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한국 히말라야 원정대 [9-1] (1991년)*-

paxlee 2007. 9. 29. 10:42

다변화되어 가는 한국의 해외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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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은 한국의 해외원정사상 가장 많은 팀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소련, 중국 지역의 개방으로 그 활동 무대가 한층 넓어진 한 해였다. 전부 35개에 달하는 한국원정대가 세계 각지의 고산에서 등반활동을 펼쳤다. 그중 히말라야 지역이 22개 팀으로 가장 많은 수를 기록했는데, 네팔 지역으로 9개 팀, 파키스탄으로 5개 팀, 중국 지역으로 3개 팀, 그리고 소련 파미르 지역으로 5개 팀이 진출했다. 이 원정에 참가한 인원은 모두 171명에 달했다. 새로 개방된 중국 지역은 시샤팡마와 초오유에, 그리고 전년도에 개방된 소련 지역은 코뮤니즘, 레닌, 코르제네프스카야에 원정대가 집중되어 91년도 고산원정대 증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다섯 번째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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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 히말라야 지역으로의 고산원정은 중국과 독립국가연합의 개방 덕에 활동 영역이 다소 넓어졌으나 아직도 네팔히말라야 원정이 가장 많은 수를 기록했다. 전부 24개 팀 중에서 91년의 첫 원정을 기록한 것은 봄시즌에 네팔히말라야로 진출한 에베레스트 남서벽원정대와 아피원정대 등 2개 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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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에베레스트 남서벽원정대

한국산악인에게 네 번의 실패를 안겨준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다섯 번째 도전장을 던진 팀은 전국합동원정대였다. 한국산악회 이사인 이강오대장(48)과 정우섭부대장(44)이 대부분의 경비를 부담함으로써 성사된 이 원정대는 남선우등반대장(36)이 중심이 되어 허정식(36), 정광식(35), 최태식(31), 조광제(29), 이상록(29), 박영석(28), 김진성(27), 구경모(27), 김석준대원(25) 등 모두 12명이 참가했다.
▲ 91년 3월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목표로한 한국합동대가 가모우백을 점검하고 있다.

4월 1일 쿰부빙하에 들어온 원정대는 5일에는 제1캠프, 7일에는 6,450미터 지점에 2캠프를 설치하고 전진 베이스캠프로 삼았다.
이어서 본격적으로 남서벽 공략에 나선 이들은 15일에 세 번째 캠프 예정지(6,950m)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4캠프를 향해 루트공작을 시도하던 박영석 대원이 강풍에 균형을 잃고 100여 미터를 추락, 안면 골절상을 입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등반은 그가 헬기로 후송되던 18일까지 중단되었다.
박대원의 사고로 침체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대원들은 루트공작을 계속해 4월 23일에는 7,600미터 지점에 4캠프를 설치했다. 이어서 28일에는 5캠프 지점(8,300m)까지 고정로프를 설치한 뒤 정상공격조로 남선우등반대장과 김진성대원, 그리고 앙체링셀파를 결정했다.


4월 30일 2캠프를 떠난 공격조는 하루에 4캠프까지 올랐고, 다음날 5캠프 지점까지 올랐으나 그곳에는 텐트칠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일행중 셀파는 등반을 포기하고 내려가버렸고 두 대원은 하켄에 확보된 채로 텐트를 뒤집어쓰고 비박을 감행했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까지 버티던 두 대원은 이미 기력이 쇄진해버렸다. 눈이 녹으면 다시 올라올 것에 대비해서 산소통과 침낭 등을 두고 내려왔으나 등반은 그것으로 끝났다. 그들이 2캠프까지 내려왔을 때에는 날씨가 매우 나빠지고 있었고 대원들은 몹시 지쳐 등반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이로써 에베레스트 남서벽은 여전히 한국산악인들에게 큰 과제로 남게 되었다.


