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이 클라이머의 삶] 이상조씨 *-

paxlee 2007. 8. 16. 22:54

 

         [이 클라이머의 삶] 이상조 익스트림라이더 교장


   “내가 만족할 수 있는 그림과 등반선을 그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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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조 익스트림라이더 교장

 

제5회 마운틴하드웨어 익스트림라이더 빅월 페스티발이 열린 2006년 9월16, 17일 이틀간 이상조씨(李商照·54·전북대 미대 교수)는 내내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 대회는 그가 익스트림라이더등산학교 교장에 취임한 2003년 이후 네 번째 대회였다. 그간 재정적인 문제로 겪은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때문에 포리스트시스템(대표 이석호·한국대학산악연맹 회장)이나 올해부터 후원에 나선 컬럼비아스포츠웨어(대표 조성래)와 같은 등산장비업체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대회장도 당고개 인공암장에서 뚝섬시민공원 인공암벽으로 옮겨왔고, 이틀간 선수들뿐 아니라 많은 관람객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후배들 정신 이어받아 인공등반기술 전도 나서

 

대회 운영진은 태풍 ‘산산’이 강풍을 동반한 많은 비를 몰고 부산 앞바다를 강타하고, 그 여파가 서울까지도 미칠 가능성이 있다는 일기예보에 잔뜩 긴장했으나, 대회가 끝난 다음 인공암장 아래 잔디밭 천막 아래서 뒤풀이 행사를 치를 때가 되어서야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하늘마저 도와준 듯싶었다. 이 교장은 젊은 클라이머들과 밤늦도록 술잔을 건네며 오랜만에 마음 놓고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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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레이사가르를 배경으로 대원들과 함께.(왼쪽에서 세번째가 이상조 교장)

 

한편으론 착잡한 심정도 들었다. 대회를 1주일 앞둔 9월9일 오후 1시17분 서울산악구조대팀이 탈레이사가르 북벽 등정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원정대가 출정한 이후 틈만 나면 산악사이트에 들어가 등반 소식을 확인했다. 등정 소식도 가장 먼저 확인했다. 너무나도 기뻤고, 축하 댓글도 그가 가장 먼저 올렸다.


그러나 씁쓸한 기분도 들었다. ‘이렇게 끝날 것을 왜 그렇게 오랜 세월 애를 먹였나’ 싶었다. 그것도 20살 가까이 차이나지만 친동생 이상 가깝게 지내온 후배들을 앗아가면서까지-. 그가 친동생처럼 아끼던 후배 최승철, 김형진과 신상만은 98년 탈레이사가르 북벽 등반 중 추락사하고 말았다.

 

이 교장이 인공등반을 배운 것은 최승철, 김형진이 추진한 파키스탄의 대암탑 트랑고타워 등반에 대비해서였다. 상하단 합치면 수직고 1,500m에 이르는 대암벽을 오르자면 인공등반기술은 필수. 게다가 후배들은 새로운 루트를 꿈꾸고 있었다. “96년 말 신윤정, 최승철, 김형진 등 대원 4명이 확정된 후 수유동 4.19공원에서 대동문과 위문을 거쳐 도선사로 내려오는 크로스컨트리를 거의 매일 아침 했습니다. 후배들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죠. 그렇지만 이미 40대 중반에 들어선 제가 20대인 후배들과 줄을 함께 묶는다는 것은 욕심이죠. 저는 오로지 지원만 하겠다는 조건으로 참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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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레이트트랑고타워를 배경으로 기념촬영한 김형진, 최승철, 신윤정.

 

97년 여름 파키스탄을 향해 출정, 베이스캠프를 구축한 다음 대원들과 함께 벽 밑에까지 짐을 옮긴 다음부터 베이스캠프를 지켰다. “루트 관측이 제 임무였죠. 새로운 선을 찾아내기 위해 몇날 며칠을 살펴보던 중 어느 날 아침 해뜰 무렵 거대한 바위에서 뭔가 반짝이는 거예요. 미국팀이 박아놓은 볼트에서 반사되는 빛이었습니다. 정말 감격스런 순간이었죠. 하단부에 새로운 등반선을 찾아내는 순간이기도 했으니까요. 대장이 너무 움직여선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등반이었습니다. 대원들의 등반을 관측하면서 루트를 확인해주고, 위쪽에서 벌어질 위험을 미리 피하게 해주는 게 대장에게 주어진 가장 큰 의무니까요.

