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 히말라야 지역으로 30개 팀 214명 진출
92년은 한국의 원정사상 가장 많은 팀과 인원이 히말라야로 집중된 해로 기록되었다. 모두 30개 팀에서 214명이 한해동안 히말라야 산맥, 카라코룸, 천산, 파미르 지역에서 등반활동을 펼친 것이다. 이것은 역시 최다원정대 수를 기록했던 전년도 22개 팀 171명에 비해서 8개 팀, 43명이 늘어난 수이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네팔 지역이 11개 팀 52명으로 가장 많은 팀을 기록한 반면에 참가 인원 수로는 9개 팀에서 85명이 활동한 파키스탄 지역이 가장 많았다.
파키스탄에 이렇게 많은 국내산악인이 몰린 것은 낭가파르밧에 한꺼번에 5개 팀에서 42명이 몰렸기 때문이다.다음은 구소련 지역으로 소련 붕괴 후 첫번째 맞은 파미르와 천산 국제캠프에 전부 8개 팀 63명이 참가해 중앙아시아 고산에 대한 한국산악인들의 관심을 보여주었다. 한편 개방 2년째를 맞은 중국 티베트로의 원정은 1개 팀, 그리고 인도 지역으로의 원정도 1개 팀에 그쳤다.
봄시즌 네팔히말라야 원정 3팀 전패
한양대 가네쉬 3봉원정대
92년 봄 히말라야 원정은 3개 팀 모두가 네팔 지역 7천미터급 산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한양대 산악회가 가네쉬 3봉(7,132m), 대구 팔공산악회가 다울라기리 2봉(7,751m), 그리고 부산 빌라알파인클럽이 푸모리(7,145m)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러나 결과는 모두 좋지 않았다. 가네쉬와 다울라기리 2봉원정대는 중도에 역부족으로 패퇴했고 유일하게 등정에 성공한 푸모리팀은 등정대원 3명 모두가 실종되는 사고를 당했다.
가장 먼저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것은 한양대팀이었다. 김종민대장(30)을 비롯 강흥대(27), 이남기(28), 안정식(25) 등 4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이 원정대는 3월 17일 베이스캠프(4,000m)에 도착해 다음날부터 등반에 들어갔다. 가네쉬 3봉은 네팔 중북부에 있는 가네쉬 산군의 7개봉 중 세 번째 봉우리로 주봉은 스위스-프랑스합동대가 초등정했으나 3봉은 한참 후인 81년에야 초등정되었다. 81년 가을 서독-네팔합동대가 북면으로, 그리고 일본-네팔합동대가 남쪽으로 시도해 서독대가 초등정을, 일본대가 2등을 거두었고 그후로는 등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3봉의 북벽으로 등반루트를 잡은 한양대팀은 3월 19일 제1캠프(4,800m)를 설치하고 500여 미터의 설사면과 300여 미터의 청빙리지를 통과해 26일 2캠프(5,500m)를 설치했다. 그리고 4월 4일에는 가파른 설벽과 히든크레바스를 넘어 3캠프(6,300m)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부터 원정대는 6,700미터 지점까지 고정로프를 설치하는 데 10일 이상 소요하며 고전한 끝에 4월 20일 정상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전대원이 고소캠프에 너무 오래 머물러 체력이 쇄잔해졌을 뿐만아니라 식량과 장비도 떨어져 6,820미터를 최고 도달지점으로 하고 후퇴하고 말았다.
팔공산악회 다울라기리 2봉원정대
팔공산악회의 다울라기리 2봉원정대는 카트만두를 떠난 지 12일 만인 3월 6일 2봉의 남면에 베이스캠프(3,400m)를 설치했다. 팔공산악회는 6년 전인 86년 봄시즌 이 산에 도전하여 정상에 올랐으나 불행히도 등정자 김성규대원이 하산 도중 실종되는 사고를 당했었다. 따라서 이 원정은 고인에 대한 추모등반이자 미완으로 끝난 등반을 완성시키겠다는 취지가 담겨 있었다.
