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이 클라이머의 삶] 박희영씨 *-

paxlee 2007. 8. 18. 21:39
 
                    [이 클라이머의 삶]
       네파 탈레이사가르-조긴 원정대 박희영 대장
 

박희영씨(朴喜英·38·알펜그로우 대표)-. 그가 재난구조대 대원들로 이루어진 네파(NEPA) 원정대를 이끌고 한국팀들이 10차례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해결하지 못한 인도 히말라야의 난벽 탈레이사가르(6,904m) 북벽과 조긴(6,465m)에 도전한다.

“탈레이사가르는 7월8일 세계9위 고봉인 낭가파르밧 등정에 성공한 구은수 대원과, 등반경험이 많은 서우석 형을 주축으로 등반하게 될 겁니다. 대원들이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젊은 패기가 넘치고 여러 해 동안 쌓아온 팀웍으로 밀어붙인다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8월20일 출국할 후발대는 스키를 타고 북서릉을 통해 조긴 정상에 도전할 겁니다.”

탈레이사가르는 한국 산악계의 과제로 남아 있는 봉이기도 하지만, 박희영씨 개인적으로도 한이 많은 산이다. 98년 가을 북벽 등반을 마치고 정상 설원을 오르다 추락사한 신상만·최승철·김형진씨가 절친한 산우들이었기 때문이다.

“원정을 결정짓기 전 승철이 아내인 김점숙씨와 형진이 형인 형일씨한테 양해를 구했습니다. 이번에는 우리 구조대가 도전해보겠다고 말입니다. 그런 인연을 떠나서라도 탈레이사가르는 산꾼이라면 오르고픈 욕심이 생기는 봉입니다. 특히 북벽은 볼 때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드는 거벽이니까요. 이번 등반에서 세 산우들의 한을 풀어주고 싶습니다.”

스포츠클라이밍·루트세터 1세대

사실 박희영씨가 대장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적잖은 이들이 의아해했다. 무엇보다 대장을 맡기에는 체격 조건이 어울리지 않아서다. 그러나, 선배에게 깍듯하면서도 후배들에게 너그러운 성격을 지닌 데다 어린 시절부터 열정적으로 펼쳐온 등반 활동으로 볼 때 대장 자격이 충분하다는 게 그를 잘 아는 이들의 중평이다.

이미 고교시절 전국등반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바 있는 그는 스포츠클라이밍 1세대이자 루트세터 1세대로 꼽힐 만큼 등반 경력도 오래 됐고 기량도 뛰어난 클라이머다. 그런 그에게 작고 가벼운 체격은 어린 시절부터 핸디캡으로 따라다녔다. 84년 동양공고에 진학, 산악부에 들어갔을 때도 그랬다. 선배들은 동기인 주광인은 늘 함께 인수봉을 오르면서 희영에게는 텐트나 지키면서 기다리라고 했다. 몸이 약해 보여 한두 번 나오다 그만두려니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키는 160cm 정도로 비슷하지만 몸무게는 지금의 53kg보다도 4~5kg 덜 나가는 체격이었으니 산에 다니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도 저는 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인수봉처럼 큰 바위는 아니더라도 캠프장 주변에 널려 있는 바위에서 등반을 즐길 수도 있었고요. 그래서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산행에 참가했죠.”

▲ 인수봉 남측에 개척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등반하는 박희영씨.(왼쪽) 도쿄 월드컵을 마친 뒤 찾은 푸라고야마 암장.(오른쪽)

악착같이 바위에 붙었다. 가르쳐주는 이도 거의 없었지만 가능한 선이다 싶으면 올라붙었다. 방학이면 아예 북한산 백운산장 뒤편 능선에 텐트를 쳐놓고 살다시피 했다. 그렇게 칼을 갈고 닦은 희영이 인수봉 정상에 처음 올라선 것은 2학년 2학기 동기 주광인씨와 함께 해낸 비둘기길 등반이었다. 인수봉 루트 중 비교적 쉬운 길이었지만 뭐가 뭔지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정상에 올라서서 백운대를 마주보고, 산 아래 서울시를 내려다보는 순간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밀려들었다.

