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18개 팀 히말라야 진출 말라야 등반대 수가 감소되었다. 한햇동안 전부 18개 팀에서 149명이 히 말라야 원정에 참가해 전년도 30개 팀 214명보다 현격히 그 수가 줄어든 것으로 집계되었다. 네팔 지역으로 6팀, 중국 지역으로 3팀, 파키스탄 5팀, 인도 2팀, 그리고 구소련 지역으로 2팀이 진출하여 각 지역별로 비교적 고른 분포를 보였다.
이것은 한국대가 네팔 지역을 선호하던 과거의 성향에서 완전히 벗어났음 을 보여주는 예이다. 또한 에베레스트에 5개 팀이 몰린 것을 비롯 전부 9 개 팀이 8천미터급 원정대였고 나머지는 주로 인도나 파키스탄에서 한국 대가 경험한 바 없는 고봉을 택했다. 이렇게 한국대의 해외원정 성향이 다 변화되고 있는 것은 중국, 소련과의 수교로 인한 대상지의 광역화와, 6천 미터급 산에 대한 초등루트나 벽등반루트를 택하는 원정대가 점차 증가하 고 있기 때문이었다. |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한국 5팀 공략 가운데 한국산악계에서도 예년에 보기드물게 한 해 5개 원정대가 러시를 이루었다. 특히 네팔의 에베레스트 입산료가 오르기 직전인 봄시즌에는 한국에서 4개 팀(전체 23개 팀)이 몰려 각기 다른 루트로 등반을 개시했다. 대한산악연맹은 국내 최초로 여성 에베레스트원정대를 파견 남동릉을 공 략했고, 동국산악회팀은 한국인에게 여섯 번의 실패를 안겨준 남서벽에 도전장을 냈으며, 전북산악연맹팀은 남릉경유 남동릉을, 그리고 유일하게 티베트쪽으로 접근한 히말라얀클럽은 노스콜을 경유한 북동릉루트를 택해 한국 초등을 노렸다. (사진 5-15) |
허영호, 에베레스트 남북 종단 이들 중 가장 먼저 낭보를 보내온 팀은 히말라얀클럽팀이었다. 한국 최초 로 최고봉 북쪽 루트로 도전한 이 팀은 고인경단장(50·파고다 외국어학원 장)이 사재를 털어 꾸린 원정대로 오인환대장(47)을 포함 성순제부대장 (47·변호사), 허영호등반대장(39), 김범택(30), 조재철(27), 홍성택대원 (27) 등 6명으로 구성되었다.
으로 하산해 두 번째 에베레스트 종단기록을 수립했다. 허대장과 셀파는 새벽 8,300미터의 비박지를 출발, 산소를 사용하며 7시간 20분을 오른 끝 에 오후 1시 20분 정상에 도달했다. 이것은 프레몬순기 등반사상 가장 빠 른 기일 등정이란 새기록이 수립되는 순간이었다. 이 등정으로 허영호는 2회의 에베레스트 등정기록을 갖게 되었다.
남면루트로 내려가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 남동릉으로 하산길을 잡 았다. 이미 산소가 바닥나 기력이 다 떨어진 이들은 남봉 밑 8,600미터 지 점에서 더 내려가지 못하고 비박을 해야만 했다. 다음날 두사람은 거의 탈 진 상태에서 한국의 여성원정대 제3캠프에 도달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모 험적인 북-남 종단등반이 마무리 되었다. 이 등반은 88년 봄 일본-네팔- 중국합동대가 수립한 남-북 교차 등반 이후 두 번째로 기록되었는데 지원 을 받지 않은 첫번째 기록이다. (사진 5-18) |
한국여성 에베레스트에 오르다 에 3캠프(7,300m)를 건설해 놓고 있었다. 대한산악연맹에서 국고사업으 로 파견한 이 원정대는 출국 전 집행진과의 많은 불협화음끝에 원정이 성 사되었다. 대장은 서원대산악부장 출신 지현옥(32)이 맡았고 부대장에 정 명숙(33), 그리고 대원에는 곽명옥(30), 이영순(29), 오은선(27), 권경옥 (27), 임희재(26), 강인숙(26), 유명희(26), 손승주(25), 정근희(25), 박금 옥(24), 최오순(24), 김순주(23) 등 모두 14명의 여성산악인이 최고봉 등 정을 위해 한마음으로 뭉쳤다.
