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열린캠프등산학교 전두성 교장

paxlee 2007. 8. 31. 20:52

       [이 클라이머의 삶] 열린캠프등산학교 교장 전두성

 
“등반은 道를 닦는 과정이다”

전두성씨(田斗聖·55)는 산이 인생의 전부였다 해도 될 만큼 산과 더불어 살아온 산악인이다. 67년 배낭여행 때 오른 한라산을 시작으로, 고교산악부와 대학산악부, 고교시절(69년) 입회한 어센트산악회와 대학시절(73년) 입회한 한국산악회 활동을 통해 30여 년간 山인생을 이어왔다. 자신의 산행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아는 등산 지식을 나누기를 즐겼다. 대학산악부 지도강사, 코오롱등산학교, 한국산악회 등산학교 강사 등을 통해서였다.


여러 해 동안 등산학교 강사를 하거나 운영해 나가는 사이 주관과 카리스마가 뚜렷한 그와 등산학교를 운영하는 주도업체나 산악회와 갈등이 생겼다. 그럴 때마다 한동안 심한 가슴앓이를 했다. 그래도 주저앉지 않았다. 매순간 툴툴 털어 버리고 오뚝이처럼 일어났고, 지금도 열린캠프(cafe.naver. com/frcamp) 등산학교와 훈련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어려선 배우는 재미, 나이 들어선 가르치는 즐거움


7월13일 오후 6시30분경 우이동에서 시작된 산행도 열린캠프 산행이었다. 그는 ‘길이 끝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등반행위의 원칙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이 날 묵기로 한 백운산장까지는 무당골 좌측 능선을 따랐다. 공원법상 통제구간이었다. 중간 중간 길도 희미했고, 능선길은 험한 바위구간이 자주 나타나 애를 먹였다. 일행인 김기용(정규반 18기), 양훈(19기), 임중빈(21기 입교 예정) 세 사람은 아직 새로운 길을 여유럽게 오르기에는 산행 경험이 적다 싶었다. 앞장선 전씨는 적당한 바위에 앉아 쉬고 있다가 일행이 뒤쫓아오면 합류하여 다시 오르기를 반복했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면서 산에는 어둠이 몰려들었지만 산 아래 불빛이 점점 또렷해지다가 점차 휘황찬란해졌다.


“북한산을 40년 가까이 다녔을 텐데 지금도 좋은가요?”


“학교 방침이 못마땅해 고3 때 학교를 안 다닌 적이 있어요. 반면 산은 그만둘 생각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어렸을 때는 짓궂은 선배들의 속박을 견뎌야했지만, 그래도 나만의 자유가 있는 곳이 산이었으니까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북한산은 더 많은 자유를 주는 것 같고요. 바위가 있잖아요. 어렸을 적엔 배우는 재미였다면 지금은 가르치는 즐거움에 빠져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아요.

 

내가 아는 것을 필요한 사람과 나눈다는 기쁨이겠죠. 물론 좀더 재미있는 등반법을 창출하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고교입시를 코앞에 둔 67년 중학교 3학년 때 배낭 싸들고 무전여행에 나섰을 만큼 방랑벽을 타고난 그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한라산까지 올랐다. 그렇게 싸돌아다니기를 밥 먹듯 했으니 공부를 제대로 했을 리 없었다. 한 해 꿇었다. 그리곤 69년 중대부고에 입학했다.

 

당시 서울지역 골수 산악회들은 인수파와 선인파로 나뉘어 등반을 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단지 익숙한 바위에서 만족하고 지냈을 뿐이다. 60년대 말 바위 입문 첫 단계가 대부분 그렇듯이 그 역시 군용 워커를 신고 허리에 둘러 감은 슬링에 걸린 카라비너에 군용 자일을 걸고 남측 뜀바위 코스부터 올랐다. “알피니즘은 만년설이 있는 알프스에서 태동했습니다. 우리나라는 겨울 외에는 눈도 얼음도 없어요.

