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에베레스트 실버 원정대 [7] *-

paxlee 2007. 5. 4. 21:41

 

에베레스트에는 휴일이 없다.  
 

                        ▲ 흐린 날씨속의 캠프1 전경
 
ABC(C2)에는 현재 실버원정대 외에 남서벽 원정대, 한국도로공사 원정대, 그리고 허영호 단독등반대 4개 팀이 모여 있다. 남서벽팀과 도로공사팀은 등반루트가 빤히 바라보이는 맨위쪽 캠프지에 있고, 실버팀은 표고차 50여m가 나는 맨 아래쪽에 있다. 때문에 실버팀에서 다른 팀에 마실이라도 갈라치면 헉헉거리며 20~30분을 걸어야 한다.

 

고소란 이런 곳이다. 빤히 보이는데 가도가도 목적지가 다가오지 않고 오히려 멀어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오늘 실버팀 김성봉 대장, 조광현 이장우 대원과, 천병태ㆍ유학재 지원대원, 이재승 의료담당대원은 ABC에서 베르그슈른트까지 적응훈련에 나선다. 의료담당대원인 이재승 박사는 대원들보다 오히려 더욱 좋은 컨디션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이번 원정에 석달이란 안식년휴가를 내어 참가한 것은 그 역시 등산광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태 전 위암 수술을 받았다. 정기검진에서 다행스럽게도 조기발견하여 수술도 비교적 쉽게 하고, 재발의 가능성도 적다고 한다. 이 박사는 100회 마라톤 모임 멤버다. 현재 42.195km 풀코스를 47회나 완주했다고 한다.

 

그렇게 평소 건강을 관리해온 덕분인지 이번 원정에서 오히려 대원을 능가할 만큼 뛰어난 체력과 고소적응력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세브란스 의대 교수이자 한국소아과학회 회장인 이 박사는 등산예찬론자이기도 하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서 자신의 능력에 맞게 할 수 있는 운둥 중 가장 좋은 운동이 등산이라는 것이다.

 

                 ▲ 캠프1에서 바라다본 에베레스트 남서벽과 로체서벽

 

ABC에서 대원들이 베르그슈른트(산사면과 빙하가 갈라지면서 가로로 형성된 커다란 틈)를 다녀오는 모습을 보면 굼벵이 기어가는 모습 저리 가라다. 크레바스와 눈언덕이 반복되는 저 길, 특히 6500m에서 6800m로 표고 300m를 올라야 하는 길이고 보면 결코 간단치 않은 길이다. 특히 제2캠프에 오를 때와 달리 안전로프가 설치되지 않아 더욱 긴장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베르그슈른트 위로는 상황이 달라진다. 평균 70도를 넘는 청빙지대다. 제3캠프 또한 가파른 얼음 사면에 형성된다.
제3캠프는 7300m 높이의 얼음 사면이지만 워낙 원정대가 많다보니 좋은 자리를 잡는다는 게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제4캠프로 향하는 루트의 기점 상에 위치한 캠프사이트가 가장 좋고, 그 사이트를 기준으로 아래쪽으로 길게 캠프지가 형성된다.

 
아래쪽에 위치한 캠프에서 제4캠프로 가려면 등반로가 길어질 수밖에 없고, 이 경우 제4캠프 도착시간이 늦어지면서 이튿날 출발을 앞두고 피로를 풀 시간이 그만큼 짧아지는 것이다.
때문에 많은 인원이 돈을 내고 참가하는 상업등반대의 경우 미리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서둘러 셰르파들을 올려보내 캠프 사이트를 확보한다.


방법은 우습다. 텐트 몇 동을 쳐놓기도 하지만 쇠꼬챙이 같은 아이스바일을 서너 개 박은 다음 줄을 빙 둘러치기도 한다. 어제 제3캠프로 올라간 상업등반대는 초입부의 고정로프를 거둬버렸다. 다른 팀이 쉽게 제3캠프로 올라가 캠프를 치지 못하게 하려는 유치한 행동인 것이다. 에베레스트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모습이라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90년대 들어서면서 상업등반대가 에베레스트까지 파고들면서 에베레스트 등반이 상대적으로 쉬워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아이스폴 구간은 셰르파 원정대가 길을 뚫어주고, 베르그슈른트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구간은 상업등반대나 여러 원정대들의 셰르파들이 합동으로 길을 뚫고 고정로프를 깐다. 물론 아이스폴~ABC~사우스콜~정상으로 이어지는 노멀루트의 경우다. 
 

                          ▲ 남서벽을 오르고 있는 대원들


반면 지금 남서벽에서 매우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형모, 정찬일 대원은 강풍과 눈보라 속에서 등반을 펼치고, 박영석 대장은 정상으로 이어지는 정확한 등반선을 찾기 위해 실버팀 캠프 아래쪽의 빙하로 내려갔다. 남서벽에서는 정찬일 대원의 외침이 들려온다.


