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여성 산악인 배경미씨 -

paxlee 2007. 5. 25. 22:37
 
             [이 클라이머의 삶] 김태삼-배경미 부부 산악인
 
     “산악 발전 위해 사명감을 갖고 최선을 다할 터”

 

 

김태삼(金泰三·41)-배경미씨(裵京美·41) 산악인 부부는 함께 올해 산악계에서 중요 임무를 부여받았다. 남편 김태삼씨는 지난 2년간 맡아온 서울시연맹 등반경기위원장을 2년 더 해야 하고, 아내 배경미씨는 3월 초 대한산악연맹 여성 최초의 이사로 선임됐다. 학술정보위원회까지 맡게 돼 앞으로 2년간 위원회를 이끌어야 한다.

   ->▲ 김태삼-배경미 부부 산악인   /사진=김영훈 차장


김태삼 위원장은 대산련 등반경기위원으로 임명된 94년 이후 대산련과 서울시련 등반경기대회를 한 해에 대여섯 차례씩, 10여 년간 60여 대회에 관여해 왔다. 뿐 아니라 85년 개교 이후 20년간 코오롱등산학교 강사로서 후배 양성에 힘써왔다. 대부분 토요일와 일요일 같은 휴일에 열리는 행사이기에 본인은 물론 아내를 비롯한 가족 모두의 이해가 있기 전에는 해내기 힘든 일이다.


  전문가와 새내기 사제지간으로 만나


▲ 89년 여름 요세미티 글레이셔 뷰포인트

“사명감이 없었다면 못했을 겁니다. 80년대 들어 초반에는 자유등반이, 후반엔 스포츠클라이밍이 도입되면서 고전등반에 몰입해 있는 산악인들과 신세대 스포츠클라이머들 간에 정서적으로 단절되었습니다. 그 가교 역할을 1세대 스포츠클라이머인 제가 맡아야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아내 배경미 위원장도 산악발전을 위해 해온 일은 만만찮다. 90년 결혼 전후 5년간 대한산악연맹 편집실에 근무하며 계간지 <산악인>를 펴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고, 연맹 사무국을 떠난 이후에도 학술편집위원으로서 대산련 간행물 편찬에 꾸준히 관여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회보와 연감, 청소년오지탐험대 보고서 편찬뿐 아니라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각 위원회를 포함한 연맹 홍보와 정보 교류까지 도맡아야한다.

“한 달이 지났는데도 피부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지금은 2004년 연감을 마무리짓느라 정신없고요. 그래도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동안 참여에 의의를 둔 적이 많았는데, 지금은 주도해야할 위치가 되었으니까요.”김태삼씨와 배경미씨는 동갑내기 산꾼 부부다. 두 사람은 당연히 한 집에서 살지만, 낮에도 한 사무실에서 지낸다.

 

김태삼씨는 푸른여행사 대표이고, 배경미씨는 그 여행사의 해외유학 담당 실장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사제지간으로 시작됐다. 배경미씨가 83년 덕성여대 입학 후 처음 찾은 동아리는 서예반이었다. 전국대학미전 서예 부문에서 특선에 입상했을 정도로 서예에 재능도 있고, 몰두도 했다. 그러면서 정적인 서예와 정반대되는 동적인 활동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들어간 게 산악부였다.

당시 덕성여대 산악부는 도보 위주의 산행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2학년이 끝나갈 무렵인 12월 첫째 주 일요일 산악부 서포터 역할을 해주던 남자 선배가 도봉산 산행 중 “바위 한 번 붙어볼래?” 하곤 엉뚱한 산행을 제시했다. 도보산행만 고집하던 남자 선배의 뜻밖의 제안에 동조해 오른 게 선인봉 남측이었다.

▲  (左)2003년 매킨리 등반 중 7대륙 최고봉 등정자인 오은선씨(오른쪽)와 함께 촬영한 배경미씨. (右)강원도 용평스키장에서 다정한 한때.


첫 바위는 첫 사랑만큼이나 푹 빠지게 했다. 그런 배경미씨에게 산악부 5년 선배인 정은경씨가 등반 서포터로 소개해준 게 김태삼씨였다. 김씨는 당시 대산련 암벽대회에서 우승할 정도로 한창 잘 나가는 클라이머였고, 산도 일찍 시작해 고1 때부터 바위에서 살다시피 했다.