 

그런 환경 차이 때문에 우리나라는 암벽등반이 알피니즘을 추구하는 행위로 대체되지 않았나 싶어요.” 완전히 어두워진 8시30분경 백운산장에 도착한 일행이 장맛비로 불어난 계곡 물에 땀을 씻고 오는 사이 그는 자신의 등반 철학에 대해 언뜻 비췄다. “모험 등반은 어찌 보면 더욱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수련과정이 아닌가 싶어요. 자연 속에서 용맹정진하는 도인들처럼 클라이머들은 암빙벽등반을 통해 자아를 찾아가는 거죠.”

▲ 생일을 맞은 임중빈씨(오른족에서 두번째)가 전두성씨의 축하연주에 활짝 웃고 있다.

이 날 밤 마침 일행 중 임중빈씨는 생일을 맞았다. 산장 앞마당 테이블 위에 차린 ‘잔치상’이래 봤자 초코파이에 가느다란 초 몇 개 꽂고 가벼운 안주에 양주 한 병과 소주 몇 병이 전부였다. 우크렐레 반주에 생일 축하 노래가 나오자 전두성씨와 고교 동창인 임중빈씨는 “전 선생이 고등학교 때부터 우크렐레를 가지고 다녔는데, 그 악기에 맞춰 내 생일 파티송을 부르게 될 줄은 몰랐다”며 즐거워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우크렐레를 치며 노래부르기를 좋아했다.

 

이 날 밤에도 얘기를 나누다가도 틈만 나면 산노래를 부르고, 요들송도 불렀다. “산노래와 우크렐레는 정말 잘 어울려요. 가능한 한 조용히, 여럿이서 화음을 넣어가면서 불러요. 산노래를 통해 사람들끼리 화합하는 법을 배우는 거죠.” 11시쯤 올라온 양승현씨(8기)는 4년만에 모습을 보였고, 안주가 떨어질 때 즈음 노승헌씨(4기)는 골뱅이 무침을 싸들고 올라왔다.

 

전원 산장에서 머물기로 했으나 강북청소년수련원생 30명이 올라온다는 얘기를 들은 뒤 자정을 넘어서자 열림캠프 회원들은 모두들 백운산장 뒤쪽 능선으로 올랐다. 남쪽 바다에서 바람이 세차게 불어냈다. 폭풍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새벽 1시 안팎에 도착한 김경태, 윤성택씨까지도 기꺼이 비박에 합류했다.


▲ 88년 늦가을 40피치 연장등반을 마치고 인수봉 정상에서 손덕규씨와 함께 비박중인 전두성씨.

꼭두새벽에 설마 등반하랴 했는데 새벽 5시가 되자 모두들 일어나 인수봉으로 향했다. 열린캠프는 매주 산행을 금요일 밤 산에서 만나 하룻밤 같이 지낸 뒤 이튿날 새벽부터 등반하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모든 먹거리는 저녁 한 끼 외에는 모두 행동식이었다. 알피니즘에 입각한 등반을 하려면 일찍 움직여야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어제 생일파티의 주인공인 임중빈씨는 3개조 중 기존B 코스 조의 선등을 맡았고, 현역 준사관인 윤선택씨를 선등으로 전두성씨와 기자가 함께 등반했다.


“중대부고 산악부원은 자연스레 어센트산악회 회원이 되었어요. 그래서 선인봉과 주봉 등 도봉산 일원의 바위는 실컷 다녔어요. 선인파였기 때문이죠. 그러다 어머니께서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산에 다니는 걸 허락해주겠다 하여 72년 광운공대에 합격하자마자 산악부에 들어갔죠. 그제서야 인수봉을 오를 수 있게 되었답니다.” 젊은 날 그는 열정적으로 등반활동을 펼쳤다. 고교시절 주말이면 선인봉으로 달려갔고, 방학 대부분을 설악산에서 지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토왕빙폭 등반대에 참가할 정도로 열성적이었고, 대학 1학년 때 설악산 백운동 일원의 개척등반에 참가하는가 하면, 73년 서북릉~백운동계곡~용아장성~화채봉 연결등반, 74년 동계 천화대 개척등반, 77년 천화대~1275m봉 리지~설악골~잦은바위골 연결등반 등을 해냈다. 동계 천화대 리지 등반은 동계 초등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무엇보다 주어진 환경에서 그가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어렵고 힘든 산행을 추구해왔다. 81년 토왕빙폭과 우벽 연장등반도 그런 개척정신과 도전정신에서 시도했던 것이다.


