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산 사나이 엄홍길 *-

paxlee 2007. 1. 13. 14:13

 

 산 사나이 엄홍길

 

엄홍길은 한국 최고의 산악인이다. 세계에서 8번째로 8000 미터 이상의 고봉을 한 둘도 아닌 자그마치 14개나 정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히말라야 탱크다. 물론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기록이다. 어느 분야든 그 분야를 평정한 사람에게는 남다른 그 무엇이 있다. 그는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이란 얘기를 듣는다. 서울에서의 엄홍길과 히말라야에서 보는 엄홍길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는 털털하고 수더분하지만 히말라야에서는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지고,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성질 급한 사람이 된다.

 

왜 그럴까? 그의 답변이다. “평지에서는 웃어넘길 수 있는 사소한 실수가 높은 산에서는 팀 전체를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습니다. 장비의 매듭하나 풀린 정도의 사소한 부주의 때문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 됩니다. 고산등반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섬세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기술과 장비가 발달했다 해도 히말라야 고산등반은 생명을 건 모험입니다. 등반을 책임 진 대장으로서, 세세한 부분까지 점검하고 챙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는 변화와 새로운 도전을 즐긴다. 국내 처음으로 외국인과 함께 동반산행을 시도했다. 14좌 가운데 5좌를 스페인 등반대와 함께 올랐다. 그는 외국인과의 등반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많이 배웠다. 우선 경량등반이라는 새로운 접근방식을 배웠다. 한국 등반은 많은 인원이 가서 시끌벅적한 잔치 분위기 속에서 등반을 했지만 스페인 팀은 경제적으로 등반을 한다. 소규모 인원과 장비로 단시간에 등반하는 방식이다. 등반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을 체계화하고 프로세스가 합리화되어 있다. 한 마디로 “경량화와 속공”이라 할 수 있다.

 

등반 분위기가 밝고 필요 이상 정신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즐긴다. 8000미터 이상 산을 14개나 올랐다는 등반기록은 화려해 보인다. 하지만 그가 늘 성공만을 한 것은 아니다. 같은 숫자 만큼의 실패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엄홍길은 첫 도전인 1988년 에베레스트 등반에는 쉽게 성공한다. 하지만 93년까지 시도한 도전에 6번을 연이어 실패한다. 또 죽음의 문턱도 여러 번 넘나든다. 그가 외국인과 등반을 하게 된 것도 사실은 스폰서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이은 실패 덕분에 그는 겸손해진다. 고산등반은 신들의 영역이란 것도 알게 된다.

 

그리고 성공한다. 하지만 11번째 봉우리인 안나푸르나에 도전하다 또 다시 실패한다. 정상을 500미터 남긴 시점에서 세르파 2명이 추락했고 이들을 구하려다 발목이 180도 돌아가는 중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헬기도 올라올 수 없는 곳에서의 사고였다. 2박 3일에 걸쳐 베이스캠프까지 기어왔고 재기한다. 그의 고백이다. “1988년 에베레스트를 처음 올랐을 땐 정말 무서운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연이은 실패는 내 인생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히말라야는 나를 거부하는 것 같았고, 나는 그 냉혹함에 진저리를 쳤습니다.

 

그 사건으로 나는 힘만 믿는 청년에서 겸손함을 아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었습니다.” 작은 성공은 실패 없이도 가능하다. 그러나 큰 성공 뒤에는 항상 쓰라린 실패가 있게 마련이다. 그가 위대한 것은 실패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실패를 거듭했지만 이겨내고 다시 도전해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최고의 인사 전문가이다. 네팔에서 엄홍길의 별명은 엄싸부다. 셰르파를 존중하고 인간적으로 대접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이들은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면 라마제를 지낸다. 산에 오르겠다는 고지와 동시에 안전 등반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셰르파에게는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금기사항이 많다. 닭이나 염소를 죽이는 살생, 고기를 불에 구워먹는 것… 많은 사람들은 이를 무시하지만 엄홍길은 이를 철저히 존중하고 배려한다. “셰르파는 우리가 돈을 주고 고용했지만 등반을 같이 하는 동료입니다. 이들을 어떤 사소한 일로도 자극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해 주는 것은 등반의 성과와 직결됩니다.” 셰르파 2명을 구하기 위해 그가 다친 사건 때문에 엄홍길은 그 동네 사람들에게는 절대적 신임을 얻고 있다. 역시 사람 마음을 사야 하는 것은 리더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대범한 산 사나이지만 그는 사소한 것에 정성을 다한다. 그가 등산화 신는 모습은 경이롭다. 신발에 혹시 작은 모래알이라도 있을까 봐 신발 바닥을 위로 해서 햇빛에 비춘 후 일일이 손톱으로 모래나 먼지를 하나하나 털어낸다. 신발 속에 들어간 돌 가루 하나가 집중력을 흐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엄홍길의 텐트는 척 보면 알 수 있다. 워낙 깔끔하게 정리 정돈되어 있기 때문이다. 눈 감고도 장비를 찾을 수 있게끔 되어 있다. 어찌나 텐트를 잘 정돈하고 관리하는지 셰르파들은 엄 대장의 텐트를 신전이라고 부른다.

