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백의 고장 상주

-*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상주 1, *-

paxlee 2007. 12. 4. 19:55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상주1.
 
* “경상도(慶尙道)라는 이름은 경주(慶州)와 상주(尙州)를 함께 부르면서 유래되었다”
* "백두대간과 낙동강이 빚어낸 삼백(三白)의 고을 상주는 흰쌀과 누에고치, 곶감의 고장이다. 
▲ 상주 화북의 견훤산성에서 바라본 속리산 조망. 천황봉에서 문장대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마루금이 생동감 넘친다.

쌀, 누에, 곶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하얗다는 것이다. 영남지방의 큰 고을이었던 상주(尙州)는 예부터 이 세 가지로 유명해 상주를 흔히 ‘삼백(三白)의 고을’이라고 불렀다. 우선 ‘삼백미’로 불리는 상주쌀은 경기미와 어깨를 견줄 정도로 질이 좋았고, 임금의 수랏상에도 오르던 진상품이었다. 게다가 생산량도 많아 한때 상주에서 생산되는 쌀의 양은 강원도 전 지역에서 생산되는 그것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됐다고 한다.


그 다음은 누에.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에서 누에치기를 시작한 지는 4,000년쯤 되었는데, 상주 함창읍은 신라시대부터 명주 산지로 이름난 곳이었다. 하지만 한때는 산기슭을 온통 차지했을 뽕밭은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고, 양잠농가도 더불어 사라져 예전 명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요즘도 함창 장날엔 명주장이 설 정도로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은척면 두곡리에 은척뽕나무로 불리는 350년쯤 된 늙은 토종 뽕나무가 있는 것도 이 고장의 누에치기가 아주 오래됐음을 알려준다.
 

곶감의 명성은 아직도 대단하다.

 

상주는 시내 한가운데는 물론이요, 마을 길가에도 온통 감나무다. 그래서 가을엔 주민들이 감을 따는 광경을 쉽게 만날 수 있고, 가을에서 겨울 사이엔 어딜 가나 주렁주렁 매달린 곶감이 익어가는 건조장을 쉽게 볼 수 있다.


여기서 잠시 궁금증 하나. 요즘 곶감은 분명히 말간 빛이 도는 주황색인데 왜 ‘삼백’에 속할까? 사정은 이렇다. 타래에 그대로 건 곶감에서는 하얀 분가루가 생기지 않고 사람이 손으로 만지작거려야만 분이 생겨난다.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곶감을 걸어놓고 손으로 만지며 모양을 만들었기에 하얀 분이 나와 곶감을 감쌌던 것이다. 이렇게 해야 곶감을 오래 보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 하얀 분이 나오지 않아도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다.


           ▲ 함창 읍내에 있는 전 고령가야 왕릉. 낙동강을 중심으로 일어난

             여섯 가야 중 하나인 고령가야 태조의 무덤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이렇게 ‘삼백의 고을’로 유명한 상주는 영남지방에선 확고한 권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선 영남의 행정명인 경상도(慶尙道)는 천년 신라의 고도 경주(慶州)와 상주(尙州) 고을의 첫 글자를 하나씩 따서 지은 것이다. 또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은 삼한시대에 상주 벌판에 자리 잡았던 사벌국(沙伐國)의 도읍이던 낙양(洛陽)에서 유래했는데, ‘낙양의 동쪽에 와서야 강다운 면모를 갖추고 흐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 하니 상주 사람들이 갖는 자부심을 이해할 만하다.


뿐만 아니다. 이곳 상주는 낙동강 주변으로 매우 기름지고 널찍한 들녘이 펼쳐져 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곡창일 뿐만 아니라 천혜의 방어막인 백두대간을 두르고 금·쇠 같은 지하자원도 품고 있어 삼국시대에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화북면 속리산 자락에 있는 견훤산성과 모동면 백화산에 있는 금돌산성이 그 증거가 된다.


그래서 신라는 상주를 북방 경영의 전초기지로 삼았고, 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이곳을 제2의 도읍으로 일컬을 만큼 소중하게 여겼다. 이런 상주의 위상은 고려를 지나 조선까지 이어졌다. 세종 때에는 경상도 감영이 설치되기도 했던 상주의 전성시대는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경상도 감영이 대구로 옮겨가면서 시들고 말았다. 물론 그 덕분에 현재의 상주는 도시로서의 이미지보다는 편안한 시골로서의 이미지가 아주 강하게 남았지만 말이다.


           

          

            ▲ 공갈못 노래비. 상주 고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채련요인

              ‘상주 연밥 따는 노래’가 새겨져 있다.

 

임진왜란 때 비록 감영을 대구로 옮기기는 했으나 조선 후기에도 상주의 영역은 매우 넓었다. 대동여지도를 살펴보면, 상주의 범위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서쪽으론 백두대간을 넘었고, 동쪽으론 낙동강을 건넜다. 그래서 상주는 답사 동선을 잡기가 쉽지 않다. 가장 일반적인 여정은 중부내륙고속도로 점촌·함창 나들목을 나와 북부에서부터 남부로 내려가면서 둘러보는 것이다. 그 다음 서부의 백두대간쪽을 훑어본 다음 북서쪽의 늘재를 넘든지, 아니면 남서쪽의 충북 황간이나 영동으로 해서 경부고속도로로 빠져나가는 동선이 가장 자연스럽다.