참가자는 류시동대장(37)을 포함 김기태등반대장(30), 조을래(27), 박종수(24), 이명기(26), 추민호(23), 이진욱(19) 등 모두 7명의 대원으로 구성되었다.동릉을 루트로 잡고 등반을 시작한 이들은 10일 만인 3월 19일 전진베이스캠프(4,850m)를 건설했고, 강풍 속에서 등반을 계속해 26일엔 제1캠프(5,140m)를 설치했다. 이어서 4월 2일에 2캠프(5,700m)를 설치하고 여기서 5일 6,300미터 지점까지 올랐으나 눈보라와 강풍은 더이상의 등반을 허락하지 않았다.
빌라알파인클럽 푸모리원정대
봄시즌의 마지막 한국등반대인 부산 빌라알파인클럽의 푸모리원정대는 정상등정 후 패러글라이딩으로 활강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 원정대를 이끈 서성수대장(33)은 부산 패러글라이딩스쿨을 운영하고 있는 산악인으로 푸모리 정상에서 페리제 마을(4,252m)까지 활강하는 대모험을 구상했다. 히말라야 고산에서의 패러글라이딩 활강은 87년 가을 일본의 다카하시가 초오유(8,201m)에서 최초로 성공한 후 88년에 프랑스의 브와벵이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활공해 내려와 큰 화제가 되었었다. 푸모리에서 최초로 시도되는 활공 모험에 참가한 대원은 서대장을 비롯 강종삼(37), 권주현(36), 강석규(30), 서영덕(23), 김백균대원(23) 등 6명이었다.
이들은 4월 30일 베이스캠프를 구축하고 남서릉으로 등반을 개시했다. 제1캠프를 설치한 후에는 한차례 패러글라이딩을 시도해 성공시켰다. 5월 8일에는 루트공작중이던 셸파가 추락사하는 사고를 당했으나 등반을 속개, 12일 3캠프(6,800m)를 떠난 서성수대장과 서대장의 친동생 서영덕대원, 그리고 김백균대원과 셀파 1명이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등정자들은 뜻하지 않은 악천후로 패러글라이딩을 포기했는데, 하산 도중 3캠프 지점에서 모두 실종되고 말았다. 며칠이 지나도 이들을 찾을 길이 없게 되자 나머지 대원들은 이들이 눈사태에 의해 실종된 것으로 결론지었다.
한국 5팀 집중 공략받은 험봉 낭가파르밧
92년은 원정사상 가장 많은 팀과 인원이 한꺼번에 파키스탄 지역으로 몰린 해였다. 모두 9개 팀에서 85명의 국내산악인들이 여름시즌을 이용해 파키스탄히말라야 원정길에 나섰다. 목표로 한 산은 5개 팀이 한꺼번에 몰린 낭가파르밧(8,125m)을 비롯, 2개 팀이 도전한 트랑고 네임리스타워(6,239m), 그리고 브로드피크(8,047m), 루프가르사르 동봉(7,200m) 등 4개 봉이었다.
우암산악회 낭가파르밧원정대
경남합동 낭가파르밧원정대
낭가파르밧에 출사표를 던진 한국 5개 팀 중 서울시연맹을 비롯해서 광주우암산악회, 경남합동대, 조선대공전 등 4개 팀이 서면 디아미르벽으로 루트를 잡은 반면, 서울-의정부합동팀은 남면 루팔벽을 등반루트로 잡았다.결과는 5개 팀 중에서 광주우암산악회팀과 경남합동팀의 세 대원이 5월 29일 함께 정상에 오르는 개가를 올렸고, 나머지 세 팀은 고배를 마셨다. 이들의 등정은 한국산악계의 숙원을 해결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았다.