 

네팔 서부 첫진출, 아피봉 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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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아피원정대



봄시즌에는 국내 최초로 네팔히말라야 서쪽 끝에 있는 아피(7,132m)봉에 도전장을 던진 한국 원정대가 있었다. 아피봉은 안나푸르나 등반의 기점인 포카라로부터도 36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고 네팔과 인도의 국경 아피-남파 산군의 주봉이다. 산의 이름은 티베트어로 ‘조모(할머니)’란 뜻이다. 최초의 본격적인 등반은 네팔 개방 이후인 1954년 이태리팀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 산의 북면으로 접근한 이 팀은 정상공격 도중 두 대원을 잃고 패퇴했다. 이후 이 산은 60년 5월 일본대가 초등정에 성공했다.
이 산에 도전한 최초의 한국 아피원정대는 이태연대장(31), 이영주(30), 손동수대원(22) 등 단 3명으로 이루어진 초경량 원정대였다.
이들 중 이대장은 카트만두에서부터 등반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인원은 2명인 셈이었다.
2명의 대원은 10명의 셀파, 그리고 36명의 포터를 고용해 버스 한 대로 3박 4일을 달려서야 네팔의 서쪽 도로마저 끝나는 곳에 이르렀다.

 

이곳부터는 외국인이라고는 몇 년에 한 번씩 지나가는 원정대뿐인 오지의 카라반 길이었다.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캬라반에 26일을 소요했다는 기록도 있었으나 다행히 도로사정이 좋아져 8일 만에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두 대원은 10일 만에 어렵게 제2캠프를 구축했으나 식량은 거의 바닥나고 있었다.
5월 20일, 2캠프에서 정상공격을 시도하려 했지만 악천후로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27일 아침 7시, 손동수대원과 셀파 2명은 1캠프를 떠나 정상을 향했다. 이들은 11시경 눈에 묻혀버린 2캠프를 지나 크레바스지대를 돌파하고 오후 4시경 눈보라 속에서 마침내 정상에 섰다. 그곳에서는 폭풍설이 심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일행은 서둘러 하산해야 했다.

 
파키스탄 가셔브룸 2봉에 9명 등정
성균관대 가셔브룸 2봉원정대
대산련 울산지부 가셔브룸 2봉원정대

▲ 정상에선 유석재 김수홍대원

91년 파키스탄히말라야로 진출한 한국대는 모두 5개 팀이었는데 그중 가셔브룸 2봉에 2개 팀과 낭가파르밧에 도전한 2개 팀 등 8천미터급 원정대가 4개 팀이었고, 나머지는 파이유(6,610m)에 도전한 6천미터급 원정대였다.


가셔브룸 2봉(8,035m)은 카라코룸에서도 발토로산맥에 위치한 가셔브룸 그룹, 즉 1봉에서 6봉에 이르는 봉우리 중에서 두 번째 고봉이다. 이미 89년에 성균관대원정대(대장 김홍기)가 시도했다가 패퇴한 바 있는데 2년 만에 성대팀이 재도전에 나섰고, 대산련 울산지부에서도 출사표를 던져 2개 팀이 같은 시즌에 함께 등반하게 되었다.


6월 4일 먼저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성대팀은 한상국대장(43)의 지휘아래 김창선(31), 김수홍(25), 유석재대원(22) 등 4명으로 구성된 조촐한 팀이었다. 이들 중 김창선대원은 K2, 에베레스트 등을 등정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6월 8일 제1캠프(5,900m)에 진입한 성대팀은 16일에는 일명 ‘바나나리지’를 돌파해 능선상의 펑퍼짐한 곳에 2캠프(6,500m)를 설치했다. 곧바로 3캠프를 향해 루트공작에 들어갔으나 날씨가 나빠져 일주일이나 베이스캠프에 머물러야 했다.


이때 울산팀이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6월 13일 전대원이 스카르두에서 캬라반을 개시, 12일 만인 25일에 도착한 것이다. 울산팀은 송정두대장(33·울산지부 구조대장)을 비롯한 이용순(25·진산악회), 한영준(29·산울림), 조재철(27·현대중공업), 장상기(26·로타리), 권순두(25·진산악회), 박을규(25·울산), 정인규대원(26·현대정공) 등 8명으로 구성된 합동대였다. 이들은 발토로빙하의 퇴석지대를 피해 카라코룸원정대로는 최초로 간도고라 패스를 넘어 가셔브룸 산군으로 들어왔다. 6월 26일에 제1캠프에 도착했고, 7월 2일에는 2캠프를 설치했다.


