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백의 고장 상주

-*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상주 2. *-

paxlee 2007. 12. 5. 19:29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상주 2.
▲ 임진왜란 때 왜군과 100여 차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정기룡 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의사.

공검지를 벗어나면 길은 상주의 으뜸 명소 옥주봉 경천대(擎天臺)로 이어진다. 그런데 경천대 가는 길의 즐거움도 보통이 아니다. 공검지에서 3번 국도를 타고가다 경천대로 들어서려면 널따란 평야지대를 지나게 되는데, 영남의 한 고을이 아니라 마치 호남평야 한가운데를 달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또 가는 길목에 충의사, 사벌왕릉, 화달리 삼층석탑 등 의미 있는 유적지가 자리하고 있으니 이만한 코스가 어디에 있을까 싶다.


충의사는 조선의 무장 정기룡(鄭起龍•1562-1622) 장군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그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왜군과 100여 차례 전투를 벌여 승리로 이끈 명장. 특히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토왜대장이 되어 6만 왜적을 대파하고, 상주•합천•의령 등의 여러 성을 탈환했고, 경주•울산을 수복하는 등 부족한 군사와 무기로 용맹을 떨친 그를 흔히 ‘육지의 이순신’이라고도 불렀다. 전쟁이 끝난 뒤인 1617년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올랐고, 1622년 통영 진중에서 병사했다.


▲ [좌]‘육지의 이순신’이라고 불리던 정기룡 장군 영정. [우]충의사 유물전시관에는 정기룡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실전에서 사용하던 칼 등이 보관되어 있다.

옥대•신패•유서•교서•교지 등 장군이 남긴 유물은 보물(제669호)로 지정되어 충의사 유물전시관에 보관하고 있다. 이외에도 이곳에는 장군의 행적을 기록한 ‘매헌실기’의 판목 58점과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실전에서 사용하던 칼 등이 남아있다.


충의사를 나와 사벌왕릉과 화달리 삼층석탑을 보고나면 곧 경천대다. 낙동강 물길이 크게 휘도는 곳에 자리한 경천대는 정기룡 장군이 무예를 닦으며 심신을 연마하던 곳이라 한다. 경천대 아래쪽 동쪽 층계엔 장군이 용소에서 얻은 용마에게 먹이를 주었다는 말구유가 있다. 하지만 사각형 구멍이 파여 있는 이 석물은 크기나 놓인 위치 등으로 미루어 건물의 주춧돌로 사용했던 석재로 여겨진다.


▲ 만산동에 있는 임난 북천 전적지. 임진왜란 때 조선 중앙군과 왜군 선봉 주력부대가 내륙에서 최초로 본격 전투를 벌인 곳이다.

경천대에서 내다보는 조망은 참 좋다. 상주 사람들이 ‘낙동강 천삼백리 물길 중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자랑하는 명소답게 낙동강 고운 모래밭 위로 솟은 절벽이 일품이다. 또 기암절벽 아래 강물이 크게 휘돌아 흐르고 그 물돌이 너머로 펼쳐진 널찍한 회상들판은 최고의 장관이다. 백마강(금강) 낙화암에서 바라보는 부여들판, 섬진강 오산의 사성암에서 내려다보는 구례들판의 그것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명품 풍경이다. 이곳 경치 역시 들판의 벼가 누릇누릇 익어갈 무렵이 으뜸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상주 사람들이 오죽하면 하늘이 만들었다고 하여 ‘자천대’라고 자랑했겠는가.


경천대를 나와 남쪽으로 방향을 잡게 되면 상주 시내로 들어서게 된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해 동류하는 북천을 건너면 상주 시가지. 하지만 이 작은 냇가를 건너는 일은 그리 간단치 않다. 이곳은 바로 임진왜란 때 조선 중앙군과 왜군 선봉주력부대가 내륙에서 최초로 본격 전투를 벌인 임난 북천 전적지이기 때문이다.



때는 현해탄 건너 섬나라 일본이 한반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1592년 임진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4월13일, 아침에 대마도를 출발한 왜군 선봉은 물밀 듯이 부산 앞 바다에 들이닥쳤다. 14일 부산진성, 15일 동래성을 함락한 왜군은 19일엔 언양성을 넘어뜨리고, 22일 영천성을 거쳐 별다른 저항도 없이 북진에 북진을 거듭했다. 그사이 조선은 18일에 유성룡을 도체찰사, 신립을 도순변사,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해 백두대간의 조령•죽령•추풍령에 방어선을 편성하였지만, 조선의 앞날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이때 왜군을 막기 위해 남진한 조선군은 23일 상주에 도착했으나 이때 병력은 고작 60여 명 정도였다. 상주 판관 권길과 호장 박걸이 밤새워 소집한 잔병과 장정은 800여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왜군은 무려 17,000명. 이때 이미 의병을 일으켜 상주에 있던 김준신 의병장 등은 상주성 사수를 주장하였으나 이일은 성을 버리고 북천에서 적을 막기로 한다.


드디어 운명의 25일, 조선군은 북천에 진을 치고 고니시가 이끄는 왜병 정예군 17,000여 명에 대항한다. 어이없게도 이일은 포진도 하기 전에 적의 급습을 받자 도주하고 만다. 하지만 종사관 윤섬, 이경류 등과 판관 권길, 사근도찰방 김종무, 호장 박걸, 의병장 김준신 등을 비롯한 800여 장병은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북천은 이들의 피로 붉게 변했다. 나중에 이곳을 철환산(鐵丸山)이라 했으며, 이들이 빠져 죽은 연못을 학사담(學士潭)이라 불렀다.
 


왜군의 북진을 늦추기 위해 초개와 같이 몸을 던졌던 호국 영령에게 묵념하고 북천을 건넌다. 이어 25번 국도를 타고 서쪽으로 달리다 보면 곶감마을로 잘 알려진 남장동이 오른쪽으로 나온다. 전국 곶감의 60%를 생산하는 상주는 무려 7,600여 농가가 연간 4,500톤의 감을 깎아 곶감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이곳 남장동이 으뜸이다.


감은 종류에 따라 반시, 고등시, 둥시로 나눠지는데, 떫은 맛이 없어 홍시를 만드는 반시와 고등시는 경남 일원과 전북 완주•남원 등지에서 많이 자라고, 떫은 맛이 나는 둥시는 상주 지방에서 많이 난다. 하지만 상주 둥시는 곶감이 되면서 떫은 맛이 없어지고 당도가 두 배로 증가하여 여느 고을의 곶감을 앞지르고 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도 둥시라 하면 상주 감을 가리킬 만큼 유명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길손이 상주를 찾은 9월 중순엔 2층 구조로 지어진 곶감 건조장이 텅 비어 있었다. 부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감 껍질을 깎고 곶감타래에 거는 생동감 넘치는 광경은 10월 초순부터 11월 중순까지만 볼 수 있다. 이때부터 한두 달 정도 건조장에 걸어놓고 건조시키는데, 이때가 되면 껍질이 벗겨져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는 곶감들이 말간 주황색으로 익어가고 있는 풍경을 구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