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여성 산악인 최오순 *-

paxlee 2007. 4. 21. 20:21

[이 클라이머의 삶] 가의용-최오순 부부

산이 인연이 되어 인생의 길동무로 끌어올린 가의용-최오순 부부는  “함께 간다면 어떤 산 어떤 길이든 좋아요”  1월 중순 수원의 모 찻집에서 가의용씨(賈誼龍·40)와 최오순씨(崔五順·40)를 보는 순간 떠오른 단어였다. 최오순씨는 山얘기를 한창 나누던 중 찻집에 들어온 남편 가씨를 보자 활짝 웃었다. 10년쯤 살았으면 다른 사람 앞에선 체면상이라도 덤덤한 표정을 지을 법한데, 꼭 한창 열애중인 애인 사이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은 10년 넘게 살아오면서 말다툼한 기억조차 없다는 잉꼬부부다.

“제가 좀 굼뜨거든요. 그래서 산에 갈 일 있으면 옷부터 장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걸 챙겨줘요. 산에 오래 못 가면 꼭 열병을 앓고 드러눕곤 해요. 그걸 치료해주는 사람도 남편이에요.” 최오순씨는 남편 앞에서 남편 자랑을 줄줄이 늘어 놓았다. 무엇보다 어떤 일이든 아내를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오와주는 남편에 대해 고마워 했다. 산으로는 아내 최오순씨의 지명도가 한참 높다. 그녀는 에베레스트 등정자이다.

-< 에베레스트 한국 여성 초등자인 아내 >-


93년 대한 산악연맹 여성원정대 대원으로서 지현옥 대장, 김순주 대원과 함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488m)를 올랐다. 그 전에는 에베레스트 기슭의 임자체(6,160m)도 올랐고, 천산산맥의 칸텡그리(7,010m)도 올랐다. 에베레스트 이 후에도 94년 메킨리(6,194m)를 등정했으며, 95년에는 인도 차우캄바2봉(7,068m) 원정에 참가했다.

 

       
   - 언제나 다정한 가의용, 최오순 부부 -   

최오순씨는 “8남매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죠. 초등학교 때 영양주사를 아예 달고 다녔어요. 운동장 조회 때면 픽픽 쓰러지곤 했으니까요. 빈혈이 워낙 심했던 거죠. 고등학교도 그 모양으로 지내니까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등산을 권하시더군요. 건강에는 최고라면서 말이죠. 산악반에 들어간 이후 거의 매주 다녔어요. 농사꾼이셨던 아버지는 처음에는 말리는 듯하시더니 건강이 좋아지니까 농사일 거들지 않고 산에 다니는데도 즐거워하시는 거예요.

 

남녀공학이다 보니 산악부 역시 여고 산악부와 달리 강했어요. 전문등반도 했고요. 선운산 도솔암에서 바위하다 스님한테 걸려 혼난 적도 많았답니다.” 전북 고창군 무장면 영선종합고를 나온 그녀는 그 해 말 삼성전자 수원사업소에 취직한 이후에도 함께 취직한 고교동창들과 어울려 2년 가까이 설악산, 지리산, 오대산, 덕유산 등 전국 명산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한 1년은 산을 끊었다.

“입사 후 한동안 고향집이 그리워 힘들었어요. 그래서 친구들과 산에도 다니고, 재미있는 사내 동아리를 기웃거렸죠. 서예는 정말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 1년간 산에 못 다닌 거예요.” 89년 가을에 사내 산악회에 입회원서를 냈지만 정식회원이 된 것은 정작 이듬해 봄이었다. “그때만 해도 산악부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어요. 입회원서를 낸 다음 한 달에 두 번씩 정기산행에 참가해 테스트를 받아야했으니까요.

 

그러다 이듬해 3월 첫째 주 시산제 때 정회원으로 결정되었답니다. 대통령기 등산대회도 두 번이나 나갔어요.” 90년 봄 정회원이 되자마자 정승권등산학교도 들어갔다.
“선배들이 권하기에 등산을 무슨 학교서 배우냐고 했죠. 그래도 그 덕에 정승권 선배를 비롯해 많은 산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던 거죠. 그 해 입회한 경기도산악연맹 산악구조대에서도 열심히 활동했고요. 그렇게 한창 산과 산사람들에게 빠져 지내다보니 저를 예뻐해 주신 선배들의 추천으로 여성 원정 훈련대에 원서를 내게 된 거예요.”