 

흔히 등반을 삶에 비유한다. 올라가기 전에는 까마득하게 보여도 한 발 한 발 올라가다 보면 어느덧 이렇게 많이 올라왔나 하는 느낌이 든다. 올라갈 때 보다는 내려갈 때가 힘든다. 힘들 때가 있지만 상쾌하고 기분 좋을 때가 있다. 실패할 때가 있지만 좌절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다 보면 희망에 찬 순간이 오는 것도 그렇다. 엄홍길 대장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과 에너지를 공급 받기를 바란다.

 

 - 글 : 한근태 한스컨설팅 대표 -

 

히말라야 14개 봉을 완등한 알파니스트 엄홍길.

 

"이번에 오른 k2봉은 에베레스트보다 낮지만 기상변화가 심하고 난이도가 높아서 사고가 많은 곳이다." 프랭크 로담 감독의 영화로도 잘 알려진 k2는 '죽음을 부르는 산'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해발 8611m이다. 에베레스트보다 200여 미터 낮지만 히말라야 14봉 중 가장 험하여 등정 성공율이 50%에 불과하다. 그가 처음부터 14봉 완등의 목표를 세운 것은 아니었다.

 

산이 좋아 국내외의 산을 찾아 다니던 엄홍길이 에베레스트를 오른 것은 1988년부터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히말라야 14봉을 모두 오르겠다는 목표는 없었다. 그러나 1995년 스페인 바스크 원정대의 초청으로 마칼루 봉을 오르게 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도전이 시작되었다. 안나푸르나, 시샤팡마, 초오유, 낭가프르밧, 브로드피크, 로체, 다올라기리, 마나슬루, 가셔브롬1, 가셔브롬2, 캉첸중가 , 그리고 k2봉을 차례로 올랐다.

 

"정상에 오르면 아! 해냈구나, 목표를 이루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요. 하지만 그런 환희는 아주 잠깜 뿐이에요. 그 다음부턴 내려갈 걱정이 들어요. 과연 사고 없이 무사히 내려갈 수 있을까 하고 말이죠."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더 힘들고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정상정복의 순간에도 하산할 걱정이 앞선다. 베이스 캠프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정상의 기쁨을 반추하고 동료들의 희생과 도움을 기리며 히말라야의 신들에게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

 

그 동안 엄홍길은 8명의 동료들을 잃었다. 본인 자신도 무수히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에게 죽음이란 항상 짊어지고 다니는 배낭과도 같은 것이다. "산을 타면 탈수록 자신감도 생기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도 바뀝니다. 동료들의 죽음을 보면서 죽음이 주는 충격에도 익숙해지는 거지요. 죽음이 항상 곁에 있다고 생각하면 삶과 죽음의 구별이 무의미해져요. 삶에 대한 애착도 사라지고 죽음에 대해서도 초연해지게 됩니다."

 

강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죽음과 사투를 벌인 흔적이 남아있다. 눈에 반사된 햇빛에 화상을 입어 허물이 벗겨진 자국이 선명하다. 그의 발가락은 발톱이 빠지고 험하게 변해있다.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이 초연해 졌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산에 오래 오르다 보면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낍니다. 항상 사고를 예상하면서 가는 거죠. 일반인들이 일상적으로 다니는 산길을 갈 때도 어디서 바위가 굴러 떨어질 만한 곳이 있나 살펴보게 되고 미끄러운 곳이 없는가 확인하면서 가게 됩니다."

