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항을 다녀와서 -
포항은 조용하고 작은 항구도시이다.
포항제철이 그곳에 있어서 더 유명한 포항이다.
포항에는 한강보다는 작지만 형산강이 흐른다.
형산강 다리를 건너면 바로 왼쪽에 포철이 있다.
그곳엔 현대제철도 있고, 동국제강도 있다.
그래서 포항은 철강단지가 유명하다.
포항제철은 우리의 기간산업시설로,
영일만의 신화를 이룬 철강산업의 메카이다.
포항은 포항공대가 산업역군을 배출한다.
포항공대는 세계적인 명문공과대학이다.
1986년 포항공과대학으로 개교하여,
1994년 공과대학교로 명칭변경을 하였다.
산업과 학문, 연구를 협동으로 실현한다.
2003년 자료에 의하면 전임교수 212명,
대학생 1,287명, 대학원생 1,491명,
연구원 675명이고, 예산은 1,780억원이다.
포항은 울릉도를 오가는 유람선이 있으며,
호미곶 해맞이 광장과 내연산 보경사가 있고,
구룡포읍 대보리에 장기갑등대와 등대박물관있고,
구룡포 과매기는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한다.
연오랑과 세오녀의 청동조각상이 바다를 지킨다.
구룡포, 화진, 칠포, 송도, 월포해수욕장이 있다.
포항에 가면 죽도시장을 한번 둘러봐야 한다.
고려충신 정몽주가 이곳 오천읍 출신이다.
이명박 대선후보가 이곳 홍해읍 출신이기도 하다.
- 포항시 안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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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
posco는 조화, 화합, 혁신의 표현이다.
영문 posco의 다석개 알파벳은 각각 독립적인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알파벳 's' 를 중심으로 균형적
으로 배치되어 내외부 조화와 화합을 지향하는 기업철학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동심원 형태
의 글자는 외부환경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영속적으로 발전해가는 포스코
의 미래상을 반영하였다.
POSCO는 포항을 대표하는 국가 기간산업시설이자 포항의 중요한 관광자원이기도 하다. 거대한 공장
시설, 수천 도의 고온으로 쇳물을 만드는 용광로 등이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한국의
경제 발전을 선도한 세계 굴지의 철광회사라는 명함으로 관광객들에게 가슴 뿌듯한 자부심을 심어 주기
도 하기 때문이다.
POSCO는 창사 이래 1997년까지 1200여만 명의 방문객이 다녀갔으며, 1980년대 이후에는 연평균 60
만 명 이상이 방문하고 있다. 특히 이 중에는 일본의 다나까 수상, 영국의 대처 수상 등 외국의 수상급
이상 귀빈만 31명이나 된다. 연도별 관광객 추이는 다음과 같다. 1960년대 자본과 기술, 경험도 없이 산
업의 근대화를 위해 1968년 4월 1일 포항제철 창립식을 갖고 박태준 사장을 비롯하여 39명의 임직원이
건설하였다.
1973년 조강능력 103만톤의 1기 설비를 준공하였다. 네번의 확장공사를 하여 1983년 조강 910만톤의
포항제철소를 완공하였다. 포스코는 영일만의 신화를 광양만으로 이어가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여
1985년 광양 1기를 시작하여 1992년 종합준공하여 기술자립을 위해 독자기술을 개발 필요성에 따라 포
항공과대학교와 산업과학기술연구소를 잇는 산학연체제를 구축하였다.
포스코는 지속적인 설비효율화와 생산성 향상을 통해 1998년 조강생산 기준 세계 1위의 철강회사롤 발
전하였다. 1999년 추진된 프로세스 혁신을 통해 구매, 생산, 판매 등 전 부문의 업무 프로세스를 재 정립
하고 디지털 통합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2000년 민영화된 포스코는 2007년 현재 조강생산 5,000만톤을
목표로 해외 생산기지를 확대하기 위해 베트남, 인도에 일관제철소건설을 추진하는 등 주요 해외거점
에 생산 설비를 증설하고 있다.