한편 성대팀은 6월 28일 3캠프(6,900m)를 설치하고 30일에는 강풍을 뚫고 정상부 피라밋 밑에 마지막 캠프인 4캠프(7,350m)를 설치했다. 그리고 7월 12일 정상공격을 위해 4캠프에 올랐으나 강한 눈보라로 포기하고 내려왔다. 성대팀이 7월 18일 두 번째 정상공격을 위해 4캠프로 올라갔을 때 울산팀은 3캠프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다음날 울산팀이 4캠프로 진출하는 동안 성대팀은 정상공격에 나섰다. 새벽 4시 한대장을 비롯한 전대원이 강풍 속에서 정상을 향했다. 남동콜을 올라 나이프리지를 통과해 오전 9시 제일 먼저 정상에 선 것은 김창선대원이었다.

 

그로부터 3시간 뒤인 12시에 한대장과 나머지 두 대원이 정상에 섬으로써 이들은 한국 히말라야 등반사상 최초로 전대원이 8천미터봉 정상에 서는 기록을 세웠다. 한편 성대팀의 4캠프를 물려받은 울산팀은 다음날인 5월 20일 한영준, 박을규, 조재철, 장상기, 이용순 등 5명의 대원이 등정을 시도, 모두 정상에 오르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들도 국내 히말라야 등반사상 가장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정상에 오른 기록을 남겼다.


 

낭가파르밧 등정발표와 그 의혹

한국-홍콩 합동 낭가파르밧원정대
울산 현대공고OB 낭가파르밧원정대



한편 전년도에 이어 두 한국대가 낭가파르밧 국내초등을 노리고 디아미르에 들어왔다. 한 팀은 은정산악회가 주축이 된 한국-홍콩합동대였고 다른 하나는 울산의 현대공고OB산악회팀이었는데 둘 다 서면 킨스호퍼루트를 등반루트로 택했다. 이들 두 팀은 6월 3일 같은날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김형주대장(35)이 꾸린 한국-홍콩합동대는 백중현(47), 원우연(30), 맹상원(28), 이관호(28), 구한회(28), 이병남(24), 박진석대원(28) 등 은정산악회원으로 이루어진 8명의 한국대원과 곽감홍부대장(31)을 비롯한 4명의 홍콩산악인이 참가했다.

 

이들 중 히말라야 등반 경험자는 88년에 낭가파르밧에 도전했다가 6,100미터에서 패퇴한 바 있는 김대장뿐이었다. 최초로 홍콩산악인과 합동으로 꾸린 이 원정대는 4,200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후 계속되는 폭설과 이상기온으로 40일 이상을 고전한 끝에 7월 16일 1,500미터에 이르는 급경사 암설지대를 돌파해 2캠프(6,300m)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낭가파르밧 디아미르벽에서 가장 어려운 구간을 통과한 원정대는 여세를 몰아 7월 30일 3캠프(6,900m)를 설치했고, 8월 4일에는 7,500미터 지점에 네 번째 캠프를 설치하면서 정상공격 준비를 마쳤다.


이어서 8월 6일 새벽 4시경 김대장과 홍콩인 곽감홍부대장, 창푸이룬대원이 정상공격에 나섰다. 이들은 그러나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쳐나가느라 체력을 많이 소모한 데다가 루트 파인딩에 시간을 허비해 7,900미터 지점에서 되돌아섰다. 4캠프로 돌아온 3인은 알파미 1봉지를 나누어 먹으며 악천후 속에서 3일간을 버틴 끝에 8월 9일 저녁 7시 30분 두 번째 정상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이들은 밤새 등반한 끝에 정상에 올랐다고 발표했다.


