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백의 고장 상주

-* [민병준의 향토기행] 상주 4. *-

paxlee 2007. 12. 6. 19:22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상주4
▲ 백두대간 국수봉에서 내려다본 중화지구대.

김준신 의병장 유적지를 벗어나 화령(化寧)으로 간다. 상주와 보은을 잇는 25번 국도가 지나는 화령재는 한때 제법 번잡하던 고개였다. 고갯마루 서쪽의 화서면 신봉리 장터에선 매월 끝자리가 3, 8일인 날에 화령장이 선다. 고려 때부터 화서•화동•모동•모서•화북•화남 등 상주 서부인 중화지역의 중심시장으로 역할을 해온 화령장은 1965년부터 현대식 정기시장이 개설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70~80년대엔 “다른 지방에서 화서는 몰라도 화령장은 안다”고 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당시 장날이면 사람 어깨가 부딪혀서 걷기 어려울 정도로 인파가 붐볐다지만, 지금은 점심 무렵이면 어느덧 파장 분위기가 풍겨 나오는 시골장이 되었다.


화령장으로 유명했던 화령은 6•25전쟁 때 낙동강 방어선 전투 중 칠곡군 가산면의 다부동전투 다음으로 치열했던 화령장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한국전쟁사’는 1950년 7월17일부터 25일 사이 화령장 주변에서 처절하게 벌어졌던 전투를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북한의 인민군 제15사단은 괴산에서 보은에 이르기까지 국군 제1사단을 공격하는 한편, 증강된 1개 연대로 일거에 화령장을 돌파하고 상주를 점령하려 했다. 국군 제6사단의 병참선을 차단해 이를 격파한 다음 북한군 제1사단과 협공하여 대구를 점령하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화령 주변은 백두대간을 따라 나있는 산간도로인 보은~화령장~상주에 이르는 도로와, 괴산~갈령~화령장~상주 도로의 합류지점으로 백두대간을 통과하여 상주로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그러나 국군은 이곳의 중요성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고, 따라서 병력도 배치하지 않았다. 이 점을 간파한 인민군은 이곳에 제15사단을 투입하여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 김준신 장군의 가족들이 자결했다는 낙화담.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보다 훨씬 넓었다고 한다.
그러나 화령장 주변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인민군 전령을 생포한 국군 제17연대가 적의 작전을 미리 파악하고, 화령 동쪽의 상곡리와 갈령 주변의 동관리에서 각각 매복작전을 펼친 끝에 남진하는 인민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이로써 백두대간 분수령을 넘어 상주 지역에서 국군 제2군단의 퇴로를 차단코자 했던 인민군의 의도는 저지되었다. 결국 개전 이후 계속 밀리기만 하던 국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최후의 낙동강 전선 구축에 6일이라는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되었다. 화령장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제17연대 전 장병은 1계급 특진하였다. 화서면 신봉리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화령지구전적비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화령에서 북으로 방향을 잡고 지방도를 타고 갈령을 넘으면 화북이다. 이곳은 속리산 천황봉, 청화산, 도장산을 잇는 삼각형의 한 중간에 자리한 산속의 이상향이다. 이곳은 어디서든 속리산의 불꽃같은 암봉들을 감상할 수 있다. 흔히 속리산이라 하면 유명한 법주사 때문에 보은을 떠올리지만, 주봉인 천황봉과 오래 전부터 속리산의 상징으로 군림해온 문장대는 상주에 주소를 두고 있다. 즉, 주봉인 천황봉은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요, 문장대는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다. 산행 거리도 상주 쪽에서 오르는 게 훨씬 가깝다.

▲ 중화지구대를 지나는 백두대간 분수령 일부 구간에는 논과 밭이 자리를 잡고 있다.

청화산(靑華山•984m)은 늘재의 잠룡(潛龍)이 승천하는 형국이라는 명산이다. 부드러운 능선과 날카로운 암릉이 적절히 섞여 있는데, 정상 부근의 바위에서 사방으로 탁 트인 주변 산하를 바라보면 정말로 행복하다. 특히 품위가 넘치는 천황봉의 위용과 문장대까지 울퉁불퉁 이어진 바위들의 기세가 제법 당당하다. 이 땅의 산하를 사랑한 조선의 지리학자 이중환 역시 청화산 칭송을 아끼지 않고 있다.


