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여성 산악인 곽정혜씨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다.

paxlee 2007. 5. 24. 22:22

 

         

         ○세계 최고봉에서 천국과 지옥을 경험한 곽정혜씨○   /2006.05.14
 
 - "이젠 공부하는 산악인이 되고 싶어요”

 

 그리 길지 않은 산 인생을 통해 곽정혜씨(郭靜蕙·26)는 젊은 나이에 누구보다도 멋지고 흥분된 등반을 했고, 또 죽음 직전까지 이르는 혹독한 시련을 겪기도 했다. 2006년 5월18일 정오, 곽정혜는 한국여성 산악인 5번째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정상에 올라섰다.

 

고산등반에 발을 들여놓은 지 막 이태가 지나서였다. 모든 산들이 발아래 펼쳐져 있었다. 지구의 용마루에 올라서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세계의 정상에서 조망을 즐기고, 배낭에 넣어두었던 캠코더와 카메라를 꺼내 파노라마 사진도 찍는 등 등정의 기쁨을 마음껏 구가했다.

 

오후 4시경, 마지막 캠프가 설치된 사우콜을 얼마 안 남겨놓은 지점에 도착하자 이제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그제야 캠코더를 정상부터 목에 걸고 내려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캠코더를 배낭에 넣고 배낭 안에 넣어두었던 예비장갑으로 바꿔 끼기 위해 배낭을 벗었다. 그 순간 균형이 깨지면서 빙판 위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100m쯤 미끄러졌을까, 완만해지면서 멈추기는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방향을 잃고 움직이다가 수천m 아래 빙하로 떨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음이 편해지면서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과도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곽정혜씨

 

2001년 밀양대 정보통신공학과에 진학한 곽정혜에게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운동장에 세워져 있는 인공암벽이었다. 저렇게 빤빤하고 가파른 벽을 어떻게 오르나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오르고픈 욕구가 생겼다. 마침 같은 과 남녀 동기생들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인공벽을 올라보겠다는 생각에 산악부에 들어갔는데 너무 힘든 거예요. 선배들이라고 강압적이고 구속만 하려 드니 좋을 리 있었겠어요? 어찌나 싫던지 휴대폰을 끈 채 잠수하기도 하고, 교문 앞에서 기다리는 선배들 몰래 피해 도망다니기도 했어요.”

 

첫 해는 한쪽 발을 얹은 정도의 산악부 생활에 머물렀다. 그런데 이듬해 2학년에 진학하면서 암벽등반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밀양 백운슬랩, 부산 금정산 등 경남 일원의 암벽을 찾아다니고, 틈 날 때마다 교내 인공벽에 매달렸다.

 

“대학 산악부들이 그렇듯이 방학 때는 인수봉을 거쳐 설악산으로 이어지는 하계 장기등반에 나서고, 겨울에는 빙폭을 찾아 전국을 쏘다녔어요. 바위는 5.11급 정도 했던 것 같아요. 다른 집과 달리 저희 부모님은 이해를 해주셨어요. 제 고집이 센 탓도 있을 것이고요.”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다 싶어 3학년 2학기 때 휴학했다. 환경 분야에 대해 공부해야겠다는 마음도 생겼다. 그러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좋아하는 산도 평생 다닐 수 있고, 적성에도 맞겠다 싶어 1년 동안 공부한 다음 원서를 내밀었으나, 보기 좋게 낙방하고 말았다.

 

그러고도 미련이 남아 고속도로 현장사무소에 경리로 근무하면서 공부하고 있는데, 원정 제의가 들어왔다. ´04-´05 경남산악연맹 아마다블람-옴비가찬 원정이었다.

 

 ->▲ 2004년 12월. 첫 원정인 마다블람 등반 당시 C1에서 C2로 트래버스하고 있다.

 

“경남 지역 5개 대학이 설악산에서 훈련하고 있는데, 이상배 대장께서 후배를 보내왔어요. 자신이 없었어요. 무섭기도 했고요. 그래서 몇 차례나 거절했는데, 결원이 생겼다며 다시 가자고 하지 뭐예요. 그 얘기를 들은 산악부 선배는 ‘고마운 분이니 안 가더라도 인사나 하고 와라’ 했어요.