88년 이래 한국인에게 6차례나 패배를 안겨주었던 낭가파르밧 등정소식은 91년도 히말라야 등반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성과로 꼽혔다. 그런데 이 놀랄 만한 등정에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간 한국원정대의 등정 의혹이 주로 외부로부터 제기되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함께 등반에 참여했던 대원들이 등정을 부인하고 나섰다. 대원들이 김대장 일행의 등정을 믿지 않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등정한 홍콩인들의 체력과 고소적응 상태가 다른 한국대원들보다 못했는데도 1차 공격 실패 후 하산하지 않고 7,500미터 고도에서 3일간이나 머물고도 다시 정상공격을 했다는 점. 둘째, 정상 200미터 전부터 정상을 다녀올 때까지 전혀 무선교신을 하지 않은 점. 셋째, 굳이 야간등반을 택해 확실한 정상 사진을 만들지 않은 점 등이 그것이었다. 한편 이들과 함께 낭가파르밧에 도전했던 울산 현대공고산악회원정대는 이동원대장(28), 정봉화(27), 김재희(25), 강동중대원(25) 등 4명으로 구성되어 등반에 나섰으나 디아미르벽 2캠프(6,300m)를 설치하고 고전하다가 7월 20일 포기하고 말았다.

 

파이유에서 역부족으로 패퇴

포항제철산악회 파이유원정대



91년에 파키스탄으로 진출한 한국대 중 유일하게 8천미터급 원정대가 아닌 팀은 파이유(6,601m)에 도전장을 낸 포항제철산악회팀이었다. 파이유봉은 카라코룸 발토로산맥 서쪽 끝에 여러 개의 위성봉을 거느리고 있는 암봉으로 산명은 발티스탄어로 ‘암염’을 의미한다. 이 산은 74년 미국대, 75년프랑스대가 도전했으나 실패하였고 76년 7월 20일에 파키스탄 육군팀에 의해 초등정되었다.


남영모대장(25)을 비롯한 하성해부대장(24), 전경화(23), 박상백(25), 함희진(21), 이혁재(20), 김태현(25) 등 7명 대원 모두가 20대로 이루어진 이 팀은 6월 19일 해발 4,000미터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22일 본격적인 등반에 나선 이들은 그러나 당초 예상과는 달리 파이유가 수직의 암벽으로 이루어져 고도의 등반기술을 요하는 거벽임을 알게 되었다. 사전에 정확한 자료나 정보가 없이 택한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이 시즌에 파이유에 도전한 팀은 한국대뿐이어서 원정대는 단독으로 루트를 개척해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몇 번이나 등반루트를 수정한 끝에 원정대는 공격조를 남벽과 동벽으로 나누어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7월 11일 남벽 팀은 5,300미터 지점까지, 그리고 동벽팀은 5,200미터 지점까지 올라가 비박을 했다. 그러나 다음날 두 팀이 각기 능선에 올라서보니 어느 쪽도 주봉과 연결된 루트가 아니었다. 그곳에서 바라본 주봉쪽은 급경사의 암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여기서 두 공격조는 더이상 등반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후퇴를 결정했다. 이미 체력과 식량이 떨어진 이들에게 이것이 마지막 등반이 되었다.

 

한국 5개대, 파미르 3고봉 등정 러시


한국대학산악연맹 코뮤니즘원정대
서울대 총산악회 코뮤니즘원정대
대산련 충북연맹 레닌원정대
포철산악회 코뮤니즘원정대
청맥산악회 레닌원정대

▲ 정상에선 대원

소련 지역 진출 3년째를 맞은 한국산악계는 파미르 국제캠프에 대거 진출, 등정 러시를 이루었다. 89년 대산련합동대가 소련 지역에 첫 진출을 기록한 이래 90년에는 코뮤니즘에 6명, 코르제네프스카야에 2명이 등정했고 이어서 3년째를 맞는 91년 여름에 5개 팀에서 50여 명이 몰려 레닌봉(7,134m)에 4명이 한국초등을 이룩한 것을 비롯, 코뮤니즘(7,495m)에 7명, 코르제네프스카야(7,105m)에 6명이 등정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처럼 파미르 지역 원정대가 늘어난 것은 1974년부터 매년 여름 소련 스포츠위원회에서 개최한 ‘인터내셔날 캠프’ 덕분이었다. 외국인을 위해 마련된 이 캠프는 다른 히말라야 지역과 같이 입산허가를 받는 번거로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저럼한 경비와 짧은 일정만으로도 7천미터급 고봉을 오를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한국산악인들로서는 그동안 이념의 장벽에 막혀 감히 근접할 수 없었던 소련의 산을 등반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파미르 지역의 최고봉이자 소련 최고봉인 코뮤니즘은 한국대학산악연맹팀(대장 손인환)의 조동영(25·서울시립대), 차진철대원(25·경북산업대)과 포철산악회팀(대장 이동연)의 김규영(31), 김대우대원(25), 그리고 서울대 총산악회팀(대장 구경모)의 구경모(27), 김극섭(23), 최영성대원(22) 등 모두 7명이 보로도킨루트로 7월 27일 등정에 성공했다. 그리고 코르제네프스카야에는 포철산악회팀의 이동연(34), 이인(26), 강현두대원(25) 등 6명이 7월 18일에, 대학연맹의 김종규(25·건국대), 이남기(25·한양대), 이임영대원(25·단국대)이 7월 26일에 올랐다.


