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 즐거운 나의 집 *-

paxlee 2008. 5. 5. 05:43

   

                                  즐거운 나의 집

 

<즐거운 나의 집>은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 아들, 그리고 아빠가 만나고 헤어지기도 하며 모든 가족이 겪는 행복과 불행, 웃음과 눈물, 생과 사가 담겨 있다. 읽는 내내 "우리 집도 이런데……" 하고 중얼거리며 미소 짓게 하는 이 소설은, 불완전해 보이는 가족 때문에 마음의 지독한 몸살을 앓으며 사춘기를 넘어야 했던 위녕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십대의 마지막을 엄마와 함께 보내면서, 그토록 간절했던 진정한 이해와 사랑을 통해 자신의 소중함을 되찾아가면서 삶의 주체로 당당하게 성장하는 위녕의 이야기는 상처와 고통의 치유가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읽어가노라면 가족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에게 새겨진 상처를 치유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며, 작가가 선물한 금빛 열쇠를 하나씩 손에 쥐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만의 세상을 열어갈 큰 위로와 격려를 얻게 될 것이다. 자칫 심각해기기 쉬운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가족의 의미"를 주인공 위녕을 통해 십대 소녀 특유의, 당돌하면서도 유쾌한 필체로 그려낸 공지영의 이 작품은 우리 가슴에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파문을 일으킬 것이다.

 

시대와의 공감, 긴장과 대결

 

공지영의 문학이 시대와 공감하는 방식은 ‘상처를 응시’하고 ‘그것과 대결’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치열한 긴장’이 작가 스스로 문학에서 가장 중요하다 여기는 명징한 ‘캐릭터’를 탄생시키고 치밀한 서사의 ‘상황’을 낳았다. 동시대의 한국 소설이 미학과 문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대중과 멀어지는 동안, 공지영은 생생한 시대와의 공감을 바탕으로 한 흡인력 있는 서사를 구축하여 대중과 성공적으로 교감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문학적 오디세이는 이번에 출간한 소설 <즐거운 나의 집>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선보이고 있다. 바로 ‘긴장과 대결에서 여유와 화해’로 나아간 것이다.

 

공지영이 <즐거운 나의 집>을 집필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 내게 ‘새로운 의미의 가족’에 대해 나와 내 아이들의 이야기를 수필로 써달라고 요청하신 것이 시작이었다. 싱글맘으로 성(姓)씨가 다른 세 아이를 키우면서 스스로에 대한 주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내게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기도 했다. “왜요?”라고 물으니 그분은 대답하셨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가족의 의미도 필요한 것이니까요.” (작가의 말(342쪽) 중에서) 성공한 작가 공지영에게 자신의 개인사는 결코 내세울 만한 이력이라 할 수 없다.

 

그래서 작가 스스로 ‘주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별나 보이는 가족 이야기의 주인공이 베스트셀러 작가 공지영이 아니라면? “한해 이혼하는 부부는 12만~16만 쌍. 이혼자 10쌍 중 6쌍은 아이가 있는 가정, 이혼 가정 아이들은 2006년에도 12만 명 이상”이라는 통계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가족의 현실을 보여준다. 여기에 “2005년도 한 해 결혼한 재혼 부부(남녀 중 한쪽 또는 양쪽이 재혼인 경우)만 해도 7만 9600건”이라는 통계청의 자료는 작가 공지영의 가정만이 유독 특별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런 의미에서 공지영의 붓이 자신의 가족사를 더듬어 가족해체시대의 가족의 의미를 그리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작가 자신이 연재를 시작하며 했던 한 인터뷰에서 “어떤 작가가 당대에 각광 받는 건 작가의 은밀한 운명이 시대의 운명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 토마스 만을 인용하며, “내가 겪은 개인적 상처도 시대와 맞닿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힌 것은 이 소설이 자신의 사생활을 소설화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고집스럽게 견지해왔던 “시대와의 공감”의 새로운 시도로 읽어야 할 것이다.

