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백의 고장 상주

-* [민병준의 향토기행] 상주 3. *-

paxlee 2007. 12. 6. 18:55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상주 3.  
▲ 남장사 보광전에는 조선 초기의 철불좌상과 나무로 조각한 목각탱이 모셔져 있다.

아쉬운 마음으로 곶감 마을을 지나면 남장사(南長寺)다. 퉁방울눈으로 성난 표정을 표현하려 했으나 소박함과 천진스러움이 엿보이는 석장승의 안내를 받고, 목수가 예술적인 솜씨를 한껏 발휘한 일주문을 차례로 지나는 맛이 참 좋다.


상주 둘레의 남장사•북장사•갑장사•승장사를 흔히 ‘상주 4장사’라고 불렀는데, 이 중에서 현재 남장사의 규모가 가장 크다. 또한 불교가 성했던 이곳 상주에서도 현재 가장 사랑 받고 있는 절집이기도 하다. 삼층석탑을 거느린 극락보전이 있지만, 중심 건물은 보광전이다. 조선 초기의 철불좌상(보물 제990호), 그리고 보광전과 관음전에 모셔져 있는 목각탱도 불교 예술의 걸작으로 인정받아 각각 보물 제922호와 제923호로 지정되어 있다.


남장사는 진감국사가 830년(흥덕왕 5)인 57세 때 중국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장백사(長栢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진감국사는 중국 종남산에서 범패(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한 불교음악)를 배워 우리나라에 보급한 인물로서 그의 행적은 신라 말 최치원이 지은 쌍계사 진감국사비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832년 이곳에 무량전을 짓고 범패를 보급하니 사람들이 구름같이 많이 모였다 한다. 결국 남장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범패가 보급된 절집이라 할 수 있다. 규모가 크지 않음에도 범종각엔 종과 함께 사찰의 사물(四物)을 이루는 목어•법고•운판이 걸려있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 [좌]남장사 보광전 앞에는 특이하게도 파초를 심어두었다. [우]절 입구에서 사악한 기운의 접근을 막고 있는 남장사 석장승.

남장사를 나와 노음산 서쪽으로 휘돌아 북장사를 들른 다음 외서면 우산리에 있는 우복 정경세(鄭經世•1563-1633) 종가 병암고택을 찾는다. 우복은 조선 중기의 예학자로서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인 김준신, 그리고 ‘육지의 이순신’이라 불리던 정기룡 장군과 더불어 조선 중기 상주의 3대 인물로 꼽히는 분이다. 정기룡 장군보다 한 해 늦게 태어난 우복은 문신 최고의 영예직인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한 대학자였다. 서애 유성룡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영남학파에 속하게 된 우복이지만, 이기설 논쟁에서는 기호학파의 율곡을 편들기도 한 소신 있는 인물로 꼽힌다.


역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던 그는 조정에서는 나라의 기강과 백성의 생활안정을 강조했으며, 지방관이 되어서는 향인들의 교화에도 힘썼다. 종택은 대산루 남쪽 언덕에 자리 잡아 우산팔경(愚山八景)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명당지로서 현재 장군의 16대손이 살고 있다.


▲ 경천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회상 들판. 맑은 가을날에 보면 감탄사 절로 나오는 장관을 이룬다.

이젠 백두대간 주변의 상주를 짚어볼 차례가 되었다. 상주의 지형은 제법 복잡하다. 백두대간이 서부로 지나지만 이 산줄기가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백두대간을 끼고 있거나 그 서쪽의 공성•모동•모서•외남•화동•화서•화남•화북면 이렇게 적지 않은 8개 면이 모두 상주 고을 영역인 것이다.


그래서 백두대간 분수령을 경계로 도계(道界)나 군계(郡界)를 나누던 관습은 적어도 이곳에선 통하지 않는다. 분수령이 이 지역에서 면계(面界) 역할조차 제대로 못하는 까닭은 분수령의 산세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중화지구대’라 불리는 이 구간은 아마도 백두대간 전 구간 중에서 분수령의 고도가 가장 낮은 곳일 성싶다. 마루금은 겨우 해발 200~400m 내외를 넘나들며 이어지는 야산지대를 이룬다. 그러나 백두대간 분수령으로선 낮아도 농사터로는 고원지대다. 이곳은 평지와 평균기온이 3~5℃ 차이가 나는 까닭에 당도 높은 과일을 생산하는 과수농업이 아주 발달해 있다.


▲ [좌]우담 채득기 선생이 관직을 버리고 은거한 경천대 무정. 낙동강 조망이 좋다. [우]사벌왕릉 옆에 있는 화달리 삼층석탑.
화동면과 내서면을 오가는 백두대간 신의터재에서 멀지 않은 판곡리엔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인 김준신 의사 제단비가 있다. 김준신 의병장은 앞서 들렀던 북천에서 의병을 이끌고 왜군 정예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분이다. 당시 김준신 의병장은 중과부적으로서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남아는 마땅히 죽어야 할 장소에서 죽어야 한다”며 부하들과 함께 왜군 수백 명을 죽이고 장열하게 전사했다.
 
왜군은 전투에서 이겼음에도 예기치도 않은 곳에서 타격을 입게 되자 분풀이를 하기 위해 김준신 의병장 가족이 살고 있는 화동면 판곡리로 몰려갔다. 그러나 어찌 무기도 없는 민간인이 왜군 정규군을 당하겠는가. 마을사람들은 힘을 합쳐 저항했지만 남자들은 거의 학살당했고, 부녀자들은 왜군들에게 욕을 당하지 않으려 마을에 있던 연못에 몸을 던졌다. 그래서 연못 이름이 낙화담(落花潭)이다.
▲ 화북 장암리에 있는 견훤산성. 산세를 따라 암벽을 적절히 이용했기 때문에 절벽과 성벽이 조화를 이룬다.

임진왜란 당시 1,600여 평에 이르렀다는 낙화담은 세월이 흐르면서 메워져 이제는 불과 60~70평 남짓한 연못으로 변해 버렸다. 못 가운데 조성한 작은 섬엔 수백 년 묵은 노송 한 그루가 옛 이야기 들려줄 듯 서있다. 그 옆엔 노산 이은상이 김준신 의병장의 행적을 기려 쓴 낙화담의적천양시(落花潭義蹟闡揚詩)가 새겨져 있다.

 
     "임진년 풍우 속에 눈부신 의사모습
      집은 무너져도 나라는 살아났네
      절사곡(節士谷) 피묻은 역사야 어느 적에 잊으리

      설악(雪岳)높은 봉이 본대로 이르는 말
      꽃은 떨어 져도 열매는 맺었다고
      오늘도 낙화담 향기 바람결에 풍기네.
 
'육지의 이순신’이라 불리던 정기룡 장군을 비롯해 우복 정경  세, 김준신 의병장…. 이렇듯 환란의 시기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선 세 분이 모두 한 해를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상주 에서 태어났으니 참 특별한 인연임에 틀림없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이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상선(상주와 선산)에 있다’고 적은 것은 이 분들에 대한 헌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