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에베레스트 30주년 헌정 등정 (2) *-

paxlee 2007. 5. 7. 22:26

 

             77원정대 '다시! 에베레스트다'


18인의 영웅들… 그들의 에베레스트는 끝나지 않았다

 

->에베레스트 등정 30주년을 맞아 77원정대원들이 다시 에베레스트를 찾는다. 출정을 앞둔 대원들이 1976년 훈련도중 숨진 동료 대원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지난 16일 설악산 사고 현장에 모였다. 조영호기자

 

‘8848’은

전화번호 뒷자리로 이 4개의 번호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의 영광을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에베레스트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휘날린 ‘77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77KEEㆍKorea Everest Expedition)’만큼 ‘8848’의 감흥을 크게 가지고 있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77KEE의 등정일기는 장편의 드라마다.

 

쉽게 뚝딱해서 정상에 오른 게 아니다. 국민들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 산악인들은 수년을 준비해 장도에 올랐고, 거머리와 해충에 시달리며 한 달의 행군 끝에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고소를 배회하는 사신과 사투를 벌인 끝에 마침내 세계의 지붕에 올라섰다.

 

정상에 오른 이는 고(故) 고상돈(당시 29세) 대원이지만 이는 나머지 18명 대원의 체계적인 지원을 통해 이뤄낸 결과였다. 하지만 사람의 기억은 늘 단편적이다. 언론은 ‘첫 발의 사나이’ 고상돈에 집중했고 사람들은 에베레스트를 고상돈의 이름으로만 떠올렸다.

 

77KEE 대원 중 누군들 정상에 오르고 싶지 않았을까. 당시 최종 정상 공격을 앞두고 대부분의 대원들은 원정일기에 “나는 더 오르고 싶다”고 꾹꾹 눌러 적고 있다. 어떻게 고생해서 온 에베레스트인데 정상의 꿈을 놓을 수 있었겠는가.

에베레스트 원정 드라마는 1971년 히말라야 로체샤르 원정팀이 네팔에 가서 에베레스트 등정 신청을 하면서 시작됐다.

 

73년에 네팔 외무성에서 77년 가을에 들어오라는 통보가 왔고 드디어 에베레스트로 가는 물꼬가 터졌다. 대한산악연맹과 창간 20주년을 맞아 도약을 꿈꾸는 한국일보가 의기 투합, 큰일을 저지르기로 했다. 원정 자금을 마련하고 원정대원을 모으느라 바빠졌다.

 

세계 최고봉을 오른다는 소식에 전국의 난다 긴다 하는 산 사나이들이 몰려들었다. 4차에 걸친 모진 훈련을 산악인들은 이를 악물며 견뎌냈다. 세계의 지붕에 서겠다는 꿈 하나 때문이다. 76년 설악산 동계훈련 중 눈사태로 3명의 대원을 잃는 큰 사고가 났지만 에베레스트를 향한 투지는 꺾이지 않았다. 77년 마지막 동계훈련 때 일이다.

 

77KEE 대원인 대한산악연맹 김병준(59) 감사는 “설악산 사고 1주기 추모행사를 위해 현지에 훈련대원들이 모였다. 연맹이 미리 맞춰 놓은 떡이 오래돼 곰팡이가 슬어있던 것을 모두 나눠 먹고 배탈들이 났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내색을 하지 못하고 끙끙 속으로만 앓았다. 에베레스트로 갈 정예 대원을 뽑을 날이 가까웠기 때문이다”고 회상했다.

 

지금은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까지 직항 노선이 뚫리고 카트만두에서 해발 2,800m인 루크라까지 비행기로 이동해 1주일 정도만 도보로 캐러밴을 하면 베이스캠프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태국 방콕 등을 경유해야 카트만두로 들어갈 수 있었고, 카트만두 인근 람상구에서 베이스캠프까지 380km를 한달 여 걸어야 도착할 수 있었다.

 

‘주가’라 부르는 거머리떼의 습격에 시달리는 고난의 행군. 그래도 마음은 희열로 터질 것 같았다. 꿈에 그리던 산이 점점 가까워오기 때문이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해서는 한국에서부터 지고 온 100개의 사다리를 이용해 거대한 빙하지대 아이스 폴의 크레바스를 건너가며 본격적인 등정에 나섰다.

 

고독, 고소의 냉혹한 한기에 시달리며 대원들은 조금씩 높이 올라갔다. 그 해 9월 박상열ㆍ 앙 푸르바 1차 공격조의 안타까운 실패를 딛고, 마침내 2차 공격조인 고상돈ㆍ 펨파 노르부가 정상에 섰다. 77KEE 박상열 부대장은 “다른 원정대도 계속해서 모임을 가지지만 77원정대만큼 활발하게 지속되는 모임은 없다”고 했다.