포항공대
1986년 대학 설립인가를 받아 포항공과대학으로 개교하였으며, 1994년 포항공과대학에서 포항공과대
학교로 대학 명칭을 변경하였다. 설립자는 박태준이다. 교훈은 성실, 창의, 진취이다. 국제적 수준의 고
급인재를 양성함과 아울러 산업(産業)·학문(學文)·연구(硏究) 협동의 실현을 통하여 사회와 인류에 봉사
할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초대학장에 김호길(金浩吉)이 취임하였다.
등록금의 54.2%를 장학금으로 환원하여 재학생 전원에게 장학금을 지급함으로써 학구열을 높이고 있
으며 학생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한다. 한편, 교내에 산업계와의 연구협력을 위한 산업과학기술연구소
를 설치하였다. 2003년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 캐나다 워털루대학교, 오스트레일
리아 뉴캐슬대학교, 독일 아헨공과대학, 프랑스 툴루즈대학교 등 해외 13개국 50개 대학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또한 지능자동화연구센터와 항공재료연구센터는 프랑스 공정시스템연구소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의 재료공정연구센터에 각각 현지 연구소를 설치하여 공동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2003년 4월 현재 1개 일반대학원, 2개 전문대학원(철강대학원, 정보통신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11개
학과(학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설연구기관으로 가속기연구소, 우수연구센터 8개 연구소(전산수학
연구센터, 생리분자과학연구센터, 기능성 분자집합체연구센터 등), 창의적 사업연구단 7개 연구소, 기
타 연구소 32개 등 50개 연구소가 있다. 2003년 현재 전임교원 수는 212명, 대학생은 1,287명, 대학원생
은 1,491명(특수대학원 제외), 연구원은 675명이고 2003년 예산은 1,780억 원이다. 경상북도 포항시 남
구 효자동 산 31번지에 있다.
왜 호미곶인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호미곶은 호랑이의 꼬리라 하여,한반도의 정기가 서려있는 곳으로 일찍이 16
세기 조선 명종때 풍수지리학자인 남사고는 산수비경(山水秘境)』에서 한반도는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
로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으로, 백두산은 호랑이 코,호미곶(虎尾串)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고 기술하
면서 천하의 명당이라 하였다.영일만의 끝부분(포항에서 38㎞)인 호미곶 앞바다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
하는 해역으로 각종 물고기의 회유지이다.
따라서 정치망 어업이 활발하고, 오징어, 꽁치, 고등어, 김, 미역, 전복, 성게 등 각종 수산자원이 풍부하
다. 1903년에 만든 국내 최대규모의 등대와 1985년 준공한 국내 최초의 등대박물관이 위치한 이 곳은
전국에서 일출을 가장 빨리볼 수 있는 곳이다. 관광명소이자 청정해역을 보유하고 있어 호미곶(대보면)
자체가 자연공원이라 할 만큼 산세가 수려하고 주변의 웅장하다.
호미곶 해맞이 광장
이곳 해맞이 광장은 새천년 한민족해맞이축전 개최장소로 13,920평의 부지에 기념조형물(상생의 손),
성화대, 영원의 불씨함, 채화기 (천년의 눈동자), 캐릭터상품특판장, 공연장, 주차장, 관리소 등이 조성
되어 있으며광장 진입로에 조성된 유채꽃단지에는 매년 4월~5월경에 유채꽃이 만개하고 있다. 특히 이
곳 광장의 기념조형물은 사람의 양손을 청동 소재로 바다와 육지에 각각 설치하여 서로 마주보는 형상
으로 상생과 화합을 상징하고 있으며 변산반도의 천년대의 마지막 햇빛, 날짜변경선에 위치한 피지섬의
새천년 첫햇빛, 이곳 호미곶 새천년 첫햇빛 등이 합화ㆍ안치된 성화대의 불씨는 각종 국가대회 성화의
씨불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장기갑등대
경상북도 포항시 구룡포읍 대보리에 있는 한말(韓末)에 제작된 등대이다. 1982년 8월 4일 경상북도기념