 

신작 <즐거운 나의 집>은 열여덟 살 주인공 위녕이, 고 삼이 되기 전 십대의 마지막을 자신을 낳아준 엄마와 함께 보내겠다며 여름방학을 이용해 아버지와 새엄마의 집에서 떠나 B시로 거처를 옮기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새로 자리 잡은 엄마의 집에서 여섯 번의 계절이 변하는 동안 위녕은 새로운 가족(외가 식구들과 형제)을 발견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존재(고양이 코코)와 동생 둥빈 아빠의 죽음을 맞기도 한다. 또한 엄마의 새 남자친구를 만나고 또래 친구를 통해 평범한(?) 가족이라는 환상을 깨기도 한다.

 

무엇보다 위녕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고 치유하며 엄마의 부재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자신의 정체성과 함께 가족의 의미를 되찾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신작 <즐거운 나의 집>에서 작가 공지영이 그리는 가족의 모습은 어떠한가?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즐거운 나의 집>에서 그려지는 가족의 모습은 생소하다. 전형적인 가정의 이미지와는 달리 이 ‘즐거운 나의 집’은 아버지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6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이혼 자녀의 74.3%는 어머니와 함께 산다. 그런 면에서 지극히 정상(?)적이다.

 

또한 ‘즐거운 나의 집’의 가장인 어머니는 늘 자신의 노동(글쓰기)으로 막내까지 대학에 보낼 수 있을지 걱정한다. 이 또한 우리의 통념과는 다르지만 어머니와 사는 이혼 자녀의 85%가 아버지에게서 양육비를 지원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2006년 여성가족부)을 감안하면 사실에 가깝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 사실적인 대목은 이혼 가정과 이혼 자녀의 현실과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편협하고 왜곡된 시선이다.

 

나는 새엄마를 좋아했었다. 엄마라고 불리는 사람을 가진다는 것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 그녀는 결혼 전부터 우리 집에 드나들며 내 피아노도 봐주고 함께 놀이 공원에도 가주었다. 아빠랑 할머니랑 이렇게 셋이 놀이 공원에 갔을 때와는 다르게 아무도 우리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우리는 완벽한 가족이었다. 사람들은 알까? 눈총이라는 단어에 왜 ‘총’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지를. (본문 (6~7쪽) 중에서)

 

이러한 편협하고 왜곡된 통념에 기대어 지레짐작으로 위녕을 바라보는 서글프고도 어이없는 현실에 대해 작가는 위녕의 입을 빌려 “다른 애들이 부러워요. 날마다 집에서 형제들을 바라보면서 아아, 나는 저 아이와 성이 같아! 그래서 너무 행복해! 어떻게 하면 좋지, 이 행복을! 하고…… 생각할 거 아니에요.”(본문 28쪽)라고 반항한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작가의 뼈아픈 일침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연재에 즈음하여 한 인터뷰에서 밝힌 작가의 바람은 인상적이다.

 

“맞아요. 자신과 다른 사람을 포용할 줄 아는 사회가 절실할 때가 됐어요. 지금 농촌 총각들이 동남아시아 여자들이랑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살잖아요. 이 애들이 컸을 때를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이 애들이 또 다른 사회 문제를 낳을지도 몰라요.” (2007년 중앙일보 대담 기사에서) 이 작품에서 작가가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상처와 싸우기도 벅찬 이혼 가정의 가족들이 사회적 편견과의 힘든 싸움을 동시에 벌이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치열한 싸움을 외면하지 않고 대면하지만, 오래 상처 받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특별한 해법인 ‘이해’와 ‘사랑’으로 작품 속 인물들이 치유 받고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우리 가족이 남들의 기준으로 보면 뒤틀리고 부서진 것이라 해도, 설사 우리가 성이 모두 다르다 해도, 설사 우리가 어쩌면 피마저 다 다르다 해도, 우리가 현재 서로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해도 사랑이 있으면 우리는 가족이니까,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름에 가장 어울리는 명사는 바로 ‘사랑’이니까. (작가의 말(343쪽) 중에서)

