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 천산산맥 칸텡그리 등정 러시
영호남합동 천산원정대
91년에 한국팀이 구소련의 파미르캠프에 참가해 레닌봉과 코뮤니즘봉을 등정한 것에 이어 92년에는 최초로 천산산맥에서 열리는 국제캠프에 참가하기 위해 6개 팀이 몰렸다. 천산산맥의 최고봉 포베다(7,439m)와 칸텡그리(7,010m) 등반을 원하는 외국인들을 위해 구소련에서 주관해 오던 이 캠프는 92년부터는 독립한 카자흐공화국에서 유치하게 되었다.산명은 몽골어로 ‘한(Han)’은 왕, ‘텡그리(Tengri)’는 영혼을 의미해 ‘영혼의 왕’을 뜻한다. 이 산을 현지인들은 ‘칸투(Kan Too)’, 즉 ‘피의 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일몰시 이 산의 북벽 상부에 비추는 진홍색 노을을 보고 붙인 별명이다.
이런 칸텡그리에 국내에서 영호남합동대, 강릉대, 대구합동대, 전주개척산악회, 수원합동대, 그리고 개인참가자 5명을 합쳐 모두 6개 팀에서 48명이 몰려 구소련 지역 산에 대한 한국산악인들의 관심을 보여주었다. 결과는 칸텡그리에 8월 1일 영호남합동대의 장병호, 박헌주대원이 국내산악인으로서는 이 봉에 첫등정을 이룩한 것을 비롯, 8월 22일까지 참가한 6개 팀에서 모두 19명의 대원이 정상에 오르는 대기록을 세웠다. 또한 천산 최고봉 포베다에는 8월 13일 수원합동대의 박태원, 임영택대원이 역시 국내 첫등정을 기록하는 성과를 올렸다.
개척산악회 칸텡그리원정대
영호남합동대 다음으로 칸텡그리 정상에 오른 팀은 전주 개척산악회팀이었다. 이동호대장(38)의 지휘아래 허선규등반대장(28), 고영국(37), 김은량(여·28), 한왕룡(27), 오기탁대원(25) 등 6명이 참가한 이 팀은 전북 지역 단일팀으로는 최고도 등정을 목표로 7월 20일 베이스캠프에 들어왔다. 이미 다른 한국대도 등반을 개시한 상태였기 때문에 비교적 빠른 속도로 캠프를 전진시켜 27일에는 3캠프까지 올랐다. 여기서 다음날 허선규, 한왕룡대원이 정상공격을 시도했으나 6,800미터에서 체력부족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베이스캠프에서 휴식을 취한 이들은 31일부터 다시 등반을 시작, 8월 2일 4캠프를 설치했고 여기서 다음날 허선규, 한왕룡, 오기탁대원이 정상공격에 나서 12시 36분에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대구합동 칸텡그리원정대
개척산악회팀이 오른 다음날 설동에서 하룻밤을 보낸 대구합동대(대장 차문환·33)의 강신천(26), 최기한(29), 하찬수대원(25) 등 3명과 개인적으로 참가한 한상국(45·성대산악회), 홍성택(26·한국체육대학), 안진섭(24·동국산악회), 그리고 국내에서 소련 국제캠프를 주선한 박영석(29)대원이 8월 5일 새벽에 정상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대구합동대의 두 대원은 체력 부족으로 중도에서 포기했고 박영석대원은 탈진 상태의 안진섭대원을 데리고 내려가느라 역시 등정을 단념했다. 결국 개인적으로 참가한 한상국, 홍성택과 대구합동대의 하찬수대원 등 3명만이 칸텡그리 정상에 올랐다.
강릉대 칸텡그리-포베다원정대
이어서 8월 6일에는 개인적으로 참가한 김균(26·제주산악회)과 강릉대의 신승국, 이영주대원이 4캠프에서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개인팀과 함께 7월 20일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강릉대는 최기순대장(33)을 포함, 최판길(31), 신국승(28), 박용하(27), 이상태(26), 박찬두(25), 이영주(22), 최명서(24) 등 8명으로 구성되어 합동등반에 참가했었다. 이들도 앞선 팀들 덕분에 빠른 전진을 보여 8월 2일 신국승, 이영주대원이 1차 정상공격을 시도해 6,700미터까지 올랐고 4일 뒤인 8월 6일 4캠프에서 김균대원과 다시 정상공격을 단행해 마침내 정상에 올랐다. 이로써 칸텡그리 정상에 오른 한국인은 13명으로 늘어났다.
