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변화되어 가는 한국의 해외원정 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 91년은 한국의 해외원정사상 가장 많은 팀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소련, 중국 지역의 개방으로 그 활동 무대가 한층 넓어진 한 해였다. 전부 35개에 달하는 한국원정대가 세계 각지의 고산에서 등반활동을 펼쳤다. 그중 히말라야 지역이 22개 팀으로 가장 많은 수를 기록했는데, 네팔 지역으로 9개 팀, 파키스탄으로 5개 팀, 중국 지역으로 3개 팀, 그리고 소련 파미르 지역으로 5개 팀이 진출했다. 이 원정에 참가한 인원은 모두 171명에 달했다. 새로 개방된 중국 지역은 시샤팡마와 초오유에, 그리고 전년도에 개방된 소련 지역은 코뮤니즘, 레닌, 코르제네프스카야에 원정대가 집중되어 91년도 고산원정대 증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다섯 번째 좌절 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 광역 히말라야 지역으로의 고산원정은 중국과 독립국가연합의 개방 덕에 활동 영역이 다소 넓어졌으나 아직도 네팔히말라야 원정이 가장 많은 수를 기록했다. 전부 24개 팀 중에서 91년의 첫 원정을 기록한 것은 봄시즌에 네팔히말라야로 진출한 에베레스트 남서벽원정대와 아피원정대 등 2개 팀이었다. |
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 한국 에베레스트 남서벽원정대 한국산악인에게 네 번의 실패를 안겨준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다섯 번째 도전장을 던진 팀은 전국합동원정대였다. 한국산악회 이사인 이강오대장(48)과 정우섭부대장(44)이 대부분의 경비를 부담함으로써 성사된 이 원정대는 남선우등반대장(36)이 중심이 되어 허정식(36), 정광식(35), 최태식(31), 조광제(29), 이상록(29), 박영석(28), 김진성(27), 구경모(27), 김석준대원(25) 등 모두 12명이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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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서부 첫진출, 아피봉 등정 봄시즌에는 국내 최초로 네팔히말라야 서쪽 끝에 있는 아피(7,132m)봉에 도전장을 던진 한국 원정대가 있었다. 아피봉은 안나푸르나 등반의 기점인 포카라로부터도 36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고 네팔과 인도의 국경 아피-남파 산군의 주봉이다. 산의 이름은 티베트어로 ‘조모(할머니)’란 뜻이다. 최초의 본격적인 등반은 네팔 개방 이후인 1954년 이태리팀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 산의 북면으로 접근한 이 팀은 정상공격 도중 두 대원을 잃고 패퇴했다. 이후 이 산은 60년 5월 일본대가 초등정에 성공했다. 이 산에 도전한 최초의 한국 아피원정대는 이태연대장(31), 이영주(30), 손동수대원(22) 등 단 3명으로 이루어진 초경량 원정대였다. 이들 중 이대장은 카트만두에서부터 등반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인원은 2명인 셈이었다. 2명의 대원은 10명의 셀파, 그리고 36명의 포터를 고용해 버스 한 대로 3박 4일을 달려서야 네팔의 서쪽 도로마저 끝나는 곳에 이르렀다.
이곳부터는 외국인이라고는 몇 년에 한 번씩 지나가는 원정대뿐인 오지의 카라반 길이었다.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캬라반에 26일을 소요했다는 기록도 있었으나 다행히 도로사정이 좋아져 8일 만에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
파키스탄 가셔브룸 2봉에 9명 등정 성균관대 가셔브룸 2봉원정대 대산련 울산지부 가셔브룸 2봉원정대
그로부터 3시간 뒤인 12시에 한대장과 나머지 두 대원이 정상에 섬으로써 이들은 한국 히말라야 등반사상 최초로 전대원이 8천미터봉 정상에 서는 기록을 세웠다. 한편 성대팀의 4캠프를 물려받은 울산팀은 다음날인 5월 20일 한영준, 박을규, 조재철, 장상기, 이용순 등 5명의 대원이 등정을 시도, 모두 정상에 오르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들도 국내 히말라야 등반사상 가장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정상에 오른 기록을 남겼다. |
낭가파르밧 등정발표와 그 의혹 한편 전년도에 이어 두 한국대가 낭가파르밧 국내초등을 노리고 디아미르에 들어왔다. 한 팀은 은정산악회가 주축이 된 한국-홍콩합동대였고 다른 하나는 울산의 현대공고OB산악회팀이었는데 둘 다 서면 킨스호퍼루트를 등반루트로 택했다. 이들 두 팀은 6월 3일 같은날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김형주대장(35)이 꾸린 한국-홍콩합동대는 백중현(47), 원우연(30), 맹상원(28), 이관호(28), 구한회(28), 이병남(24), 박진석대원(28) 등 은정산악회원으로 이루어진 8명의 한국대원과 곽감홍부대장(31)을 비롯한 4명의 홍콩산악인이 참가했다.
이들 중 히말라야 등반 경험자는 88년에 낭가파르밧에 도전했다가 6,100미터에서 패퇴한 바 있는 김대장뿐이었다. 최초로 홍콩산악인과 합동으로 꾸린 이 원정대는 4,200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후 계속되는 폭설과 이상기온으로 40일 이상을 고전한 끝에 7월 16일 1,500미터에 이르는 급경사 암설지대를 돌파해 2캠프(6,300m)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낭가파르밧 디아미르벽에서 가장 어려운 구간을 통과한 원정대는 여세를 몰아 7월 30일 3캠프(6,900m)를 설치했고, 8월 4일에는 7,500미터 지점에 네 번째 캠프를 설치하면서 정상공격 준비를 마쳤다.
첫째, 등정한 홍콩인들의 체력과 고소적응 상태가 다른 한국대원들보다 못했는데도 1차 공격 실패 후 하산하지 않고 7,500미터 고도에서 3일간이나 머물고도 다시 정상공격을 했다는 점. 둘째, 정상 200미터 전부터 정상을 다녀올 때까지 전혀 무선교신을 하지 않은 점. 셋째, 굳이 야간등반을 택해 확실한 정상 사진을 만들지 않은 점 등이 그것이었다. 한편 이들과 함께 낭가파르밧에 도전했던 울산 현대공고산악회원정대는 이동원대장(28), 정봉화(27), 김재희(25), 강동중대원(25) 등 4명으로 구성되어 등반에 나섰으나 디아미르벽 2캠프(6,300m)를 설치하고 고전하다가 7월 20일 포기하고 말았다. |
파이유에서 역부족으로 패퇴 91년에 파키스탄으로 진출한 한국대 중 유일하게 8천미터급 원정대가 아닌 팀은 파이유(6,601m)에 도전장을 낸 포항제철산악회팀이었다. 파이유봉은 카라코룸 발토로산맥 서쪽 끝에 여러 개의 위성봉을 거느리고 있는 암봉으로 산명은 발티스탄어로 ‘암염’을 의미한다. 이 산은 74년 미국대, 75년프랑스대가 도전했으나 실패하였고 76년 7월 20일에 파키스탄 육군팀에 의해 초등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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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5개대, 파미르 3고봉 등정 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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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의 장막 걷히고 첫 중국 고산 등정
의 스타인이 등정을 시도한 바 있고 1947년에는 영국의 유명한 탐험등 산가 쉽톤과 틸만이 정상 근처에서 후퇴한 후 56년에 중국-소련합동대가 무려 31명의 대원 전원을 등정시킨 산이다. 산의 이름은 터어키어로 ‘무즈’는 얼음, ‘타그’는 산, 그리고 ‘아타’는 아버지란 뜻이 합쳐져 ‘빙산의 아버지’란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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