 

실제로 길도 찾아주었지만 엄청난 눈사태를 예견, 사고를 막기도 했답니다. 눈사태가 일어나는데 마치 광목 한 필을 확 풀어놓는 것 같더군요. 길을 잘못 들어서거나 위쪽 상황이 나쁠 때마다 하도 소리를 쳤더니 14피치 등반 때도 BC에서 질러대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더군요(웃음).” 이렇게 해서 대원들 성(姓)의 알파벳 앞글자를 모은 LSCK 원정대는 트랑고타워 하단벽에 ‘코리아판타지’라는 루트를 뚫었다. 이듬해인 98년 가을에는 최승철과 김형진이 주축이 되어 탈레이사가르 북벽 등반에 나섰다.

 

한국 등반대로서는 93년 첫 도전 이후 일곱번째 도전에 나서는 팀이었다. 당시 그 동안 요세미티와 트랑고타워에서 펼친 뛰어난 활동으로 주목을 받았고, 기대했던 대로 최승철·김형진과 신상만은 최대 관건이라는 블랙타워를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마지막 정상 설원을 오르던 중 추락사하고 말았다. “학기 중이라 동행할 수 없었던 등반이었죠. 정말 좋은 후배들이었는데….” 이상조 교장은 2003년 후배들의 느낌이라도 받을 생각에 탈레이사가르 원정에 나섰다. 이번에는 최승철 대신 그의 아내 김점숙(의정부 샤모니인공암장 대표)과 김형진 대신 형 김형일(익스트림라이더등산학교 강사)이 참가했다.

 

기대를 모았던 등반이었으나, 날씨를 비롯한 여러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서야 했다. 그 후 3년이 지난 9월9일 서울시연맹 구조대에 의해 북벽 등반이 완성된 것이다. 이상조씨는 후배들을 대신해 탈레이사가르 북벽에 새 길을 내는 일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꿈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인공등반기술을 전파하는 일이다. 그는 97년 최승철·김형진 두 산우가 주축이 되어 만든 익스트림라이더 등산학교 교장직을 2003년부터 맡아오고 있다.

 

“이 기술로 못 올라갈 데가 없죠” “형일이가 어느 날 ‘형님, 익스트림등산학교에 교장이 없어요’ 하지 뭐예요. 그래서 내가 한 번 알아볼게 했죠. 그랬더니 ‘그냥 맡으시면 되죠’ 하더군요. 형일이는 학교장을 얘기했는데, 저는 교육장으로 생각했던 거죠. 어거지로 떠맡은 셈이죠. 대신 선을 그었어요. 도와주는 선에서만 하겠다고. 제가 맡으면 적어도 후원자는 한 명이라도 구할 수 있으려니 하는 생각에서였죠.” 그 생각이 맞아 떨어졌다. 동문들의 도움도 많았고, 그가 졸업한 신일고 선후배들의 도움도 많았다.

 

게다가 포리스트시스템과 같은 등산장비업체의 후원도 큰 힘이 돼주었다. 2003년 탈레이사가르 원정뿐 아니라 도봉산 기슭에 학교 사무실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 역시 포리스트시스템의 적극적인 후원 덕분이었다. “인공등반의 매력은 기술을 제대로 익히면 못 올라갈 데가 없다는 거죠. 그것도 남들이 가지 않은 선을 말입니다. 사실 인공등반이란 게 80년대 말 자유등반 붐이 일기 전엔 이미 해오던 거 아닙니까? 그게 장비가 훨씬 다양해지고 기술도 발전한 거죠.” 그는 이제 등산학교와 인공등반대회가 인공등반을 전파하는 데 어느 정도 역할을 해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지난 봄 18기 졸업생까지 300명 넘게 교육시키고, 동문들이 그들 산악회나 지역 클라이머들에게 기술을 전파하고 있으니 인공등반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 제법 될 겁니다. 이번 대회를 통해 보더라도 분위기가 무르익었고요. 봇물이 터지기 직전 분위기처럼 느껴지니까요.” 그러나 인공등반의 폐해에 대해 걱정도 많다. 가장 자연스런 선을 찾아 등반하는 게 좋은데 어거지로 루트를 내려하다 보니 아무 데나 볼트를 박는 등 자연훼손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치된 채석장을 교육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처음 한동안은 덕정리 채석장을 많이 이용했죠. 그 다음 발견한 유양리 채석장 같은 곳은 이제 인공등반의 메카로 인식될 정도랍니다. 인공등반 붐이 이는 것은 자유등반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의식 때문일 겁니다. 지금은 시작단계지만 곧 터질 것 같습니다. 최근까지 우리 등산학교만 인공등반기술을 가르쳐왔는데, 다른 등산학교에서도 교과과정으로 넣을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니까요.”  이상조씨는 클라이머 이전에 화가다. 신일고 시절부터 산악부 생활을 할 만큼 산에 흠뻑 빠져 지내왔지만, 화가의 길에 몰입하기 위해 오랜 세월 제대로 산을 찾지 못했다.