 

그게 사고였죠. 그렇지 않아도 여학생을 원하고 있었다지 뭐예요. 그렇게 코가 꿰고 말았지요.” 동행을 결정하고도 걱정이 많았다. 남자 부원들과 20kg씩 메고 다녀도 체력이 달린 적은 없었지만 히말라야는 분명 험난하리라는 생각에 걱정스러웠다. 훈련으로 극복해야겠다 다짐했다.

 

그리곤 마산의 언니 집에 머물며 창원공설운동장에서 매일 20km씩 달리고, 인터벌 훈련을 빼놓지 않고 했다. “50m 전력질주를 10회에서 20회로 늘어날 때까지 달렸어요. 주마링에 대비해 철봉에도 매달렸고요. 푸시업은 잘하는데 턱걸이는 지금도 단 한 번도 못해요. 그래서 매달리는 거랍니다.

 

지금 생각해도 걷고 달리는 건 잘하는 것 같아요. 남자대원들과 훈련할 때도 꼭 맨 앞에서 섰으니까요.” 10개월간의 강훈을 이겨낸 다음 원정에 나섰다. 히말라야에 첫발을 디딘 정혜는 모든 게 즐거웠다. 우려했던 고소증도 오지 않고, 컨디션도 좋았다. 아마다블람(6,856m)부터 등반했다.

 

“C1으로 가는 길은 너덜지대라서 무척 힘들었어요. C3에는 정말 바람이 강하게 불더군요. 정상 가는 날에는 200m쯤 오르다 설벽에서 손이 너무 시려서 이 대장님한테 추워서 도저히 못 가겠다 하곤 내려왔어요. 그런데 C3로 내려와 가스버너에 손을 녹이는데 불안하고 초조해지지 뭐예요.”

 

다시 올랐다. 마침 크레바스에 빠진 셰르파를 구조해내느라 공격조 등반이 늦어지고 있었고, 그 바람에 공격조와 함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하자마자 남자 동기가 고소증으로 힘들어하자 헬기를 불렀어요. 등반대장이 카트만두까지 함께 갔다 오라지 뭐예요.

 

회계를 맡고 있는 데다 영어도 할 줄 아는 제가 가야할 것 같다면서요. 갈등을 느끼다가 ‘등반보다 동기가 먼저’라는 생각에 그러겠다 했는데, 부대장께서 ‘힘 좋은 네가 정상에 가야 한다’며 막았어요. 아마 그때 헬기를 탔더라면 아마다블람은 아마 물 건너갔었을 거예요. 옴비가찬(6,340m)은 아마다블람 정상에 못 오른 대원들에게 기회가 주어졌고요.”

 

               ->▲ 2006년 5월 18일 에베레스트 정상.

 

정상에 올라서자 눈물만 나왔다. 에베레스트를 비롯해 수많은 설산들이 너무도 웅장했다. 곽정혜는 이후 그 날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아마다블람 등정으로 자신감을 얻은 것은 아니에요. 대신 다시 한 번 가고 싶다는 욕구가 뜨거워진 거죠.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 마음이었을 거예요.

 

그러나 대부분 학교에 복학하거나 복귀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꿈을 더 이어나갈 수 없었던 거죠.” 곽정혜는 원정 뒷정리를 하던 중 결심했다. 그리곤 곧바로 이상배씨에게 “고산등반을 좀더 해보고 싶다. 기회를 달라”고 간청했다. 이씨는 잠시 고민스러웠다. 한창 공부에 힘써야 할 나이에 너무 산에 빠지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와, 가녀린 몸이 고산등반에 맞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일단 노력해봐라”는 이상배씨의 말이 떨어진 직후부터 이상배씨의 산행을 쫓아다녔다. 당일산행도 훈련이라는 자세로 임했고, 기회는 언제 올지 모르니 항상 몸이 만들어져 있어야한다 생각했다. 겨울뿐 아니라 봄,여름,가을에도 플라스틱 이중화를 신었다. 배낭 무게는 늘 30kg에 맞춰져 있었다.