천산 최고봉 포베다에 한국 첫등정
수원합동 포베다-칸텡그리원정대
92년도 천산산맥 국제캠프에 참가한 팀 중에서 칸텡그리와 포베다를 모두 노린 팀은 영호남합동대와 수원합동대, 그리고 강릉대팀이었으나 이들 중 수원팀만이 두 개봉을 모두 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영호남합동대는 칸텡그리를 등정하고 이어서 8월 6일 포베다 등반을 개시했으나 6,800미터 지점에서 폭설을 만나 포기했고, 강릉대팀은 4캠프를 설치하고 6,750미터까지 진출했으나 기상악화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들과는 달리 먼저 포베다부터 공략에 나선 수원합동대는 8월 13일 포베다 등정에 이어 22일 칸텡그리로 오르는 데 성공했다. 수원합동대의 선발대는 7월 30일 카자흐공화국에서 마련한 포베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수원 지역 산악인들이 단위산악회를 떠나 합동으로 구성한 이 원정대는 양위석단장(47)과 남상익대장(41)의 지휘아래 박혁수부대장(31), 박태원등반대장(30), 조병묵(29), 심태선(28), 임영택(28), 조광재(28), 최오순(여·26),노민철(25), 차요한(25), 차석우대원(25) 등 모두 12명으로 구성되었다.
포베다는 구소련의 카자흐공화국과 중국의 신장-위그루 자치구의 경계를 이루며 솟아 있는 천산산맥의 최고봉으로 주봉(7,439m), 동봉(7,039m), 서봉(6,918m)을 연결하면 무려 10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산이다. 칸텡그리가 1931년에 초등정된 것에 비해 포베다는 그보다 훨씬 뒤인 56년 구소련팀에 의해 북릉으로 등정되었다. 산명 ‘포베다(Pobeda)’는 러시아어로 ‘승리(Pobedy)’를 뜻하는데 43년의 타시켄트측량대가 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명명한 것이다.
‘승리의 봉’ 포베다 등반에 나선 수원합동대는 8월 2일 이닐첵빙하를 거슬러 올라 1캠프(4,300m)로 진출했다. 여기서 이들은 북서면으로 붙어 3일에 2캠프(5,400m), 4일 3캠프(5,800m), 6일 4캠프(6,400m), 7일 5캠프(6,300m), 그리고 9일에 6캠프(6,500m)를 설치하며 비교적 빠른 전진을 계속한 끝에 8월 11일에는 마지막 캠프(6,800m) 설치를 마쳤다. 그리고 13일 오전 9시 30분, 박태원등반대장과 임영택대원이 정상공격에 나서 오후 5시 50분 마침내 천산산맥의 용마루에 올랐다. 국내 최초로 천산 최고봉을 등정하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파미르 원정대 감소, 터키스탄 첫진출
부산교육대산악회 파미르원정대
92년은 구소련 지역으로 진출한 원정대들의 대부분이 천산산맥 국제캠프로 몰려 한소 수교 이후 집중되던 파미르 원정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어 단지 한 팀만이 파미르의 코뮤니즘(7,495m)과 코르제네프스카야(7,105m) 등반에 나섰다. 부산교육대산악회에서 꾸린 파미르원정대는 신호진대장(38), 최상룡부대장(34), 임두희등반대장(30), 양정환(28), 최태신(27), 김대홍(27), 김석수(25), 박진규(25), 차광훈(24), 강성석(25), 이재천대원(23) 등 11명 모두가 현직 초등학교에 재직중인 교사로 구성된 팀이었다.
이들은 파미르의 최고봉 코뮤니즘을 공략하기에 앞서 코르제네프스카야를 등반하기로 하고 7월 29일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등반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어 8월 7일에는 3캠프(6,000m)까지 진출했고 악천후로 하루를 지체한 다음날인 8월 9일 양정환, 김석수대원이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이어서 코뮤니즘 등반에 나선 원정대는 8월 13일 임두희, 김석수대원으로 하여금 알파인스타일로 등정을 시도하게 했다. 그러나 이들이 6,800미터 지점에 이르렀을 때 날씨가 나빠져 아쉽게 후퇴하고 말았다.