 

“제가 2회인데 1회 때 있다가 없어졌어요. 그래서 저희 때는 비공식적으로 활동해야 했죠. 선생님들에게 들키는 날이면 큰일 날 일이었죠. 공부 외에는 생각도 못 하게 하던 분위기였으니까요. 우이암이 첫 바위였죠. 엉성한 장비지만 그래도 열심히 다녔답니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미 그림으로 진로를 정했기에 산보다는 그림에 더욱 열중했습니다. 대학에 가면 더 열심히 산에 다닐 줄 알았는데 그게 안 되더군요. 그림에 몰입해 지내느라 다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거죠.”

 

다시 산이 그리워진 것은 시간강사 시절인 1984년이었다. 서른을 넘어서자 고교시절 함께 산을 다니던 친구들이 그리워졌다. 뒤늦게 생긴 홍대 미대 산악부 후배들과 함께 산을 다니기 시작, 홍대 출신 그림동호인들끼리 겨울깊은산악회라는 등산모임도 만들어 백두대간을 종주하기도 했다. 그러다 아예 산을 그림의 대상으로 삼고 말았다. “외국의 비엔날레를 참관할 때마다 회의가 일었어요. 서구의 논리와 창작세계가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아 고민스러웠던 거죠. 우리와 그들의 정서는 전혀 다르죠.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 그럴 수밖에 없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내게 맞는 주제가 무엇인가 고민하게 되었답니다.

 

그 결론이 산이었던 거죠. 무엇보다 화가의 상상력과 클라이머의 상상력이 딱 맞아떨어진다 싶었습니다.” 그의 화법은 독특하다. 접착제를 섞은 돌가루를 캔버스에 덕지덕지 바른 다음 쇠브러시나 미장용 흙손으로 긁어내기도 한다. 물감을 흠뻑 바른 다음 분무기로 뿌려 상고대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그의 개인전 15회 중 산을 테마로 삼은 전시회가 10회나 된다. 모두 ‘산을 향하여’란 타이틀이다. “저는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보다는 산을 만든다는 마음으로 작업합니다. 돌가루를 재료로 사용하는 것은 강한 질감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캔버스의 공간 대부분을 산으로 꽉 채우는 것은 웅장함을 표현하기 위해서고요. 제 그림은 한 번 봐서는 답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들머리가 보이기 시작하면 바위도 보이고, 계곡도 보입니다.  나무도 있고, 짐승도 있고 말입니다. 한 후배가 그러더군요. ‘뭐 이런 그림을 줬냐’고. 그러다 얼마 안 지나 또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형, 아침 햇살이 비칠 때 보니까 정말 계곡도 있고, 바위도 있습디다’ 하고 말입니다. 그래도 산을 오래 다닌 사람들은 제 그림을 비교적 빨리 이해하더군요.” 낮에는 전국 곳곳의 대학을 찾아다니며 강의하느라 바쁘고, 밤에는 그림 작업에 열중하느라 짬이 나지 않았다. 

 

1987년 이후 미대 산악부 후배들과 짬짬이 암벽등반도 다닌 그는 91년 전임강사로 전북대에 부임한 이후 조금 여유가 생겼다. 함께 다니면서 바위에 재미 붙인 아들에게 제대로 클라이밍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에 집 부근 정승권등산학교 실내암장을 찾았다. “산에 간다고 말만 꺼내면 아들녀석이 따라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함께 다니곤 했습니다. 그런데 볼더에만 가면 끼가 나오는 거예요. 자꾸 올라붙으려 했으니까요. 그래서 기왕이면 제대로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에 집 근처 클라이밍아카데미 실내암장을 찾았던 거죠. 아이도 좋아했지만, 저는 더 좋더군요. 훈련 효과가 바로 바로 나타나곤 했으니까요. 스물 살 차이 나는데도 형님, 형님 하면서 지내게 된 후배들도 여럿 만나게 되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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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년 탈레이사가르에서 추모동판 부착.

