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 The Everest Years…A Climber’s Life *-

paxlee 2008. 5. 4. 22:21
 
      The Everest Years…A Climber’s Life [북리뷰]
 
세계적인 영국 등반가의 세 번째 자서전
1985년 4월21일, 노르웨이 등반대에 합류한 영국의 유명 산악인 크리스 보닝턴은 에베레스트 남동릉의 정상능선, 즉 눈처마가 늘어선 설릉으로 올라 힐라리스텝 위에 도달했다. 산소장비를 휴대하긴 했지만, 당시 50세 나이로 에베레스트를 등반한다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100여m 위의 정상에 먼저 도달한 선등대와 재회하기 위해 발걸음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사력을 다해 전진을 계속했다. 10년 전인 1975년 자신이 이끈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대의 제2차 등정조 피터 보드만과 셰르파 페르템바가 하산하다가 단독등반 중인 믹 버크를 만났던 곳이 바로 이 부근이었다.

그 때 안개 속으로 사라진 믹 버크 대원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갑자기 눈앞에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보닝턴의 우측, 눈처마가 무너져내린 자리 사이로 북동릉의 암탑들과 길게 뻗은 칼날능선이 바라보였다. 3년 전인 1982년 자신이 이끈 등반대의 조 태스커와 피터 보드만의 주검이 거기 어딘가에 묻혀 있으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쓰라렸다.

처음에 노르웨이 에베레스트대가 보닝턴의 동참을 권유했을 때 그는 그 북동릉 비극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여서 거절했다. 그러나 모든 산악인들의 꿈인 에베레스트 등정의 유혹은 너무나 강렬하여 마침내 등반대 운영 책임이 없는 대원 자격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그는 피터 보드만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유품, 즉 보드만이 1975년 남서벽 등정 당시 입었던 셔츠를 그의 미망인으로부터 넘겨받아 셰르파 페르템바에게 주고,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가져오게 했다. 먼저 정상을 밟은 오드, 비요른, 페르템바의 환영을 받으며 드디어 66번째 등정자가 되었다.

그는 탈진상태로 눈밭에 꿇어앉아 흐느낌과 함께 터져 나오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 여태까지 그와 함께 등반활동을 전개하다가 타계한 동료들을 애도하는 슬픔의 눈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평생 추구해 오던 것의 총결산의 마당에서, 즉 성취감에서 우러나오는 희열의 눈물이었다.

그러나 등정의 기쁨도 잠시, 아름다운 파노라마를 감상하는 기쁨도 잠시, 어떻게 하면 무사히 하산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에 휩싸였다. 기상 상태의 호조건을 맞이한 행운도 따랐지만, 이 등반대는 대원들과 셰르파들 사이의 관계가 돈독하여 10일 후 대원 17명이 등정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보닝턴이 가장 존중하는 팀웍을 유감없이 발휘한 등반대였다.

보닝턴은 1960년 군인들로 구성된 안나푸르나 2봉 등반대원으로 발탁되어 서릉으로 등정했다. 1961년 그는 눕체 등반대에 참가하여 남벽으로 등정했다. 같은 해, 그는 이안 클러프, 돈 윌런스, 얀과 몽블랑 남벽 프레니 중앙 필라를 초등하고 유명해졌다.
1962년 그는 이안 클러프와 그랑조라스 북벽의 워커스퍼를 등정했고, 이어 아이거 북벽 영국 초등자가 되었다. 그는 힌두쿠시의 코이반다카를 횡단했고, 배핀아이랜드의 아스가드봉의 1,200m 동벽을 등정하여 인공등반기술의 달인으로 인정받았다.

1966년 그는 영국 데일리 텔리그라프 지의 사진기자 자격으로, 미국 산악인 존 할린의 아이거 북벽 직등대에 참가하여 지원조 역할을 했는데, 하얀 거미 아래 오버행 위 슬랩에 설치한 7mm 고정자일이 끊어지며 존 할린 대장이 추락사하여 산에서 첫 번째 비극을 겪었다.