5개 팀 중에서 가장 먼저 베이스캠프에 들어온 팀은 5월 14일 도착한 우암산악회였다. 90년 광주합동 낭가파르밧 원정에 참가했다가 실패를 맛본 박찬기대장(33)이 이끈 이 팀은 김주현부대장(30), 조영정(29), 안병렬대원(29) 등 4명으로만 구성된 가장 소규모 원정대였다. 이들은 5월 20일 제1캠프(5,200m)를 설치하고 23일부터는 2캠프 직전까지의 거벽에 고정로프를 깔며 루트공작을 해나갔다. 경남연맹팀이 베이스캠프로 들어온 것은 5월 27일. 이들은 우암팀과 협의하여 그들의 루트를 이용하는 대신 나머지 2캠프까지의 어려운 암벽구간을 개척하기로 했다.
88년 눕체 북서봉 동계초등정을 지휘한 바 있는 조형규대장(42)이 이끌고 있는 경남연맹팀은 이병갑부대장(45), 배현철(32), 박희택(32), 박쾌돈(30), 임영택(28), 송재득(28), 임종범(30), 강덕문(32), 오세철(28), 김화곤(26), 이명용대원(26)과 한국방송공사 창원방송국에서 파견된 이은수(32), 정영상기자(33)를 합해 모두 14명으로 구성되었다. 대부분의 대원들이 고산등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이 팀도 6월 10일이 되서야 수직 암벽구간을 돌파해 2캠프 지점(6,200m)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경남팀이 어려운 구간에서 고정로프가 부족해 등반을 중단하고 있을 때 서울시연맹팀이 베이스캠프에 들어왔다.
경남팀은 이들로부터 고정로프를 지원받아 계속 루트공작을 해나갔다. 다음날에는 스위스, 폴란드, 스코틀랜드팀이, 그리고 17일에는 조선대공전팀이, 20일에는 스페인 바스크팀이 도착해 디아미르측 베이스캠프에는 6개국에서 9개 팀이 함께 등반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 무렵 경남팀은 어렵게 6월 24일 3캠프(6,800m)를 설치했다. 그리고 일단 베이스캠프로 하산한 대원들은 며칠 휴식을 취한 후, 우암팀과 함께 4캠프 설치와 동시에 정상공격을 단행하기로 하고 공격조를 편성했다. 경남팀에서 박희택, 송재득, 임영택대원과 우암팀에서 조영정, 김주현대원이 선발되었다.
27일 3캠프에 올라온 이들 공격조는 28일 4캠프(7,600m)를 설치했고 다음날 새벽 5시에 상태가 나쁜 임영택대원을 제외한 나머지 네 대원이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등반이 계속될수록 대원들간의 간격이 벌어졌는데 경남의 박대원과 우암의 김대원은 중간에 만나 함께 정상을 향해 올랐고 조영정대원은 체력의 한계를 느껴 중간에 포기하고 내려갔다. 앞의 두 대원 중 김주현대원이 먼저 정상 바로 밑에 도달했으나 김대원은 뒤따라오는 경남팀의 박희택대원을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오후 3시 15분, 영호남의 두 대원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마침내 낭가파르밧 정상에 올라섰다. 나머지 송재득대원은 이보다 1시간 30분가량 늦은 4시 47분 홀로 정상에 도착했다. 이것은 92년 파키스탄 시즌 최초의 등정보였다.