            ▲ 94년 매킨리 정상에 오른 최오순씨.


91년 말 에베레스트 훈련대에 지원하곤 이듬해 봄 회사를 그만두었다. 최종 대원으로 선발되려면 최선을 다해야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박태원(대산련 응급처치 교수·돌비알산악회) 형한테 아침마다 스틱 보행법을 배우고, 아침밥은 남상익(경기도연맹 부회장) 선배께서 운영하시는 장비점인 아이거산장에서 먹었어요. 두 분 모두 엄청 도와주셨죠. 92년 초 설악산 훈련에 참가하고 나서 2월 초인가 히말라야 전지훈련에 참가하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1차 선발대원 18명 중 10명만 보낸다면서요. 즉시 사표를 냈어요. 한 달 이상 휴가를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회사였으니까요. 적당히 해서는 안 되겠다 싶었던 거죠. 아무튼 그렇게 해서 전지훈련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해발 5,000m가 넘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올라가자니 쉬울 리 있었겠어요. 그 전까지 해외산 경험이란 게 일본 북알프스가 고작이었으니 말이에요. 베이스캠프가 빤히 보이는데 졸음이 어찌나 쏟아지던지 병든 닭처럼 쪼그리고 앉아 한참 졸았답니다. 처음 느껴보는 고소증이었죠.”

에베레스트 원정을 한해 앞둔 92년 봄 임자체로 부제 훈련등반에 참가하고 귀국하자 또 다른 원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돌비알산악회의 천산산맥 원정이었다.  "임자체 등정으로 6,000m급 고소는 맛 보았으니까 7,000m급 고산을 경험 한다면 원정대에 발탁될 가능성이 높으리라는 남상익 선배님의 배려덕에 참가한 원정이었습니다. 귀국하자 마자 함숙소로 달려가 한 달간 합숙훈련을 거친 다음 곧 바로 원정에 나섰으니 체력으로 무척 힘들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광교산을 뛰어오르고, 저녁때는 돌덩이퍼럼 무거운 배낭을 멘 체 주마링 연습을 하자니 온몸이 깨져나가는 기분이었어요. 아침이면 침낭 속에서 나오지 않자 선배들이 침낭째 앞마당으로 들어내기도 했으니까요."

 

      

 - 94년 겨울 설악산 실폭 등반자 최오순 -

 

칸텡그리(7,010m)부터 먼저 하는 다른 팀과 달리 포베다(7,439m)부터 등반했다. 캠프 3개를 치면서 해발 6,800m 지점의 설동캠프까지 무난히 올랐다. 그리곤 1차 공격조가 출발한 다음 설동캠프 속에서 선배 한 명과 함께 2차 공격을 기다렸다. “태원형 조가 하산길에 폭풍설을 만났어요. 비박을 두 차례나 한 뒤 돌아오다 조난신고를 받고 올라온 카자흐스탄 구조대원을 만나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 태원형의 발가락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죠. 결국 귀국 후 10발가락 모두 잘라내야 했어요. 아무튼 그런 일을 겪고 났으니 진이 다 빠져나간 상태일 수밖에 없었죠.” 그런 상태에서 최오순은 뒤늦게 도착한 남상익씨를 비롯한 선후배들과 포베다 등반에 나서 알파인스타일로 밀어붙이며 정상까지 올라섰다. 이듬해 5월11일 이루어진 에베레스트 등정은 이렇게 선배들의 지속적인 후원의 결과나 다름없었다.