오늘 공격 대원들이 지닌 무전기 두 대 중 한 대가 배터리 방전으로 교신이 불가능해지자 육성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다. 바람 소리가 워낙 드세다 보니 목소리로는 한계가 있고, 그렇다 보니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상단의 어마어마한 거벽에서 눈가루가 쏟아지는 모습이 캠프에서도 바라보인다. 안전하기를 바랄 뿐이다. 

 

오후 1시경, 실버팀이 ABC~베르그슈른트 구간 적응훈련을 다녀왔다. 어제 텐트 안에서 만났을 때에 비하면 훨씬 활기 찬 표정들이다. 김성봉 대장은 "'요령이나 잔재주가 전혀 먹히지 않는 산이 에베레스트'라는 사실을 깨닫고, 산 안으로 들어서는 사이 어마어마한 덩치와 풍광에 놀라고 감격했다"며, "그래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정상에 올라서고 등정욕을 불태우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성봉 대장은 "세계적인 산악인인 박영석 대장 팀과 또한 뛰어난 클라이머들로 구성된 도로공사팀과 함께 등반하게 되어 무엇보다 기쁘고 즐겁다"고 말했다.
오늘은 베이스캠프에 들어선 이후 가장 날씨가 나쁘다. 새벽까지 눈발이 흩날리더니 바람이 강해지고 베이스캠프 쪽에서 ABC쪽으로 구름이 잔뜩 밀려올라오고 있다. 에베레스트 일원의 날씨는 일단 나빠지면 1주일씩 운행을 할 수 없을 정도란다.

 

남서벽 원정대뿐 아니라 전 한국 원정대를 통틀어 홍일점인 김영미 대원은 셰르파 사이에서 '스트롱 게티(힘센 아가씨)'로 통한다. 오늘 ABC에서 할 일이 별로 없자 박영석 대장이 제1캠프로 내려가 개인 장비를 가져오라 시켰다. 어제 밤새 콜록콜록되었는데 15kg가 넘는 짐을 메고 빙하를 거슬러 올라오는 게 잘 될는지...

 

오후 3시경 이형모, 정찬일 대원이 남서벽 등반을 마치고 캠프로 귀환했다. 히말라야 거벅 첫 등반 경험이라서 두 사람 다 들뜬 표정이리라 기대했건만 시무룩하다. 계획한 만큼 루트를 뚫지 못한 탓이다. 오후 들어 눈이 더욱 드세지고, 위에서 눈가루가 뿌려대자 등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박영석 대장으로부터 히말라야 벽등반을 하려면 얼마나 기민하고 정확하게 움직여야 하는가 얘기를 듣고 내일의 등반을 위해 준비에 들어간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나 김영미 대원이 남서벽 캠프에 도착했다. ABC가 조용해졌다. 오후 5시가 넘어서면서부터 눈발이 잦아들고 햇살도 비친다. 오늘은 일요일답지 않게 무척이나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내일 실버팀은 베이스캠프로 내려가 재정비에 들어간다. 고소적응을 위해 딩보체(4400m)로 내려섰던 대원들이 올라오면 다시 고소적응을 위한 스케줄이 짜여질 것이다.

 

아무래도 ABC에서 이틀간 머물고 베르그슈른트까지 다녀온 대원들에 비하면 고소적응 상태가 뒤질 것이기 때문이다. 남서벽 팀은 어차피 내일은 쉬는 날이다. 반면 도로공사팀의 양손장애인 김홍빈씨는 전담 셰르파와 베이스캠프로 내려가고, 다른 대원들은 고소적응을 위해 제3캠프로 올라갈 계획이다. 베르그슈른트 바로 윗 구간은 당연히 로프를 깔아야 하지만, 워낙 베테랑 클라이머들이 모인 팀이다 보니 그런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햇살이 들면서 에베레스트 내원은 또다시 반짝이며 신비로운 풍광으로 바뀐다. 지금 오후 6시(한국시간 오후 9시15분), 한 시간쯤 지나면 하늘에서 무수히 많은 별이 반짝이고 간혹 별똥별이 획을 그으며 떨어질 것이다. 그러면 오늘은 이렇게 기원해 보고 싶다.‘에베레스트의 밤하늘만큼 우리 모두에게 사랑이 가득하기를...’이라고...

 

이렇게 일요일이 지나가는 줄 알았건만 내일은 오늘과 비슷한 날씨이고, 목요일까지 날씨가 더욱 나쁘다는 베이스캠프의 연락이다. 등정 예상일인 5월 중순이 멀게만 느껴지더니 갑자기 얼마 안 남은 듯싶다. 제3캠프까지 올라갔다 내려오기로 했던 내일 계획이 바뀌었다. 일어나자마자 하산이다. 에베레스트에는 정말 휴일이 없다.


/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  (070424) =한필석 월간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