서울시연맹 낭가파르밧원정대
한편 서울시련팀은 이미 4캠프 직전까지 따라붙고 있었다. 구조대원들이 주축이 된 서울시련팀은 77년 에베레스트 대원과 86년 K2원정대장을 역임한 바 있는 김병준대장(45)이 지휘한 조직적인 원정대였다. 86년 K2, 88년 에베레스트 등정으로 유명한 장봉완등반대장(41)을 위시해서 서성식(36), 엄홍길(33), 전홍(33), 우종석(31), 이상록(31), 김영교(29), 진규선(28), 김연수(28), 이치상(28), 박흥수(24), 장경덕(42·의사) 등 등반경험이 풍부한 대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빠른 속도로 등반을 진행해 6월 30일 엄홍길, 김영교, 진규선대원이 4캠프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서 엄대원이 이틀간에 걸쳐 두 차례나 단독등정을 시도했으나 강풍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후퇴해야만 했다. 한편 4캠프에 머물던 진대원이 고산병과 설맹으로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가 되자 그를 후송하기 위해 다른 대원들을 투입해야만 했다. 7월 5일, 이번에는 이상록, 김연수대원이 4캠프에서 정상공격에 나섰으나 역시 추위와 바람으로 인해 7,700미터에서 돌아서고 말았다. 그리고 7월 13일에 김영교대원이 세 번째로 등정을 시도했지만 역부족으로 7,700미터 지점에서 포기하자 김대장은 등반 종료를 선언했다.
조선대공전산악회 낭가파르밧원정대
우암팀과 함께 광주 지역에서 꾸려진 조대공전팀은 등반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문호성대장의 지휘아래 김주현(26), 장홍수(25), 서종갑(26) 등 4명으로만 이루어진 이 팀은 6월 29일 2캠프에서 하룻밤을 보낸 서종갑대원이 뇌부종 증세로 혼수상태에 빠지자 그를 구조하기 위해 나머지 대원들이 매달려야만 했다. 1캠프로 내려가는 구간은 워낙 급경사의 암벽지대였기 때문에 조대원의 후송작업은 만만치가 않았다.
결국 다음날이 되어서야 베이스캠프에 내려온 서대원은 서울시연맹팀 의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다. 그후 다시 등반을 속개한 이들은 7월 16일 장흥수대원을 4캠프까지 진출시켰으나 고소에 적응되지 않아 정상공격을 못하고 모든 등반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들과 함께 4캠프로 진출한 폴란드와 스페인팀은 6명의 대원이 등정에 성공하고 내려왔다.
서울-의정부 합동 낭가파르밧원정대
한편, 낭가파르밧 등반루트 중에서 가장 어렵기로 정평이 나 있는 남면 루팔벽에 도전장을 낸 서울-의정부합동대는 6월 4일 베이스캠프(3,700m)를 구축하고 등반에 들어갔다. 홍성윤대장(37)을 비롯하여 김홍경부대장(35), 길대윤(33), 김창선(32), 박희동(29), 지승찬(28), 최시한대원(32) 등 서울과 의정부 지역 산악인들이 합동으로 꾸린 이 원정대는 ‘플라잉 키위’라는 팀 명칭을 채택하는 여유를 보여주었다.
이 팀은 6월 12일 제1캠프(5,100m), 16일 2캠프(6,300m)를 설치하면서 순조롭게 등반을 진행해 나갔으나 폭설로 열흘간이나 등반을 중단해야 했고 그후에도 계속되는 악천후로 더이상의 전진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6월 26일 악천후가 회복될 기미가 없자 철수를 결정했다.
거벽등반의 상징 트랑고타워 등정
남가주 한인산악회 트랑고타워원정대
한국 트랑고타워원정대
카라코룸 발토로빙하에 우뚝 솟은 트랑고타워 암봉을 마침내 한국산악인들이 올랐다. 비록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트랑고 네임리스타워를 등정하면서 비로소 한국인으로 하여금 세계 거벽등반 대열에 서게 한 것이다.
트랑고 암봉은 고산에서의 거벽등반이라는 첨예적인 등반을 출현시킨 산으로 유명하다. 트랑고 산군은 그레이트 트랑고타워(6,231m)를 비롯해서 트랑고 네임리스타워(6,239m), 그리고 여러 개의 위성봉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암탑군을 일컫는다. 92년 7월, 세계 10대 거벽에 꼽히는 트랑고 네임리스타워에 두 한국팀이 각기 다른 루트로 도전장을 낸 것이다.