등반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이들은 4월 23일 사우스콜에 마지막 캠프(8,000 m)를 설치하러 올라갔다. 그곳에는 전날 네팔여성으로는 최초로 최고봉 등정에 성공한 파쌍 라무가 남봉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으니 구조를 요 청한다는 교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여성대로서는 그에 응해 줄 여력이 없었다. 이제 갓 8천미터에 올라온 그들은 아지 고소적응이 안된 상태였기 때문에 자기 몸마저도 관리하기 힘든 상황이었고 셀파들조차도 날씨가 나쁘다는 이유로 구조를 다음날로 미루었다.
그리고 다음날 셀파들이 눈보라로 등반을 포기하고 내려가버림으로해서 파쌍 라무의 구조 가능성은 없어져 버렸고 그녀는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첫번째 정상공격의 기회가 그렇게 지나간 후에 5월 5일 두 번째로 사우스 콜에 김순주와 셀파 2명이 올랐으나 역시 심한 바람으로 후퇴했다. 그리 고 5월 10일, 지현옥 대장과 최오순, 김순주 대원이 마지막이 될 공격에 나서 셀파 4명과 함께 마침내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섰다.
한국여성으로서는 최초이며 세계에서는 16, 17, 18번째의 여성등정자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이날은 에베레스트 등정사상 가장 많은 산악인이 하 루에 정상에 오른 날이기도 했다. 무려 11개국에서 40명이 단 하루 동안 에 지구의 꼭지점을도달하는 놀라운 기록이 세워졌다. (사진 5-14, 5-16) |
무산소 등정 얻고, 두 대원 잃다 한국산악인에게 다섯 번의 패배를 안겨주었던 남서벽에 도전한 동국산악 회의 ‘4326 한국 사가르마타 남서벽원정대’는 의욕적으로 등반을 개시했 다. 이인정단장(48)과 이종량대장(38)의 지휘아래 박영석등반대장(30), 김진성(29), 남원우(28), 안진섭(25), 김형우(25), 김태곤(24) 등 8명으로 구성된 이 팀은 악천후 속에서도 등반을 강행, 4월 19일 8,300미터 5캠프 지점에서 록밴드에 150미터 고정로프를 설치하고 정상공격 준비를 마쳤다.
이후 신설이 내려 복구작업에 시간을 소모한 끝에 5월 5일 박영석과 2명의 셀파가 다시 5캠프에 올랐다. 그러나 록밴드상에는 건설이 많이 내려 스 텝을 만들면서 오르기가 불가능했다. 동국대팀은 결국 8,450미터 지점에 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남서벽은 국내산악인들에게 통산 6 회의 실패를 안겨주면서 커다란 숙제로 남게 되었다.
동릉을 오르기 시작했다. 5월 15일 사우스 콜에 도착한 이 팀은 다음날 곧 바로 정상공격에 나섰다. 박영석 등반대장과 김진성, 안진섭, 김태곤대원 이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박대장은 이미 남서벽에 서 고소적응이 된 상태여서 산소장비를 휴대하지 않았다.
했고, 나머지 세 대원은 오후 2시경 정상에 섰다. 남서벽 등정 대신 남동릉 으로 3명의 등정자가 배출되었으며 특히 박영석대장은 국내 최초로 최고 봉 무산소 등정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커다란 불행이 기 다리고 있었다. 이들이 하산을 시작하여 두 대원이 남봉에 도달했을 때 힐 라리 스텝에서 산소가 떨어진 안진섭대원이 탈진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박대장이 다시 올라가 그를 인도해 내려왔으나 계속해 하산하던 안대원이 결국 마지막 캠프로 오지 못하고 실종되었다. 안대원의 시체는 다음날 2캠 프 근처 웨스턴 쿰에서 발견되었다. 불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대원 중 남서벽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남원우대원이 남서벽을 혼자 서 오르겠다고 2캠프를 출발, 등반을 계속하다가 결국 7,800미터 지점에 서 추락 사망한 것이다. 안대원과 남대원의 조난은 90년 10월 한일합동대 의 함상헌대원이 남봉 근처에서 추락사한 이후 에베레스트에서의 두 번째 조난사고로 기록되었다. (사진 5-17) |
날씨 운 없어 패퇴한 전북연맹팀 라반을 시작하기도 전에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해 일정에 차질을 빚었다. 13명으로 구성된 전북팀은 등반대원을 9명으로 제한한 네팔관광성의 새 규정으로 인해 같은 문제에 봉착한 대산련의 여성대와 함께 형식상 새 원 정대를 결성해야만 했다. 여성대도 14명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5명을 위 해 별도의 원정대를 만들어야만 할 형편이었다. 두 원정대는 1만 달러에 달하는 입산료를 지불하고 나서야 전대원이 카라반을 출발할 수 있었다.