박희영의 등반력은 고교 3학년 때 부각되었다. 북한산 족두리바위 맞은편의 코끼리바위에서 전국암벽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희영은 선배들에게 대회에 나가면 어떻겠냐고 슬쩍 물어보았다. 대답은 나가봤자 결과가 뻔한데 뭐 하러 나가냐는 투였다.

그러나 그는 학교에서 1주일간의 훈련기간을 허락받아내어 경기 루트인 코끼리크랙에 매달리고 매달린 끝에 결국 고등부 우승을 차지했다. 선배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결과였고, 그제야 선배들은 박희영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 희영은 바위에만 가면 신날 수밖에 없었다.

▲ 아마다블람 정상에서 거리회 깃발을 펼쳐들고 있는 박희영씨.(위쪽) 가셔브룸1봉 아이스폴 지대.(아래쪽)
“정말 미친 듯이 등반했습니다. 같은 루트라도 매번 다른 스타일로 등반했습니다. 물론 그 때마다 한 단계 높은 기술이었죠. 마침 프리클라이밍 붐이 한창일 때였죠. 그런 영향을 받은 선배들은 등반할 때 볼트를 절대 못 잡게 했답니다. 다른 산악회 회원들은 볼트를 잡거나 밟으면서 쉽게 오르는데 말이죠. 또 확보물이 안전하다 싶은 루트만 나타나면 선등을 서게 했습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등반한 게 보약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여러 해 동안 꿈꿔오던 전국 암장순례에 나섰다. 프리클라이밍 붐이 한창 무르익던 80년대 중반, 경남 일원에는 고난도 하드프리 루트가 많이 개척되고 있었고, 이근택, 임두학, 유재경 등 국내 최고수의 기량을 지닌 클라이머들이 많았다.

“반 년 동안 해병대볼더, 꼬시락바위, 무명암, 대륙암 등 마산과 부산 등지에 있는 이름난 바위란 바위는 다 찾아다녔죠. 당시 서울 일원의 암장에서는 접할 수 없을 만큼 어렵고도 재미있는 바윗길들이었습니다. 바위에 붙어 지내기만 하면 최고의 바위꾼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이근택 선배를 통해 평소에도 끊임없는 트레이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니까요.”

서울로 돌아와 며칠 쉰 다음 인수봉으로 향했다. 곧 암장순례를 다녀오기 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길을 읽는 눈이 좋아지고, 루트에 맞는 등반방식이 곧바로 떠올랐다. 6개월간의 순례가 등반기량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 것이다.

88년 월출산에서 열린 전국암벽대회에서 3위에 입상하면서 희영은 서울 지역을 벗어나 전국구 클라이머로 부각되었다. 대회 이튿날 보충역으로 입대한 희영은 안양의 모 예비사단에서 근무하면서도 휴일이면 바위를 찾아다녔다. 그리곤 제대하자마자 또다시 암장순례에 나섰다. 이번에는 일본의 조가사키 해벽 투어였다.

“매끄러운 바위가 있는가 하면, 칼로 베어낸 듯 날카로운 바위도 많이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는 직벽 루트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조가사키에는 오버행이나 아예 천장을 거쳐야하는 루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죠. 서커스나 신데렐라 보이 같은 길은 국내에 없는 5.12bc~5.13a급 루트였고요.”

서울시연맹 구조대 입회 후 고산도 접해

▲ 지난 겨울 천화대 암릉에서 훈련등반 중인 박희영씨.
비록 열흘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으나 희영은 큰 경험을 쌓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인수봉 남측에 5.12c급 페이스 루트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개척할 수 있었다. 길이는 10여m에 불과하지만 작은 홀드를 레이백 자세로 잡아당기면서 언더크랙으로 진입한 다음 상단의 포켓홀드에 손가락을 넣어야 등반이 끝나는, 지금까지도 완등해낸 사람이 몇 안 될 정도로 어려운 바윗길이다.