“저를 산으로 끌어들인 박찬민은 중3 때 한국등산학교를 나왔고, 또 당대 최고의 클라이머로 꼽히는 에코클럽 유기수 선배한테 바위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첫 바위를 끝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도 자연스레 에코클럽에 들어가게 되었죠. 고교 시절 찬민이와 둘이서 인수봉을 하루에 서너 코스씩 오르는 것은 무척 신나는 일이었습니다.”가볍고 날렵한 몸매의 김태삼은 고3 때 참가한 첫 대회인 제2회 대산련 암벽대회에서 고등부 2위에 올랐다.

 

우승은 박찬민 차지였다. 이듬해부터 역전됐다. 83년과 84년 역시 대산련 대회 일반부에서 박찬민은 3위와 2위에 그쳤으나, 김태삼은 연거푸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는 “코끼리크랙에서 벌어진 제3회 대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평소 등반을 생각하지 못했던 바위가 어느 날 흙을 떨어내면서 멋진 크랙이 드러났고, 이튿날 열린 대회에서 아무도 등반해보지 않은 길을 따라 오르면서 우승까지 차지했다.

 

제4회 대회에 앞서서는 박찬민씨와 1주일간 합숙하면서 대둔산 일원의 루트란 루트는 죄다 올랐다. 그 결과는 대둔산 대회 우승으로 나타났다. 제4회 대회 우승 덕에 일본에서 열린 록페스티벌에 참가, 일본 클라이머들은 모두 물리쳤으나 1, 2위는 타고난 힘과 조기교육에 특수훈련까지 받은 구소련 클라이머들에 넘겨주어야 했다.

▲ 올 봄 열린 블랙야크배 국제 볼더링 선수권대회에서 경기를 최종 평가하는 김태삼 대회위원장.
“재수할 때 어머니께서 암벽장비를 여러 번 버렸습니다. 공부하러 나가는 줄 알고 가방을 들여다보면 책 대신 암벽장비가 꽉 차 있었으니, 좀 화가 나셨겠어요. 아무튼 곧바로 인천체전에 진학한 박찬민이 지도교수를 설득해 만든 ‘등산’을 전공하기 위해 체육행정학과에 진학했을 정도로 산에 빠져 지냈죠.”

대학 입학 후 김태삼씨는 클라이밍을 전공하는 선수라면 웨이트트레이닝은 기본이라 생각했고, 체력 강화 훈련 외에도 건물 외벽 타기, 축대 타기 등을 통해 기량을 향상시키는 데 주력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나면 스포츠클라이밍이 널리 보급되어 있을 것이고, 그러면 그에 맞는 일이 많이 있으리라는 예상에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이렇게 기량이 무르익은 김태삼씨가 배경미씨에게 인상적이지 않을 리 없었다. 이후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고, 해를 거듭하면서 두 사람은 연인 관계로 발전해 나갔다. 배경미씨는 바위에 맛을 들이자마자 곧 열성 클라이머로 변신했다.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85년 가을에는 한국등산학교 정규반도 나왔다. 그 모습이 선배들의 눈에 띄어 88년 조희덕, 지현옥 등 당시 한국 대표급 여성 산악인들로 구성된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 원정에 참가할 수 있었다.

대한산악연맹 회보와 인연 맺은 것은 매킨리 등반보고서 때문이었다. 매킨리에서 돌아온 그녀는 등반기를 내기 위해 대산련 사무국을 찾았다. 그 때 만난 연보 담당자는 넌지시 도와주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어 잠시 도와주겠다는 생각에 발을 담갔는데, 이듬해 담당자가 사표를 내면서 아예 책임자가 되고 말았다.


3분의 1은 사업, 3분의 1은 산, 나머지는 열정의 가정

“연맹 집행진과의 마찰로 힘들기는 했지만, 93년까지 5년간 펴낸 <산악인>은 정말 정성을 다해 만든 계간지였습니다. 내용도 괜찮았고요. 특히 당시 산악인들이 목말라하던 전문등반에 관한 내용은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제가 손떼면서 폐간되고 말았지만요.” 배경미씨는 <산악인> 편찬을 도맡아 하느라 바삐 지내는 가운데 91년부터 2002년까지 10년 넘게 월간山 해외뉴스를 담당하기도 했다. 

 

 ▲ (左)86년 인수봉 취나드 B 쌍크랙.요세미티의 유명 루프 크랙.

     (右)세퍼레이트 리얼리티(5.12c) 등반.


90년 봄 결혼한 두 사람은 신혼여행으로 일본 북알프스를 오르고, 가을에는 김씨는 코오롱정보센터 직원으로서 연맹 행사 후원을 위해, 배경미씨는 취재차 대한산악연맹의 존무어 트레일 등반에 참가하기도 했다. 93년에는 커플원정대라는 타이틀로 매킨리 등반에 나섰다. 한 해 한 번씩은 해외 산을 찾자는 결혼 약속을 이행한 원정이었다.

