문화와 개척정신을 길러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돈이 있다면 초등학생들에게 진취적인 개척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탐험학교를 운영하고 싶다고 한다.

 

대자연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인간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늘 최선을 다했다. 지금까지 내 몸처럼 아끼던 동료 일곱을 산에서 잃었고, 나 역시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겨왔다. 목숨을 건 위험한 등반, 그 속에서 나는 삶을 생각하고 신의 존재와 인간의 한계를 절실히 느꼈다. 산은 내게 있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어쩌면 기적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 살아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꿈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내가 제일 잘 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살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