  

이번에 k2봉 정상에 올랐을 때에는 먼저간 동료들의 사진과 함께 성경책을 묻었다.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그 깊이를 알게 된 엄홍길에게 종교는 결국 자연과 같은 것이다. 자연 앞에 겸손하고 산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서양의 산악인들도 히말라야를 오래 오르다 보면 라마교의식에 경도되거나 동양종교를 믿게 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고 엄홍길 부인은 말한다. 

 

엄홍길 그는 아내 이순래씨를 93년 여름, 수영장에서 만나 5년 연애 끝에 결혼하였다. 산사나이 엄홍길씨는 집에 있는 날보다 집 밖에 나가있는 날이 더 많다. 모험가로서의 그의 인생과 생활인으로서의 그의 일상이 서로 상반되지는 않을까? "집에 돌아와서도 항상 산 생각만 합니다. 잠자는 시간외에는 산 생각만 하지요. 한번 산에 나가려면 준비할 것이 많거든요." 등반대 구성, 스폰서 모집, 등반 스케줄 작성 등 모든 일을 혼자서 추진해야 하는 그는 국내에 있을 때도 언제나 바쁘다.

 

코로롱스포츠와 파고다외국어학원 등의 스폰서들이 그의 생계에 많은 도움을 준다. 특히 파고다외국어학원의 고인경 회장은 산악인 출신으로 엄홍길 같은 후배 산악인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엄홍길은 현재 파고다외국어학원 비상근 홍보실장으로 직함을 갖고 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틈만 나면 늘 국내의 산을 오른다. 특히 집 근처의 도봉산에 자주 간다. 그에게 도봉산은 집과 같은 곳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곳에서 살았고 도봉산을 뛰어다니며 체력을 단련했다.

 

엄홍길은 키 168cm에 몸무게 60kg의 작은 체구지만 히말라야 최고봉을 넘나드는 초인적인 체력은 바로 도봉산에서 기른 것이다. 부모님이 그곳에서 음식장사를 했고, 결혼해서 분가할 때도 도봉산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도봉산이 키워준 사람이기도 하다. 또 그의 모친은 아들이 원정을 떠나있는 동안 망월사를 찾아 부처님께 그의 무사기환을 빈다.

 

히말라야 14봉을 정복한 세계적 산악인 엄홍길씨는 그가 국내에서 못 올라가 본 산이 과연 있을까? " 그럼요 아주 많지요." 그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지리산이나 설악산 등 특정한 산을 집중적으로 등반하면서 연습을 하기 때문에 국내의 산들 중에서도 못 올라본 산이 많다고 한다 두 아이의 아버지인 그는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가족과 함께 산에 오른 적이 없다. 부인과 함께 등산을 가 보지도 못했다. 지은(4)과 현식(2)은 가끔씩 집에 들어오는 아버지가 낯설다.

 

아이들에게 늘 미안하지만 그는 두 가지 일을 완벽하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가장으로써의 역할과 자신의 일이 서로 상반 될수록 그는 자신의 일에 더욱 몰두한다. 그 일이 더욱 어렵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내에게 늘 고맙고 미안하다. 항상 외국으로 떠돌며 죽을 고비를 넘기는 데다 집에 있을 때도 마음은 언제나 산에 가 있는 남편에게 아내는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는다. 아내는 그가 집을 떠나 있을 때 가정을 지켜주고 집에 돌아오면 편안한 휴식을 위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
 
● 엄홍길과 원도봉산

 

원도봉산에 오르면 언제나 푸근하고 따뜻합니다. 또 항상 제 자신을 공손하고 겸허하게 만들어 줍니다. 어렸을 적에는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는 놀이터였죠. 세 살 때 이쪽으로 이사와 부모님이 매점을 운영하셨거든요. 산속의 바위와 나무는 저에게 장난감이었죠. 산속에서 살았던 셈이죠. 그러다 보니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산사람’들이었어요. 중2 때는 두꺼비 바위에서 암벽타기를 배우기 시작했죠. 산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한 셈이죠.

 

1998년 안나푸르나 원정 중에 발목을 다쳤을 때는 정말 자포자기였습니다. 쇠못을 네 개나 박는 수술을 받고 나서 의사는 더 이상 산에 오를 수 없다고 하고 …. 그때 원도봉산이 저에게 이렇게 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넌 주저앉을 놈이 아니다. 지금 너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야. 일어서야지. 넌 해낼 수 있어.” 정말 큰 힘을 얻었습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희망의 봉우리로 저를 끌어올렸습니다.