또한 대산련 충북연맹팀(대장 조상구)의 조만수(32), 김성기대원(31), 그리고 청맥산악회팀(대장 홍옥선)의 박재순(28), 이현옥대원(여·28)이 8월 11일 합동으로 레닌봉을 올라 국내초등을 기록했다. 이들 중 이현옥대원은 소련의 7천미터급 고봉을 등정한 최초의 한국여성이 되었다.
한국의 91년도 파미르 원정은 3개봉에 17명의 등정자를 배출하는 풍성한 기록을 냈지만 전년도에 등반한 노멀루트를 답습하는 데 그쳐 질적으로는 미흡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들의 등정으로 한국은 이제 소련에 있는 7천미터급 산 중에서 천산산맥에 위치한 포베다(7,439m)와 칸텡그리(7,010m)만 남겨두게 되었다.


 

죽의 장막 걷히고 첫 중국 고산 등정

서원대 무즈타그 아타원정대



91년은 파미르 지역에서 7천미터봉 등정 러시와 아울러 그동안 죽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중국 고산을 첫 등정하는 쾌거가 잇다른 해였다. 그동안 한국산악인들은 여러 차례 중국등산협회(CMA ; Chinese Mountaineering Association)에 에베레스트나 초오유, 혹은 시샤팡마 등의 8천미터급 고봉 등반허가를 신청했었으나 북한과의 관계를 중히 여긴 중국측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해 왔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 중국정부가 한국과의 경제교류를 확대하면서 산악인들에 대해서도 입산을 허가키로 결정한 것이다.

▲ 91년 7월, 국내 최초로 중국의 고산원정길에 나선 서원대산악회팀의 카라반. 신강위그루의 광활한 고원 뒤로 무즈타그 아타(7,546m)가 솟아있다.

가장 먼저 중국산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충북 서원대의 무즈타그 아타원정대였다. 마침 무즈타그 아타에서 7월에서 8월까지 중국등산협회가 주최한 국제등산제가 있었는데 일본에서 3개 팀, 스페인과 한국에서 각 1개 팀이 참가하여 등반활동을 펼쳤다. 결과는 한국대 2명을 비롯하여 5개 팀에서 모두 24명이 등정에 성공했다.


무즈타그 아타(Muztag Ata)는 오래전부터 알려진 산이다. 1894년에는 스웨덴의 헤딘이, 1900년에는 영국

의 스타인이 등정을 시도한 바 있고 1947년에는 영국의 유명한 탐험등

가 쉽톤과 틸만이 정상 근처에서 후퇴한 후 56년에 중국-소련합동대가 무려 31명의 대원 전원을 등정시킨 산이다. 산의 이름은 터어키어로 ‘무즈’는 얼음, ‘타그’는 산, 그리고 ‘아타’는 아버지란 뜻이 합쳐져 ‘빙산의 아버지’란 의미이다.


김진기대장(47)을 비롯해 지현옥등반대장(여·30), 이기태(25), 장철기(25), 박요한(21), 황학연(21), 황경선대원(20) 등 7명으로 구성된 서원대산악회팀은 7월 17일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19일 본격적인 등반을 개시한 이들은 9일간 두 개의 캠프를 전진시킨 후 7월 27일 지현옥대장과 장철기대원이 2캠프(6,200m)에서 정상공격에 나섰다. 두 사람은 7,100미터 지점에서 설동을 파고 비박한 후 다음날 등반을 재개, 28일 오후 5시 45분 정상에 섰다. 서원대산악부 창립 15주년을 기념한 이 등반은 첫 중국 고산등정이란 위업을 이룩하며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