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이 클라이머의 삶] 박종관씨 *-

paxlee 2007. 8. 14. 22:44
 
           [이 클라이머의 삶] 5대륙 최고봉 완등한 박종관씨
        “내 인생의 절반을 산으로 채웠다”

박종관씨(朴鐘款·38)는 2004년 아프리카 킬리만자로(5,895m) 정상을 밟음으로써, 북미 매킨리(6,194m), 남미 아콩카구아(6,959m), 아시아 에베레스트(8,848m)로 이어지는 5대륙 최고봉 등정을 해냈다. 히말라야 8,000m급 14개 거봉을 완등하고 또 새로운 기록에 도전중인 엄홍길이나, 박영석, 한왕용씨 같은 산악인들에 비하면 내세울 만한 기록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기록은 평범한 셀러리맨으로서 해낸 기록이기에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더욱이 그는 가능한 한 난도 높은 루트를 택했다. 매킨리는 캐신리지로 등반했고, 아콩카구아는 동면 루트 한국 초등을 기록했다. 특히 아콩카구아는 그를 죽음의 늪 깊숙이 끌어들였던 산이다.


‘잠들면 죽는다’…처절했던 아콩카구아 하산길


1999년 12월 말 박종관씨 일행은 남미 최고봉 아콩카구아를 등반하고 있었다. 루트는 당시 한국인이 처음 도전하는 동면 폴란드 직등루트. 박씨를 포함한 세 사람은 새벽 2시경 C2(5,800m)를 출발해 정상으로 향했다. 그런데 선배인 최영규씨가 아이젠 한 짝이 고장나면서 자꾸 벗겨져 어쩔 수 없이 포기했고, 후배인 송진철씨와 둘이서 정상으로 향했다.


그 날 정상에 올라섰다가 C2로 돌아올 계획이었으나 가도 가도 정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저녁 7시경, 날이 어두워지자 크레바스 구멍을 깨내고 들어서서 안전벨트를 벗고 배낭 안의 물건을 꺼내 깔고 앉았다. 이 때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수통이 얼어붙어 물도 마시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눈보라가 들이쳤다. 눈은 점점 더 쌓였다. 크레바스 밖으로는 나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자면 죽는다는 생각에 툭하면 서로 부르거나 흔들어 잠들지 못하도록 했다.


▲ 아콩카구아 동면을 등반 중인 박종관씨.
기다려도 기다려도 눈보라는 멈추지 않았다. 날이 밝을 즈음에는 눈(目)만 빼놓고는 완전히 눈(雪)에 묻혀 버렸고, 안전벨트며 수통 등 몇몇 장비는 어디 갔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제 300~400m만 오르면 정상이리라는 기대감과, 선배들에게 받은 후원에 대한 부담이 박종관씨를 정상으로 향하게 했다. 반면, 송진철씨는 체력적으로 무모하다는 판단에 포기했다. 이후 두 사람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제 죽었구나 싶었습니다. 정상에 다 왔다 싶었는데 발이 푹 빠지더니 온몸이 쑥 들어갔으니까요. 정상부에 크레바스가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거죠. 다행히 양팔과 무릎이 턱에 걸려 구사일행으로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맥이 풀리고 말았죠. C2를 치려고 돌을 거둬내다가 죽은 시신의 얼굴과 이중화가 보여 얼른 다시 돌을 덮었고, 동면 등반 중에도 바짝 말라붙은 시신을 보곤 잔뜩 겁먹고 있던 터라 더욱 겁이 났습니다.”


눈보라와 안개는 걷힐 줄 몰랐다. 앞도 제대로 분간되지 않는 상황에서 기다시피 정상쪽으로 다가갔다. 너무 지친 나머지 돌을 깔고 하루 더 자고 가려고 했다. 이미 정상적인 사고능력을 잃은 뒤였다. 그런데 돌을 옮기는 사이 바람에 안개가 걷히더니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남미 최고봉 정상을 상징하는 증표였다.