따라서 엄격히 따지면 93년 봄시즌의 한국대는 4개 팀이 아니라 5개 팀이 된 셈이다. 전북연맹원정대는 전병만원정대장(43)과 김용욱등반대장(35) 을 중심으로 이의재(31), 유한(31), 양재영(31), 최정길(29), 허선규(28), 유신영(27), 진재창(27), 한왕룡(27), 신현민(25), 박경일(25), 이동윤(25) 등 13명으로 구성된 전북지역의 합동대였다.
프, 3월 31일 2캠프를 설치했다. 그리고 4월 15일 남릉 7,200미터 지점에 3캠프를, 19일에는 7,900미터 지점에 4캠프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이 4캠프까지 진출한 후 다음날 새벽 2시 정상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도중에 셀파 1명이 두통으로 등반을 포기했고 5시경에는 진대원의 산소통에 이상이 생겨 돌아섰다. 나머지 두 대원과 셀파도 허리까지 차는 깊은 눈을 헤치며 전진하다 해발 8,400미터 지점에서 역부족으로 후퇴를 결정했다. 전북팀은 적설량이 많은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고 판단, 내린 눈이 어느 정도 크러스트 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5월 7일, 최정길대원과 다와셀파가 2차 공격을 시도했으나 역시 눈이 깊어 제대로 등반도 못하고 8,300미터 지점에서 돌아서고 말았다.
3차 공격에 나섰으나 눈이 허리까지 빠지기 시작했고 루트를 확인하며 등 반하는 데 어려움이 커져 오전 9시경 끝내 등반 포기를 선언했다. 안타깝 게도 그 이틀 뒤인 5월 10일 에베레스트 등반사상 가장 많은 인원인 40명 이 정상을 밟았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전북대는 눈물의 철수를 했다. |
호남산악인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 93년 에베레스트에 도전한 마지막 한국대는 가을 시즌 티베트측 루트에 도전한 광주전남 학산련 팀이었다. 이미 4년 전인 89년 겨울에 에베레스트 에 도전했다 고배를 마신 바 있는 광주-전남 지역 산악인들이 재차 원정 대를 꾸린 것이다. 이 원정은 광주시와 전라남도, 그리고 각 대학산악부와 가입단체들의 지원금으로 꾸려진 것으로 범전남권 원정대였으며 국내 통 산 23번째 에베레스트 원정이기도 했다.
임형칠대장(36)의 지휘아래 김영학등반대장(33), 최행준(27), 박현재(25), 정우연(24), 이정현(22), 정득채(27), 박헌주(26), 나관주(26), 정찬주(26), 이창수(37·보도) 등 11명 대부분이 학생산악연맹 소속 대원으로 구성되었 다. 이들은 네팔을 경유 육로로 티베트로 들어가 8월 22일에 베이스캠프(5,200m)를 구축했다.
치했고, 18일 4캠프(7,900m)를 설치한 후 다음날 정득채, 박헌주대원이 5캠프 설치를 겸한 정상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고소적응이 안된 상태였기 때문에 8,100미터에서 돌아서야 했다. 이후에도 두 번이나 정상공격을 준비했으나 번번히 5캠프도 설치 못하고 포기했다.
에 나섰다. 그리고 이날 오후 늦게 록밴드 바로 밑에 5캠프(8,300m)를 설 치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날 새벽 4시 45분, 희미한 달빛을 받으며 박현재 대원과 1명의 셀파가 마지막 캠프를 출발했다. 오전 7시에 북동릉과 만나 는 지점까지 오른 이들은 12시에는 세컨드 스텝을 통과해 8,600미터 고도 까지 올랐다. 공격조는 이곳에서 전위봉까지 우측으로 우회하며 등반했다.