 

새로운 시대의 가족의 의미

 

.../ 혹시, 아무 생각도 없는 거, 그게 좋은 가정이라는 게 아닐까, 그냥 밥 먹고, 자고, 가끔 외식하고 가끔 같이 텔레비 보고, 가끔 싸우고, 더러 지긋지긋해하다가 또 화해하고, 그런 거..... 누가 그러더라구, 집은 산악인으로 말하자면 베이스캠프라고 말이야. 튼튼하게 잘 있어야 하지만, 그게 목적일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그게 흔들거리면 산 정상에 올라갈 수도 없고, 날씨가 나쁘면 도로 내려와서 잠시 피해 있다가 다시 떠나는 곳, 그게 집이라고. 하지만 목적 그 자체는 아니라고, 그러나 그 목적을 위해서 결코 튼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라고. 삶은 충분히 비바람 치니까, 그럴 때 돌아와 쉴 만큼은 튼튼해야 한다고.... (본문(269~270쪽) 중에서)

 

가족의 구성이야 어쨌거나, 가족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어떻거나 중요한 것은 “충분히 비바람 치는” 삶의 전장에서 “돌아와 쉴 만큼 튼튼”하고 서로에 대한 이해와 진실한 사랑이 전제된 그런 ‘가족’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작가 공지영이 자신의 특별한 가족사를 되새겨 얻은 평범한 가족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작가 공지영은 자신의 작품 목록에 또 하나의 장편소설을 올리면서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치열하다 못해 처절한 주인공들의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소설의 대가였던 그가 눈물의 카타르시스를 넘어 웃음의 고지에 올랐기 때문이다.

 

“울리는 건 자신 있는데”라고 작가 스스로 밝힌 것처럼 과거 공지영 소설은 손수건 없이 읽을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신작 <즐거운 나의 집>은 상처로 인한 슬픔에 그저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고난이 올 때 정말 필요한 것은 용기이기도 하고 인내이기도 하고 희망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가장 중요한 건 유머”(본문 101쪽)라고 한 대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작품 속의 웃음은 작가 스스로가 터득한 삶의 지혜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심각하고 슬픔에 가득 차야만 할 것 같은 가족의 이야기가 마치 시트콤처럼 전개되고 있다.

 

“너한테 아직 말하지 못한 게 있어. 미안해, 엄마..... 이혼했어.”
담담한 말투였는데 엄마는 말끝에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이럴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들고 있던 가방을 가슴에 꼭 안았다. “.....근데 왜 나한테 미안해?”
엄마는 눈물을 흘릴 때면 늘 그렇듯이 휴지를 찾아서 코를 풍풍 풀다 말고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본문(14쪽) 중에서)

 

“아니 왜 남의 먹을 걸 가지고 지네들이 시비야 시비긴……. 누가 지네들 주기나 한대?” 하면서 투덜댔던 것이다. 사박 오일의 짧은 일정으로 온 사람치고 엄마의 가방은 엄청나게 컸다. 뚱뚱한 가방을 택시에 싣느라고 땀이 뻘뻘 나서 엄마와 나는 어색할 겨를도 없었다.
“너 만나면 눈물이 나와서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통관 직원들하고 실랑이하다가 눈물도 쏙 들어가 버렸어.”  엄마는 투덜거렸다.
그날 밤, 아빠가 특별히 허락해주어서 엄마와 함께 묵게 된 모텔에서 엄마의 이민 가방은 열렸다. 그 안에는 쥐포와 말린 문어, 오징어와 김, 그리고 한과와 라면들이 쏟아져 나왔다. 통관 직원들이 보따리장수로 오해할 만했다. 엄마가 갈아입은 잠옷에서는 쥐포의 고릿한 냄새가 났다. (본문(43~44쪽) 중에서)

 