“죽음과도 같은 하산길이었습니다. 얼음을 깨내 입에 물고, 눈을 뭉쳐 입술을 적시면서 한 발 한 발 내려섰습니다. 잠들면 죽는다는 생각에 졸음과 싸우면서 말이죠. 비틀거리면서 C2로 돌아오니 출발한 지 36시간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일이 기다리고 있더군요. 진철이가 양손에 벙어리장갑을 끼고 있지 뭡니까. 동상에 걸린 거죠. 캠프에 도착할 때 피피 장갑에 피켈이 얼어붙은 상태였다는 것으로 보아 하산길에 두터운 장갑이 불편하고 등반에 방해되니 벗어 버린 게 동상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저는 이튿날부터 설맹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크레바스에서 나온 뒤 날씨가 흐려 고글을 벗고 등반한 게 화근이 된 거죠.”


그 사고로 송진철씨는 귀국 후 열 손가락을 모두 잘라내는 수술을 받아야 했고, 박종관씨는 지나친 등정욕 때문에 후배의 안전을 저버렸다는 질타에 한동안 시달려야 했다.


“죄책감에 한동안 마음이 아팠습니다. 손가락을 잘라낸 다음에도 진철이는 웃으며 저를 보는데 저는 속이 타들어가는 기분일 적이 많았으니까요. 등반 당시로선 서로를 위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상상치도 못한 결과가 나오고 말았던 거죠.”


전북 부안 출신인 박종관씨는 동년배 클라이머에 비해 뒤늦게 전문등반에 발을 들여놓았다. 90년 순천향대학병원 진단방사선과에 근무하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한 이후 도보산행은 간간이 했지만, 전문등반을 할 기회는 없었다.


▲ 매킨리 캐신리지 초입부인 재피니스 쿨와르 등반.
그런데 94년 어느 날 산악전문지에 체격 당당한 클라이머가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는 게 무척이나 부럽게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인수봉이나 선인봉을 오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런 암봉에 한 번은 올라봐야겠다는 꿈을 꾸곤 하던 터에 저 사람에게 배우면 제대로 바위를 탈 줄 알겠다 싶었다. 그래서 그 주인공이 운영하는 등산학교에 입교했다.


마음먹은 대로 94년 봄 등산학교 암벽반은 나왔지만, 이후 거의 한 해 동안 바위 탈 기회가 없었다. 함께 등반할 파트너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95년 동문산악회인 산사람산악회에 가입하면서 급속도로 암벽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해외원정의 기회도 주어졌다.


“석 달쯤 산에 다녔을 때일 겁니다. 선배들이 해외원정 얘기를 꺼내더군요. 어디 가는지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일단 손부터 들었죠. 그리고 매킨리에 대해 공부하면서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답니다. 그래서 열심히 운동을 했습니다. 아침마다 크로스컨트리도 하면서요.”


매킨리 이후 몸속 깊이 숨어있던 방랑벽 꿈틀


고산 초행자인 그는 매킨리에서도 만만치 않은 루트인 캐신리지 등반조에 끼었다. 대원 7명은 웨스트버트레스 노멀루트 조와 캐신리지 조로 나뉘어 랑데부 등반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제 등반을 배운 지 얼마 안 된 박종관씨는 대장인 이동석씨와 선배인 백호기씨와 함께 험난하기로 악명 높은 캐신리지 조에 선발됐다.


노멀루트조가 캐신리지 초입까지는 짐 수송을 도와주었지만, 이후로는 세 사람이 모든 짐을 올리면서 등반해야 했다. 초반에는 배낭 무게가 30kg에 이르렀다. 때문에 짐을 나누어 올리고, 이후에도 짐이 너무 무겁다 싶어 햄과 초콜릿처럼 무거운 식량을 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닷새째 등반하던 날 마땅한 텐트 자리가 나타나지 않자 이튿날 새벽 3시까지 밀어붙이다 좁은 턱에 프렌드와 하켄을 박아 고정시키면서 텐트를 설치했다.