 

에베레스트 첫 등정의 영광과 꼭 그 만큼의 그늘은 사반세기가 넘도록 대원들을 하나로 묶는 세월의 자일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영원한 대장’ 김영도 대장이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지금껏 모임을 이끌고 있다”고 했다.

세계의 정상을 처음 밟은 한국의 산악 영웅들이 지난 감격을 되새기며 이제 31일이면 다시 에베레스트를 향해 그들의 영혼 한 조각 미련없이 저당잡힌 에베레스트 품속으로 날아간다.

 

           "후회는 없다" 77원정대 부대장 박상열씨 회고

셰르파와 죽음의 비바크… '정상'대신 '우정'얻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는 첫 번째 관문은 거대한 빙하인 아이스 폴을 건너는 것이다. 얼음과 얼음 사이 죽음의 홀인 크레바스 위에 사다리로 길을 놓고 조심스레 나아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등정을 마치고 귀국한 대원들이 에베레스트 원정을 적극 후원했던 한국일보 장기영 창간 사주의 묘소를 찾아 분향하고 있다. / 국민의 영웅이 되어 돌아온 77대원들이 카퍼레이드를 하며 시민들의 박수 갈채를 받고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왼쪽부터)

 

77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77KEE)의 성공 이후 뜬 스타가 정상에 섰던 고(故) 고상돈 대원이라면, 비운의 사나이는 박상열(64) 부대장이다. 고상돈 보다 먼저 정상에 도전했던 대원이다. 만일 그가 성공했다면 세상은 에베레스트를 ‘박상열’의 이름으로 기억했을 것이다.


1977년 9월 5일 김영도 원정대장이 대원들을 모아놓고 정상 공격조를 발표하는 날. 1차 공격조에 선택된 사람은 박상열 부대장과 셰르파 앙 푸르바였다. 정상 공격조는 미리 뽑는 게 아니라 최종 단계에서 가장 컨디션이 좋은 대원을 뽑는다.

 

대원들의 평균 폐활량이 4,000cc인데 비해 ‘곰’으로 불린 박 부대장의 폐활량은 6,000cc를 넘었다. 김 대장은 원정일기에 ‘그가 스쿠버다이빙을 해서 폐에 자신 있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뛰어난 체력을 가지고 있을 줄 몰랐다. 고산족인 셰르파도 놀랐다’고 적고 있다.

 

대원들의 염원을 양 어깨에 짊어진 채 박 부대장의 가슴은 투지로 불탔고, 내딛는 발걸음은 진지했다. 사우스 콜을 지나 마지막 캠프를 해발 8,490m에 차렸다.

이곳에서 하룻밤만 보내면 드디어 정상을 공격하는 날이다. 텐트에서 잠을 자는데 새벽 2시께 산소마스크에서 갑자기 산소가 나오지 않았다. 영하 30~40도의 혹한에 천막 밖으로 나가 산소통을 새것으로 갈아 끼우는 일은 여간 번거롭지 않다.

 

머리속에서는 일어나 산소를 갈아 끼워야 한다는 경고음이 울렸지만 한번 육체를 점령한 잠은 좀처럼 떨치기 어려웠다. 그대로 잠들었다. 고소에서 산소공급 없이 잠드는 것은 하룻밤 사이 몸을 극도로 쇠약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건만 잠의 달콤한 유혹은 그만큼 강력했다.

 

새벽 무전기 소리에 일어나니 몸이 무겁다. 셰르파 앙 푸르바와 서로 몸을 묶고 밖을 나서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산더미 같은 폭풍설이 몰아쳤다. 허리 위로 쌓이는 눈을 헤쳐가며 몇 걸음 올라 보지만 자꾸 눈더미에 밀려 내려온다.

남봉을 넘어 나이프 릿지를 지나 힐러리 스텝 앞에 섰을 때. 마스크에서 산소가 또 나오지 않는다. 산소가 다 떨어졌다.

 

이대로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정상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무산소 등정.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그만큼 정상에 대한 열망이 컸다. 결국 정상을 불과 40m 앞에 두고 고집을 꺾을 수 밖에 없었다. 악천후에 산소까지 떨어져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앞에 서서 힘겹게 한걸음 씩 디디며 내려오는데 앙 푸르바와 자신을 잇던 줄이 팽팽해졌다.