작품 전편에서 만나게 되는 이러한 웃음은 단순한 유머가 아니라 삶이 준 온갖 상처를 이겨낸 자에게만 허락되는 건강한 낙관주의이다. 이러한 낙관주의는 웃음에 머물지 않는다. 짐짓 알려지기를 꺼릴 만한 자신의 가족사를 전면에 드러내겠다는 발상 자체가 그러하며, 심각한 상황이 희화된 장면이 그러하다. 특히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릴 유명 작가인 ‘엄마’ 캐릭터가 그러하다. 연재 전에 했던 한 대담에서 “엄마를 못 그리겠어요. 결국엔 저 자신이잖아요. 잘못하면 밥맛없는 캐릭터가 될 수도 있고, 제 자신을 너무 깎아내리는 건 솔직히 괴롭고…….”라고 밝혔듯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나, 작가는 일견 푼수 같아 보이나 충분히 성숙해 삶의 지혜를 얻은 ‘엄마’를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식인으로서의 진보적 모습과 엄마로서의 속물적 모습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 모습까지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솔직함은 문학적 성취 이전에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공지영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힌다. 그리고 그 건강한 낙관주의는 작품의 중간 중간에 밑줄 긋고 싶은 잠언들에서 빛을 발한다. 이 밖에도 작품 전편에서 끝없이 만나게 되는 이러한 잠언은 어두운 막장에서 금강석을 캐는 것처럼 우리의 어두운 현실의 삶에서 빛을 발견하게 하며, 독자들에게도 그 건강한 낙관주의를 빠르게 전염시키기에 충분하다.

 

가족을 소재한 가족의 새로운 의미를 찾고자 쓴 소설이지만 언뜻 가족이라는 소재가 주는 한계로 인해 그저 가족 소설의 범주에 한정될 듯 보이나, 읽는 이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연재가 끝날 무렵 소설을 게재했던 중앙일보에서 시도한 독후감 공모에 모두 286통의 이메일 독후감이 접수되었다. 그 가운데는 작가처럼 이혼을 했거나 이혼한 가정에서 자란 독자들이 수십 통이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평범한 독자들의 사연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연 가운데는 작품에 드러난 상황에 공감하는 것도 있었으나, “가족이란 말 속엔 가족마다의 아픔이, 남모를 눈물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세상에 평범한 가족은 없다는 그야말로 평범한 진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 삼 수험생으로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위녕에서 보내는 편지 형식의 독후감도 눈에 띄었다. “위녕! 우리 엄마도 내가 수능을 보는 동안 친구라도 만나서 낮술을 즐길 수 있게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네 얘기를 들을 때마다 어린 나도 네가 성장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 나도 네 얘기를 들으면서 조금 더 자란 것 같아 고마워. 남은 10대, 우리 더 크자! 그래도 미모는 챙겨야 한다.”는 이 독후감은 이 작품이 청소년들에게는 성장소설로 읽혔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둥빈이 외할아버지의 말씀처럼, 돌아가시는 것도 생의 일부라고 느끼며 가실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한다.”는 아버지의 간병으로 여름휴가를 다 보낸 딸에 이르면, 이 책이 단순히 가족소설이거나 성장소설의 울타리를 넘어 삶의 과정에서 받는 상처와 그 치유를 통해 삶을 성찰하는 소설로도 읽힌다는 걸 알 수 있다. 읽기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색깔로 독자들의 가슴에 독특한 무늬를 아로새길 소설이라는 점에서 공지영 문학의 힘을 확인하게 한다.

 

공지영 푸로필
     1988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단편 〈동트는 새벽〉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시작》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고등어》 《착한 여자》 《봉순이 언니》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있고, 소설집 《인간에 대한 예의》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별들의 들판》, 산문집 《상처 없는 영혼》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등이 있다. 21세기문학상과 한국 소설문학상, 오영수 문학상, 앰네스티 언론상 특별상, 제10회 가톨릭문학상을 수상했다.