▲ 엘캐피탄 퍼시픽오션월 등반.
“너무 좁아 쪼그리고 앉아서 깜빡 졸고 깨어났더니 텐트가 턱에 겨우 걸려 있지 뭐예요. 조금만 더 밀렸더라면 세 명 모두 몇 천 미터 절벽 아래로 내동댕이쳐졌을 겁니다. 그 날 널찍한 자리가 눈에 띄자마자 텐트를 치고 이틀동안 잠만 잤답니다. 하룻밤 내내 못 잔 잠을 보충할 생각으로 말입니다.”


세 명 모두 무난히 정상에 올라 등반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엉뚱하게도 하산길에서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노멀루트의 마지막 캠프인 데날리빌리지로 내려서기 전 급경사 설사면에서 배낭을 깔고 앉아 쉬다가 일어서는 순간 미끄러지고 말았다.


“호기형은 로프에 충격이 전해지는 순간 미끄러지고 말았는데, 마침 바위 부근에 있던 동석이 형이 발을 크랙에 끼워 넣는 덕분에 추락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충격으로 동석이 형은 복숭아뼈가 깨져나가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답니다. 쩔뚝거리며 암빙설 혼합 능선과 헤드월 절벽 구간을 내려선 다음 매킨리시티에서 헬기를 타라니까 먼저 내려가면 뭐하냐는 바람에 동석형을 썰매에 싣고 내려왔답니다. 형 때문에 목숨을 건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형을 실은 썰매를 끌고 내려오는 데 조금도 힘들지 않더군요.”


바위를 타면서도 슬랩 등반은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매킨리에서 돌아오자 인수봉과 선인봉이 작게 느껴지고, 바짝 선 슬랩도 누운 것처럼 느껴졌다. 웬만한 길은 가볍게 앞장서 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자신이 생기면서 또 다른 고산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제가 살던 마을은 내변산이 가까이 보이고, 선운산과 내장산도 평야 끝에 솟아 있는 곳입니다. 김제평야 바로 아래였으니까요. 아마 그 시절 돌아다니는 습성이 제 몸 깊이 파고 들었던가 봅니다. 밥을 굶어가면서 먼 곳을 다녀오고, 기차소리에 십리 이상 떨어진 철길도 마다 않고 다녀오곤 했으니까요. 매킨리를 다녀온 뒤 제 몸에 내재해 있던 그 방랑벽이 솟아나더군요.”


다음 번 고산으로 아콩카구아를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웠다. 97년 준비해 98년 초에 나설 생각이었다. 그런데 97년 말 불어닥친 IMF 여파로 무산됐고, 그래서 한 해 뒤인 99년 말 아콩카구아를 등반하게 된 것이다. 아콩카구아 등반을 대여섯 달 앞두고 미국 요세미티의 엘캐피탄도 등반했으니, 그 스스로 ‘비행기병’이라는 방랑벽이 도져도 단단히 도진 셈이다.


“한 달쯤 배운 알량한 인공등반 기술을 가지고 거벽에 붙었지만, 색다른 감흥에 즐거웠습니다. 절벽에 설치한 포타레지에 누우면 등 밑은 수백m 절벽인데도 밤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들은 환상적이었으니까요. 휴가 기간에 맞추느라 동료들보다 열흘 앞서 귀국하는데 정말 오기 싫더군요. 그런데 지난해 또다시 엘캡을 등반할 때는 루트가 먼젓번에 비해 어렵기도 했지만, 고정로프를 걸어놓은 뒤 본 등반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등반을 앞두고 캠프에 내려와 자는데, 꿈에 여섯 달밖에 안된 딸아이가 아장거리며 다가오지 뭡니까. 이미지 훈련에 소홀해 마인드컨트롤에 실패했던 거죠.”


▲ 퍼시픽오션월 루트로 올라선 엘캐피탄 정상. 왼쪽부터 이민호, 정승권, 박종관씨.
2000년 마침 대한산악연맹에서 새천년을 축하하는 7대륙 최고봉 원정 계획이 발표되자 지원서를 냈다. 매킨리 캐신리지 등반경력이 먹혀 들었던지 선발됐고, 비행기를 탄 지 나흘만에 유럽 최고봉인 엘브루즈 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리곤 2002년 유럽 알프스를 상징하는 난벽인 아이거 북벽에도 도전했다가, 날씨가 받쳐주지 않아 몽블랑, 뮌히, 융프라우 등정으로 만족해야 했다.