한국산악회 악수원정대
전년도에 코뮤니즘을 등정한 바 있는 한국산악회가 이번에는 파미로 알라이산맥의 지맥인 터키스탄 산맥 악수봉(5,217m)에 첫진출을 꾀했다. 이 지역 산들은 1,500미터 내외의 수직 화강암벽으로 이루어져 거벽등반의 메카로 꼽히고 있었다. 82년부터 등반이 시작되어 피라미달니(5,509m), 카라수(5,309m),아산(4,202m), 우산(4,329m) 등 4,5천미터급 암봉들이 차례로 등정되었다. 한국산악회팀이 목표로 한 악수(Ak su)봉은 키르키스어로 ‘하얀 물’이란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산은 82년부터 북벽에 6급 상당의 루트가 7개나 개척되어 있었는데 90년에야 외국팀의 입산이 이루어졌다. 손재식대장(36), 조성대(38), 조유동(30), 신상만(27) 등 4명으로 구성된 한국산악회팀은 7월 27일 베이스캠프(2,800m)에 도착했다. 그리고 31일부터 북벽의 트로시니안카루트를 등반하기 시작했으나 이들의 예상과는 달리 암벽루트에 얼음이 덮여 혼합등반으로 오르는 데 역부족을 느꼈다. 벽을 5피치 오르다 8월 12일 악수리지로 등반루트를 변경한 한국산악회팀은 그러나 4,800미터 지점의 크랙에 눈이 쌓여 있어 등반을 포기해야만 했다.
초오유-시샤팡마 연속등정 성취
한국 초오유-시샤팡마원정대
92년은 한국과 중국이 공식적으로 수교한 원년으로 울산과 서울산악인이 합동으로 티베트의 고봉 초오유(8,201m)와 시샤팡마(8,027m)를 연속 등정하기 위해 출사표를 던졌다. 전년도에 이어 중국정부의 허가를 받아 티베트로 공식 입산한 한국대는 먼저 초오유 공략에 나섰다. 김관준대장(54)을 비롯, 신영호부대장(42), 남선우등반대장(38), 신영철(42), 김영태(29), 손경득(29), 조상현(27), 남기칠대원(26) 등 8명의 한국대는 울산의 청산악우회와 서울의 중앙대, 양정산악회 소속 회원들이 합동으로 참여한 원정대였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육로로 티베트로 들어간 한국대는 9월 4일 초오유 베이스캠프(4,900m)에 도착했다. 3일 뒤 다시 전진베이스캠프(5,700m)를 구축한 이들은 9일에 제1캠프(6,400m), 12일에 2캠프(6,950m), 그리고 16일에는 록밴드에 3캠프(7,500m) 설치를 마쳤다. 9월 20일에는 남선우등반대장과 김영태대원이 셀파 1명과 함께 새벽 4시 10분, 3캠프를 떠나 7시간 만인 11시 25분에 초오유의 넓은 정상에 섰다. 공식적으로는 국내 두 번째 초오유 등정이었다.
초오유 등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원정대는 9월 26일 시샤팡마 베이스캠프(5,000m)로 이동했다.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남선우, 김영태, 남기칠, 조상현 등 4명의 대원과 셀파 1명만이 입산허가를 받아 등반을 개시했다. 이미 고소적응이 되어 있던 이들은 28일 전진베이스캠프(5,500m)를 설치하고 다음날부터 알파인스타일로 시샤팡마를 공략, 4일 만인 10월 2일 오전 11시 20분 남선우, 김영태조와 셀파 1명이 마침내 시샤팡마 정상에 섰다. 이것은 국내 최초의 8천미터급 2개봉 연속등정 기록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등정은 다른 외국팀들과 마찬가지로 중앙봉(8,008m)에 도달하는 데 그쳐 아쉬움을 남겼다.