“조가사키를 다녀오기 전까지는 그런 페이스에 길을 낸다는 건 상상도 안 되었죠. 선운산 암장과 간현암에 하드프리 루트가 많이 생기면서 찾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저 역시 해본 지 오래 되었고요. 아마 지금 제 실력으론 어림도 없을 겁니다. 그 때는 군생활하느라 등반을 더욱 열심히 하지 못한 게 아쉬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고 이름을 지냈는데, 또 그런 시간이 많이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그는 91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스포츠클라이밍 월드컵대회에서 다시 한 번 세계 수준의 클라이머들과의 격차를 경험하고, 외국 선수들의 진지함과 도전 자세에도 감탄했다. 대회가 끝난 다음에도 실패한 루트에 재도전하는 모습은 그에게 진정한 클라이머가 되려면 얼마나 몰입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해주었다.

대회를 마치고 또다시 나선 일본 암장순례를 통해 여러 암질의 암장과 고난도 루트를 경험한 그는 이후 선수보다는 루트세터로서 대회에 참가하곤 했다. 우연찮은 기회에 프랑스 국가대표 코치들의 세팅 교육에 참가해보곤 세팅도 나름대로 재미있는 일이다 싶었다.

“아시안컵은 1회부터 3회 대회까지 연속으로 세팅했습니다. 이후 국내대회 세팅을 했고요. 참가선수 중 몇 명이 완등하고, 몇 명은 떨어지게 한다는 계산을 하곤 길을 만든답니다. 결선루트는 단 한 명만 오를 수 있게 만들지요. 그게 딱 맞아떨어지면 정말 기분이 좋아요. 물론 도중에 다 떨어지거나 한 지점이 너무 어려우면 선수들과 관중들에게 욕을 먹게 되지만요.”

박희영은 94년 서울산악조난구조대에 들어가면서 산행의 폭이 한층 넓어진다. 거리회 선배이자 당시 구조대장인 장봉완씨(서울시연맹 부회장)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거리회는 동양공고 산악부 산행 때마다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산악회였고, 그로 인해 동양공고 산악부 출신들이 거리회에 들어가는 게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는 구조대 입회 이듬해 파키스탄 히말라야의 가셔브룸1봉(8,068m) 원정에 참여하는 행운을 얻는다.

▲ 아마다블람 캐러밴 중 설봉과 설릉을 배경으로.
“유학재 형이랑 함께 트랑고에서 몸담고 있을 때 늘 회사 이름과 똑같은 트랑고타워를 언젠가 도전해보자고 약속하곤 했었죠. 그 꿈이 부근에 있는 더 높은 고봉으로 바뀐 셈이었습니다. 아무튼 매일 바위에만 붙어 지내 고산에서 잘 적응할까 걱정했는데 뜻밖에 괜찮았습니다. 그래서 해발 7,300m인 마지막 캠프까지 오르긴 했는데, 등정은 시도조차 못했답니다. 짙은 안개가 벗겨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장봉완 대장의 철수 지시가 떨어졌으니까요.

별별 일 다 겪은 등반이었습니다. 먼저 하산하다 크레바스에 빠진 대원이 무전기로 구조요청을 했는데, 가까이 있던 슬로베니아팀 닥터가 구해내려다 그 역시 크레바스에 빠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으니까요. 며칠 앞서 정상에 오른 슬로베니아팀 대원이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 모습은 정말 환상적이더군요. 그래서 스키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죠.”