고난은 업그레이드되기 위한 과정이다.

“토왕빙폭은 77년 초등 이후 다섯 번째 완등이었어요. 잘 진행되다 막판에 사고가 나고 말았죠. 선등자인 김명춘이 밤 11시경 상단을 끝내고 후등자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는데, 후등자인 신동우가 어센더로 등반하다 얼음이 끼어 작동이 잘 안 되자 자력으로 등반하다 추락하고 말았던 거죠.” 60m 추락이었다. 자일을 고정시켜 놓은 나무가 부러지고, 신씨가 자일에 매놓은 푸르지크 매듭이 끊어지는 바람에 추락거리가 컸다.

 

그래도 충격이 많이 완화되는 바람에 부상을 당하지 않은 신씨는 자력으로 중단까지 내려와 구조차 올라온 대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상단에 있던 김명춘씨는 구조대가 올라올 때까지 악몽같은 시간을 보내야했다. 새벽 서너 시면 도착하리라 예상했던 대원이 도중에 길을 잃는 바람에 상단에 도착한 것은 아침 8시나 되어서였다. “고교시절 토왕폭 등반에 참가했다가 심부름만 한 게 오래도록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었어요.

 

그래서 당시 고등학생인 동우를 등반조에 참가시킨 거랍니다. 동우는 다행히 괜찮았지만 발가락을 다섯 개나 잃은 명춘이를 보니 정말 산이 싫어지더군요. 300만 원이 넘는 병원비를 구하는 일도 정말 힘들었어요. 자비와 후원금으론 절반도 못 메웠어요. 그래서 그 3년 전 안나푸르나4봉 원정 때 남은 장비와 귀국길에 일본에서 사온 장비까지 몽땅 팔고, 막 입사한 회사에서 받은 봉급의 3분의 2를 석 달 동안 보태야했죠. 리더라는 게 함부로 할 게 못된다 싶었어요. 몇 년 전 미국에서 명춘이를 만났을 때 얼싸안고 한동안 울었답니다. 옛날 일이 생각났던 거죠.”


열정을 다 받친 그에게 히말라야 등반의 기회는 비교적 일찍 왔다. 78년 대학 4학년 때 그는 한국산악회 안나푸르나4봉 원정(대장 전병구)에 참가했다. 그 등반에서 1차 공격의 기회는 선배인 유동옥씨(크로니산악회)에게 주어졌고, 그는 지원조이자 2차 공격조였다. 그러나 C3(7,000m)까지 동행한 대원은 컨디션 저하로, 셰르파는 버너를 켜다 화상을 입는 바람에 내려가 등정 후 하산길에 비박하고 내려오는 공격조를 홀로 맞아야했고, C3를 철수하는 것으로 등반도 마쳐야했다.

▲ 90년 안나푸르나 남벽 베이스캠프에서 기념촬영한 어센트산악회 원정대. 앞줄 가운데가 전두성 대장.

90년에는 어센트산악회 원정대를 이끌고 안나푸르나 주봉에 도전했다. 87년 해외원정을 머릿속에 그릴 때는 대상지가 요세미티의 거벽이었으나 4봉 원정대장이었던 전병구씨의 권유로 대상지를 바꾼 것이다. “엘캐피탄 같은 거벽 등반에 대비해 인수봉 40피치 연장등반을 했어요. 홀링과 어센딩 연습을 많이 했답니다. 홀링색이 없어 플라스틱 박스를 잘라 배낭 겉에 대고, 직선 루트만 연결 등반했지만 경사가 죽다보니 끌어올리는 데 정말 힘들었어요.

 

이틀쯤 하고 나니 대원들 대부분 체력이 떨어지면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더군요.” 대상지가 히말라야로 바뀌면서 훈련방법도 바꿨다. 이듬해 겨울 한라산 서북벽에서 남벽을 잇는 나선형 등반을 하고, 매주 하중훈련에 중점을 두었다. 대원이 14명인 대규모 원정대를 위한 경비를 마련하는 일은 힘도 들었지만 재미도 있었다. 후원금과 대원 참가비로도 경비가 마련되지 않자 티셔츠를 만들어 팔고, 협찬 받은 장비를 팔기도 했다.