취재차 그는 서릉으로 아이거 정상에 올라 두갈 해스턴을 기다리던 중 손에 심한 동상을 입고 해스턴과 함께 치료를 받으면서 친교를 맺게 되어 드디어 히말라야 거벽 등반계획이 태동되었다.1970년 그는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대를 이끌었다. 마틴 보이슨과 닉 에스코트 대원이 아이스리지의 최난코스를 돌파했다.
 
등반대는 최종캠프인 C6(7,315m)까지 5,000m의 고정자일을 설치했다. 보닝턴 대장도 등정에 일조하기 위해 최종캠프까지 짐을 운반했다. 윌런스와 해스턴이 역사적인 등정에 성공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맨 나중에 하산하던 이안 클러프가 C2 아래에서 눈사태로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에베레스트 남서벽은 웨스턴쿰에서 2,430m 높이로 치솟은 피라밋형 거벽이다. 최난 코스는 벽의 8,300m 지대를 가로지르는 높이 300m의 록밴드다. 그레이트 센트럴 걸리가 록밴드 아래에서 좌우로 갈라져 오른쪽은 람페 형태로 남동릉을 향해 대각선으로 300여m 뻗어 있고, 왼쪽은 더욱 가파른 형태로 록밴드를 통과하는 걸리와 이어진다. 록밴드 위쪽에는 제2 빙원이 있다.

1970년 일본대를 시작으로, 1973년까지 5개 등반대가 록밴드 우측으로 이 벽을 공략했으나 줄줄이 실패했다. 1972년 포스트 몬슨에 도전한 영국 보닝턴대도 그 중 하나였다. 5일간 폭설이 적설량 3m를 기록하며 캠프를 파괴시켰고, C5의 밤 기온은 영하 40℃를 넘나들었다. 보닝턴 대장도 C5까지 짐을 운반하며 안간힘을 썼지만, 등반대는 분루를 삼켜야 했다.
 
BC 매니저 토니는 셰르파들과 쿰부 아이스폴을 등반하던 중 빙탑 붕괴로 혼자 사망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974년 보닝턴은 두갈 해스턴, 더그 스코트, 마틴 보이슨, 그리고 인도 산악인들과 함께 칼날능선인 동릉으로 창가방을 초등하고, 이듬해 1975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재도전했다. 이번에는 록밴드 왼쪽을 공략했다.
 
닉 에스코트와 투트 브라이스웨이트가 드디어 난코스 록밴드를 돌파했다. C6(8,321m)에서 두갈 해스턴과 더그 스코트가 빙원을 가로질러 500m의 고정자일을 설치하고, 다음 날 등정에 성공한 후 남봉의 설동에서 비박하고 C6로 귀환했다. 2차로 피터 보드만과 셰르파 페르템바도 등정하고, 남봉에서 믹 버크를 거의 2시간 동안 기다렸지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1977년 보닝턴은 카라코룸의 오거(7,285m·바인타브락) 등반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자일파트너로 참가하기로 했던 두갈 해스턴이 스위스의 자기 집 부근에서 스키를 타다가 눈사태로 사망했다. 보닝턴은 닉 에스코트를 데리고 이 등반에 참가했다. 더그 스코트와 브라이스웨이트 조는 중앙스퍼로 루트를 개척하려고 했다.
 
스코트가 걸리를 선등하다가 낙석을 유발하는 바람에 후등자 브라이스웨이트는 대퇴부에 큰 부상을 입고 등반을 포기했다. 보닝턴과 에스코트는 남벽으로 루트를 개척했다. 그들이 알파인스타일로 정상 리지에 도달해보니 주봉으로 이어지는 중앙봉을 등반하자면 많은 암벽장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서봉을 오르고 하산했다.