남동벽의 쿠르티카-로레탕루트로 박현규대장(30), 김종대(26), 이은숙대원(25) 등 3명으로 이루어진 국내팀이 들어왔고, 남벽의 유고루트로는 미국의 남가주 한인산악회팀 6명이 등반을 시작했다. 7월 23일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국내팀은 본래 90년 일본루트를 목표로 했으나 정찰 결과 그곳에는 얼음이 너무 많이 붙어 있어 남동벽으로 루트를 바꾸게 되었다.
그러나 8월 2일부터 시작되어 7일간 계속된 등반에서 이들은 70∼80도 경사의 크랙을 올라 5,700미터에 도달하는 데 그쳤다. 한편 7월 26일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남가주산악회팀은 선우중옥대장(51)을 포함, 조종환등반대장(31), 주영(37), 소호영(36), 조덕규(22) 등 6명의 대원 중 대장과 조덕규대원만 남기고 4명의 대원이 87년 유고팀에 의해 개척된 바 있는 남벽루트에 붙었다. 8월 4일 본격적인 등반을 시작한 이들은 정상 150미터 아래 지점에 도달했을 때 폭설을 만나 한차례 후퇴한 끝에 8월 11일 다시 등반을 개시, 2박 3일 만에 1,300미터의 거벽을 프리클라이밍으로 올라 13일 12시 30분에 정상을 밟는 데 성공했다.
루프가르사르 동봉서 2명 실종
전주 파이오니어스 루프가르사르 동봉원정대
카라코룸의 히스파산맥에 위치한 처녀봉 루프가르사르 동봉(7,200m)에 한국원정대가 도전장을 냈으나 정상공격 직전 눈사태로 2명의 대원이 실종되는 사고로 끝이 났다. 파키스탄 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의 눈사태 조난으로 기록된 이 사고로 원정대는 세계 초등정을 눈앞에 두고 후퇴하고 말았다. 루프가르사르(LupgarSar)는 P-3이란 기호로 분류되었다가 나중에 붙여진 이름인데 ‘커다란 바위의 정상’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히스파산맥의 몸힐 산군에 속하는 이 산은 동봉(7,200m), 중앙봉(약7,200m), 서봉(7,199m) 등 비슷한 높이의 3개봉으로 이루어졌다. 1979년 서독대가 서봉을, 일본대가 중앙봉을 초등정하고 동봉만이 미답으로 남아 있었다.
세계초등을 노리고 국내에서는 최초로 히스파 지역으로 들어간 전주 파이오니어스클럽원정대는 84년 동계안나푸르나 원정대원으로 히말라야 경험을 가지고 있는 김호영대장(36)의 지휘하에 정원택(29), 정수근(25), 김영재(28), 박정순(여·24), 김향순(여·24), 조은철대원(23) 등 7명이 참가했다. 6월 28일 베이스캠프(4,250m)에 도착한 이들은 다음날부터 동봉 북면에 루트공작을 시작했다. 눈과 바위가 혼합된 구간이 많아 장비가 많이 소요되었으며 루트 확인이 잘 되지 않았다.
7일간의 고생끝에 벽등반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제1캠프(5,150m)에 도달했고 7월 12일에는 5,300미터 지점에 임시 2캠프를 설치했다. 여기서부터 2캠프지(5,700m)를 지나 급경사의 설사면에 고정로프를 설치하며 전진한 끝에 24일 6,050미터 지점에 도달했고, 26일에는 정수근, 김영재대원이 6,450미터 지점의 4캠프지까지 오르는 데 성공했다. 이제 정상공격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그날 밤부터 무선이 끊겼고 다음날 다른 대원이 근처까지 올라가 확인한 결과, 그곳에는 눈사태가 쓸어간 흔적만 남아 있었다.
