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다니는 사람은 대체로 좋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심성이 산이라는 자연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산에 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무엇인가 다른 데가 있는데 그것을 끄집어내서 이것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나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등산가 즉 산악인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 말은 내가 좋아하는 산악인하고는 다르다. 전자는 일반적인 뜻이고 후자는 특정인을 말한다. 이를테면 일반적 산악인은 보통명사고 특정인은 고유명사인 셈이다.
사람이 산에 간다고 누구나 산악인은 아니다. 등산애호가와 등산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한 ‘등산 전문가’라는 호칭이 있는데 이것을 ‘산악인’으로 오해하고 착각하기 쉽다. 물론 등산가들 가운데서도 등산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시 말해서 직업적인 등산가가 그런 사람이다.
이렇게 등산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은 등산 선진국인 구미에 많지만 근년에 우리나라에도 그런 산악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런 전문 등산가는 아니다. 물론 그러한 사람도 있으나. 직업적 등산가로서 세계 등산계에 이름이 난 사람들은 적지 않다.
그렇다고 등산계에 명성을 떨치거나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모두 등산을 직업적으로 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등산 초창기에 활약한 사람들은 거의가 그러했다. 알피니즘의 여명기를 연 드 소쉬르는 대학교수이고, 마터호른의 역사적 초등을 이룬 에드워드 윔퍼는 삽화 그리는 사람이었으며, 에베레스트 초등을 지휘한 존 헌트는 군인이었다.
등산을 직업으로 여기는 생활 의식이나 형식은 적어도 등산 초창기에는 없었다. 그 무렵의 등산가들은 오로지 눈앞에 벌어지는 미지의 세계이고 경이의 대상인 대자연에 매혹되어 행동했을 따름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등산을 생활 수단으로 여긴 데가 없이 순수 무구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무서움을 몰랐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 뜻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이 ‘단독행’의 선구자였던 독일의 게오르그 빈클러(1869~1888)가 아닌가 한다. 19세의 젊은 나이에 알프스 바이스호른에서 간 빈클러는 책 한 권 남길 틈도 없이 오직 홀로 암탑과 빙벽을 찾아 헤맸다. 그의 등산행위에는 직업의식이 끼어들 여유와 틈이 없었으며, 그야말로 등산가로 그 의식과 행위가 맑고 깨끗했다.
‘한 등산가의 회상’이라는 아름다운 명작을 남기고 요절한 에밀 자벨도 으뜸가는 순수 알피니스트였다. 그는 알프스에서도 특히 당 뒤 미디(3257m)에 매료되어, 창밖으로 멀리 허공에 알프스가 보이는 지방 대학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문학을 강의한 예술가요 철학자였다.
레오 마두슈카(Leo Maduschka·1908~1932)의 경우는 더 한층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등산가들 가운데 이른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을 보기 쉽지 않은데 마두슈카는 예외였다. 즉 그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학구적인 등산가였다.
마두슈카가 뮌헨 학생산악회의 간사로 활약한 데는 그의 학력이 좌우했다고 보아서 안 될 것 없다. 그러나 그는 끝내 젊은 나이에 치베타(3218m) 북서벽에서 추락사했는데,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산을 중심으로 격한 등반을 감행했던 그의 등반 정신은 독일 등산가의 전형으로 그의 뒤를 잇는 젊은 등산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마두슈카가 남긴 ‘청춘의 산’ 서두에 이런 글이 나온다. ‘나는 처음에 자기 속에서 우러나오는 충동으로 산을 오르고, 비로소 멀리 푸르러 보이는 정상의 장대한 미관을 의식하게 되어 그때 등산가가 갖는 강한 동경을 느꼈다. 그리하여 육체를 움직이는 일, 곤란과 위험을 이기는 일에 즐거움을 알았다.’
마두슈카는 장차 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생각을 했는데, 그가 산을 알게 되고 끝내는 자기가 그리워하던 세계에 짧은 인생을 바친 것을 보면 그 속에 직업의 냄새를 추호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고 직업적 등산가가 산악인으로서 부당하거나 부족하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밥벌이가 우선이냐 등산이 앞서느냐에 있으며, 직업을 전제로 하더라도 그 속에 등산가로서의 의식이 강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다.
가스통 레뷔파의 경우가 그 좋은 예다. 그는 어려서 몸이 약하면서도, 그리고 산과 멀리 떨어진 바닷가에 살면서도 장차 등산가가 되고 무엇보다도 등산 가이드가 되고 싶었다고 자기 유년기를 회상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훗날 위대한 등산가며 등산 안내자로 그 방면에 많은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등산가 의식과 가이드 의식이 철저하게 발휘되어 많은 기록적 초등반에 많은 산책까지 썼다. ‘바위와 눈’이며 ‘별과 눈보라’가 그의 이름을 당대에 그리고 후세에 널리 빛낸 것은 너무나 유명하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세계 등산계에서 독보적 존재다. 사실 그는 순수 알피니스트와 직업 등산가의 구별이 분명치 않을 정도로 두 세계에서 뛰어나다. 그에게서 등산이 직업처럼 보이는 것은 그의 많은 저술과 강연이 남달리 그의 생계를 돕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이를 위해 메스너가 산에 가지는 않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에베레스트는 세계 최고봉. 그래서 여기 도전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전문적인 산악인으로 생각하기 쉽다. 물론 에베레스트를 꿈꾸는 사람은 산악인 가운데 산악인으로 체력과 기술 그리고 정신면에서 남달리 뛰어나서 마땅하다.
77년 우리 원정대도 대원 모두가 직장인이었지만, 76년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하는 에베레스트 등반대의 경우, 당시 대원 12명은 평소 등산을 좋아하던 사람들로서 의사, 변호사, 대학교수에 영화제작과 요트제작 등 그 직업이 정말 다양했다.
이 등반대는 오히려 그 점을 자랑으로 한 듯이 그 원정기를 ‘The Boldest Dream’ 즉 ‘터무니없는 꿈’이라고 했다. 물론 그들은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하지도 않았겠지만 이렇다할 기록을 세우지 못한 채, 그러나 다행히 전원 무사히 돌아왔다.
등산가는 산이 좋아 산을 잘 오르내리는 사람으로 알기 쉽다. 그러나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산악인에게는 산악인으로서의 조건이 있다. 그리고 그 조건을 대체로 갖추었을 때 비로소 산악인으로서의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 조건이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강건해야 함은 물론이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여기에 등산에 대한 기술과 지식이 남달라야 한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본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어느 수준에 도달할 수가 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산사람은 이런 조건들을 구배했다고 그 테두리에 넣고 싶지 않다. 진정 마음에 드는 산사람은 넓은 시야와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지평선 너머를 내다보며, 한편 등산의 세계가 빚어내는 거칠고 힘든 속에서 아름다운 정서를 느끼고 거기에 젖어들 줄 아는 사람을 말한다.
등산은 확실히 과격하고 위험한 놀이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그때그때 뚜렷한 목표가 있다. 그러면서도 등산은 어디까지나 자유롭고 자율적인 의식과 행위의 세계다. 원래 등산 무대가 대자연이다 보니 불의의 구속이 예상된다. 그런데 실은 이것조차도 등산가 자신의 작위적 노력으로 감소시키거나 회피할 수가 있다.
나는 이러한 사람들과 하루 산행을 마치고 산장이나 천막 또는 비박 장소에서, 피로를 보이지 않고 말없이 스토브에 불을 지피는 그 순간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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