“고산에 갈 때마다 외국 클라이머들이 꼭 묻는 게 있었습니다. 에베레스트 가봤냐는 거였죠. 물론 아콩카구아 등정 이후 5대륙 최고봉 등정을 꿈꿔 왔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더욱 조바심이 생기곤 했습니다.”


기회는 빨리 왔다. 2002년 봄, 서울시산악연맹이 티벳등산협회와 초모랑마 합동등반을 계획하고 대원을 선발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것저것 잴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12명 선발에 고산등반 경험이 많은 클라이머 40여 명이 지원했으니 하늘에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 그런 원정에 선발되는 행운을 안고, 2003년 봄 초모랑마 등반에 나섰다.


세계 최고봉 하산길에 천길 낭떠러지 유혹받아


서울시연맹 원정대는 4월10일 BC(5,200m)에 입성한 이후 ABC(6,300m)를 구축하고, 노스콜(7,000m)에 올라 하룻밤 자고 내려오는 등 등반이 순조로웠다. 그런데 C4를 구축할 즈음인 5월 초 느닷없이 몰아닥친 강풍에 ABC의 모든 텐트가 바람에 날아가고, 폴이 부러지는 등 엉망이 되고 말았다. 


“네팔에서 텐트를 급히 가져오는 등, 어수선한 상태로 여러 날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전화위복이 되었답니다. 정상공격에 나서기 전까지 노스콜을 네 번이나 올랐고, 7,900m 캠프에도 올라갔다 내려왔으니 고소적응이 완벽하게 이루어졌고, 베이스캠프에서 아침마다 구보할 정도로 체력도 회복된 거죠.”


▲ 2002년 알프스 융프라우 정상.
박종관씨는 엄홍길씨 일행이 1차 공격에 성공한 다음날인 5월22일 0시를 조금 넘어 후배 두명과 함께 마지막 캠프(8,300m)를 출발했다. 다른 팀보다 두세 시간 빨리 출발했기에 헤드랜턴 불빛으로 길을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올라야 했다. 그런데 퍼스트스텝을 지나치는 사이 웬 물체가 바위에 누워 있었다. 한 해 전에 숨진 외국 클라이머의 시신이었다. 후배인 고용준씨를 불렀다. 혼자 보면 졸도할 것 같아서였다. 


최난 구간인 세컨드스텝에 이어 서드스텝을 지나칠 즈음 흰 산들이 발갛게 물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인 오전 8시30분경 세계 최고봉 정상에 올라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하산길은 그를 천길 낭떠러지 밑으로 유혹했다. 서드스텝을 내려서는 사이 아이젠 한 짝이 벗겨지면서 바위턱에 걸리고 말았다. 주우러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짧은 시간이지만 수십 번 갈등했다. 그러다 턱에서 미끄러지는 날이면 수천m 낭떠러지 아래로 곤두박질치리라는 두려움이 한 쪽 아이젠만 차고 내려서게 했다.


곧 산소통의 산소마저 바닥이 났다. 데포지점에 놓아둔 산소통을 찾아보았지만, 누가 가져갔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거의 탈진한 상태였으나 마지막 캠프로 무사히 내려섰고, C4(7,900m)로 내려설 시간도 충분했다. 하지만, 산소의 도움 없이 여러 시간을 보내는 사이 체력과 정신력은 바닥이 나 있었다.


C5에서 하룻밤 더 자고 한쪽 발만 아이젠을 찬 상태로 겨우 겨우 노스콜 캠프로 내려서는 사이 그의 머릿속에서는 다시는 이런 미친 짓은 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런데 노스콜을 내려서고 기나긴 플라토를 지나 ABC에 귀환, 선배들과 포옹하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선 또다시 새로운 설산이 그려지고 있었다.