안나푸르나4봉 등정 한도 풀 겸해서 나선 원정이었건만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의욕이 넘쳐 너무 일찍 원정에 나선 게 무엇보다 큰 걸림돌이었다. 가을시즌이 시작되었는데도 몬순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C3(6,200m)를 구축한 뒤 보름이 넘도록 폭설이 퍼부었다. 그 눈이 결국 등반에 치명적인 눈사태를 일으켰다. “C3 상단의 거대한 스노돔이 반쪽은 루트를 쓸어버리고, 반쪽은 C2를 매몰시켜 버렸죠. C3 위에 데포시켜 놓은 빙벽 장비는 당연히 사라졌죠.”


다행히 캠프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어 인명사고는 피했다. 빙벽장비는 마침 베이스캠프를 방문했다 막 하산한 구소련 산악인들을 좇아 내려가 구입할 수 있었으나, 이중계약을 맺었던 사다가 도중에 떠나는 바람에 셰르파 통솔에 문제가 생기고, 대원들은 원정기간이 늘어지면서 점차 의욕을 상실해갔다. 결국 C4 직전 해발 6,800m 지점에서 원정을 접어야했다. 99일간의 원정이었다.


“부자지간일지라도 한 달 이상 여행하지 말라는 이탈리아 속담이 있죠. 그렇게 오래도록 산악회 생활을 함께 해왔는데도 시간이 흐를수록 갈등이 심해지더군요. 세대 차이, 고소와 환경에서 오는 의지력 저하 등등, 원정을 끝마치고도 몇 년간 대원들간의 갈등이 지속되곤 했으니까요. 이것도 한 단계 올라서기 위한 과정이라면 과정이겠지마는요.”

 
40년 동안 변하지 않는 벙거지에 청바지 차림

40년 가까이 산에 다녔으면 타이즈처럼 맵시 있거나 컬러풀한 복장을 갖추었을 법한데도 그는 도시에서 그렇듯이 바위 복장도 벙거지를 뒤집어쓴 채 청바지에 낡아빠진 남방이나 윈드재킷이 전부였다. 바위를 오르는 모습도 세련되지는 않았다. 저벅저벅 걷는 것 같았다. 이런 복장은 있는 그대로가 좋아서라고 했다.

▲ 95년 만장봉 정상에서 마라토너 황영조씨에게 하강법을 가르치는 전두성씨.

그는 산에 입문한 지 9년째인 76년부터 산악 지도자로서 활동을 해왔다. 76년 수도여자사범대학과 세종대학 산악부 지도강사를 시작으로 한국산악회 산간학교와 클라이밍스쿨 강사, 국립경찰대학 산악부 지도강사, 코오롱등산학교 강사·동계반 대표강사를 거쳐 1998년부터 2002년까지는 한국산악회 등산학교를 개설하고 운영을 책임져왔다. 2003년 한국산악회 등산학교와 인연을 끊으면서 새로 창립한 게 지금 그가 운영하고 있는 열림캠프 등산학교다.
 
그는 광운공대 통신공학과를 나와 83년부터 89년까지 당시 첨단기업인 삼보컴퓨터에서도 잘 나가는 개발팀과 신규사업 개설팀 등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히말라야 등반을 위해 과감하게 사표를 썼다. 그게 90년 안나푸르나 남벽 원정이었다. 귀국 후 계열사에서 몇 해 동안 근무했지만 모회사에서 근무하던 그에게 계열사의 환경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91년 퇴사 직후 그는 산악단체에서 행정가로서 10여 년간 일해왔다.

 

91년부터 2002년까지 한국산악회 안전대책위원장 겸 이사와 한국산악문화회관 관리책임역을 함께 해내면서 92년부터 98년까지 한국대학산악연맹 이사 겸 사무국장도 맡았다. 그 사이 산악박물관과 산악도서관을 개설하고 관리하는가 하면 산악정보 자료집을 발간하고, 그의 오랜 꿈이었던 산노래 책자 ‘산이야기’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와 더불어 열정을 다 받친 게 등산학교였다. 하지만 그는 코오롱등산학교도 그랬고, 한국산악회 등산학교도 주도 업체나 산악회와의 갈등 끝에 인연을 끝내야했다.