5전 4승 거둔 가을철 네팔히말라야
92년 가을 네팔히말라야에서는 5개의 한국원정대가 등반활동을 펼쳤다. 조선대산악회는 마나슬루(8,163m), 뫼우리산악회가 푸모리(7,145m), 부산 솔뫼산악회는 로부제(6,119m) 동벽, 그리고 울산의 현대자동차산악회와 승려 혜종이 각각 안나푸르나 4봉(7,525m)을 등반하기 위해 네팔로 향했다.
조선대 마나슬루원정대
조선대산악회가 72년 봄 마나슬루 원정에 참가했다가 눈사태로 사망한 오세근대원의 20주기를 맞아 그의 추모등반으로 마나슬루에 도전했다. 박태규대장(44)의 지휘아래 소방현(33), 이성래(33), 김병규(29), 김경자(30), 강태용(29), 이용철(26), 박동호(26), 장성복(24), 정찬주(25), 오태근(34·고 오세근의 동생) 등 10명으로 구성된 조선대팀은 8월 31일 베이스캠프(4,800m)에 도착했다. 9월 4일 제1캠프(5,500m)를 설치한 이들은 빠른 전진을 보여 6일 2캠프(6,000m), 10일에는 3캠프(6,500m)까지 올랐다. 여기서부터 날씨가 악화되어 세 차례 시도에도 불구하고 4캠프(7,300m)를 설치하지 못했다.
정공법으로 마지막 기회를 노린 조선대팀은 9월 23일 공격조 이용철대원과 푸르바셀파를 베이스캠프에서 출발시켰다. 24일 3캠프까지 올라온 두 사람은 25일 새벽 0시 정상을 향해 출발, 무려 17시간이나 등반끝에 오후 6시 30분 어렵게 정상에 올랐다. 오세근 악우의 20년 한을 풀기 위한 집념의 결산이었다. 체력이 쇄잔해진 이들의 하산길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7,900미터 지점에 이르렀을때는 더이상 내려갈 수가 없어 설동을 파고 고통의 밤을 보냈다. 이로 인해 이대원은 발가락 동상을 입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솔뫼산악회 로부제 동벽원정대
쿰부히말라야에 있는 등반대상지 중에서 가장 낮은 산인 로부제(6,119m)는 트레킹 피크로, 많은 원정대들이 고소적응차 남릉을 이용해 오르는 봉우리이다. 그러나 이 봉우리의 동벽은 1천여 미터나 깎아지른 수직 암벽으로 이루어져 거벽등반을 꿈꾸는 클라이머들을 유혹해 왔다. 그간 체코와 일본대에 의해 이 벽이 등정되었는데 완벽한 벽등반은 아니었다. 부산의 솔뫼산악회는 이 동벽에 새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서 쿰부 지역으로 들어왔다. 대원은 김재수대장(31)을 포함 임종길부대장(41), 윤성환(38), 최영춘(35), 김상진(29), 이성춘(25), 박영식대원(22) 등 7명으로 구성되었다.
4,750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구축한 이들은 9월 1일 벽 출발지점에 전진캠프(5,000m)를 세웠다. 이들은 두 번에 걸쳐 650미터 13피치를 전진하고 9월 15일 마지막 공격을 속개했다. 김재수, 이성춘, 박영식대원은 오후 1시 30분에 지난번 도달지점을 통과하여 등반을 계속해 오후 4시경 동벽을 완전히 돌파하여 정상에 올랐다. 전부 19피치 950미터를 등반한 것이다. 이들이 개척한 루트는 ‘블랙 다이아몬드 코리안루트’로 명명되었다. 솔뫼산악회의 로부제 동벽 등반은 높이에 연연해 대상지를 결정하는 한국산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뫼우리산악회 푸모리원정대
쿰부히말라야에 솟아 있는 미봉 푸모리에 출사표를 던진 뫼우리산악회 원정대는 이재원대장(39)을 비롯해서 최동섭등반대장(34), 조정형(28), 이인창(27),최중석(26), 김준호대원(19) 등 모두가 코오롱등산학교 출신들로 짜여졌다. 뫼우리팀이 도전한 가을시즌에는 한국팀 외에도 스위스 2개 팀, 미국, 캐나다,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등 8개 팀이 한꺼번에 몰려 이 산에 대한 외국산악인들의 선호도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뫼우리팀은 베이스캠프로 가는 카라반길에서 등반대원이 급성고산병으로 생명을 잃는 불운을 맞아야 했다.