 

98년 가을 탈레이사가르에서 돌아오지 않은 최승철, 김형진과의 인연도 거기서 비롯됐다. “전도사처럼 치열하게 등반했던 후배들이지요. 일반 산꾼들과 달리 무척 밝고 적극적이었고요. 예의도 바랐으니까요. 그런데 산 밑에서 그렇게 말 잘 듣는 친구들이 바위에만 가면 조금도 봐주지 않는 거예요. 인수봉 정상에 올랐다가 클라이밍다운도 시켰고 말이죠. 정말 아슬아슬한 등반을 좋아하던 후배들이었습니다. 얼굴이 앳되 보이는 바람에 오해 산 적도 여러 번 있었답니다. 후배들과 다니다보면 등 뒤에서 반말하는 사람이 간간이 있었죠. 뒤돌아서면 미안하다고 했지만요. 그래도 젊은 사람들과 산에 다니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습니다. 저도 젊어지는 느낌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러다 보니 저한테 형이라고 부르는 후배한테 제 아들이 또 형이라고 부르는 묘한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더군요(웃음).”

 

북한산성의 실체를 그림으로 재현하고파

 

그는 52년생 용띠다. 머리카락은 반백에 가깝지만 얼굴만큼은 40대 초반으로 보일 만큼 앳된 그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6년째 투병중인 아내를 돌보며 지내는 생활이 녹록할 리 없다. “스트레스를 잘 안 받는 체질이긴 하지만 쉽진 않네요. 그래도 산이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열심히 바위를 타고, 후배들과 산 얘기 나누는 사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아마 산에 다니지 않았다면 모든 게 힘들기만 할 겁니다.” 그는 91년 전임강사로 전북대에 부임, 학교 곳곳을 둘러보던 중 산악부에 들른 게 인연이 되어 94년부터 전북대 산악부 지도교수를 맡아오고, 전북산악연맹 부회장으로 지역 산악 발전에도 이바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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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소년 오지탐사 중국천산 천지호수에서 스케치 중인 이상조 교수

 
“실제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해 학생들이나 연맹 식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익스트림등산학교의 봄가을 정기반 교육에 참가하는 것만 해도 시간에 쫓긴답니다. 화가가 다른 일에 신경을 쓰다 보면 본분을 제대로 지키기 어렵답니다. 어려서부터 한 가지에 몰두하면 헤어나지 못하는 스타일이었어요. 고교시절 선생님들이 마음 놓고 산에 다니게 했다면 아마 꽤나 이름난 산쟁이가 되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도 클라이머보다는 화가로 남고 싶습니다. 명화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내가 만족할 수 있는 그림은 꼭 그리고 싶고요. 기왕이면 산을 주제로 한 작품이면 더욱 좋을 것이고요. 특히 우리 민족에게 자주정신의 상징이랄 수 있는 북한산성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북한산의 역사와 실체를 다큐멘터리형으로 그리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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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 역사자료 수집차 방문한 장군총에서.

     그는 역사 다큐멘터리를 그림으로 재현하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그의 꿈은 북한산성의 역사를 그림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오랜 숙고 끝에 성을 구축하게 된 배경에서 돌멩이 하나 하나를 쌓던 석수장이의 심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그림 한 장 한 장으로 표현하는 게 꿈이다. 그래도 그는 천생 산꾼일 수밖에 없다. “그림이 그렇듯이 등산도 사람이 하는 행위라 좋은 것 같아요. 사람들이 산에만 가면 친근한 느낌을 얻는 것은 역시 오른다는 게 무상의 행위이기 때문일 거고요. 그래서 어려운 등반을 해냈다고 우쭐해하는 클라이머들을 보면 마음에 들지 않아요. 무상의 행위인데 말입니다.

 

원정 갈 때도 그랬고, 등산학교 교장을 맡을 때도 내가 주역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후배들을 도와주는 것으로 만족했던 거죠. 그런데 요즘은 욕심이 생겨요. 내가 직접 선을 그으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죠. 그래서 내년쯤 파키스탄이나 중국에 있는 5,000m쯤 되는 산을 갈까 합니다. 내년에 익스트림라이더등산학교가 개교 10주년을 맞거든요. 후배들과 함께 신나게 등반해 보는 거죠.”

 

             글 : 한필석 기자 / 월간 산[444호] 20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