“운도 좋았어요. 모두들 최선을 다해 등반을 펼쳤는데, 막판에 제게 기회가 왔으니 말이죠. 컨디션이 좋았던 것 같아요. C1(6,000m)에 처음 올랐다 BC(5,400m)로 내려온 이튿날 아침 ‘C1에 올라갈 사람?’ 하고 대장님이 물었을 때 손을 들었으니까요. 하루 산행을 마치고 캠프에 도착하면 늘 힘이 30%쯤 남아 있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사우스콜 캠프(8,000m)에서 정상으로 향할 때도 다른 팀보다 1시간은 늦게 출발했는데, 거의 다 추월했고, 정상에서 실컷 시간을 보내고 힐라리스텝을 내려설 때 외국 산악인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합숙훈련 중 세 끼 꼬박 꼬박 먹으면서 지낸 게 큰 보탬이 된 것 같아요. 혼자 자취할 때는 귀찮다는 생각에 끼니를 건너뛰기 일쑤였으니까요. 출국 전 선배 언니가 45만원이나 되는 큰 돈을 들여 마련해준 보약도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웃음).”

 

-< 등산학교 수료식에서 첫눈에 반해버린 남편 >-

에베레스트 얘기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 남편이 찻집에 들어섰다. “어머 자기 왔네.” 동갑내기 남편이 들어오자 너무도 반가워했다. 두 사람은 결혼 전 산 친구 사이였다. 가의용씨와 최오순씨 두 사람이 인연을 맺은 것은 에베레스트 원정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였다. 93년 5월 말 가의용씨는 전문등반을 배우기 위해 경기도등산학교 기초반을 수강 중이었다.

“졸업 직후 산에 다닐 때는 몰랐는데 91년 제대 후 산에 다니자니 부족한 게 많이 느껴졌어요. 특히 능선종주 중 당황할 적이 많았죠. 모르는 사람 뒤쫓아가다가 암릉에서 당황한 적도 있고, 바위에 매달려 있는 줄을 잡고 오르다 놓치는 바람에 땅바닥에 패대기친 적도 있어요. 그래서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등산학교에 들어간 거예요. 지원 엄마를 처음 본 게 기초반 수료식에서였죠. 얼굴이 시커멓게 탔는데도 마음이 확 끌리는 거예요. 그 때 찜했어요.”

박태원씨가 수원시 권선구 교동에서 운영하던 생맥주집인 베이스캠프가 만남의 장소였다. “다음에 원정 가면 도와주겠다”는 삼성전자 수원사업소 공장장의 권유로 ‘한 번 퇴사자는 재입사 불가’라는 불문율을 깨고 최오순씨는 삼성전자에 재입사했지만, 근무시간 외에는 베이스캠프가 주거지였고, 가의용씨에게는 매주 산행 출발장소가 베이스캠프였다. 가씨 일행은 산행 출발 전 두어 시간씩 박태원씨에게 응급처치 요령에 배웠다.
 
    
▲ 94년 수원 매킨리 우정원정대. 맨왼쪽이 최오순,
왼쪽에서 6번째가 젊은날부터 후원자 역할을 해온
남상익씨다.
 
그러다 94년 가씨 역시 경기연맹 구조대에 가입, 활동을 함께하면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산행할 기회가 많아졌다. “나랑 결혼하자고 수없이 말했어요. 아무 것도 필요 없다면서 말이에요. 그런데 지원 엄마는 계속 농담으로 받아들이더라고요.” 94년 최오순씨는 돌비알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매킨리 남벽 어메리컨 다이렉트 루트 등반에 나섰다. 남벽은 수직고 3,000m에 이르는 대암벽이다. 그 등반에서 처음으로 부상을 당한다.

“인원 제약 때문에 공격조 4명에 끼지 못했어요. 그래서 베이스캠프에 머물다 등반이 한창 무르익을 즈음 캠프를 철수하려고 C1에 올라섰다가 낙석에 맞았어요. 머리가 10cm쯤 찢어졌죠. 그걸 태원 형이 치료한다고 했는데, 그게….” 수술용 실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찢어져 벌어진 양쪽 부분의 머리카락을 서로 묶는 거였다. 그런데 용하게도 10여 일 뒤 감쪽같이 아물었다.

“남벽 등반도 못하게 되자 대장인 태원형이 남벽조 등반이 무사히 끝나면 노멀루트로 올라가자 했는데 막판에 폭풍설이 몰아닥치는 바람에 등반이 여러 날 늦어졌어요.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매킨리를 떠나야했죠. 그런데 앵커리지에 도착했을 때 예정에 없던 남상익 대장님이 와 계시지 뭐예요. 나이 드신 선배님들과 후배들과 함께 말이죠. 식당에서 마주칠 때마다 ‘오순아, 매킨리 가고 싶지 않니?’ 하고 농담을 건내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눈물을 쏟아지지 뭐예요. 그런 제 마음을 읽으시곤 함께 가자고 하셨던 거죠. 그래서 다시 매킨리로 향했답니다.”