 

“한동안 이중화를 신고 산행할 때마다 발바닥과 발목이 아파 혼났어요. 발이 워낙 작아 사이즈가 세 치수 큰 이중화를 신어야했으니 불편하고 힘들 수밖에 없었죠. 그래도 참았어요. 히말라야에 가려면 이 정도 고생은 당연히 견뎌야한다면서 말이죠.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한여름에 웬 스키화냐는 시선이었어요.”

 

키 158cm에 몸무게가 47kg밖에 나가지 않는 왜소한 체격을 지녔지만 훈련은 황소 같은 남자들 못지않게 해냈다. 그런 힘든 훈련을 잘 참아내는 모습에 이상배씨는 메라피크 중앙봉(6,461m) 등반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등반보다 마오이스트들이 두려웠어요. 호기심도 있었고요.

 

진짜 총을 들고 와서 돈을 요구할 때는 겁나더라고요. 그래서 1인당 3,000루피씩 뺏겼답니다. 메라피크 등반은 어색할 적이 많았어요. 많은 대원들 가운에 홍일점이라서 그랬을 거예요. 심적으로도 어려운데 대원들 대부분 히말라야가 초행인지라 잘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버겁기도 했어요. 정상으로 이어지는 플라토는 유난히 길더라고요. 지루할 정도였어요. 그래서 그런지 정상에 올랐을 때는 덤덤했어요.”


- “중동팀과 한왕용 선배의 은혜는 평생 못 잊어”

 

귀국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유럽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 등반에 나섰다. 그녀는 상업등반대를 인솔하는 이상배씨의 보조역할을 맡았다. “이 대장님과 남학생 동기와 셋이서 11인분의 텐트와 취사구를 짊어지고 다니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도우미로 동행한 동기가 고소증세로 제 역할을 못해 더욱 힘들었죠.

 

하산길에선 동기가 다리가 풀려 하산 시간이 늦어지고, 그 바람에 열차를 놓쳐 무거운 짐을 메고 3시간이나 걸어 내려가야 했답니다. 그래도 그 등반에서 설벽 스텝을 깎는 법만큼은 제대로 배운 것 같아요.” 그 해 가을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다녀오자 이상배씨는 내년 봄 네 번째 에베레스트 도전에 나선다며, 8,000m급 등반에 대비하라고 했다.

 

곽정혜는 들떴다. 꿈의 8,000m급 거봉 등반이 이루어진다 생각하니 꿈만 같았다. 너무 빨리 왔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처음엔 로체에 가기로 돼 있었어요. 이상배씨와 두어 달 남겨놓고 양산시에서 경비 지원이 확정되는 바람에 에베레스트로 바뀐 거였죠. 8,000m급 봉만 해도 꿈만 같은 일인데 세계 최고봉을 오르게 되었으니 하늘을 날 듯한 기분이었죠.”

 

곽정혜는 이상배씨와 함께 2006년 봄 에베레스트 등반에 나섰다. 또 한 명의 대원은 로체 조였다. 다른 사람들은 아이스폴 지대를 지날 때면 빙탑이 무너지면 어떡하나, 크레바스에 빠지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에 가슴을 졸이고, C1과 C2 사이의 거대한 빙하를 오를 때 지루함과 강렬한 햇살에 몸서리를 쳐도 그녀는 마냥 즐겁고 행복하기만 했다. “불평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싶었어요. 당연히 겪어야하는 일인데 말이죠. 저는 에베레스트를 오른다는 생각에 즐겁기만 했는데 말이에요.”

 

                   ->▲ 아이스폴에서 이상배 대장과 곽정혜씨

 

많은 눈으로 늦춰지던 시즌 초등은 5월17일 이루어졌다. 그 날 곽정혜는 이상배씨와 함께 C3(7,300m)에서 마지막 캠프(C4·약 8,000m)로 향했고, 그 날 밤 9시쯤 세계 최고봉 정상을 향해 한 발 한 발 올랐다. 곽정혜의 걸음은 시종일관 가벼웠으나, C4에 너무 늦게 도착해 쉬지도 못하고 등정길에 나선 이상배 대장의 걸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무거워졌다.