에스코트는 기관지 악화와 탈진으로 등반을 포기했다. 스코트와 보닝턴, 모, 클리브 4인은 남서릉의 가파른 버트레스로 서봉을 넘어 주봉 아래 7,000m 지점 안부 부근에 설동을 설치하고 비박했다.

다음 날 스코트와 보닝턴은 두 피치의 암빙지대를 올라 피너클에 도달한 후 트래버스하여 45m 화감암벽 밑에 도달했다. 남벽 등반을 시도하다가 피로가 완전 회복되지 못한 보닝턴을 위해 스코트가 계속 리드했다. 그는 벽을 오르고 트래버스하여 크랙으로 다시 벽을 오르고 펜듈럼하여 또 다른 크랙을 찾아내며 등반을 계속했다.
스노 걸리가 나타났다. 스노 걸리의 오버행은 보닝턴의 등을 인간사다리 삼아 돌파하고, 일몰에 두 사람은 주봉 정상을 밟아 초등에 성공했다. 그러나 어둠이 닥쳐왔기 때문에 그들은 하산을 서둘러야 했다. 스코트가 20m를 자일하강하고, 수평으로 40여m를 트래버스했을 때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은 그의 발이 베르글라(바위에 얇게 얼어붙은 얼음)에 미끄러지며 마치 펜듈럼이라도 하듯이 자일에 매달려 시계추처럼 스윙하며 쿨와르 반대쪽 벽을 향해 돌진했다.

더그 스코트는 두 발로 충격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하다가 양쪽 발목에 골절상을 입었다. 크리스가 설치한 자일로 두 사람은 15m 아래 스노레지까지 하강하여 입고 있던 복장 그대로 추위에 떨며 비박하는 고초를 겪고 다음 날 세 피치를 자일하강하여 눈밭에 도달했다. 더그 스코트는 동료들이 깎은 커다란 스텝 위로 기어서 100여m 떨어진 설동까지 돌아왔다.

그들은 폭풍설로 이틀간 설동에 갇혀 지내고 식량이 떨어져 차만 끓여 마셨다. 눈보라 속에 동료들이 설치한 스텝을 따라 더그 스코트는 사력을 다해 서봉까지 기어올랐다.

보닝턴은 서릉 상의 눈도랑 속으로 하강 중에 추락하여 갈비뼈 2개가 부러지는 골절상을 입었고, 또한 폐렴에 걸렸다. 동료들의 헌신적인 지원을 받으며 스코트는 오버트라우저의 무릎이 다 닳도록 기어서 8일만에 BC에 도달했다. 이것이 소위 산악인들에게 회자되는 '오거 신화'다.

1978년 보닝턴은 K2 서릉 등반대를 이끌었다. 더그 스코트와 닉 에스코트가 설사면을 횡단 중에 눈사태가 덮쳐 닉 에스코트가 사망했다. 1981년 그는 중국의 콩구르를 서릉으로 등정했다. 1982년 에베레스트 북동릉의 미등 구간을 등반 중에 피터 보드만과 조 태스커가 실종되었다. 1983년 보닝턴은 인도의 시블링 남서봉을 남동릉으로 등정했다.

같은 해 남극의 빈슨매시프 등반대에 초빙되어 영하 30℃의 혹한과 시속 96km의 강풍 속에서 릭 리지웨이(K2 북동릉 등정자)와 상부 암탑에 도달했다. 혹한을 견디지 못한 리지웨이는 하산하고 보닝턴은 단독으로 등정했다. 리지웨이는 며칠 후 재도전하여 등정했다.

1986년 보닝턴은 노르웨이의 여러 벽을 등반했다. 1987년 그는 멘룽체 서봉 등반대장으로 서릉으로 팬쇼와 힝크스를 정상에 세웠다.

저자 / 크리스 보닝턴 / 크라운판, 256쪽. 1987년 미국 바이킹 펭귄 출판사 간행.
리뷰 / 이창기 전 강릉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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