물 제39호로 지정되었다. 전국 최대 규모로 일명 대보등대(大甫燈臺)라고 한다. 1903년(광무 7) 12월에
건립되었다. 팔각형의 근대식 건축양식으로 높이 26.4m, 둘레는 밑부분 24m, 윗부분 17m, 광력1,000
촉, 광불거리는 16마일이다.1901년(광무 5) 일본수산실업전문대학교 실습선이 대보 앞바다를 항해하다
가 암초에 부딪쳐 몰살하였는데 일본은 이 사건이 한국의 해안시설 미비로 발생하였으며, 해난사고 발
생책임이 한국에 있다고 주장하여 손해배상을 요구하므로 하는 수 없이 한국 예산으로 일본에게 등대시
설을 공사하게 하여 제작한 것이다.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벽돌로만 지은 건물로 건축기술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등탑(燈塔) 내부는 6
층으로 각층 천장에는 조선왕실의 상징인 배꽃 모양의 문장이 조각되어 있는 등 문화재적 가치를 지니
고 있다. 등대 옆에 장기갑등대박물관이 있다. 해운항만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연오랑과 세오녀 청동조각상
이 청동조각상은 전체높이가 8m이고, 상의 높이는 3m이다. 조각산 좌대는 두 사람을 일본으로 싣고 간
바위이고 바다 조형물은 영일만과 동해의 파도를 상징하고 있다. 원형의 둥근 조형물은 이 땅을 밝게 비
추는 해와 달을 상징하며, 원형조형물의 중앙의 검은 부분은 일본에 전파 선진 문물인 비단(일월정을 상
징하는 국가제천행사의 제물)을 상징하고 있다.
연오랑과 세오녀 (延烏郞 細烏女) 전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신화. 신화의 흔적을 갖춘 우리나라 유일의 일월(日月) 신화이며 일본의 건국
신화와도 관계가 있는 작품이다. 신라 제8대 아사달 이사금(서기154-184)때, 동해바닷가 조그마한 오
막살이에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남편 연오랑은 가난하지만 부지런한 어부였
다. 그는 아침밥만 먹으면 바다로 나가 곡를 낚거나, 조개를 캐거나, 미역을 따며 하루종일 일을 했다.
남편이 이렇게 바다에서 하루종일 해가 지도록 일하는 동안, 아내 세오녀는 밭을 매거나 길쌈을 했다.
세오녀는 배 짜는 솜씨는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아줄 정도로 꼼꼼했다. 이렇게 연오랑과 세오녀는 남
들이 부러워할 만큼 정답게 살았다. 어느 날 아침 연오랑은 늘 하듯이 낚시대를 들고 고기를 낚으러 받
로 나갔다.
연오랑은 해변을 거닐며 낚시하기에 알맞은 곳을 찾다가 거북처럼 엎드려 있는 바위하나를 발견하여 신
을 버어놓고 그리로 올라가 낚시대를 드리웠다. 그런데 그날 따라 고기가 통 잡히지 않았다. "그 참 이상
하다. 오늘은 고기들이 배가 고프지 않은 모양이지?" 점심때까지 헛손질을 하고 있는데, 가자기 몸이 기
우뚱했다. 깜짝 놀라 주위를 살펴보니 놀랍게도 바위가 통째로 두둥실 떠가고 있었다. " 아니 이게 웬일
이람?" 연오랑을 태운 바위는 둥실둥실 해뜨는 쪽으로 흘러갔다. 한가지 이상한 것은 황금빛으로 빛나
는 태양이 연오랑의 머리 위에 바짝 붙어 따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연오랑을 실은 위는 점점 빨라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쏟살 같이 푸른 물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한편 점심을 지어놓고 남편을 기다리던 세오녀는 아무리 기다려도 연오랑이 다녀오지 않자 근심이 되어
바로 나갔다. "오늘은 낚시를 하겠다고 했으니까 저바위 쪽으로 갔으오 텐데!" 세오녀는 모래를 밟으며
남편이 자주가는 바위가 있는 해변가로 갔다. 그러나 남편의 모습은 거기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세오
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남편을 불렀으나, 아무데서도 대답이 없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한 곳에 나란히
놓여있는 신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 보아도 남편의 것이 분명했다.