 

“평균 5시간 걸리는 발코니(8,500m)에 도착했을 때 환해지기 시작했어요. 6시쯤 해가 뜨니까 9시간쯤 걸린 셈이죠. 벌써 정상에서 내려서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시간이 너무 늦어진다 싶어 고민스러웠어요. 정상은 포기하고 가는 데까지라도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어느 순간 이상배 대장은 “나 때문에 너까지 못 올라가면 안 된다”며 “먼저 가라”고 했다. 등정하든 실패하든 모든 성패가 둘이 함께 이루어져야한다고 늘 강조해오던 이 대장은 자신이 너무 지쳐 있다는 판단에 생각을 바꾸었다. 이후 곽정혜는 셰르파 한 명과 함께 빠른 속도로 등반, 정오경 정상에 올라서는 데 성공했다.

 

동행한 셰르파가 날씨가 나빠지고 있다며 하산을 재촉하는 바람에 어렵게 올라온 세계 최고봉 정상에서 오랜 시간 머물지도 못한 채 하산길에 들어서야 했다.

“오를 때는 몰랐는데 하산할 때는 힐라리스텝에서 혼란스럽지 뭐예요. 깔려 있는 여러 가닥의 로프 중 어떤 걸 잡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던 거죠. 잘못 잡으면 삭은 줄에 몸을 실을 수 있으니까요. 발이 꼬이면서 로프에 걸리곤 해서 정말 애를 먹었어요.”

 

어렵고 위험한 구간을 빠져나와 남봉(8,751m)에 내려섰을 때 이상배 대장이 보였다. 이 대장은 산소가 떨어져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설동을 파고 비박한 다음 다시 정상에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곽정혜는 셰르파에게 등정길에 데포시켜 놓은 산소통이 어디 있느냐 물었으나, 그 산소통은 다른 셰르파가 이미 가지고 내려간 뒤였다.

 

1시간쯤 설득해 함께 하산길에 들어섰으나, 눈발이 날리면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추락에 대한 공포 때문에 기마 자세로 다리에 힘을 주면서 한 발 한 발 내려섰다. 그렇게 어렵게 발코니에 도착했을 때 지친 이 대장이 셰르파에게 잠깐 쉬었다 가자고 했으나 셰르파는 거의 다 왔다며 연결된 로프를 풀러내곤 혼자 내려가 버렸다.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지고 말았다. 곽정혜는 정상적인 고정로프를 따라 내려섰으나, 이 대장은 장비나 산소통을 걸어놓기 위해 고정로프에 걸어놓은 로프를 따라 내려섰다. 곽정혜는 그 줄이 아니라고 몇 차례 외쳤지만 바람소리는 그 외침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날씨가 더욱 나빠지고 ‘여기서 이렇게 죽는구나’ 공포를 느끼게 되자 곽정혜는 하산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하산 하다가, 이제 다 내려왔다 싶어 마음을 놓고 배낭을 벗는 순간 몸이 기우뚱하면서 미끄러졌던 것이다. “얼음판에 누워 6시간쯤 있었나 봐요. 장갑이 벗겨진 손을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지만 멀쩡할 리가 있었겠어요. 해발 8,000m가 넘는 고도와 추위 속에서. 친구가 찾아왔어요. 그것도 두 번이나요.

 

어린 시절 헤어진 이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친구였죠. 저승사자구나 싶었어요. 그러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깨어난 거예요. 중동고팀 선배님들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도 고맙고 죄송스러워요. 저 때문에 정상길에 나섰던 박재우, 최인수 선배 두 분은 포기해야 했으니까요.”

 

1차 공격에 성공한 중동팀의 2차 공격조 대원 3명은 이날 밤 정상을 향하던 중 눈에 익은 옷차림의 사람이 얼음판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곤 캠프로 옮긴 다음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시커멓게 죽어 있는 곽정혜의 손을 치료해주기 위해 등정을 포기했다. 이상배 대장은 곽 대원을 데리고 캠프에 내려섰다 다시 정상을 향한 중동팀 이명호 대원에 의해 발견되어 셰르파들의 도움을 받으며 무사히 캠프로 내려설 수 있었다.

 

                             ->▲ 로체 서벽을 배경으로.