그리고 완만한 설릉을 계속 오르니 거대한 커니스로 이루어진 정상이 나 왔다. 오후 2시 55분 커니스 상단에 삼각대로 보이는 쇠파이프를 잡고 오 르니 정상이었다. 초모랑마 여신이 4년 만에 광주-전남 산악인들에게 정 상을 내주는 순간이었다. |
한국산악인에게 개방된지 3년째를 맞는 티베트에는 전년도에 이어 초오유 (8,201m)와 시샤팡마(8,027m) 연속등정을 목표로 한 원정대가 들어왔다. 서울시산악연맹에 소속된 거봉산악회에서 결성한 이 원정대는 강태선단 장(44·동진레저 대표)을 포함 홍영길부대장(39·거봉레포츠 대표), 장재순 부대장(써미트 대표), 엄홍길등반대장(33)과 이상근(35), 소흥섭(34), 박병태(28), 박종숙(25), 민경태대원(24) 등 모두 9명으로 구성되었다.
유 베이스캠프(5,100m)에 도착했다. 이로부터 12일 뒤인 9월 8일 초오유 서면에 3캠프(7,250m)를 설치하고 정상공격 채비를 마쳤다. 9월 10일 밤 10시 엄홍길, 민경태, 최병수 대원이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이들은 전날 내린 눈으로 인해 깊은 눈을 헤치며 전진하다가 새벽 6시 7,600미터 지점 에 설동을 파고 두 시간 눈을 붙였다 이 지점부터는 엄대원이 스페인팀 두 명과 직등루트로 오르고 나머지 대원들은 본래 루트로 오르기로 했다.
다시 깊은 눈과 씨름을 하며 등반에 몰두한 지 만 11시간여 만인 11일 오 후 8시 25분 엄대장은 스페인대원 1명과 마침내 정상에 도달했다. 그로부 터 1시간 뒤에는 민경태, 최병수 대원도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초오 유 등반을 성공적으로 마친 거봉팀은 서둘러 캠프를 철수해 니얄람에서 하루를 쉰 뒤 9월 18일 시샤팡마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북서릉 노멀루트를 노린 거봉팀의 엄홍길, 박병태, 민경태 트리오는 셀파 2명과 함께 26일 2캠프(6,750m)를 세우고, 그 다음날엔 더이상 못올라가 겠다는 셀파들을 하산시키고 세 대원만으로 3캠프(6,950m)를 설치했다. 이어서 세 대원은 9월 28일 새벽 1시 30분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이들은 예상보다 러셀을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7,200미터 지점에서 잠시 휴 식을 취한 후 오전 8시 30분 다시 정상을 향했다.
박하기로 결심한 이들은 설동을 팠으나 그곳은 너무 추워 머물 수가 없었 다. 하는수없이 세 사람은 정상공격을 계속하기로 하고 오후 5시쯤 설동을 나왔다. 그로부터 밤 11시경 해발 7,450미터 지점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가 지쳐 더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시 설동을 파고 비박을 한 이들은 다음 날 오전 10시 30분에 또다시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조금 가다가 박병태대 원이 졸고 있어 엄대장은 그를 하산시켰다.
내내 등반을 계속해 아주 가파른 설사면을 올라 오후 7시 30분 엄대장이 먼저 정상에 도달했고 30분 뒤에는 민대원도 정상에 올라 두 사람은 국내 에서 두 번째로 8천미터급 2개봉 연속등정을 이룩했다. 그러나 이들이 어 렵게 3캠프에 도착했을 때 먼저 하산한 박병태대원이 실종된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결국 그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거봉산악회는 영광과 비극을 동 시에 겪으며 티베트 원정의 막을 내렸다. |
@@81년부터 한국산악인들이 꾸준히 진출해 온 파키스탄 지역에는 전년에 9개 팀이라는 사상최다원정대를 기록했는데 반해 93년에는 5개 팀으로 줄었다. 이는 한국산악계의 숙원 중 하나였던 낭가파르밧 이 전년도에 등정되면서 파키스탄쪽으로의 열기가 잠시 식었기 때문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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