9월 12일 루크라에서 카라반을 시작한 원정대가 남체바잘(3,440m)을 거쳐 15일 풍기텡가(3,250m)에 도착한 다음날 남체바잘에서부터 두통을 호소하던 김준호대원이 폐수종으로 보이는 고산병 증세로 사망한 것이다. 그동안 히말라야에서 고산병 증세로 사망한 예는 가끔 있었지만 이들과 같이 낮은 고도에서 고산병으로 사망은 극히 드문 경우였다. 이 사고로 뫼우리팀은 시신 운구와 뒷처리 문제로 전력이 나뉘어졌고 사기가 떨어져 등반에 임한 최동섭, 조정형, 이인창, 최중석 등 4명 대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정대는 남릉 6,100미터 지점에서 돌아서야 했다.
현대자동차산악회 안나푸르나 4봉원정대
92혜종 임종범 안나푸르나 4봉원정대
92년 가을 네팔히말라야에는 푸모리 원정대 외에도 안나푸르나 4봉(7,525m)에 2개의 한국팀이 출사표를 던졌다. 울산 현대자동차산악회와 혜종이라는 법명으로 알려진 임종범승려(37)가 단독으로 이 산에 들어왔다. 결과는 현대자동차팀에서 두 대원과 셀파 1명이 등정하고 이틀 뒤에 혜종도 셀파 3명과 함께 등정하는 개가를 올렸다. 안나푸르나 4봉은 중부 네팔 안나푸르나 산군의 네 번째 봉우리로 한국에서는 78년 4월 23일 한국산악회원정대(대장 전병구)의 유동옥대원이 북서릉으로 국내 첫등정을 이뤄낸 산이다. 그후 이 산에 9개 외국대가 등정에 성공했다.
92년의 두 한국팀은 14년 전 한국산악회가 오른 북서릉을 등반루트로 잡았다. 현대자동차팀은 구화집대장(34)을 비롯해서 이대행부대장(27), 김종섭(27), 박종원(25), 김수영(25), 장민석대원(21) 등 6명 모두가 현대자동차에 근무하는 히말라야 초년병들이었다. 9월 2일 전진베이스캠프(4,700m)를 건설한 이들은 7일 제1캠프(5,300m), 14일 2캠프(6,000m), 그리고 19일에는 3캠프(6,900m) 설치를 마쳤다. 이어서 21일 새벽 4시 30분 정상공격조 이대행, 김종섭대원이 셀파 1명과 함께 마지막 캠프를 떠났다. 이들은 11시 30분경에 2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올라섰고 여기서부터 설릉을 따라 눈을 헤쳐나갔다.
정상을 100여 미터 남겨둔 지점에 이르렀을 때 눈사태를 만났으나 극적으로 탈출했고, 다시 등반을 속개하여 오후 1시 40분 마침내 정상에 우뚝 섰다. 직장산악회로서는 82년 선경여자산악회의 람중히말(6,986m) 등정에 이은 두 번 째 등정으로 기록되었다. 한편 현대자동차팀과 같은 베이스캠프에서 등반에 나선 혜종은 2캠프(6,330m)까지 4명의 셀파로 하여금 고정로프를 설치케 한 후 9월 22일 새벽 3시 30분 그들과 함께 정상을 향했다. 그러나 낮은 고도에서 정상공격에 나섰기 때문에 이들은 그날로 정상에 다다르지 못하고 7천미터 지점에서 비박을 해야 했다. 다음날 새벽 3시 일행은 다시 정상을 향했다. 셀파 1명은 몸이 쇠약해져 등정을 포기했고 혜종과 3명의 셀파가 23일 오후 5시 30분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겨울 아마다블람에 한국 8명 등정
대구알파인클럽 동계아마다블람원정대
인하대 아마다블람으로 가는 즐거운 원정대
‘어머니의 목걸이’란 뜻을 가진 네팔의 세계적인 미봉 아마다블람(6,812m)을 2개의 한국원정대가 겨울철 등정을 노리고 쿰부히말라야로 들어왔다. 대구알파인클럽과 인하대산악회팀이 동시에 이 산에 도전한 것이다. 11월 27일 먼저 베이스캠프(4,500m)에 도착한 대구알파인클럽 팀은 차재우대장(43)을 비롯해서 배시혁부대장(41), 김위영등반대장(38), 백승호(35), 윤창환(34), 이수영(28), 이병호대원(27) 등 7명으로 조직되었다.