배경미씨는 88년에, 김태삼씨는 89년 고 고상돈 10주기 추모행사로서 매킨리를 찾은 바 있어 두 사람 모두 재도전인 셈이었다. 등반은 매킨리시티에서 김태삼씨 혼자 마지막 캠프인 데날리빌리지에 올라가 하룻밤 비박한 뒤 데날리패스를 향해 오르다 포기한 것으로 끝났지만 행복이 넘쳤던 등반이었다.

“부부가 둘이서 만년설에 텐트 쳐 놓고 보석처럼 반짝이는 흰 산을 바라보고, 또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세며 지냈는데 더 이상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어차피 정상을 고집한 등반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비박 이튿날 혼자 정상을 향하는데 발에 동상 기미가 느껴지자마자 돌아섰죠. 다음에 다시 오마 하고 말입니다.”

두 사람은 큰 산에 대한 특별한 꿈은 없다. 단, 대상이 정해지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열심히 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마음먹었다. 배경미씨는 “아이가 하나일 때는 그래도 고산에 가고픈 열정이 강렬했는데, 둘째 아이가 세상에 태어난 다음부터는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싶어 산에 다니는 것을 자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태삼씨는 제대 후 엉뚱하게도 여행업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89년 트레킹 전문 여행사인 락희항공에 입사했고, 이듬해는 코오롱정보센터로 자리를 옮겨 해외트레킹 업무를 담당했다. 90년 결혼 이후 잠시 ‘장밋빛 인생’이란 맥주집을 운영한 적도 있지만, 95년 아내와 함께 푸른여행사를 개업한 이후 지금까지 여행업 외길을 걷고 있다.

“남들처럼 빨간 날 놀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 생각해낸 게 여행업이었습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제대 직후 여행업을 해보았으니 웬만큼 아는 상황이었고요. 엉뚱한 일도 여러 번 했죠. 등산장비 쇼핑몰도 해봤고, 2003년에는 상비군을 운영하려면 시내 중심에 좋은 인공암장이 있어야한다는 생각에 무교동 코오롱 건물에 실내암장 ‘매드짐’을 만들었으니까요. 딱 1년만에 1억을 까먹게 되더군요.”

김태삼씨는 사업에 바삐 지내면서도 산악활동을 열심히 한다. 봄가을 토요일과 일요일은 코오롱등산학교 강사로 활동하느라 북한산에 가 있거나, 또는 대한산악연맹과 서울시연맹 주최 등반대회 운영을 맡느라 대회장에서 지낸다. 열의가 식었다가도 새내기 클라이머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면 다시 뜨거워지고, 대회 때 새로운 다크호스가 탄생할 때면 보람이 느껴졌다.

 

선수층이 두터워지고, 기량이 느는 모습만으로도 흡족했다. 그렇지만 바깥 나들이하기 좋은 봄가을에 산이나 대회장에 나가서 지내는 것을 아내를 비롯한 가족의 이해가 없다면 해내기 힘든 일일 것이다. 김태삼씨 부부는 10년간 한 집에서 지내고, 또 한 사무실에서 일을 같이 하고 있다. 김씨는 해외여행과 트레킹을 담당하고, 아내 배경미씨는 해외유학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배경미씨는 캐나다쪽 전문가로 잘 알려져 있다.

“여행업이지만 서로 전혀 다른 분야를 담당하고 있기에 부딪칠 일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도와줄 일이 생기죠. 태삼씨는 사업, 가정, 산을 3분의 1씩 구분해놓고 지내는 사람이랍니다. 자신이 지닌 역량의 3분의 1은 사업에 쏟아붓고, 또 3분의 1은 산에 투자한답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아이들과 가정을 위해 노력을 다하는 거죠. 사실 휴일에 함께 지내지 못한다는 게 달가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열의를 갖고 산에 다니니 뭐라 트집 잡을 수 없는 일 아니겠어요? 그래서 간혹 일요일 오후 아이들과 산을 한 바퀴 돌다가 등산학교가 끝날 때쯤 찾아가곤 합니다.”

▲ 바위에 한창 맛든 85년 봄 인수봉 등반중 동양길 테라스에서.


배경미씨는 “여행사 일이 바쁜데도 대회 때면 멀리 떨어져 있는 경기장을 하루에 두 차례 이상 다녀오는 것을 보면 대단하다 싶다”며, “등산학교나 등반대회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아빠가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봉사 정신을 깨닫게 하는 산교육”이라며 오히려 남편을 치켜세워 주었다.