세오녀는 위를 다 훑어 보았으나,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어? 저 위는 꼭 거북이가 엎디어 있는 것 같은
데!" 세오녀가 신을 벗어놓고 그 바위에 오르자. 이번에도 바위가 둥둥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세오녀를
태운 바위는 점점 빨라지면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흘러갔다. 한편 머리에 해를 이고 동으로 흘러갔던 연
오랑은 이윽고 어떤 섬에 도착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일본의 서쪽 해안이었다. 당시 일본은 채 나라를
이루지 못해 부락마다 싸움이 심했다. 전체를 휘어자는 지도자가 업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판국에 연오
랑이 바위를 타고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바위를 타고 온 손님을 보자. "저 분은 하늘에서 오신 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우리들
의 왕으로 받들자." 하며 연오랑을 환영했다. 일본사람ㄷㄹ의 간절한 부탁에 못 이겨 임금이 된 연오랑
은 마음이 무거웠다. 신라에 두고온 아내가 그리웠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한 신하가 바삐 달려오더니
연오랑에게 아뢰었다. "서쪽 해안에 거북 바위를 탄 왠 여자가 나타났습니다.!" 연오랑이 나가보니 놀랍
게도 그것은 세오녀였다. 그리하여 세오녀는 일본의 왕비가 되었다.
연오랑이 일본을 다스리게 되면서 일본에는 태평세월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신라에는 이상한 일
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연오랑과 세오녀가 떠난 이후 신라에는 해도 뜨지 않고 달도 뜨지 않았다. 또 곳
곳에서 여우가 나타나 사람ㄷㄹ을 놀리고 도망갔으며, 갑자기 도둑이 날뛰었다. 아달다 이사금은 갑자
기 들이닥친 이변에 고심 하다가 점정이를 불러 그 까닭을 물어 보았다. 점장이는 " 우리나라에 갑자기
이런 괴변이 일어나는 것은 얼마 전까지 해와 달이 정기를 지닌 두 분이 함께 동해안에 살고 있었는데,
그 분들이 한꺼번에 왜국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라임금은 그 말을 듣고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 연오랑에게 그 사정을 하소연하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
고 물었다. 연오랑은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이 나라로 와 임금이 된 것은 하늘
이 시켜서 한 일이므로 내가 도로 신라로 돌아 갈 수 없는 일이오, 그러나 신라라면 바로 내가 태어난 나
라이므로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소. 여기 내 아내가 짠 비단이 있소. 이것을 줄 테니 이것을 제물로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다시 해돠 달이 나타날 것이오." 사신이 돌아와 그대로 아뢰자 아달라 이사
금은 제단을 차려 그 위에 세오녀가 짠 비단을 올려놓고, 해와 달을 다시 보게 해 달라고 빌었다.
제사가 끝나자 아닌게 아니라 사라졌던 해와 달이 다시 나타나 온 누리를 밝게 비추었다. 세오녀의 정성
이 깃든 비단이 하늘을 움직였던 것이다. 해와 달을 되찾은 신라 사람들은 그 뒤로 동해 벌판을 영일(迎
日) 이라고 불렀으며, 비단을 제물로 바치고 제사를 지내던 곳을 도기야(都祈野)라고 했다. 지금의 영일
군 오천면 도구동이 바로 그곳이다. 영일군은 지금 포항시에 포함되어 있다. 아달라 이사금은 귀비고(貴
妃庫)라는 이름의 창고를 짓게 하고는, 해와 달을 불러낸 신비한 비단을 거기에 보관 시켰다. 지금은
그 귀비고는 업어지고 그 자리에 일월지(日月池)라는 커다란 못이 남아 있는데, 신라 사람들은 가뭄이
들거나 별이 나돌면 으레 이 일월지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일월지의 위치는 포항시 남구 오천읍 용덕리 60. 해병대 제 1사단 경내 699만평 중에 위치한다. 대한민
국에서 제일 넓은 부지를 장악하고 있는 해병 제 1 사단의 민사참모본부에 평일에는 하루전에, 휴일에
는 3일전에 전화 또는 공문으로 답사견학의사를 밝히고, 사단 서문으로 접근하여 출입증을 받아 구경할
수 있다.
- 포항 출장을 가서 많은 곳을 돌아보지는 못 하였지만, 자료를 찾아보고 짧은 글을 써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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