당시 박희영씨는 암벽화와 장비 전문제조업체인 트랑고스포츠에 재직 중이었다. 그런데 직장 선배이자 산 선배인 유학재씨 역시 가셔브룸4봉(7,925m)을 등반 중이었다. 작은 규모의 업체에서 직원 두 사람이 동시에 여러 날 자리를 비우게 한다는 게 쉬운 일일 리 없건만 당시 사장인 고 홍성암씨는 두 사람의 등반 열정을 높이 사주어 원정에 참가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박희영씨는 96년 한순분씨(35)와 결혼한 후 여러 해 동안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에 충실하기 위해 산과 조금 거리를 두며 지냈다. 아비가민-무쿠트파르밧 원정 등 고산등반의 기회도 포기했다. 그러나 4년쯤 지나자 열정이 다시 살아나 견딜 수 없었고, 이를 눈치 챈 거리회 선배들은 아마다블람 원정에 그를 끌어들였다. 2000년 늦가을이었다.

“너무 너무 좋았습니다. 흰 산을 오른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으니까요. 오랜만의 원정이라 걱정도 많이 했는데, 다행히 고소적응도 잘 되었습니다. 함께 정상에 오르기로 한 후배들이 도중에 컨디션이 나빠지자 포기하는 바람에 셰르파와 둘이서 정상에 올랐죠. 에베레스트, 로체, 초오유 등 고봉들이 바로 앞에 솟아 있더군요. 바람이 정신을 쑥 빼놓기는 했지만 살아있다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었습니다.”

박희영씨는 2003년 4월 10년 가까이 다니던 트랑고스포츠를 그만두었다. 그리곤 대전으로 생활터전을 옮겼다. 남한땅의 중심인 대전에서 등산장비를 만들어 팔면 성공하리라 믿었다.

“미싱으로 만드는 제품은 다 만들었습니다. 특히 바지가 주 아이템이었죠. 생각처럼 되지 않더군요. 낯선 지역이라 예상치 못한 걸림돌도 많았고요. 그래서 1년 반쯤 지나 다시 살던 곳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박희영씨는 2004년 11월 부천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 알펜그로우라는 브랜드의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예전에 치중하던 제조업 대신 인권비가 비교적 저렴한 중국의 공장에서 생산해낸 소품 위주의 제품들을 국내에 공급하는 일이다.

“산은 내 인생의 활력소입니다”

▲ 가셔브룸1봉 훈련등반 중 오른 한라산 백록담.
용두동 실내암장인 서울클라이밍센터에서 인연을 맺은 한순분씨와 성은(딸·초교 4년)과 정우(초교 2년)를 키우며 단란한 가정을 이끌고 있는 그는 이번 원정을 결정하는 데 고민이 많았다.

“선배들이 많은 상황에서 대장을 맡아야한다는 부담도 컸지만, 사업이 이제 겨우 자리 잡아가는 상황에서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운다는 게 아무래도 가장 큰 걱정이었습니다. 파트너 업체측에서도 의아해했고요. 돌아오면 더욱 열심히 일해야겠죠. 두 달간 못한 일까지 하다보면 몸무게가 더 줄지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이네요(웃음). 등산은 참 묘한 스포츠입니다. 몸이 파김치가 되도록 산행하고 나면 사회생활도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니 말입니다. 한 피치든 정상이든 목표로 삼고 산을 다니다 보니 사회생활에서도 목표가 정해지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산은 제게 큰 활력소가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7월25일 출국을 보름쯤 앞두었을 때에도 박희영씨는 이미 원정에 돌입해 있었다. 수시로 대원들에게 맡겨놓은 일을 확인하고, 또 선배들의 주문을 받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런데도 얼굴에는 늘 미소가 넘쳤다.

“여러 해동안 일에 시달리며 지내다보니 하고 싶은 등반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남들이 생각할 땐 저 정도면 바위를 실컷 했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늘 미련이 남습니다. 특히 예전에 가볍게 오르던 길에서 자세가 나오지 않을 때면 정말 갑갑해집니다. 더 열심히 했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가 들면서 말이죠. 이번 등반에는 정말 열심히 할 겁니다. 다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좋은 선후배들끼리 나선 등반인지라 잘 될 겁니다. 한 번 믿어 보십시오.”


  - 글 : 한필석 기자 / 월간 산 [442호] 2006.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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