 

곽정혜는 이튿날에도 탈진 상태였으나, 동상이 악화될 우려 때문에 하산을 서둘렀다. 셰르파들의 도움을 받으며 로체 서벽을 거쳐 C2까지 내려선 다음 BC에서 사고소식을 들은 클린원정대(대장 한왕용)가 올려보낸 셰르파들의 들것에 실려 BC로 내려설 수 있었다.

 

“중동팀 선배님들은 너무나도 고마운 분들이었어요. 한왕용 선배님도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셰르파 여러 명을 올려 보내주어 C3에서 베이스캠프까지 들것에 실려 내려갈 수 있었으니까요. 그 분들의 은혜는 정말 잊지 못할 거예요.”

곽정혜씨는 귀국 후 동상 치료를 받다가 손가락을 절제해야한다는 의사의 권고 대신 동상 부위가 괴사하여 떨어져나갈 때까지 기다리며 치료를 받고 있다.

 

현재 오른손은 새끼손가락 손톱 부위가 괴사 후 떨어져 나간 상태로 끝났지만, 왼손은 붕대를 감은 채 지내고 있다. “매주 한두 번씩 서울에서 치료받고 있어요. 다섯 손가락 모두 두 마디씩은 포기해야 한대요. 저절로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래야 후유증이 덜하다고 하니까요. 사고 직후 엄마는 담담하게 대처하셨는데, 출국 전 인명은 재천이라며 덤덤해하셨던 아버지께서 손에 붕대를 칭칭 감고 공항에 도착한 제 모습을 보곤 오열하셨어요. 저도 따라 울고 말았죠.”

 

                 

 ->▲ 에베레스트에서 사고 당시 들것으로 구조되는 곽정혜씨.

 

곽정혜씨는 에베레스트 등반에 대해 손가락을 잃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지만 “실패한 등반이었다”는 평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다 말한다. “걱정 마세요, 전 아직 젊잖아요” “후회요? 아마다블람 등반 전부터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죽는 것보다 더 나쁜 최악의 상황이라 상심한 적도 있었어요.

 

지금은 아니에요. 정상에 올랐고 이렇게 살아 내려왔으니까요. 분명 제 에베레스트 등반이 완벽하게 성공한 건 아니에요. 이렇게 손가락을 잃었으니까요. 하지만 실패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실수였죠. 실수로 인한 사고였던 겁니다.”

이상배씨는 곽정혜씨의 치료비 마련을 하기 위해 경남도 차원에서 모금운동을 하려 했으나 곽씨의 거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이 무엇보다 무모했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해서 마음이 상할 적이 많다”고 한다. “동정받는 게 싫어요. 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신중했어요. 그래서 어떨 때는 다시 올라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나 자신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 싶기 때문이죠. 저 혼자서도 충분히 일어설 수 있어요. 두고 보세요.

 

저는 운이 좋은 편이에요. 좋은 선배 만나 히말라야 고산등반의 기회를 빨리 얻었으니까요. 간혹 그렇게 혹독한 일을 겪고도 산에 갈 생각이 나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제 저한테 산 빼면 뭐가 남겠어요?” 그녀는 무척 밝고 긍정적인 사고를 지닌 젊은 여성 산악인이다. 사고 직후 병원에서 만났을 때나 그 후 1년 가까이 지나 밀양에서 만날 때나 밝고 맑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녀의 꿈은 사회체육이나 스포츠마케팅 분야에서 일하는 것이다. “공부할 때가 빨리 온 것 같아요. 내년쯤 제가 원하는 분야에 관련된 과가 있는 학교에 편입할 계획이에요. 그래도 손가락을 자유롭게 쓸 수 있으려면 2~3년은 더 걸릴 것 같네요. 그 기간동안 공부하면서 체력을 다질 거예요. 새로운 분야와 새로운 산을 기대하면서요. 이젠 공부하는 산악인이 되고 싶어요. 산은 높든 낮든 계속 다닐 겁니다. 우선 손이 나으면 백두대간부터 시작할까 해요. 걱정하는 분들이 많으신 것 같은데 전 괜찮아요. 전 아직 젊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