 

뒤돌아보니 앙 푸르바가 쓰러졌다. “컴 다운”을 외치니 그가 지긋이 쳐다보다가 줄을 풀어버렸다. 혼자 가란다. 자기 한 몸 추스르기 힘든 극한 상황, 그러나 사지에 동료를 버리고 갈 수는 없다. 다시 되짚어 올라가 앙 푸르바를 겨우 일으켜 내려오는데 해가 졌다. 산소도 없고 텐트도 없는 해발 8,700m의 눈보라 속이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피켈을 다리 사이에 꽂고 서로를 껴안고는 비바크(Biwakㆍ불시 노숙)에 들어갔다.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죽음과 맞설 뿐. 침낭도 없고 허기를 달랠 비스킷도 없다. 가지고 있는 것은 식어가는 서로의 체온뿐이다.

세찬 눈보라가 얼굴을 때리자 앙 푸르바가 배낭을 뒤져 윈드재킷을 꺼내서는 얼굴을 감싸줬다. 우정에 감동해 얼굴로 그의 얼굴을 비벼댔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날이 맑아지며 바람이 멈췄다. 산소 없이 인간의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8,700m에서 무산소로 비바크를 하고 살아났다. 세계 최초의 기록이라면 기록이다. 캠프5로 내려와 몸을 뉘었다가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하산했다.

 

얼마 후 베이스캠프에서 고상돈 대원의 성공 소식을 들었다. 기뻤다. 그리고 허전했다. 박 부대장에게 “후회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후회 없다”고 잘라 말했다. 천상 산사나이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스쳤다. 그는 “등산은 산이 주는 온갖 시련을 이겨낸 뒤 산에서 내려와 등산화 끈을 풀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것”이라고 일러준다.

 

다시 물었다. “정말 후회하지 않는가.” 그는 “세계의 정상 40m 앞에서 아쉬움을 접고 살아 내려왔기에 또 다시 에베레스트를 찾아갈 수 있는 거 아니냐”며 말문을 막았다. 8,700m 고지에서 죽음의 비바크를 함께 했던 앙 푸르바의 아내는 그 시간 딸을 낳았다고 한다. 노총각이었던 그도 귀국한 다음해 가정을 꾸렸다.

 

박 부대장은 “무산소 비바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떠날 때 어머니가 손에 쥐어준 부적과 고모가 벽에 걸어준 성모상, 김영도 대장의 사모님이 보내신 성경책 덕이었는지도 모르겠다”며 슬쩍 미소를 짓는다. 세상 모든 종교의 선인들이 그를 지켜준 셈이다.

 

고소에서의 산소 결핍과 눈부신 설원에서 고글 없이 노출된 탓에 그의 눈 한쪽은 시력을 잃었다. 그래도 그는 히말라야가 좋다. 이번 박영석 원정대와의 동행이 히말라야 방문으론 11번째다. 그는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지만 설산에 중독된 몸과 마음은 벌써 다음 갈 길을 손꼽는다”고 했다.

 

▲ 77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 등정 일지

 

1971년 로체샤르 원정대(대장 박철암) 에베레스트 등정 신청서 네팔 외무성

           에 제출
73년 네팔 외무성 한국 원정대 등정 허가
74년 1~2월 지리산 칠선동 계곡에서 1차 동계훈련
75년 1~2월 설악산 공룡능선에서 2차 동계훈련
75년 8~11월 1차 정찰대 에베레스트 파견
76년 2월 설악산 3차 동계훈련 중 최수남 송준송 전재운 대원 눈사태로 조난
76년 9~11월 2차 정찰대 에베레스트 파견
77년 2월 오대산서 4차 동계훈련
       6월 11일 원정대 발대식
       7월 2일 원정대 출국
       7월 6일 원정대 카트만두 도착
       7월 19일 람상고에서 캐러밴 대장정(람상고-준베시-남체-탕보체-고락셉)

            시작
       8월 14일 베이스캠프(5,400m) 도착
       8월 15일 아이스 폴 돌파 제1공격캠프(6,100m) 설치
       8월 20일 웨스턴 쿰 6,450m에 제2공격캠프 설치
       8월 26일 로체페이스 7,500m에 제3공격캠프 설치
       9월 5일 정상 공격조(1차 박상열, 2차 고상돈 한정수) 발표
       9월 6일 1차 공격조 출발
       9월 8~9일 심한 눈보라속 8,600m서 비박후 귀환
       9월 12일 2차 공격조(고상돈) 출발
       9월 15일 고상돈 대원 셰르파 펨파 노르부와 정상 등정
       9월 20일 베이스캠프 철수
       9월 24일 카트만두 도착
       10월 1~6일 카트만두 출발, 방콕 홍콩 타이페이 경유 서울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