김태삼씨는 선수 활동도 해봤고, 대회 운영도 해왔기에 누구보다도 스포츠클라이밍의 흐름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김씨는 “이제 스포츠클라이밍은 하나의 협회로서 조직을 키워야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인공암장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생겨났습니다. 전국 규모의 대회에 참가하는 스포츠클라이머들만 해도 평균 120명입니다. 상위 10%만 큰 대회에 참가한다고 생각하면 무척 많은 인구죠. 전국적으로 200~300개의 인공암장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한 곳에서 운동하는 클라이머를 50~60명 정도 잡으면 적게는 10,000명 많게는 18,000여명이나 되는 셈이죠.

 

그래서 위원회가 여럿 있는 연맹에서 운영하기가 쉽지 않은 겁니다. 연맹이란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한 분야로 따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연맹 부회장 한 분이 회장을 맡아주면 중앙연맹과의 관계가 더욱 원활하게 돌아갈 것이고요.” 김태삼씨는 여러 해 동안 스포츠클라이밍이 제대로 발전하려면 상비군을 운영해야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아무도 나서주지 않자 자신이 나섰다. 그렇지만, 단순 계산과 달리 월 임대료 500만 원을 착착 내가면서 인공암장을 운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배경미씨는 “첫 외도치고는 치명적이었다”며, “그렇지만 남편이 좋아서 한 일이었기에 지금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김태삼씨는 2002년 등반 경기지도자 2급 자격을 취득한 다음 이듬해 1급 자격도 취득했다. 현재 1급 경기지도자 자격증 소지자는 김씨를 포함해 6명에 불과하다.

“후배들에게 시간 날 때 자격증을 따놓으라는 얘기를 수시로 합니다. 대학시절 후배를 만들어놓지 않고 입대한 것이 지금도 후회가 된답니다. 후배가 있었다면 지금쯤 학문으로 자리 잡아 클라이밍 학과가 생겨났을 텐데 말입니다.” 김태삼씨는 최근 열린 블랙야크배 서울시연맹 국제 볼더링 대회 때 사뭇 흥분된 모습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반응이 좋았기 때문이다.

“매스컴의 관심을 받아야 스포츠클라이밍이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난이도 경기 대신 볼더링 대회를 추진한 겁니다. 기대했던 대로 중계방송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관중들 호응도 좋았고, 참가 선수들도 즐거워했습니다. 내년에는 대중이 좀더 쉽게 찾을 수 있는 장소를 택해 대회를 열었으면 합니다.”


“후배 도와주는 것도 하나의 산행 아니겠습니까?”

▲ 시문-한나 생일날 기념촬영한 김태삼-배경미씨 가족. 인공암장을 함께 찾는 산꾼 가족이다.

대산련 최초의 상임이사가 된 배경미씨도 계획이 많다. 내용도 충실해야 하지만, 연감은 위원들이 한 분야씩 맡아 행사에도 직접 참가해 주도적으로 글을 쓰도록 하고, 오지탐험 보고서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읽고 싶은 책이 될 수 있도록 만들 생각이다. 좌담회를 열어 다음에 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실질적인 내용이 나올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인터넷 홈페이지도 관공서 홈페이지 분위기에서 벗어나 정보에 충실하고, 웹사이트 상에서 산악인들의 교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바꿔볼 계획도 세웠다. “거의 죽어 있는 각 위원회 방도 새롭게 꾸밀 생각입니다. 아무튼 20년 가까이 연맹 일에 관여해오면서 산악인이 대산련 회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강했습니다.

 

사실 위원장을 열심히 해야겠다 다짐한 것도 이번에 정통 산악인인 이인정 선배께서 대산련 회장이 되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최초의 여성 이사이자 위원장이어서 부담이 많이 가기는 하지만, 열심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월간山 회의실에서 취재하던 중 큰아이 시문(호성중 2년)에게서 전화가 왔다. 학교 다녀왔으니 운동하러 가도 되지 않겠냐는 내용이었다.

“얼마 전에 실내인공암장이 집 옆에 생겼어요. 아이들이 인공벽 대회에 자주 가보다 보니 어색해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한답니다. 큰애는 아빠 따라 인수봉 정상에도 서너 번 올랐습니다. 둘째 한나도 산을 좋아하고요. 요즘은 아이들 돌보느라 산에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봄가을 캠핑과 겨울 스키는 틈틈이 즐기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산을 좋아한다는 아내의 말에 김태삼씨는 흐믓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는 등산은 무조건 필드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업도 열심히 하고, 아이들도 잘 키우면서 또 뒤에서 후배들 잘 되도록 도와주는 것도 하나의 등산이란 생각이 드니까요.”

 - 글 / 월간 산[427호] 2005.05 / 한필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