‘청화산은 내선유동과 외선유동을 위에 두고, 앞으로는 용유동을 가까이 두고 있는데, 수석의 기이함은 속리산보다 훌륭하다. 산의 높고 큼은 비록 속리산에 미치지 못하나, 속리산 같은 험한 곳은 없다. 흙으로 된 봉우리에 둘린 돌은 모두 밝고 깨끗하여 살기가 적다. 모양이 단정하고 좋으며 빼어난 기운을 가린 곳이 없으니, 거의 복지(福地)다.’


▲ 곶감을 널어놓은 풍경. 상주에서는 가을과 겨울 사이에 이런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이 정도의 극찬이니 이중환이 스스로의 호를 청화산인(靑華山人)이라 칭했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중환과 청화산의 인연을 아는 사람들은 이곳 어딘가에 이중환과 관계된 유적이 남아있을 거란 기대를 갖고 그 흔적을 찾고 있다.

도장산은 앞의 두 산에 비해 유명세는 떨어지지만 역시 속리산 천황봉•문장대, 청화산 등의 조망이 눈앞에 거칠 것 없이 펼쳐지니, 이러한 세 산 한가운데 자리한 화북에선 비록 풍수를 보는 눈이 트이지 않은 평범한 사람도 맑은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이 길손이 경험해보니 역시 사계 중에 가을 무렵, 추석 전후가 절정이었던 것 같다.


풍수가들은 이렇듯 ‘속리산 천황봉, 청화산, 도장산을 잇는 삼각형 산줄기의 형세가 마치 속세를 떠난 유•불•선의 대가들이 모여 앉아 담론하는 형국’이라 말한다. 그 삼각형 한가운데 자리한 화북의 용유동(龍遊洞)은 민초들이 절박하면서도 질박한 꿈을 모아 이뤄낸 이상향이다. 용유동은 병화(兵火)가 침범하지 못한다는 신비한 마을. 비결을 믿는 사람들은 이곳의 지형이 마치 소의 배 안처럼 생겨 사람살기에 더없이 좋다 하여 우복동(牛腹洞)이라고 부른다.


▲ 화령장 지구 전적비. 화령은 6•25전쟁 때 다부동전투 다음으로 치열했던 화령장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우복동의 지세를 보면 서쪽은 백두대간의 속리산 바위병풍에 첩첩이 막혀있다. 또 북쪽은 백두대간 늘재를 넘어야 괴산으로 연결되며, 남쪽은 갈령을 넘어야 멀리 상주로 갈 수 있는데다가, 고개를 넘지 않는 유일한 관문인 동쪽의 문경 가는 길은 가파른 벼랑이 연이어 있는 쌍룡계곡이 막고 있다. 지금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으나 이처럼 예전엔 접근조차 어려운 깊디깊은 산골이었다. 결국 우복동은 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 하여 이 땅에 사는 민초들이 영원한 이상향으로 여겨온 십승지(十勝地)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우복동 믿음의 중심지인 용유동 길가엔 ‘洞天’이라 쓰인 바위가 있다. 비스듬히 누운 바위 표면에 새겨진 멋들어진 글씨는 조선의 명필 양사언(楊士彦•1517-1584)의 친필이라 전한다. 우복동의 비결을 믿는 사람들은 “분명 우복동천(牛腹洞天)일 것인데, 우복동을 함부로 밝힐 수가 없으니 양사언이 지명을 밝히지 않고 그냥 동천이라고만 쓴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화북에서 돌불꽃 이룬 속리산, 신비로운 청화산과 도장산, 그리고 민초들의 이상향인 우복동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명당은 다름 아닌 장암리에 있는 견훤산성이다. 산성 입구에서 20여 분만 걷는다면 아마 평생 다시 만나기 어려운 풍광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자리가 다시 그립다.



/ 글•사진 민병준 [ 월간 산 [456호] 2007.1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