매킨리는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등정을 이뤘다. 그러나 삼성전자에 복직할 때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표를 내고 매킨리 원정에 나섰으나 돌아오자 재입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때문에 귀국 직후 한동안 백수 신세로 지내야했다. 그래도 마침 이듬해 95년을 목표로 브로드피크 원정대가 꾸려져 지루할 틈이 없었다. 매일 저녁 모이고, 매주 훈련등반으로 이어지는 강훈련의 연속이었다. 그 원정은 도중에 무산돼 버렸지만, 최오순을 비롯한 멤버 4명은 부천 차우캄바2봉 원정대에 합류, 흰 산에 대한 꿈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남편도 함께 갈 계획이었는데 출국 직전 일이 생겨 참가하지 못했어요. 등반은 실패했어요. 정보가 너무 없었어요. 1차 공격조로 정상부 가까이 갔는데 너무 난해하더군요. 무엇보다 엄청난 크레바스를 넘어서는 게 거의 불가능했어요. 너무 위험했던 거죠.” 이렇게 91년 북알프스 산행 이후 거의 매년 고산을 찾던 최오순씨는 96년 12월15일 결혼 직후 여러 해 동안 산을 찾을 기회가 오지 않았다. 수원 지역의 고산등반 붐이 가라앉은 게 무엇보다 큰 이유였고, 경제적인 안정을 찾기 위해 97년부터 2년간은 직장생활도 하고, 99년 가을 태어난 딸아이 지원을 키우자니 집을 비울 수가 없었다.

“큰 산에 대한 욕심은 없었어요. 하지만 마음 놓고 산에 갈 수 없는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꼭 큰 병을 앓았어요. TV를 보다가도 산만 나오면 괜히 눈물이 나왔고요. 아마도 열병인가 봐요.” 그럴 때 흑기사처럼 나타나 해결해준 게 신랑 하의용씨였다. “배낭을 싸놓고 기다리다간 ‘가자’ 하곤 떠나는 거예요. 그렇게 산에 갔다오면 거짓말처럼 열병이 식었고요.”

하의용씨는 아내의 칭찬에 얼굴이 붉어지기는 했지만, 결코 싫지 않은 표정이다. 하씨는 대학 때 축산을 전공했지만 조경을 전공한 친구와 어울려 산에 다니는 사이 조경에 점점 관심이 많아지면서 조경기사 자격증을 따게 되었고, 그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하의용씨는 96년 매킨리 원정에 참가했다. 그때 원정대장인 박태원씨에게 “의용씨가 가고 싶데요” 하고 말을 건네준 게 최오순씨였고, 그로 인해 선후배들 사이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케 되었다.

원정은 1차 공격 직후 심한 고소증세로 이튿날 2차 공격에 참가하지 못해 실패로 끝났지만, 귀국 후에는 하의용씨에게 큰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씨는 귀국하자마자 또다시 “나랑 결혼하자”고 최오순씨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농담으로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진지한 청혼이었다. “솔직히 동갑내기 다른 산꾼들과 달리 늘 진지하고 말도 조심스럽게 하는 모습이 좋았어요. 그래서 농담으로 받아치던 것을 ‘그래 하자’고 대답했죠. 그리곤 일사천리로 결혼날짜를 잡았고요.”

두 사람은 결혼 이후 여러 해 동안 고산등반뿐 아니라 전문등반도 거의 하지 않았다. 시간도 없었다. 결혼 직후 2년간은 부부 모두 직장에 다녔고, 99년 이후엔 딸 지원(智元·수원 탑동초교 1년)이를 키우는 일에 몰두하며 지내왔다. 지난해 말까지 2년간은 아이거산장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최오순씨는 너무 오랫동안 산을 찾지 않으면 열병이 났다. 그걸 달래준 것 역시 남편 하의용씨였다. 2004년에는 엘브루즈(5,642m)를 다녀왔다. 96년 차우캄바 원정 이후 8년만이었다.