 

이때부터 네 살짜리 딸을 캐리어에 들쳐 업고 원도봉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힘이 들면 딸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오르기도 하고요. 10개월의 재활 기간 가족과 사랑도 키우고 희망도 키우고. 모두 원도봉산 덕분입니다. 지금은 도시 생활에 지쳐 있거나 고민거리가 생기면 원도봉산을 찾습니다. 산속을 걷다 보면 해답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또 남을 배려하지 못했는지. 겸손함을 잃었는지 돌이켜보게 만들기도 합니다. 저에게 있어 원도봉산은 평생의 어머니이자 스승입니다. 

 

● “8000m의 희망과 고독”

 

히말라야 8000미터 14좌에 바친 뜨거운 젊음의 기록이 2003년 11월 15일 이레출판사에서 발행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인류가 발을 들여놓은 지 꼭 50년이 되는 해에 전 세계의 산악인들이 모이는 <에베레스트 초등 50주년 기념 등반>이 있었다. 한국의 산악인 엄홍길 대장이 그곳에 초청 받아 참가하였다. 엄홍길 대장은 2000년 7월 31일 K2에 오르며, 한국인으로 최초, 아시아에서 최초로 히말라야의 8000미터급 14개 봉우리를 모두 오른 신화적인 산악인이다.

 

이번에 도서출판 이레가 출간한 《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은 히말라야의 탱크라고 불리는 의지의 산악인 엄홍길이 1985년 에베레스트에 첫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도도한 히말라야 8000미터급 봉우리들의 정상을 밟아가며, 마침내 2000년 7월 K2 등정으로 히말라야 8000미터 14좌를 완등하기까지, 그 고난과 극한의 상황, 감동적인 정상의 순간들을 담은 책이다. 엄홍길은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하므로 세계적인 산악인으로 한국인의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은 그의 파란만장했던 히말라야 등정의 날들이 기록되어 있다. 함께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우정을 쌓아갔던 친구들을 설산에 묻어야 했던 슬픔들, 어떤 고통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도전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은 히말라야의 어마어마한 거봉들 그 자체와 그곳을 오르며 겪어야 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 산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한 강인한 영혼의 이야기이다.

 

● "엄홍길의 약속"

 

2005년, 세계 등반사상 유례가 없는 죽음의 고도 8750미터에서 산악 조난으로 사망한  박무택과 장민. 그리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홀몸으로 달려 올라간 백준호의 시신을 찾아나선 원정대의 기록이다. 인간을 거부하는 고산지대는 눈사태와 저온, 저 산소로 시신 운구는 커녕 혼자 몸으로 정상에 오르기에도 벅찬 곳이다. 그곳을 한국의 산악인 엄홍길과 초모랑마 휴먼원정대가 우정과 신의 하나에 몸을 기대어 시신 수습을 위해 나섰다.

 

77일간의 사투 끝에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는 데 성공한 2005 한국 초모랑마 휴먼원정대의 이야기가 산악문학 전문 작가 심산에 의해 《엄홍길의 약속》으로 도서출판 이레에서 출간되었다. 산악인, 기자 등으로 구성된 휴먼 원정대의 구성과 훈련부터 출발, 등정과정, 시체 운구 과정 속에서 벌어진 좌절과 희망의 순간들을 담았다. 이미 MBC에서 다큐멘터리로 방영한 바 있는 내용을 다양한 사진자료와 함께 묶었다.

 

휴먼원정대 보도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고인들의 개인적인 면모와 원정지에서의 생활 모습, 휴먼원정대원들 간의 진한 우정과 동료애 등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산사나이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번 원정대의 객체는 백준호, 박무택, 장민이고, 주체는 엄홍길을 비롯한 휴먼원정대이다. 작가는 원정대의 전체 활동을 생중계하면서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감동의 드라마를 보고문학의 형식으로 담아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와 싸우며 동료의 안위만을 걱정하던 고인들의 이야기, 자신들의 생업을 팽개치고 그리움 속에 묻어둔 친구의 시신을 찾아 나서는 산악인들의 끈끈한 우정과 죽음의 그림자를 등에 업은 채 거대한 자연과 맞서는 인간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한 편의 감동적인 휴먼 다큐멘터리가 되어 우리 앞에 찾아온 것이다. “엄홍길의 약속”은 한국 산악문학사상 가장 생동감 넘치는 저작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