한국팀 브로드피크에서 두 번째 고배
경남연맹 브로드피크원정대
경남연맹은 ‘한국 브로드피크 사랑과 우정의 원정대’라는 이름으로 한국인에게는 아직 미등으로 남아 있는 브로드피크에 도전장을 냈다. 파키스탄의 카라코룸 지역 발토로 산군에 솟아 있는 세계 12위의 이 고봉은 88년 악우회팀(대장 장용일)이 처음 도전, 정상에 올랐으나, 후에 이들이 오른 곳이 주봉이 아니라 전봉임이 밝혀져 아쉬움을 남긴 산이었다.
대산련 경남산악연맹에서 파견한 원정대는 회장인 허금단장(61)의 사재와 일부 국고 지원으로 성사되었는데, 윤현종대장(45)을 포함, 정갑진등반대장(30), 이강철(27), 최부훈(28), 홍재기(30), 허외택(23), 이상욱(25), 김인기(26), 황동진(29) 등 모두 10명의 대원이 참가했다. 5월 23일 브로드피크의 서릉루트가 잘 조망되는 곳에 베이스캠프(4,900m)를 건설한 경남연맹 팀은 24일부터 등반을 개시, 31일에는 2캠프(6,200m)까지 올랐다.
이어서 6월 2일부터 3캠프 루트공작에 들어간 이들은 설릉상에 펼쳐진 청빙구간에서 고전한 끝에 18일에야 3캠프(6,700m)에 올랐고, 20일에는 4캠프(7,100m)를 설치했다. 다음날 이곳에서 곧바로 정상공격을 시도했으나 강풍과 폭설 등 악천후로 후퇴한 후 6월 28일에 5캠프(7,500m)를 추가 설치했다.
다음날 황동진, 최부훈, 김인기, 이상욱 등 4명의 대원이 두 번째 공격을 시도했으나 역시 날씨가 나빠 돌아섰다. 이어 30일 3차 정상공격에 나섰으나 전날 내린 신설을 헤쳐나가느라 체력을 모두 소모한 끝에 7,800미터를 최고 도달지점으로 하고 철수를 결정했다. 총 43일간 등반을 했지만 브로드피크는 끝내 정상의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가르왈히말라야 판왈리드와르에서 패퇴
한국대학산악연맹 18기회 가르왈 히말원정대
92년에는 모처럼 한국대가 인도히말라야로 진출했다. 한국대학산악연맹(회장 이인정) 제18기회가 가르왈히말라야의 판왈리드와르(6,663m)에 국내 첫 등반을 시도한 것이다.
이 산은 난다데비 내원 남쪽 장벽상에 있는 설봉으로 남면이 급준한 설벽을 이루고 있어 등반이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왔다. 79년부터 일본대가 등정을 시도해 80년 5월 30일에 남릉을 통해 초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초등정루트인 남릉을 목표로 한 92년의 한국대는 허태한등반대장(27·서울미대)을 비롯해서 송재헌(27·홍익대), 곽동진(27·인천대), 이진영(27·수원대), 최성우(29·수원대), 고운철대원(28·단국대) 등 6명으로 구성되었는데 모두가 85년도 입학한 동기생들이었다.
7월 15일 베이스캠프(3,750m)를 건설한 이들은 다음날부터 남릉루트를 택해 등반에 들어갔다. 이어서 3일 만인 18일에 브리아빙하 4,630미터 지점에 제1캠프를 설치했고, 21일에는 2캠프(5,370m), 그리고 28일에는 400미터의 설벽을 어렵게 넘어 3캠프(6,150m)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들은 3캠프에서 더이상의 전진을 포기해야만 했다. 가져간 버너가 모두 고장난 것이다. 이들은 취사용으로 휘발유버너를 준비해 갔는데 카라반중 구입한 저질 휘발유로 인해 노즐이 막혀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미 2캠프부터 버너 고장으로 식사를 제대로 못한 이들은 더이상의 등반이 어렵다고 결정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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