상주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함창은 현재는 상주에 속한 한적한 읍이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현령이 다스리던 독립된 현이었다. 읍내 남쪽 언덕엔 심상치 않은 모습의 고분이 보인다. 바로 고령가야 태조의 무덤으로 전해오는 무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조선 선조 25) 경상도 관찰사 김수와 함창 현감 이국필이 ‘고령국 태조 가야왕릉’이라고 새겨져 있는 묘비를 발견하여 가야왕릉임을 확인했다고 전한다.


▲ 최근 복원 작업을 하면서 넓게 확장된 공갈못 전경.

공검면 양정리에 있는 공검지 삼한시대에 조성한 저수지다. 아직 변변한 이정표가 없으나 상주를 구성하는 중요한 장소이므로 반드시 들러보는 게 좋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공검이라는 큰 못이 있었는데 1195년(명종 25) 사록 최정빈이 옛터에 축대를 쌓아 저수지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못을 축조할 때 공갈이라는 아이를 묻고 둑을 쌓았기 때문에 공갈못이라고 부른다고 전한다. 인근 고을에는 공갈못을 못 보고 죽으면 저승에서도 쫓겨날 정도라는 이야기까지 있는 것을 보면 함창 공갈못의 명성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상주 사람들은 공검지라는 한자 지명보다 공갈못이라는 한글 지명을 더 선호한다.


다음은 오래 전부터 상주 고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채련요(採蓮謠)인 ‘상주 연밥 따는 노래’ 일부다.

 
1.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큰 아가
    연밥줄밥 내 따 주마 우리 부모 섬겨다오
2. 이 물꼬 저 물꼬 다 헐어놓고  쥔네양반 어디갔나 
        
    장터안에 첩을 두고  첩네방을 놀러갔소
3. 모시야 적삼에 반쯤 나온  연적같은 젖좀 보소
    많아야 보면 병이 난다  담배씨 만큼만 보고 가소
4. 이 배미 저 배미 다 심어놓으니  또 한 배미가 남았구나

     지가야 무슨 반달이냐 초생달이 반달되지

 5. 문오야 대전목 손에 들고 친구집으로 놀러가니

      친구야 벗님은 간 곳 없고 조각배만 놀아난다
 
6. 저기 가는 저 처자야 고추이나 잡아다오

      고추 농살 내가 놓게 새참이나 내다주소
 7. 싸립문 대청문 열어놓고 손님네는 어딜갔소

      무산 일이 그리많아 내 올 줄을 몰랐던가
  8. 못줄 잡는 솜씨따라 금년 농사 달렸다네

       모심기는 농사치곤 칸 좀 맞춰 심어주소
  9. 이 고생 저 고생 갖은 고생 모질게도 사는 목숨

       한도 많은 이 내 팔자 어느 때나 면해볼꼬
 10. 붕어야 대전봉 손에 들고 친구집으로 놀러가세

       친구야 벗님 간 곳 없고 조각배만 놀아난다
 11. 능청능청 저 비리 끝에 시누 올케 마주앉아

       나두야 죽어 후생 가면 낭군 먼저 섬길라네
 12. 고추 당초 맵다해도 시집살이만 못하더라

        나도야 죽어 후생가면 시집살이는 안할라네
            

연꽃도 모두 스러지고 연밥이 익은 어느 가을, 공갈못에서 연밥을 놓고 수작 거는 사내와 이를 받아넘기는 여인의 여유가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민요다. 김소희 명창 등이 불러서 유명해진 이 민요에는 유서 깊은 상주 고을의 자연과 향토색이 물씬 풍겨 나온다.

 

인근 고을끼리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민요의 특성인데, ‘상주 연밥 따는 노래’의 정겨운 가락은 영남지역은 물론 백두대간 너머 충청도 보은, 옥천은 물론 전북 내륙 지역까지 전파되어 그곳에서 모내기할 때도 곧잘 불리곤 했다. 이 채련요가 널리 전파될 수 있었던 까닭은 곧잘 고을 간에 문화적 장벽이 되곤 하는 백두대간 분수령이 상주 고을을 지나면서 몸을 낮추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갈못이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널따란 공갈못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조선 고종 때 못의 일부를 논으로 만들면서 축소되었고, 1959년 공검지 서남쪽에 오태저수지가 완공된 이후 다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성만 듣고 찾아간 이들은 너무 협소한 연못을 보고는 공갈못이란 이름의 유래를 ‘공갈을 치는 연못’으로 해석해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상주시에서는 공갈못 복원작업에 힘쓰고 있다. 이번에 가보니 주변의 논을 모두 연못을 바꿔 제법 공갈못의 영역이 넓어져 있었다. 물론 전남 무안의 백련지 정도는 아니었으나 우선 아쉬운 대로 이 정도면 옛 명성을 그려보는 데 부족함이 없을 듯했다. 전국에 연꽃으로 유명한 곳이 많지만, 역사나 전설 등 여러 콘텐츠를 볼 때 상주의 공갈못이 으뜸이 아니었던가. 아직 연뿌리가 넓게 퍼지진 않았지만, 연이란 식물이 워낙 번식력이 좋으니 곧 넓혀진 공갈못을 뒤덮은 연꽃, 그리고 연밥 따는 처자를 구경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에 벌써부터 은근히 가슴이 설렌다.

                  - >/ 글·사진 민병준  [ 월간 산 [456호] 2007.10 ]<-

                         
                                           /박수관의 상주함창연밥 따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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