이들보다 이틀 뒤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인하대팀은 ‘아마다블람으로 가는 즐거운 원정대’라는 특이한 명칭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천병태대장(35), 심정섭부대장(33), 전우송(32), 정덕기(28), 김진용(26), 정경주(27), 나한나(여·24), 서종삼(24), 심성보대원(24) 등 9명으로 구성되었다. 두 팀은 같은 남서릉을 등반루트로 잡고 있었는데 스위스, 벨기에, 일본 등 3개의 외국팀들도 등반루트가 같아 겨울시즌에 아마다블람에 몰린 5개 팀 모두가 남서릉으로 등반을 개시하게 되었다.
11월 30일부터 등반을 시작한 한국팀들은 빠른 전진끝에 12월 6일 3캠프(6,500m)까지 진출했고 이어서 7일에는 두 팀 모두 1차 정상공격에 나섰다. 알파인클럽은 김위영과 셀파 2명이 오전 7시경 3캠프를 출발해 70도 경사의 설벽을 오른 끝에 오전 11시 20분 정상에 올라섰다.
이어서 새벽 6시경 출발한 인하대팀의 천병태대장과 심정섭, 김진용, 그리고 셀파 1명 등 4명의 공격조가 12시 10분 정상을 밟는 데 성공했다. 이어서 12월 10일 오후 3시경에는 알파인클럽의 이수영대원이 2캠프에서 정상을 올랐고, 다음날인 11일 오전 11시 45분에는 인하대팀의 전우송, 정덕기, 심성보대원과 셀파 1명이 또다시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랑탕리룽 동계초등과 등정대원 실종
설암산악회 동계 랑탕리룽원정대
랑탕계곡에 아름답게 솟아 ‘큰 산’, 혹은 ‘아버지의 산’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랑탕 산군의 최고봉 랑탕리룽(7,234m)에 한국팀이 6년 만에 다시 도전장을 냈다. 이 산은 86년 가을 충남대산악회 팀(대장 윤건중 외 6인)이 5명을 한꺼번에 정상에 올리는 쾌거를 올린 산인데, 이번에는 제주설암산악회팀이 혹한의 겨울철을 택해 동계초등정에 도전한 것이다.
이종량대장(37)의 지휘아래 주정수(37), 김진현(25), 김용수(25), 김형우(24), 이창백(23)대원 등 6명으로 조직된 이 팀은 제주 지역에서는 최초로 결성된 히말라야 원정대였다. 이들은 11월 28일 랑탕 계곡에 베이스캠프(4,300m)를 구축하고 동계등반 허가일인 12월 1일부터 남동릉으로 등반을 개시했다. 4일에 제1캠프(5,200m), 7일에 2캠프(5,800m), 8일에 3캠프(6,400m), 그리고 12일에 4캠프(6,800m)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서 12월 13일 정상공격을 시도하려 했지만 바람이 너무 심해 포기하고 내려왔다. 12월 18일 다시 정상공격에 나선 김진현대원과 두 셀파는 새벽 6시에 출발해 암봉을 넘어 오후 1시 마침내 혹한의 정상에 올랐다. 이 산에 대한 동계초등정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등정조 3명은 체력이 많이 소모되어 하산길이 여의치 않았다. 하산 도중 날은 어두워졌고 4캠프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마지막 무선교신을 남긴채 세 사람은 실종되고 말았다. 아름답기만 하던 랑탕히말은 동계초등이란 영광과 함께 김진현대원을 잃는 비통함을 안겨주었다.
'산악인의 발자취'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국 히말라야 원정대 [11-2] (1993년) *- (0) | 2007.10.26 |
---|---|
-* 한국 히말라야 원정대 [11-1] (1993년) *- (0) | 2007.10.25 |
-* 한국 히말라야 원정사 [10-1] (1992년) *- (0) | 2007.10.18 |
-* 에베레스트 등정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 (0) | 2007.10.11 |
-* 한국 히말라야 원정대 [9-2] (1991년) *- (0) | 2007.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