“99년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된 지현옥 대장 추모식 때 여성 대원들끼리 원정을 가보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전철이 끊어지는 줄도 모르고 계획을 세웠죠. 집에 돌아가자마자 남편한테 얘기했더니 흔쾌히 다녀오라 하기에 두어 달 뒤 곽명옥 언니와 김순주와 함께 떠났죠. 러시아 사람들이 영어가 통하지 않아 애를 먹기는 했지만 무척 즐거웠어요.” 엘브루즈를 오르자 은근히 5대륙 최고봉 등정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마침 ‘꿍짝이 맞는 사이’인 김순주씨는 아콩카구아(6,959m)만 남겨놓고 있던 터라 내친김에 그 해 말 나서기로 했다.

“출국을 열흘 남겨놓고 급제동한 앞차를 들이받았지 뭐예요. 큰 부상은 아니다 싶어 물리치료나 받겠다는 생각에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남편이 챙겨준 짐을 들고 공항에 가려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지 뭐예요. 순주는 대구에서 서울에 와 있는데 말이죠. 지금도 무척 미안하게 생각한답니다.” 출국 날 원정이 무산되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2년 뒤인 지난 12월 아콩카구아 원정에 나서 두 사람은 C1(5,400m)에서 정상까지 하루에 올려쳤다가 BC(4,300m)까지 하산, 에베레스트 등정자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산 없인 못 살 것 같아요”>-

“에베레스트 등정 후 베이스캠프로 내려섰을 때 지현옥 대장이 순주와 저를 따로 따로 텐트로 불렀어요. 그리곤 조용히 ‘너희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앞으로 에베레스트 등정자라는 얘기를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팔면서 살 생각은 말아라. 항상 겸손하게 한 발짝 물러서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지 뭐예요. 솔직히 그때는 섭섭했어요. 누가 에베레스트 올랐다고 폼 잡고 살 줄 아냐 싶었던 거죠. 그런데 훗날 그 말이 맞다 싶더군요. 그때 일침을 가하지 않았다면 까불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지금은 산과 무관한 사람에게 저를 소개할 때 ‘에베레스트를 오른 최아무개예요’하면 정말 싫어요. 속상하고요. 그냥 최오순이 가장 좋아요.”

최오순씨는 “기왕 세운 계획이니 5대륙 최고봉 등정은 잘 마무리짓고 싶다”고 한다. 그렇지만 큰 산에 대한 꿈을 억지로 이어나갈 생각은 없다고 한다. “어떤 산이든 기왕이면 뜻 맞는 사람끼리 다녔으면 해요. 시작도 웃고 마무리도 웃을 수 있는 그런 원정이죠. 정말 사람이 좋아 산에 다니긴 했지만 산 없인 못 살 것 같아요. 큰 산만 원하지는 않아요. 남편과 함께 갈 수만 있다면 어떤 산, 어떤 길이든 좋아요.”

남편 하의용씨는 아내의 말을 들으며 빙그레 웃었고, 그 모습에 아내 최오순씨는 너무도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부부는 들떠 있었다. 인터뷰 이튿날 모처럼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떠나기로 돼 있었다. “고교시절 산을 권해주셨던 선생님과 한라산 가기로 했어요. 선배도 만나고요. 저희는 참으로 행복한 부부인 것 같아요. 무엇보다 사람 복이 많아요. 좋은 선생님에게 평생 사랑을 받고, 좋은 선배님들이 아껴주시니 말이에요. 무엇보다 남편 복이 많은 것 같아요. 결혼하고 잘 얻어먹어서 그런지 몸이 점점 튼튼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제 팔뚝 보세요, 남편보다 힘이 세 보이지 않나요?”

□ 최오순
소속

경기도산악연맹 산악구조대

등반경력
91년 일본 북알프스 원정
92년 임자체(등정)-로부제 원정
93년 에베레스트 등정
94년 매킨리 등정
94년 엘브루즈 등정

95년 차우캄바2봉 원정
06년 아콩카구아 등정

 - 글 / 월간산 한필석 차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