       ▲ 킬리만자로 정상(2004년).
박종관씨는 에베레스트에서 돌아온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같은 산악회 후배인 장진씨(37)와 결혼했다. 그리고 이듬해 아프리카 킬리만자로를 올라 5대륙 최고봉을 마무리했다. 게다가 99년 초보 수준으로 덤볐던 엘캐피탄도 찾았다. 이렇게 96년 매킨리 이후 꾸준히 고산등반을 하며 지내는데 단 한 번도 직장을 그만둔 적은 없다. 산보다는 사회생활이 우선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직장 상사나 동료 선후배들이 이해해주어 가능한 일이지만, 저 역시 무리하게 원정 나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정 때마다 휴가기간과 경제적 부담 등 여러 상황을 고려해서 결정해 왔습니다. 사실 얼마 전 귀국한 창가방 팀에도 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두 달간 자리를 비운다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포기한 겁니다.”


박종관씨는 98년부터 2002년까지 4년간 수유리 정승권등산학교 실내암장에서 50m밖에 떨어지지 않은 집에서 살았다. 조금이라도 운동을 더 하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실상은 운동 끝나면 선후배들과 어울려 술 마시는 재미에 빠져 병원에 지각하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그 때가 제게는 가장 즐거운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산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산친구들이 좋아 산에 다니고 있으니까요. 제 인생의 절반은 산 덕분에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산에 다니다 보니 몸이 강해졌죠, 같은 산악회 후배를 아내로 맞아들였죠, 게다가 직장에서 유명해지기까지 했으니까요. 특별한 욕심은 없습니다. 산친구들이 좋아 산을 다니고 있듯이 산우들에게 싫은 소리 듣지 않고 계속 다닐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박종관씨는 내년 여름 바름산악회 창립 10주년 기념 낭가파르밧 원정에 참가한다. 파키스탄의 해발 8,125m의 이 거봉을 등반하려면 두 달 이상 걸린다. 그렇지만 등반기간 내내 대원들과 함께 지내기는 어려울 것이라 말한다.


“회사에서 받아낼 수 있는 기간은 한 달입니다. 그래서 그 한 달간 시도해보다가 안 되면 돌아와야 한답니다. 그 등반에 아콩카구아에서 손가락을 잃은 후배도 참가하기로 돼 있습니다. 얼마 전 직장 상사께 술 한 잔 마시면서 제 꿈을 솔직히 털어놓았습니다. 이번에도 아내가 말리지 않을 겁니다. 결혼 전에 산에 가는 것하고 술 마시는 건 말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냈으니까요.”


“7대륙 최고봉 모두 올라야 직성 풀려”


▲ 2004년 5월 22일, 같은 산악회 회원인 구은수씨(왼쪽)와 함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선 박종관씨.


박종관씨는 2002년 수유동에서 옥수동으로 이사한 후 집 부근의 실내암장인 손정준클라이밍연구소에서 운동하고 있다. 그는 99년 요세미티를 다녀온 뒤 하드프리 등반에 푹 빠져 현재 5.12급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올 연말부터 당분간 하드프리를 접어둘 계획이다. 낭가파르밧 등반을 위해 몸을 만들어야하기 때문이다.

 

매킨리 때부터 고산등반을 앞두곤 6개월간 크로스컨트리로 체력을 강화시켰다. 수유동에 살 때는 가벼운 배낭을 메고 집에서부터 우이동을 거쳐 백운대까지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머리가 어찔어찔할 때까지 속도를 높였다. 이번에는 집 근처의 매봉산에서 훈련할 생각이다.


“고산등반을 앞두고 가장 좋은 훈련은 크로스컨트리인 것 같습니다. 실내암장훈련은 상체는 좋아지지만 하체 강화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요. 아무튼 이번 여름에도 고향집에 갈 겁니다. 하루는 어머니와 함께 지내고, 둘째 날은 선운산에 가서 바위를 하고요. 10여 년간 해왔듯이 말이죠. 그런데 참, 킬리만자로 정상에서 한 생각이 뭔지 아십니까? 남극대륙이 떠오르면서 빈슨매시프가 솟아오르지 뭡니까. 아무래도 기회가 오면 꼭 가야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7대륙 최고봉을 모두 올라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서요.”


그는 영원한 방랑자다.


글 : 한필석 기자 / 월간 산 [430호] 20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