“산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지내온 나에게 모든 것 다 빼앗고 잠시 머물다 아무렇지도 않게 가버린 셈이다 싶었죠. 정말 화가 났어요. 지금은 괜찮아요. 그 덕분에 열린캠프가 탄생했잖아요. 인간만사 새옹지마란 게 바로 이런 거구나 싶어요. 그 동안 등산학교와 산악회로 인한 시련 역시 결국은 더 나은 단계로 올라서기 위한 또 하나의 과정이다 싶어지고요.”

▲ 93년 한국산악회 임원 모임에서 구인모씨 부부(좌우측), 손재식씨(왼쪽에서 두 번째)와 산노래를 연주중인 전두성씨.
한국산악회 등산학교 동문들의 후원금으로 강남 제1번지라 할 수 있는 서초동에 훈련센터까지 갖춘 열린캠프등산학교는 군인 경찰 대학생 신부 수녀 승려 등 참가하는 층이 다양하다. 잊혀져 가는 60년대 산악 스타들도 많이 이용하는 실내암장이기도 하다.

▲ 전두성씨는 등반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수련과정이라고 말한다.

“저는 등반을 참인간이 되기 위한 수련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쾌락적인 데 너무 탐닉하다보면 목적으로 착각할 수 있어요. 등반을 두고 무상의 행위니 숭고한 행위니 하는 표현에 대해 동조하지도 않는답니다. 레저나 스포츠화하는 경향도 못마땅하고요. 등반은 어디서건 죽음이 상존하는 행위잖아요? 등산학교는 산에서의 위험을 일깨워주고,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역할을 해내야한다고 생각해요. 산이 주는 가치, 알피니즘이라는 모험을 일깨워줌으로써 인간의 역할을 다시 한 번 인식시켜주는 역할도 해야겠고요.”


그는 철저한 원칙론자이면서도 산은 자유로워야한다고 말한다. “교육생들이 등산학교를 통해 사회에서 쌓인 스트레스나 콤플렉스를 풀고, 또 세상이 살만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아가는 모습을 보면 정말 즐거워요. 등산학교 교육도 참가자의 자유로움에 근저를 두고 있어요. 제시하되 강요하지 않으며, 스스로 깨닫게 도와주는 역할만 하는 거죠. 동문산악회를 만드는 것도 반대예요.

 

산악회를 조직하다보면 틀을 갖추고 유지하려 애쓰게 되고, 그러다 보면 본말이 전도되는 경우가 많죠. 무엇보다 배타적으로 변한다는 게 나쁜 점이고요.” 그는 등반은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자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자기수련과정이라 일컫는다. “원정이 끝나고 날 때마다 많은 것을 깨닫곤 했답니다. 등산학교도 그렇고 산악문화회관을 그만둘 때도 그랬어요. 세월이 지나고 나니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나 자신에 대해 많은 면을 되돌아보면서 반성하곤 한답니다. 섭섭했던 점도 많지만 나 스스로 잘못한 것도 많지 않았나 생각도 하고요. 스스로 발전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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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슬랩 2번 코스와 검악B 코스를 거쳐 기존B 코스로 진입한 전두성씨 조는 아미동 상단에서 일행
          10명과 모두 합류한 다음 정상까지 신속하게 밀어붙였다. 오전 10시, 등반 시작 후 4시간이 지났
          다. 그는 “군인의 목표가 전투나 전쟁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 총을 쏘는 것이듯 초기엔 등
          반 자체가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등반의 목적은 인간정신 추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산은 자연의 한 자락이랍니다. 역으로 저는 그 산을 통해 자연을 깨닫고 있는 거죠. 알피니즘은 산을 통해 모험을 추구하고, 자아를 찾는 수단인 것 같아요. 아무튼 산은 참 좋은 것 같아요. 무한한 꿈을 주지요, 도전의 기회도 주잖아요. 언젠가 ‘신선도’를 보면서 문뜩 깨달은 게 있어요. 절벽 위 너럭바위에 신선 두 사람이 앉아 장기를 두고, 동자는 차 심부름을 하는데 그 아래선 필부가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는 그림이었죠. 제가 그 신선처럼 살아온 게 아닌가 싶어요.”



/ 글 한필석 차장대우  /사진 허재성 기자  /월간산 [454호] 20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